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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utritional and Functional properties from high temperature and disease : –resistant strains of Pyropia yezoensis

        바로 제주대학교 일반대학원 2018 국내석사

        RANK : 1919

        이 연구는 국내에서 생산되는 영양 및 기능성 면에서 우수한 수산 양식 종자를 개발하여 수출하기 위한 과제로서 2013년도부터 시행되어온 Golden Seeds Project(GSP)의 한 부분으로 진행된 연구이다. 현재 우리나라 수산 양식 생산량은 계속 증가를 하고 있으며, 그 중 홍조류인 방사무늬 김 양식 생산량은 넙치 양식에 이어 두 번째로 가장 많은 양식 생산이 이루어 지고 있다. 이와 더불어 김의 수출량 또한 지속적으로 증가를 하고 있어 이전에는 주로 식품으로서만 이용하였던 방사무늬 김을 더욱 더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이용을 하기 위해 연구를 하고 있다. 그러나, 방사무늬 김의 유리사상체 시기는 주로 고수온기인 여름철이며, 전 지구적으로 수온이 증가하는 추세에 따라 고수온기에 여러 질병에 감염되며, 또한 저수온기에 주로 생산되는 방사무늬 김 양식 생산에 있어서 큰 타격을 준다. 이에 많은 연구자들은 붉은 갯병과 같은 질병에 내성을 가지며, 고수온기에 내성을 가진 양식 생산이 가능한 품종을 개발하는 연구 중에 있다. 대표적으로 고수온기인 여름철 김 양식장에서 발생하는 질병을 예방하기 위해 유전적 조작을 이용한 내병성 및 고온 내성 김 품종을 개발하는 것이다. 그러나 유전적 조작으로 개발이 된 것에 대해 반감을 가지기 때문에 유전적 조작으로 개발된 품종인 내병성 및 고온내성 김 품종과 일반 양식산 방사무늬 김의 영양 및 기능성 성분의 함량을 비교 분석 하였을 때, 영양 및 기능성 성분에서 차이가 나는지 확인 하였다. 그 결과, 단백질 및 아미노산은 내병성 김(DP)에서 더 많았고, 탄수화물 및 단당의 함량에서는 고온 내성 김(HP)에서 더 많았으며, 지질과 회분은 매우 적은 함량을 보였다. 김 유래 기능성 성분으로 알려진 Phycoerythrin 과 sterol을 분석한 결과, 일반 양식산 방사무늬 김에서 개발된 내병성 및 고온내성 품종보다 더 높은 함량을 보였으나, 내병성 및 고온내성 품종만으로 비교하였을 때, 고온내성 품종에서 내병성 품종보다 더 높은 함량을 보였다. 이는 김 유래 기능성 성분이 환경에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일반 양식산 방사무늬 김에서 높게 나타난 것으로 사료된다. 그리고 내병성 및 고온내성 방사무늬 김을 실제로 먹었을 때 장내 소화 효소에 의해서 분해가 되어 나타나는 생리활성을 내병성 및 고온내성 품종과 일반 양식산 김의 차이를 비교하였다. 그 중 당뇨, 비만 등의 대사성 질병을 유발하는 활성산소(reactive oxygen species, ROS)와 염증을 소거 및 완화 시킬 수 있는 기능성에 대하여 평가하였다. 그 결과, 내병성 김 품종보다 고온내성 김 품종에서 일반 양식산 김보다 라디칼 소거능이 뛰어났으며, 세포독성을 보이지 않으며, 뛰어난 세포 내 ROS 소거능을 확인하였다. 특히, trypsin 과 α-chymotrypsin 효소 가수분해물에서 뛰어난 항산화 활성을 가짐을 확인 하였다. 그리고 대식세포(RAW 264.7) 내의 NO 소거능을 통한 항염증 효능을 확인한 결과, 내병성 및 고온내성 김을 비교 했을 때, 고온내성 김 품종에서 NO 소거능이 뛰어났지만, 일반 양식산 김과 비교 했을 때 유의적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종합적으로 살펴 보았을 때, 내병성 김 품종에 비해 고온내성 김 품종에서 탄수화물의 함량이 제일 높았으며, 뛰어난 항산화 및 항염증 활성을 보였다. 이를 통해서, 고온내성 김 품종의 종자를 이용하면 보다 넓은 범위의 수온 환경에서 양식생산이 가능하며, 그 영양 및 기능성 성분 면에서 일반 양식산 김과 비교했을 때 더 적은 함량을 보이지만 기능성 면에서 뛰어난 항산화 및 항염 활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아 고온 내성 김 품종이 종자 산업에 있어서 경쟁력 있는 우수한 종자가 될 것으로 사료된다.

