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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 식민지기 예비학교의 설립과 운영에 관한 시론 - 고등교육기관 입학시험 준비교육을 중심으로

        김자중 고려대학교 교육문제연구소 2020 敎育問題硏究 Vol.33 No.1

        This study aimed to analyze the establishment and operation of preparatory schools in Korea under Japanese rule. The results are as follows. Firstly, preparatory schools in japan influenced the establishment and operation of preparatory schools in Korea under Japanese rule. Secondly, After the March 1st Movement, the educational enthusiasm of Koreans and fierce competition to enter university and junior colleges influenced the establishment of preparatory schools. Thirdly, There were at least 15 preparatory schools in colonial Korea. eleven of them was established by Korean, three of them was established by Japanese. The founders and teachers of the former were mostly from private schools. Fourthly, preparatory schools had one year or less diploma course, taught English and mathematics, selected secondary schools students and graduates. Some preparatory schools charged high school fees, carried out Mock tests, held summer or winter courses, published textbooks. And most preparatory schools had various courses, but did not last long. Fifthly, supplementary courses absorbed the demand for preparatory schools. This shows that supplementary courses was in competition with the preparatory schools. 본 연구는 일제 식민지기 예비학교의 설립 배경과 현황, 운영상의 특징을 분석하고 고등보통학교⋅중학교 보습과와의 관계를 고찰함으로써 예비학교의 교육사적 의의를 고찰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일본의 예비교는 식민지 조선의 예비학교의 설립과 운영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둘째 예비학교의 설립은 3.1운동 이후 고등보통학교 졸업자 수의 증가와 조선총독부의 관립전문학교증설억제정책에 의해 초래된 고등교육기관의 입학경쟁의 격화와 이에 따른 ‘정규의 학교제도’ 밖에서의 ‘준비교육’에 대한 수요 증가라는 배경 하에서 이루어졌다. 셋째 일제 식민지에는 적어도 15교의 예비학교가 설립됐다. 설립자별로 보면 사실상 조선인 설립의 예비학교 11교, 일본인 설립의 예비학교 3교, 미상 1교였다. 이중 조선인 설립의 예비학교는 설립자나 강사가 대체로 사립의 고등보통학교, 각종학교, 사설학술강습소 관계자 출신이었으나 일본인 설립의 예비학교는 설립자나 강사가 중등학교 교원와 함께 일부 고등교육기관 교원도 참여하고 있었다. 넷째 예비학교는 다음과 같은 운영상의 특징을 갖고 있었다. 수업연한은 대체로 1년 이하였으며 교육과정은 영어⋅수학 중심이었다. 재학자는 재수생과 함께 고등보통학교와 ‘지정학교’ 재학자 등을 아울렀을 것으로 보인다. 일부 예비학교는 모의시험을 실시하거나 강습회를 개최하고 교재를 저술⋅출판했으며 수업료가 고등보통학교 본과의 수업료보다 고액이었다. 대부분의 예비학교는 존속기간이 짧았으며 ‘준비교육’ 이외의 다양한 과정을 설치했다. 다섯째 1934년에 보습과의 출현은 예비교에 대한 수요를 일정 정도 흡수했다. 동년에 경성고등예비학교의 입학지원자 수는 급감했다. 이는 보습과가 경성고등예비학교와 경합관계에 있었다는 점을 방증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를 보면 일제 식민지기에 예비학교는 고등교육기관의 입학경쟁의 격화와 이에 따른 ‘준비교육’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는 상황에서 ‘재수생’, 고등보통학교와 ‘지정학교’ 재학자, ‘전검’ 합격자 등에게 ‘준비교육’을 제공하는 교육기관이었다는 점에서 교육사적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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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오개혁 이전 ‘고등교육(Higher Education)’에 대한 조선인의 인식의 수용 과정에 관한 연구