      • 淸 전·중기 朝鮮 歸附人 金氏 가문의 세대별 정착양상

        휘석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2020 국내석사

        RANK : 1919

        17세기 요동지역에서 등장한 ‘滿洲’는 八旗制를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민족 공동체의 개념이다. 그렇기에 팔기에 새로 편입되는 집단이 생기면 ‘만주’의 범위도 확장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이러한 팔기의 범위가 확장되는 주요한 원동력인 다민족성과 융합성이 청의 治世期에 얼마나 성공적으로 작동되었는가에 있다. 이를 검토하고자 본고에서는 조선 출신의 구성원인 김씨 가문이 세대별로 청 사회에 어떻게 정착하였는지를 통해 살펴보았다. 김씨 가문의 세대별 정착 양상은 각 세대별마다의 그들 가문을 둘러싼 시대적 환경의 영향과 김씨 가문의 이중적인 정체성의 충돌로 인해 다양한 변화들이 있었다. 가문의 1세대인 김신달리 형제들 시기에서는 그들의 이주 동기가 무엇이었는지를 밝히고자 새로운 검토를 시도하였다. 신달리 형제들을 청으로 귀부하게 만든 요인들에 대해서는 현재 직접적인 자료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상황적으로 추론 가능한 이유들이 있는데 조선 내부에서 이들을 밀어낸 유출요인(Pushing-factor)과 청에서 이들을 끌어들인 유인요인(Pulling-factor)으로 나누어 볼 때, 크게 4가지이다. 유출요인으로는 첫째 서북지역에 대한 지역적 차별, 특히 중앙관리 등용에 있어서의 암묵적인 차별, 둘째 모문룡과 그가 이끄는 요동 유민들에 의한 서북지역에서의 횡포가 있었던 점을 꼽을 수 있다. 유인요인에서는 첫째 귀부인들에 대한 홍타이지의 우대정책, 둘째 동시대인으로서 1625년에 먼저 청으로 귀부하였던 한윤, 한택 종형제의 정착 사례에 대한 소문의 영향이 있었다. 이렇듯 신달리 형제들은 지역적 차별이 심했던 조선에서 벗어나 청에 귀부한 이후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여러 차례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 하급 통사관과 하급무관으로서 종사하던 형제들은 이후 자신들의 유능함과 내부자 고발로 인해 얻은 신임, 그리고 뛰어난 전공을 통해 두각을 드러내다. 그 결과 병자호란 전공 보상에서 맏형 신달리가 홍타이지로부터 황제의 친위 세력으로 형성하고 있던 보오이 니루의 어전으로 임명 되었다. 신달리의 보오이 니루 어전직 임명을 계기로 김씨 가문 전체의 旗籍이 正黃旗구사 니루에서 正黃旗보오이 니루로 변경되었다. 1세대들은 적극적으로 조선인으로의 정체성을 부인하고 새로운 만주 정체성을 획득하고자 노력하였다. 하지만 본질상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부정하기는 힘든 부분들이 있었다. 김씨 가문의 3세대인 김상명 시기에는 팔기 상층 사회로의 정착이 더 가속화되었다. 김상명이 청 사회 상층으로 가문을 정착시킬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의 할아버지 신달리에 의한 旗籍변경이 매우 크게 작용했다. 신달리의 후손들은 황실 보오이로서 황제에게 보다 더 가까운 위치에 머물 수 있었다. 보오이로서 황제와 가까운 위치에 있게 된 결과 김씨 가문에게는 황제의 신임을 받아 성장할 수 있는 몇 번의 기회들이 주어졌다. 그 중 하나가 2세대인 김상명의 어머니가 강희제의 유모로서 발탁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상명 자신이 옹정제의 하하 주서로서 발탁된 것이었다. 상명은 이러한 기회들을 통해 황제와의 사적인 신뢰를 형성할 수 있게 되었다. 황제의 신뢰는 상명 자신에게는 가진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고, 상명의 지위는 정6품 理藩院主事에서 결국 정1품 領侍衛內大臣까지 상승했다. 팔기조직 내에서 2세대를 거치며 중간적인 위치에 머물러 있던 김씨 가문은 상명을 통해 상층 기인 사회로의 진입에 성공했다. 3세대 시기 기인 상층 사회로 진입한 김씨 가문은 조선과의 잦은 교류 속에서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과 만주 정체성이 혼재해졌다. 당시 권력이 있던 김씨 가문은 적극적으로 조선에 우호적인 입장을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김씨 가문의 이중적이고 중간자적인 속성이 입관 후에도 계속 유지되어 왔다고 해도, 조선출신 기인과 만주족의 차이는 조선인과의 차이보다 적었다. 팔기에 조선인들이 편입된 이후 조선 출신 기인들은 만주어를 배워 말해야 했고, 만주의 문화와 관습을 따라야 했기에, 김씨 가문은 언어와 문화, 그리고 제도적인 측면에서 ‘만주화’가 되었다. 4세대 시기의 김씨 가문은 여전히 조선인과 만주인 정체성이 공존했지만, 숙가황귀비의 혼인으로 황실의 외척이 됨에 따라 ‘만주화’의 완성이 초래되었다. 특히 가경제의 擡旗조치와 만주식 姓을 하사하는 조치는 김씨 집안의 정체성을 제도적으로 만주인으로 규정지었다. 이러한 가경제의 제도적 조치 이면에는 황실 외척인 김씨 집안을 완전히 그들 집단으로 흡수하고자 하는 황제의 외척 가문들에 대한 인식이 존재했다. 앞서 말한 것처럼 황실은 혼인으로 맺어진 새로운 구성원을 자신들의 집단으로 흡수하는 방식을 취했었다. 이로써 김씨 가문의 만주화는 제도적인 측면과 그 제도를 뒷받침하는 지배층의 인식 두 가지의 결합으로 이루어졌다. 이와 같이 김씨 가문의 세대별 정착 양상을 볼 때, 청나라 발전의 원동력인 팔기의 다민족성과 융합성은 청 중기인 건륭년간까지 지속적으로 작동되고 있었다.

      • 補助金의 國際規範과 韓國 補助金政策의 改編方向에 관한 硏究

        보수 명지대학교 대학원 1997 국내박사

        RANK : 1919

        With the emergence of globalization following the advent of the WTO (World Trade Organization), domestic industrial policies and practices which have no significant meaning in international trade relationship in the part have become restricted. Following this, the Korean subsidy policy is also required to abide by international regulations in many respects. That is because the agreement on subsidies and countervailing measures under the WTO system regulates ever country's industrial support systsm which give effects on export and import directly or have possibility of injury to trade matching country. Against the bacground of this change in the world economic environment,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amine international regulation on subsidies under the WTO and OECD regimes and to show how subsidies contribute to unfair pricing policies. Folowing this, a desirable see approach to subsidies by Korea is proposed. The method of analysis is through Vector Autoregression models and empirical verification of the effects that market effect interest as price subsidy index and the difference export subsidy interest. Besides this emprical analysis, there is a parallel documents survey. The results of the research showed as fallows; First, Korean subsidy policy must be reorganized to non-actionable subsidies. Subsidies for export improvement or enlargement of domestic production goods regarded as prohibited subsidies should be changed to countervailable subsidies or non-actionable subidies to fully utilize WTO agreements' postponement periods, and during its duration. It must be reduced gradually. In particular, partial adjustment of the funds for export industrius' facilities investment, trade financing and tax support system are inevitable. Second, the improvement of objectivity in the implementation of subsidies policies and the exclusicn of specificity is needed. In particular, financial incentives provided through various funds is expected that a dispute about specificity in discretion of subsidizing action. Therefore precautious notice is needed. Third, the establishment of an R&D support system is needed. Though A&D support which affects industrial competitiveness is belong to non-actionable sussidies, if that support to the negatively affects other countries' trade environment, it is possible to impose countervailing measures. This can be the basis of a dispute. Therefore, thorough administration of the contents of R&D subsidies' payments and compliance with its rulls is required. Fourth, the consolidation of a support system for small and medium enterprises is needed. That is because support for small and medium enterprises has a few trade distortion effects. In view of creating a sound industrial foundation and enhancing competitiveners, developed countries have utilized this. However, with the start of the WTO system, not only developed countries but also Korean small and medium enterprses support system is permitted in the caresory of Actionable subsidies. Therefore subsidy systems aimed at improvement of special industries, especially those aimed at export promotion and import transfer must be abolished. Fifth, availability of enlarged funds and reduction of policy financing is needed. The prohibited factor about prohibited characterized support system ought to be eliminated. The problem of preferential treatment about interest about policy financing. Throughout this paper, appropriate reforms in Korea's subsidy system are suggested accdrding to international regulations. While this paper tries to be as comprehensive as possible, limitations exist in emprical analysis and point of exclusiveness of taxation effect.

      • 四君子의 상징으로 본 情感 표현 연구

        외자 단국대학교 대학원 2018 국내박사

        RANK : 1919

        四君子의 상징으로 본 情感 표현 연구 단국대학교 대학원 조형예술학과 동양화전공 김 외 자 지도교수 : 오 순 이 본 논문은 사군자(四君子)의 상징으로 본 정감(情感) 표현에 대한 연구이다. 사군자는 우리나라는 물론 동양회화사에서 시대를 초월하여 문인들이 가장 선호했던 화재(畫材)로서 각 시대의 사회문화적 환경과 정치적 상황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표출되어 왔다. 말하자면, 사군자도(四君子圖)는 문인들이 그 시대정신을 반영하여 자신을 표현하는 수단이었다. 특히 매(梅)·난(蘭)·국(菊)·죽(竹)의 각 특유의 상징성이나 정감을 부여하여 예술적으로 승화시켰다. 군자는 은대(殷代) 이래 정치적으로 ‘통치자’, 신분의 표식으로서‘의례를 행하는 성직자’등을 의미했다. 그러던 것이 공자 이후 유가적 학문과 도덕적 인격을 갖춘 이상적 인간상을 의미하면서 타고난 신분적 의미에서 일정 수준 이상의 자질과 덕목을 지니면 누구나 군자가 될 수 있었다. 이는 인간의 평가기준을 종래 타고난 신분에서 사람됨을 중시하는 인간중심적 사고로 전환된 것이라는데 의의가 있다. 인간중심적 사고는 천(天)을 기본으로 도(道)를 실현하는 윤리적이면서 철학적인 가치를 포함하는 인(仁)·의(義)·예(禮)·지(智)이며, 이를 실천하는 것이 군자의 도리였다. 사군자는 이러한 군자의 도리와 품성을 상징하게 되었는데 매서운 추위 속에서 봄을 알리는 매화, 홀로 은은한 향을 풍기는 난초, 찬 서리에도 꽃을 피우는 국화, 사시사철 푸르면서도 곧게 자라는 대나무의 속성에 따른 것이다. 특히 이들 사군자는 수묵으로 그려졌는데 먹색 하나와 공백으로 그려지는 화면에서 사군자도는 수많은 사유와 관조의 세계를 표현하는 고차원적 회화였으며 이는 군자가 추구하는 경계를 드러냈다. 따라서 이들 사군자도는 여러 상징을 담고 있다. 상징은 고유의 코드를 지니는 것으로 거의 동일한 정서를 담는데, 동아시아의 전통에서 거의 유사한 의미로 통한다. 매화의 경우 임포(林逋, 967-1028)의 고사로부터 유래하여 ‘은일(隱逸)’을, 난초는 공자(孔子, BC551-BC479)의 공곡유란(空谷幽蘭) 고사로부터 향기의 덕 즉 ‘덕향(德香)’을, 국화는 도연명(陶淵明, 365-427) 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지절(志節)’을, 그리고 대나무는 『시경(詩經)』에서 언급한 유비군자(有匪君子)의 ‘충정(忠情)’을 대표적 상징으로 한다. 이들의 대표적 사례를 한국과 중국의 네 명의 화가를 통해 살펴보았다. 조선말기 허련(許鍊, 1809-1892)은 남종문인화를 토착화시킨 선비화가로서 그의 <묵매도(墨梅圖)>에서 노매(老梅)는 은일적 삶의 즐거움을 상징화하였다. 김정희(金正喜, 1786-1856)는 서화예술에서‘문자향 서권기(文字香 書卷氣)’를 주장하였는데 그의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에 표현된 난초는 불이선(不二禪)을 체득한 행복감을 난초 향으로 상징화하였다. 청대 말기 오창석(吳昌錫, 1844-1927)은 ‘대사의 화훼화(大寫意 花卉畵)’의 경지를 표현했으며, 그의 <묵국도(墨菊圖)>에서는 오상고절(傲霜孤節)의 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흉중성죽(胸中成竹)의 대 그림을 주장한 북송대의 문동(文同, 1018-1079)은 <도수죽(倒垂竹)>에서 굽어 내리면서도 위로 솟구치는 대나무를 그려 불굴의 의지를 상징화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이러한 예를 근거로 연구자는 사계(四季)의 정감으로 본 사군자를 새롭게 재해석 하였다. 봄의 정감은 매화를 매개로 탄생과 소멸에 따른 찰나의 아쉬움으로 상징화되었다. <홀로 피다>, <세상으로 나가다>, <활짝 피다>, <흩어지다>의 네 작품에서 이른 봄 홀로 태어나, 잠시 청향으로 존재를 알리고 바로 흩어지는, 매화꽃의 생성과 소멸을 담았다. 여름의 정감은 난초를 하루의 시간적 변화로 정겨운 풍경을 그렸다. 한 여름날의 일상을 층차를 두고 표현하여 <아침이 오다>, <한낮의 풍경>, <늦은 오후>, <저녁이 내리다>에서 난초는 청아함과 아름다움을 다루고 있다. 가을의 정감은 국화의 담담한 정취로 상징화 되었다. 입추·중추·만추·석추에 대한 국화의 정감은 <가을이 시작되다>, <가을 속에서>, <가을을 느끼다>, <서리 속에 국화를 보다>의 주제로 국화의 색다른 격조를 나타내고 있다. 겨울의 정감은 찬바람을 견디는 대나무에 대한 대견함으로 상징화되었다. 입동(立冬)에서 시작하여 한 겨울 맹동지절(孟冬之節)의 시간적 순환체계로 이어지며 삼동을 나는 대나무의 모습은 <겨울의 시작>, <투명함으로>, <침묵>, <바람으로>의 네 가지 주제로 예스러우면서 강한 대나무를 그렸다. 이상 사군자의 상징으로 본 사계절의 정감 표현 연구는 다음과 같은 조형성을 구현하였다. 첫째, 현대적 감각이 혼용된 다양한 구도 경영으로 사군자의 정감을 나타내고 있다. 전통적 구도를 변형시키는 것으로부터 직선과 곡선의 방향성 활용 및 사각형과 원형 구도의 대비에 의한 기하학적 구조가 강조된 구성으로 현대화하였다. 둘째, 다양한 질감 표현을 통해 사군자의 미묘한 정감을 조형화했다. 수묵을 통한 담묵과 농묵의 번짐 효과, 투명성과 불투명성의 대조적 활용, 아크릴에 의한 두터운 재질감의 활용 등 다양한 질감 효과로 정감 그 자체의 이미지를 조형화하였다. 셋째, 전통 먹색과 현대적 색채와의 융합에 의한 정감을 조형화했다. 먹색은 오색을 갖추었다고는 하지만 꽃의 화려한 색채를 통한 정감의 발현은 먹색만으로 표현하기 힘들고 현대적 감각을 도출하기도 쉽지 않다. 전통 사군자의 상징성을 현대인의 정감으로 상징화하는 역할은 색채가 많은 부분을 담당할 수 있었다. 이렇게 사군자의 생태적 속성으로부터 형성된 전통적 상징성은 새로운 조형성의 활용에 의해 현대인의 삶 속에 투영된 자연스러운 감정과 융합되어 작품화되었다. 이들은 작품 크기에서부터 다양한 화면 구성과 분할, 대상의 선택과 배치, 그리고 재료의 사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조형언어로 정감의 상징화를 시도하였다. 사군자에 담긴 정신이 인격을 반영하는 매개체로 작용한 이래 사군자도의 전개는 곧 인간정신의 확장을 의미했다. 그러나 그 인간정신의 확장은 점점 퇴보하여 이제는 다가서려는 노력마저 희미해진 게 현실이다. 때문에 본 연구는 감상자들에게 현대적 정감으로 보다 쉽게 다가서는 사군자를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되었다. 전통 속으로 깊이 들어가기보다는 전통에 바탕을 두되 인간의 삶을 이해하고 공감하며 행복해 할 수 있는 소소한 정감을 표현한 사군자를 그린 것이다. 즉, 계절의 정감으로 바라보며 그린 사군자가 동시대인과 호흡하며 새로운 이미지로 다가가는 것이 본 연구의 목표이다. 주제어 : 군자, 사군자, 사군자도, 허련, 김정희, 오창석, 문동, 은일, 덕향, 지절, 충정, 정감