        김자중 교육사학회 2018 교육사학연구 Vol.28 No.1

        This study aimed to consider the Adoption of ‘Higher Education’ during the Early Opening Port Era in Korea. The results were as follows. Firstly, Susinsa(修信使) and the Courtier’s Observation Mission imperfectly understood ‘Higher Education’ in Japan at first, but gradually began to understand that it was education of the last tier in three tier school system, education that the entrance qualification was finishing secondary education, and specialized education. Secondly, 『Hanseong Sunbo(漢城旬報)』 and 『Hanseong Jubo(漢城週報)』 introduced ‘Higher Education’ in western countries. Especially, it is worthy of notice that 『Hanseong Sunbo』 mostly introduced universities, but various higher educational institutions such as Imperial University in Japan and Grandes Écoles in France as well as universities. Thirdly, Park Young-Hyo(朴泳孝), Park Jeong-yang(朴定陽) and Yu Kil-Chun(俞吉濬) could understand ‘Higher Education’ from overseas experiences. Also, they understood the importance of ‘Higher Education’. Especially, Park Young-Hyo proposed the establishment of Jangnnyeonkyo(壯年校) that it was a kind of a higher educational institution for government officials training, and Yu Kil-Chun regarded university graduates as leaders or elites in a a country. In conclusion, After analyzing the literature, This study found that Koreans gradually began to understand ‘Higher Education’ during the Early Opening Port Era in Korea. It might have been the epistemic foundation of the Joseon Government’s higher education policy after that time. In other words, the adoption of ‘Higher Education’ during the Early Opening Port Era was one factor of the Joseon Government’s higher education policy after that time in Korea. 본 연구는 개항 이후 갑오개혁 이전 ‘고등교육’에 대한 조선인의 인식의 수용 과정을 고찰함으로써 이후 갑오·광무개혁기에 조선·대한제국 정부가 실시한 고등교육정책의 인식론적 기초를 확인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수신사·조사시찰단은 최초에 일본의 ‘고등교육’에 대해 다소 불완전하게 인식했으나 이후 점차 그것이 “3단계 학제상의 최종단계의 교육이자 중등교육 수료를 입학자격으로 하는 단계의 교육”이라는 점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둘째 『한성순보』·『한성주보』는 서양 각국의 ‘고등교육’에 대해 소개했다. 이중 『한성순보』는 주로 대학에 대해 소개했으나 이에 비해 『한성주보』는 대학뿐만 아니라 일본의 제국대학, 프랑스의 그랑제콜 등과 같이 보다 다양한 고등교육기관에 대해서도 소개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셋째 개화파 인사인 박영효·박정양·유길준은 헤외체류경험 등을 토대로 ‘고등교육’에 대한 인식을 확대할 수 있었다. 또한 이들은 ‘고등교육’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잘 인식하고 있었다. 특히 이중 박영효는 수신사·조사시찰단이나 『한성순보』·『한성주보』가 고등교육을 소개한 것을 넘어 “장년교”라는 일종의 관리양성을 목적으로 한 고등교육기관의 설립을 요구했으며 유길준은 대학 졸업자를 한 나라의 지도자(엘리트)적인 위치로서 묘사할 만큼 그 중요성에 대해 잘 인식하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갑오개혁 이전의 주요 문헌을 분석한 결과 동 시기에 ‘고등교육’에 대한 조선인의 인식은 점차 확대됐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즉 이 시기에 조선인은 ‘고등교육’이 “3단계 학제상의 최종단계의 교육이자 중등교육 수료를 입학자격으로 하는 단계의 교육”이라는 점, 고등교육기관에는 대학뿐만 아니라 다양한 교육기관들이 존재한다는 점, 그리고 고등교육기관의 중요성 등을 인식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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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 식민지기 ‘전문정도 사립각종학교’ 경성치과의학교의 전문학교 승격과정에 관한 연구