      • 고려후기 安東金氏 金恂系의 정치활동과 성격

        서정현 고려대학교 대학원 2019 국내석사

        RANK : 1919

        본 논문은 고려후기 성장한 정치세력의 형성과 변화가 갖는 역사적 의미를 金恂系를 중심으로 고찰한 것이다. 14세기 고려가 원에 직간접적으로 간섭을 받게 되면서 지배층은 새로이 재편되었다. 이때 김순계 인물들은 시대의 흐름에 맞춰 정치활동을 이어나가고 인적관계망을 형성하여 꾸준히 높은 위상을 유지해 나갈 수 있었다. 金方慶의 막내아들인 김순은 고려 내에서 활동한 고려 내부 관인의 단면을 보여주기에 의미가 있다. 그는 과거에 급제하여 忠宣王이 세자인 시절부터 世子府 관직을 역임하며, 1298년(충선왕 즉위) 당시 충선왕 개혁세력으로 활동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忠烈王이 복위된 이후에도 등용되어 정계활동을 이어갔으며, 이듬해 韓希愈 무고사건이 벌어지고 1300년 김방경마저 사망하면서 고향인 安東으로 내려가 한거하게 되었다. 또한 급변하는 麗-元관계 속에서 김순계 인물들이 당시 세족들과의 통혼권을 형성하여 권세를 유지하였음이 주목된다. 김순은 孔巖許氏 許珙의 딸과 혼인해 세족으로서의 입지를 탄탄히 하였으며, 이후 그의 자손들은 利川申氏, 淸州韓氏, 南陽洪氏, 安東權氏, 慶州李氏 등 당시 세족들과의 혼인관계를 맺었다. 그 중 괄목할 만한 변화를 가져온 것은 딸들의 혼인이었으며, 남양홍씨 洪奎와의 중첩된 통혼권을 형성하여 고려 내부에서의 정치적 위상을 향상시키고 원 조정까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배경을 마련하였다. 이후 원과의 관계가 심화되면서 당시 지배층들은 관직 및 인적관계망을 바탕으로 원과의 관련성을 강조해나가기 시작하였다. 이때 김순계 인물들 또한 선대에 형성된 견고한 인적관계망을 바탕으로 원의 지배층과 교류하였고 그들의 정치적 위상을 높여갈 수 있었다. 특히, 김영돈은 원에 자주 왕래하며 別里哥不花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整治都監 判事를 역임하며 忠穆王의 개혁정치를 수행해 나갔다. 恭愍王代에는 2대 金永煦를 필두로 하여 3대 金縝, 4대 金士安, 金士衡 등이 활동하였다. 김영후는 書筵에서 공민왕의 의견에 반대할 정도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수 있는 원로대신이었으며, 김진은 辛旽의 당여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김사형은 朱子性理學을 정치에 적용하고자 하는 新進士類로서 李成桂, 趙浚, 鄭道傳 등과 어울리며 여말 주요 사건에서 활약하였다. 이후 조선건국에 참여하며 1등개국공신이 되었다. 이상으로 김순계 인물들은 왕실과의 통혼권을 형성하지는 못하였지만 지속적인 개혁활동과 여타 세족들과의 중첩된 통혼권 형성, 그리고 신진사류로의 전환 등이 시대의 흐름과 유기적으로 작용하면서 고려후기 지배층으로 자리할 수 있었다. 고려후기 김순계 인물들은 사회모순을 개혁하려는 지식인 계층으로서 고려에서 조선초로 이어지는 지배층의 한 양상을 보여준다. 나아가 김순계의 성장은 고려후기 혼돈의 정치상황과 지배층의 인적관계망 및 권력재생산 구조, 여말선초 지배세력의 성격변화 등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있다고 여겨진다.

      • 김의경 연구 : 연극 활동을 중심으로

        박지혜 고려대학교 대학원 2019 국내석사

        RANK : 1919

        본 논문은 196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우리 연극계에서 극작, 공연 기획 및 제작, 예술 교육, 예술 행정 등 다양한 연극 활동을 보여준 김의경의 삶의 궤적을 좇아가면서, 그의 연극 활동이 우리 공연예술계에 끼친 다양한 영향에 대해 규명해보고자 했다. 이를 위하여 김의경의 생애를 그의 연극 활동에 따라 실험극장 시기, 현대극장 시기, 국제 감각을 지니는 시기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각 장에서는 김의경의 연극 활동의 궤적을 좇으면서 그를 둘러싼 연극계의 환경과 어떤 영향 관계에 놓였는지를 규명하고 그의 생애와 연극 활동을 연결 지어 살펴보는 가운데 특히 브레히트의 서사극을 중심축으로 하여 그의 작품 창작 활동을 살피고자 하였다. 1960년대 김의경은 연극의 환상주의에 반(反)하는 실험정신을 공유하는 신세대 연극인 중 하나로서 극단 실험극장을 창단하였으며, 특히 이근삼에 의해 소개된 에릭 벤틀리의 영역본을 통해 브레히트의 서사극에 크게 심취하여 서사극 작품을 창작한다. 이를 시작으로 그는 희곡 창작 활동에서 서사극에 대한 꾸준한 관심이 드러낸다. 한편, 그는 실험극장을 통해 예술성을 인정받는 작품을 올리거나 때때로 흥행에도 성공하는 경험을 하면서 흥행과 자본에 대한 감각을 깨우친다. 그러나 작품이 크게 흥행하는 경험을 하면서도 연극만으로 생계를 이어나갈 수 없거나, 동인들이 극단 외의 문제로 동원되는 등 문제와 마주친다. 실험극장은 초기부터 괄목할 만한 연극 활동을 펼치어 주목받았지만, 동인제 극단으로서 한계를 계속 절감하게 된다. 이러한 경험은 그로 하여금 연극 대중과 작품의 대중성에 대하여 고민하게 만든다. 뮤지컬은 춤과 노래로 시청각을 두루 자극하는 양식의 특성상 대중성을 담보하기 마련이다. 이에 따라 그는 대중성을 담보한 뮤지컬 장르에 관심을 지니게 된다. 더불어 음악극의 하위 장르로서 뮤지컬은 기법적인 측면이나 극장주의적인 견지에서 서사극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브레히트의 서사극에 심취해있던 김의경에게 더욱 매력적인 장르일 수밖에 없었다. 서사극과 뮤지컬에 대한 그의 관심은 <갈대의 노래>를 시작으로 그의 연극 활동 전반에서 꾸준히 드러난다. 1970년대 연극계는 극단의 전문화가 요구되는 시기였다. 김의경은 이러한 시대의 요구에 따라 1976년 표재순과 공동 대표로서 한국연극의 “전문화, 직업화, 과학화” 세 가지 기치를 내걸면서 현대극장을 창단하게 된다. 이러한 기치는 모두 동인제 극단으로부터 벗어나 전문적인 극단에의 추구로서 동궤에 있었다. 이 가운데 현대극장은 영세한 연극계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곧 극단의 전문화를 꾀하기 위하여 관중의 광역화와 공연의 대형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이를 위하여 작품의 대중성 확보는 중요한 문제였으며, 앞서 실험극장 시기 김의경이 얻은 흥행과 자본에 대한 감각을 바탕으로 뮤지컬 및 어린이극 및 청소년극을 중점으로 연극 활동을 펼치게 된다. 또한 이 시기 김의경의 희곡 창작 활동은 서사극에서 역사극으로 귀결된다. 이는 민족주의적 분위기의 고조 속에서 역사극이 집중적으로 발표되는 시대 기류와 무관하지는 않으나, 연극 활동 초반부터 견지해 온 브레히트의 서사극에 대한 관심, 미국 유학 등에서 느낀 세계연극 속 한국연극에 대한 감각, 어린이연극 및 청소년연극 등에 대해 본격적 관심 등이 두루 작용하였다. 그는 새로운 역사의식을 담지한 연극에 대해 고민하였으며 이는 그의 초창기 실험정신인 서사극에 대한 탐구 맞닿는다. 왜냐하면 브레히트의 서사극과 역사극은 관객들에게 자신의 현실의 변화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동일한 연극 미학을 지니기 때문이다. 1980년 김의경은 한국연극과 세계연극 간 국제교류에 대한 깨우친 감각을 바탕으로 다양한 국제 연극 교류 활동을 펼쳤다. 이와 관련하여 그의 국제 감각이 어디서부터 시작되며 그의 연극 활동 가운데 어떻게 이어져 오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았다. 김의경은 해외연극인과의 만남, 협업 등의 초기적인 수준의 국제교류활동을 시작으로 이후 보다 적극적인 차원에서의 국제적인 연극 교류 활동을 꾀하게 된다. 그의 주도로 한국에서 제 3세계 연극제의 성공적으로 개최, 아시테지 한국본부 설립을 주도, 베세토 연극의 창설을 주도하는 등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내었다. 이를 바탕으로 김의경은 기존의 유럽 중심의 국제연극 활동을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를 비롯하여 전세계로 확장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김의경은 교육적 성격을 담지한 서사극에 대한 탐구정신과 국제 감각을 바탕으로 우리나라 역사에 더욱 관심을 지니는 한편, 기존의 정사 소재의 역사적 인물을 소환하는 역사극의 위험성을 깨닫는다. 이에 관객이 시대착오적 이데올로기에 빠질 위험을 완벽히 제거한 역사극 창작에 관심을 두었다. 이를 위하여 그간 잊혀 온 민중적 인물을 발굴하고자 노력하였다. 또한 이러한 역사극들은 김의경이 초기부터 견지해 온 서사극의 원리를 기반으로 구성되어 관객으로 하여금 자신의 역사의식을 정립하여 비판하도록 요구하는바 브레히트의 연극 미학을 구심점으로 삼아 극작 활동을 전개해왔음을 살펴보았다.