        김자중 한국교육사학회 2022 한국교육사학 Vol.44 No.3

        본 연구는 일제 식민지기 ‘전문정도 사립각종학교’ 경성치과의학교의 전문학교 승격과정을 분석하고 이를 통해 전문정도 사립각종학교 중 ‘일본인 설립자 학교’의 존재 양태에 대해 고찰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경성치과의학교가 전문학교로 승격한 데에는 그 내부의 노력이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단계적인 승격계획과 식민교육의 철저였다. 즉 경성치과의학교는 설립 직후인 1920년대 초반부터 전문학교 승격의 전제로서, 또한 적어도 1925년까지는 지정을 받아 그해 배출되는 제1회 졸업자부터 무시험 조선총독부 치과의사 면허를 받을 수 있는 자격을 획득하기 위해 지정운동을 전개했다. 그 결과 경성치과의학교는 1925년 2월 28일에 지정을 받았다. 이어 1926년에 경성치과의학교는 본격적인 승격운동에 착수하여 승격의 당위성을 강조하기 위해 치과의사양성기관의 충실과 조선인 중등학교 졸업자의 상급학교 진학기회라는 논리를 제시했으며, 정원 확대에 수반하여 증가될 것으로 예상되는 학교수입을 토대로 전임교원을 대거 확충하는 것에 방점을 둔 전문학교 설립계획서를 총독부에 제출했다. 이와 함께 경성치과의학교는 총독부의 식민지 교육정책에 부응하기 위해 학칙 중 생도심득에 학생들의 일어 사용과 집회 등의 허가제를 규정했으며, 또한 칙어등본을 교부받고 승마부를 설치하거나 육군현역장교의 배속에 의한 교련교육을 실시했다. 결국 경성치과의학교는 1929년 2월 5일에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로 승격했다. 경성치과의학교의 이와 같은 노력은 식민지 조선의 독특한 사립전문학교 유형이라고 할 수 있는, 말하자면 ‘반관반민형 사립전문학교’라고 할 수 있는 경성치과의전을 출현시킨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된다. 여기서 ‘반관반민’은 경성치과의전이 사립전문학교임에도 불구하고 일정 부분 총독부의 지원을 받아 운영됐다는 점, 또한 그 운영방침이 관립전문학교와 닮아 있었다는 점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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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 식민지기 전문학교입학자검정제도에 관한 시론

        김자중 고려대학교 교육문제연구소 2019 敎育問題硏究 Vol.32 No.2

        본 연구는 일제 식민지기 ‘전문학교입학자검정제도’에 대해 분석함으로써 그 교육사적 의의를 규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총독부가 ‘전검제도’를 도입한 이유는 3.1운동 이후 안정적인 식민지 지배를 위해 실시한 ‘문화정치’라는 정책 기조 하에서 당시 일본에서 이미 실시되고 있었던 ‘전검제도’를 식민지 조선에도 실시함으로써 차별적 제도를 완화하고 전문학교 입학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전문학교 입학기회를 부여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이와 함께 식민지 조선사회를 회유하기 위한 측면도 있었다. 둘째 1925년 4월 20일에 「전문학교입학자검정규정」의 전면개정을 기점으로 시험검정은 제도화됐다. 즉 이때부터 시험검정은 조선총독부 주관, 정기적 실시와 『조선총독부관보』에 출원기한・시험시행의 기일・장소의 고시, ‘학과목합격제도’와 ‘학과목면제제도’의 도입, 7월 공고-10월 실시-11월 합격자 발표라는 형태를 갖추게 됐다. 기타 시험장소는 1927년부터 1곳에서 1939년부터 5곳으로, 시험횟수는 1926년부터 연 1회에서 1942년부터 연 2회로 확대됐다. 셋째 시험검정 지원자는 1920년대 초반에는 주로 전문학교의 ‘구령에 의한 재학자’였으나 1920년대 중반 이후에는 이들과 4년제 고등보통학교 졸업자가 점차 감소하고 그 자리를 각종학교 출신과 독학자가 대체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선총독부가 오랜 기간 시험검정의 시험장을 1곳, 시험횟수를 연 1회로 제한했던 탓에 전검합격자 수는 저조했다. 넷째 그럼에도 ‘전검제도’가 교육사적 의의를 갖는 것은 첫째 ‘전검제도’가 5년제 고등보통학교(중학교)를 졸업하지 않은 사람에게 전문학교 입학기회를 부여했으며 실제로 이를 통해 그들 중 일부가 전문학교 입학기회를 획득할 수 있었다는 점, 둘째 ‘전검제도’가 독학의 계기로서 작용하여 이를 통해 독학자 간에 고등보통교육이 보급되는 데에 일정 부분 기여했을 것이라는 점 때문이다. This study aimed to consider the Qualification Exam for JeonMunHakKyo(專門學校) Entrance(QEJE) in Korea during the Japanese rule. The results were as follows. Firstly, the Governor-General of Korea(GGk) introduced the QEJE to provided for people who couldn't enter five-year-course middle school with higher education opportunities. But also It was system for conciliating the minds of the Koreans who got the educational fever and required education opportunities including higher education opportunities after the March 1st Movement. Secondly, the GGk reformed the QEJE in 1925. As a result, the GGk administered the QEJE regularly, announced the deadline for application, exam date and site in the official gazette, introduced the splitting exams and the exemption system, increased exam site after 1939 and the annual number of exam after 1942. Also, people who passed the QEJE could be employed government officials or teachers. Thirdly, in early 1920s the applicants were people who were entered JeonMunHakKyo by old regulation, but after the mid 1920s the applicants were the Miscellaneous School graduates and the self studied men. But the number of people who passed the QEJE were very small because the GGk limited site and the annual number of exam for a long time, and also the rate of passing applicants were very small because the applicants weren’t people who received formal school education after the mid 1920s. Nevertheless, the QEJE in Korea during the Japanese rule has the historical significance. Because it provided people who couldn't enter five-year-course middle school with higher education opportunities, and let them started self study, as a result spread middle school leveled common knowledge among the Koreans during the Japanese ru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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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체제기(1937-1945) 조선총독부의 고등교육기관 입학시험정책