      • 住宅賃貸借保護法에 관한 硏究

        규수 목포대학교 경영행정대학원 1999 국내석사

        RANK : 1919

        現行 住宅賃貸借保護法은 1999년 1월 21일 法律 5641호로 3차 개정이 된 상태이다. 그 특징을 보면 첫째, 賃借人이 賃借保證金返還債權의 確定判決 기타 이에 준하는 채무명의에 기하여 競賣申請을 하는 경우에는 반대의무의 이행 또는 이행의 제공을 집행개시의 요건으로 보지 아니함으로써 賃借人이 住宅을 비우지 아니하고서도 競賣를 申請할 수 있도록 하였다(제3조의 2). 둘째, 賃貸借가 종료된 후 保證金을 받지 못한 賃借人이 법원에 賃借權登記命令을 申請하여 賃借權登記가 경료되면 登記와 동시에 對抗力 또는 優先辨濟權을 취득하도록 하고, 만일 賃借人이 이미 對抗力과 優先辨濟權을 취득한 자인 경우에는 종전의 對抗力과 優先辨濟權을 유지하며, 賃借權登記 이후에는 住宅의 점유와 주민등록의 요건을 갖추지 아니하더라도 賃借人이 종전에 가지고 있던 對抗力과 優先辨濟權이 유지되도록 함으로써 賃借權登記의 효력을 강화하고 賃借人이 자유롭게 주거를 이전할 수 있도록 하였다(제3조의 3). 셋째, 民法 제621조의 規定에 의한 賃借權登記에도 이 법에 規定된 賃借權登記命令에 의한 賃借權登記와 동일한 효력을 가지도록 함으로써 優先辨濟權을 부여하였다(제3조의 4 제 1항). 넷째, 임대차기간을 2년 이하로 약정한 경우 賃借人이 2년 이하의 약정기간을 주장할 수 없으나 賃借人은 이를 주장할 수 있도록 하여 賃借人이 주거안정과 賃貸借期間에 관한 선택권을 함께 보장하였다(제4조 제1항 단서). 다섯째, 保證金返還請求訴訟에 관하여 소장송달과 기일지정 등 少額事件審判法의 일부 조항을 준용함으로써 訴訟節次가 신속히 진행될 수 있도록 하였다(제13조). 그러나 여전히 문제점들이 상존해 있는 실정이다. 住宅賃貸借保護法은 ‘住宅’과 ‘住宅의 일부가 주거 외의 목적으로 사용되는 경우’만을 보호대상으로 하고 있으므로 일반상가, 사무실 등의 賃貸借는 적용대상이 아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현재 국회에 店鋪賃貸借法案이 상정되어 있으므로 그에 대한 논쟁은 어느 정도 결말을 보는 것 같다. 제3차 개정법 내용 중에서 제3조의 2 제1항의 保證金回收와 競賣開始要件의 완화와 관련하여 貰入者가 임대차기간 만료 후 保證金의 返還을 받는데는 그 節次上 대단히 어려운 면이 있다. 즉 賃貸人이 保證金을 返還하지 않는 경우에 貰入者는 保證金返還請求訴訟의 確定判決 기타 이에 준하는 債務名義에 기한 競賣를 申請하는 방법을 취하게 되는데, 民事訴訟法 제491조의 2 제1항은「반대의무의 이행과 상환으로 집행할 수 있음을 내용으로 하는 債務名義 집행은 債權者가 반대의무의 이행 또는 이행의 제공이 있었음을 증명한 때에 한하여 개시할 수 있다」고 規定하고 있기 때문에, 貰入者가 競賣를 申請할 경우에는 賃借住宅을 미리 비워줘야 하며, 住宅을 비워주면 對抗力을 상실하게 되고(제3조 제1항), 競賣配當 先順位에서 後順位로 밀리게 된다. 결국 貰入者들은 保證金返還訴訟에서 승소하였다 하여도 保證金을 확실히 返還받을 방법이 없게 된다. 또한 賃借權登記命令制度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問題가 있다. 우선 ①賃貸借法은 賃借權의 登記 없이도 賃借人을 保護하기 위하여 特別法으로 만든 것인데, 다시 登記制度를 導入한다는 것은 法律의 一貫性을 결여케 하는 것은 아닌지, 또한 賃借權의 保護問題는 공시의 한 방법인 登記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며 더욱이 주민등록과는 관계가 없는 것인데 이러한 根本的인 問題를 해결하지 않고 다시 登記制度를 導入한다는 것이 과연 현명한 입법이라고 할 수 있는지, ② 설령 登記命令制度를 취한다 하여도 假押留에 관한 規定을 준용하는 것이 가능한지, ③뿐만 아니라 복잡한 절차를 요하는 登記命令制度의 실현성은 있겠는지 등의 법률적인 문제가 산적해 있다.

      • 김생 서예의 형태미 연구

        수복 대전대학교 대학원 2015 국내석사

        RANK : 1919

        오늘날 누구든지, 우리나라 역대 명서예가를 거론할 때 김생을 빼놓지 않을 정도로 김생은 훌륭한 서예가로서 평가받고 있으며, 李奎報의 『東國李相國集』에서는 坦然, 崔瑀, 柳伸 등과 더불어 ‘神品四賢’으로 불린다. 김생이 활동하던 당시 주류적인 서풍은 중국의 영향을 크게 받아 해서에서는 초당 3대가로 불리던 歐陽詢, 虞世南, 楮遂良의 서체가 성행하였고, 행서에서만큼은 왕희지의 서풍이 독보적인 지위를 차지하며 유행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김생은 당시 융성하던 불교의 대중화 움직임과 조화미를 중시하는 당시의 미술사조로부터 그의 서체미 형성에 영향을 받았고, 왕희지 서풍 및 초당 서풍의 수용, 그리고 삼국서예의 전승 등을 통해 김생만의 독창적 서풍을 완성하였던 것이다. 김생은 그의 80 평생을 서예를 위해 힘썼고 서예에만 몰두하여 많은 서예 작품을 남기었지만, 불행히도 김생이 활동했던 시기로부터 1,200여 년이 지난 오늘날 김생에 대한 자료는 매우 한정적이다. 현재 김생의 筆跡으로 전해있는 작품으로는 <太子寺朗空大師白月栖雲塔碑>, <田遊巖山家序>, <趙棨墓碑>, <徐命九墓碑>, <昌林寺碑>, <李玄緖墓碑> 등이 있다. 김생은 예서, 행서, 초서에 있어서 모두 입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전하는데, 오늘날 남아 있는 김생의 작품들과 글씨를 분석할 때, 특히 행서에서만큼은 김생이 왕희지의 영향을 크게 받은 듯하다. 그러나, 김생은 왕희지의 필법을 근본으로 하면서도 보다 생동적인 변화를 주는 등 왕희지와는 다른 서예세계를 구사하고 있는데, 본고에서는 이러한 김생 서체의 특징을 분석하기 위하여, 김생의 글씨와 왕희지 글씨를 하나하나 비교하여 同質性, 異質性, 優秀性, 特異性 등 4가지 측면에서 세부적으로 고찰하였다. 이를 통하여, 중국서예와는 다른 한국서예만의 독자성을 발견하고, 한편으로는 문화의 주체성 측면에서 우리 서예가 중국서예를 어떻게 수용하고 재해석 해내었는지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문자를 소재로 하여 자기의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는 서예는 한 나라의 정신문화의 요체이며, 따라서 독자적인 서예관의 확립과 서예술의 발달은 그 나라의 문화적 우수성을 가늠할 수 있는 하나의 척도가 되기 때문이다. 김생 서예의 특징을 요약하자면, 외형적으로는 정제된 중국의 서풍을 수용하였으나, 내면적으로는 韓民族 고유의 소박미, 토속미, 자연미 등을 표출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김생의 글씨는 자연스럽고 활달하며 여유로운 서민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이는 왕희지 서체에서는 발견하기 힘든 부분으로서 김생만의 창의적 필법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러한 김생의 필법은 후대의 최치원에게로 전승되었으며, 이후 김생은 한국서예의 전형을 완성했다고 평가된다. 본고에서는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김생에 대한 현대적 평가가 다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즉 김생의 서예는 문화의 ‘主體的 受容’을 통하여 우리 정서에 맞는 예술작품으로 승화시킨 점에서 높이 평가 받아야 하며,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김생의 글씨들은 오늘날 그 가치성과 중요성을 가진다. 다시 말하면, 오늘날 김생을 평가하는 현대적 의의는 단순히 글씨를 잘 썼던 명필가로서의 김생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정신문화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 성인으로서 그 의의가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 오늘날 김생을 海東書聖으로 높이 평가하는 것이며, 이는 우리 서예사의 초석이 되어 현재까지도 崇慕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향후 우리 서예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일제말기 친일문학의 내적논리와 회고의 전략 : 이광수, 김동인, 채만식을 중심으로

        박수빈 고려대학교 대학원 2019 국내박사

        RANK : 1918

        본 논문에서는 일제말기(1937년~1945년) 친일문학과 해방기 회고의 전략적 성격을 문인들의 ‘자기규정’과 ‘식민지적 정체성’을 통해 살펴보았다. 일제말기 친일문인들은 대중적 지도자나 사상가의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제국일본과 조선 사이의 ‘번역자’로 살아왔다. 그러나 일제의 외부적 압력과 문인의 내부적 혼란이 극대화된 시점에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해방은 이들을 순식간에 민족의 죄인이자 평범한 인민의 한 사람으로 끌어내렸다. 해방공간에서 친일문인들은 일제말기 제국일본의 식민지배이데올로기를 조선(인)에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 이상으로, ‘정치적’이고 ‘전략적’인 자기변호의 텍스트를 생산해낼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친일문인들의 해방기 ‘회고’는 문인의 내적 욕망과 외부적 압력이 동시에 작용한 결과라는 점, 시대와 이데올로기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문학적, 사회적 생존을 모색하기 위한 행위의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일제말기의 ‘친일문학’과 매우 닮아있다. 본 논문의 기본적인 시각은 제국주의와 주체의 관계성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탈식민주의적 담론의 자장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 선행연구와 차별을 두기 위해 일제말기 친일문학에 영향을 미친 외부적 요인보다는 문인 개개인의 사상적 배경과 문학론, 그들의 식민지적 주체형성 과정에 주목함으로써, 친일문학이 그저 외압에 의한 몰개성한 선전문학이 아님을 규명하려 했다. 이를 위해 각기 다른 사상적 배경과 문학론, 식민지적 주체성을 형성하면서 일제하에서나 해방공간에서 활발히 작품 활동을 이광수, 김동인, 채만식을 연구대상으로 설정하였다. 이 세 명의 문인을 통해 친일문학이 일제의 식민지배이데올로기를 문인 각자의 맥락에서 내면화한 결과물이라는 공통점을 발견하고, 이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취하는 서술전략과 서술방식의 차이점에 주목하였다. 또한 친일의 범위와 의미를 일제강점기에 국한시키지 않고, 이를 해방 후 회고와 연결시킴으로써 친일의 시작과 완결을 철저히 작가 본인의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도록 했다. 서론에서는 친일문학에 대한 기존 연구사가 갖고 있던 견고한 민족주의적 시각에 대해 정리하고, 이를 돌파하려는 최근 연구 성과에 대해 살펴보았다. 연구사 검토를 통해 최근 친일문학 연구에서 주목하는 ‘식민지적 주체’의 문제를 본 논문의 문제의식에 적극적으로 반영하였다. 또한 친일문학(연구)의 정치적 성격으로 인해 연구자들이 경직된 태도와 시각을 갖게 된다는 점을 지적하며 친일문학 연구의 난점과 방법론의 문제를 정리하였다. Ⅱ장에서는 일제말기 조선문단의 상황과 문인협회의 존재의의를 바탕으로, 세 문인의 ‘친일논리’가 구축되는 과정을 그들의 비평(적)텍스트를 통해 살펴보았다. 일제말기 조선의 문인들은 일본을 중심으로 한 ‘대아시아’ 개념 속에서 근대와 동양을 초극하고 서구에 대항할 가능성을 찾았다. 문인협회는 문인들의 친일행위를 집단화・조직화하고, 일본으로부터 ‘국민문학론’을 수용하는 등 새로운 문학의 방향을 모색했지만 문학론의 불명확성으로 인해 식민지적 주체의 사상적 균열과 분열을 만들어내는데 일조하였다. 식민지 조선의 독립을 위한 근간인 ‘민족주의’가 친일로 흐르게 되는 양상은 일견 아이러니로 보이지만, 이광수를 통해 보면 민족주의와 제국주의는 결코 상반된 개념이 아님을 알게 된다. 그의 민족주의는 ‘자강론’, ‘실력양성론’ 등과 결합하면서 자연스럽게 동화주의(assimilation)로 이어지는 양상을 보이기 때문이다. 반면 김동인의 친일논리는 그의 민족의식의 부재를 잘 보여준다. 그는 일본이 내세우는 식민지배이데올로기에 현혹되지 않기 때문에 이를 내면화하거나 자기화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 김동인은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이 조선문단의 대표적 친일문인으로 보이기를 원했다. 생존을 위해서는 일제하에서 문인의 가치를 높여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자, 일찍이 문학의 자율성에 대한 철저한 옹호자였던 김동인은 문학이 가장 중요한 ‘도구’일 수 있다는 자가당착적 결론에 다다른다. 그래서 일제말기 김동인에게는 주체성이 결여된 식민지 지식인의 수동적인 모습과 식민지배 체제 내에서 가치 있는 존재가 되고자하는 피식민자의 욕망이 동시에 발견된다. 반면 무력한 니힐리스트이자 체제순응자인 채만식의 사회주의는 ‘전체주의’라는 공통점으로 인해 일제하 신체제로 빨려 들어가는 양상을 보인다. 채만식의 친일논리는 이광수에 대한 모방으로, 친일소설의 구상은 히노 아시헤이의 영향 하에서 그 기반을 마련하지만, 이광수와 달리 채만식은 조선(인)을 초극하여 사고할 수 없다는 점에서 결정적인 차이를 보인다. 조선과 조선문학, 그리고 조선인으로서 자신을 모두 미달된 존재로 규정했던 채만식은 현실적 제조건으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이기에 시대에 순응하는 것으로써 자신의 길을 정한다. Ⅲ장에서는 일제말기 문인에게 내면화된 식민지배이데올로기의 결과물인 소설텍스트를 분석해보았다. 특히 이 장에서는 해방 후 삭제된 서사를 복원하고, 지금까지 연구대상이 되지 못했던 친일소설텍스트들을 새롭게 의미화 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세 문인의 ‘개성’은 문학작품의 제재(題材)와 장르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광수의 친일소설은 기본적으로 일상에서 제재를 취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는 조선인에게는 충(忠)을, 일본인에게는 성(誠)의 정신을 주입시키려 함으로써 계몽의 이중적 의도를 보인다. 완전한 내선일체의 완성은 한쪽의 노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광수 특유의 도식적인 인물구도는 ‘내지인-조선인’ 사이에서 효과적으로 구현되어 ‘정신적 내선일체’를 완성하고, 원술을 동원한 군인정신의 강조는 징병제 실시를 통한 ‘실질적 내선일체’의 기획을 뒷받침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미완으로 남은 일군의 소설들에서 이광수는 내선일체론과 국민문학론의 허상을 스스로 폭로하고, 불완전한 내면을 드러내기도 한다. 김동인의 친일소설은 모두 백제, 일본, 중국을 배경으로 하는 ‘역사소설’이다. 김동인의 친일역사소설은 텍스트 자체만으로 볼 때에는 친일적 요소를 발견하기 어렵지만, 컨텍스트와 함께 읽으면 그 안에 숨겨진 식민사관과 텍스트의 진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고도의 전략적 글쓰기라 할 수 있다. 그는 서구를 통해 동양의 가치를 재인식하고, 일본중심의 대동아공영권 구상을 뒷받침한다. 아편전쟁을 제재로 삼은 두 편의 역사소설에서 김동인은 중국의 치욕적인 역사를 통해 反서구의 정서를 정당화하고, 친중적인 서술태도로 제국일본의 대동아공영권 구상을 뒷받침한다. 일본정신을 반영한 예술가소설에서는 국책문학 창작에 대한 일본인 문사의 고민을 담았지만, 그 함의는 조선 문인의 일본어 글쓰기에 대한 고민으로 읽는 것이 옳다. 일제의 고대사복원 계획과 발맞춘 친일역사소설에서는 일본역사관을 바탕으로 백제와 일본의 역사적 친연성을 강조하고, 과거 백제가 일본의 도움으로 당군을 물리친 것처럼 조선이 일본을 도와 중국에 대항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채만식의 친일소설은 르포문학의 형태를 띤 전쟁소설과 후방의 역할을 강조하는 총후문학으로 이루어져 있다. 직접 전쟁에 참여하는 용맹한 일본군, 후방에서 이를 적극 지원하는 이상적 ‘총후부인’과 ‘군국의 어머니’를 통해 채만식의 소설은 군국주의적 전체주의를 선전한다. 일제말기 채만식의 소설 가운데 장편 『아름다운 새벽』은 해방 후 단행본으로 엮이는 과정에서 친일적 요소가 의도적으로 삭제되면서 해석상의 혼란을 야기했다. 본고에서는 삭제된 서사를 복원하고, 채만식 친일논리와 해방기의 정치성을 보여주는 텍스트로 의미화 하였다. Ⅳ장에서는 해방공간에서 쓰인 세 문인의 회고를 대상으로 친일문인들의 ‘자기규정’과 반성의 ‘전략’적 측면을 연관시켜 살펴보았다. 특히 복잡한 수사와 정치적 맥락 사이에 숨겨진 텍스트의 ‘진의’를 찾고자 했다. 이광수는 인생의 모든 기간을 대상으로 하는 ‘자서전’이 아님에도 친일협력의 기간을 ‘일제말기’에 한정하고, 그 의미를 희석시키기 위해 자서전 형식의 회고를 썼다. 자의적으로 서술시간을 조절함으로써 ‘민족주의자’의 순수성을 강조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반면 김동인은 이광수를 ‘민족주의를 내세워 자발적으로 친일한 민족적 지도자’로, 자신을 ‘일생 조선문 소설쓰기에만 몰두한 순수하고 무력한 소설가’로 규정함으로써 친일의 그림자를 이광수에게 덧씌우고 자신은 그 비판으로부터 벗어나려 한다. 특히 그는 자신의 문학적 공로를 과장되게 제시하고, 일제하와 미군정의 ‘지배/점령’을 동일하게 의미화 함으로써 자신을 철저한 피해자에 위치시킨다. 채만식은 스스로를 민족의 ‘죄인’으로 규정하지만, 그의 회고에는 죄의식과 억울함이 동시에 나타난다. 그의 회고에서는 반복적으로 죄에 대한 인정과 동기에 대한 부정이 중첩되어 서술된다. 자신의 친일을 인정하면서도, 본심에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려 하는 채만식의 회고는 본심과 양심 사이의 팽팽한 힘겨루기를 보여준다. 해방기 채만식의 인식은 ‘조선인 대부분이 민족의 죄인’이라는 것이다. 자기풍자와 자기폭로를 통해 죄의식을 드러내고는 있지만, 그런 면에서 채만식의 회고는 친일에 대한 반성적 텍스트가 아닌 자기변호의 텍스트임이 분명해진다. 문인들의 친일의 동기와 경로, 해방 후 보여준 자기비판과 반성까지 검토한 후 드러나는 것은 식민지적 주체의 모순과 분열의 복잡한 양상이다. 친일문학은 그 자체로 정치적인 텍스트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문학’이란 한 인간이 세계를 보는 관점이자, 그 자신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친일문학은 국책을 위한 전략적 글쓰기인 동시에 한 작가의 문학적 지향과 식민지적 정체성을 담고 있는 대상이다. 친일문인은 식민주의 내부의 구조적인 불균등성을 극복하는 것이 목표이지만 정작 자신들의 존재가 이 체제를 상징한다는 것, 나아가 체제를 더 공고히 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이 논문은 세 문인의 일제말기와 해방기의 텍스트를 통해 식민지적 주체의 형성과 분열, 일제식민지배이데올로기의 환상과 모순, 친일문학에 내재된 피식민자의 욕망과 주체의 한계에 대해 살펴보았다. 또한 해방 후에도 여전히 세계의 비주체적 존재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그들에게서 ‘식민지 근대성’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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