        김자중 고려대학교 교육문제연구소 2022 敎育問題硏究 Vol.35 No.1

        본 논문은 전시체제기 조선총독부의 고등교육기관 입학시험정책을 분석하고 이를 토대로 당시 총독부가 각 고등교육기관의 입학시험과목에 대해 직접적 통제를 한 이유를 규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1940년의 영어시험 폐지는 입시위주의 영어교육에 대한 비판과 함께 일제와 미영 간의 국제적 대립, 그에 수반한 영어교육의 개편이라는 정치적 배경 하에서 미나미 총독의 동의 하에 자유주의를 극력 반대한 시오바라 학무국장이 영어교육을 통해 미영추수주의적 사상이 수용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당시 고조되고 있던 배영운동에 편승하여 추진한 급진적 조치였다. 둘째, 1940년대 이후의 문과계와 이과계를 막론한 국사시험의 확대는 국체명징을 강조하는 역사교육정책의 실시라는 배경 하에서 총독부가 국사시험 등의 실시를 지시한 문부성 통첩의 영향을 받아, 또한 폐지가 결정된 영어시험의 대체과목으로서 실시한 조치였다. 셋째, 1945년의 ‘결전입시’ 하에서 필답시문의 실시는 중등학교의 ‘통년동원’이 실시됨에 따라 그 졸업반 학생들이 예년과 같이 정상적으로 입학시험을 준비하는 것이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게 됐기 때문이다. 이때 총독부는 고등교육을 받는 데에 족한 소질, 능력을 평가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실제로는 지원자의 국체관념을 평가하는 문제도 출제했다. 결론적으로 전시체제기 총독부의 고등교육기관 입학시험정책은 교육적이기보다는 정치적인 목적, 말하자면 ‘옥쇄’라고 답하고 가미가제공격을 하다가 사망한 조선인 청년 ‘마쓰이’를 닮겠다고 답하는 인간을 만드는 것, 즉 철저한 황민화를 달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This study aimed to analyze the higher education institutions entrance examination policies of the Governor-General of Korea and to investigate the relationship between them and Japanization Education during the wartime period. The results are as follows. Firstly, the abolition of the English test in 1940 was a radical measure promoted by Shiobara Tokisaburo, who strongly opposed liberalism under the political background of the international confrontation between Japan, the UK, and the United States, to prevent liberalism from being accepted through English education. Secondly, since the 1940s, the expansion of the National History test has been carried out under the background of the history education policy of the Japanese government and the Governor-General of Korea, which emphasized national names. Thirdly, the implementation of the written examination in 1945 was due to the expansion of secondary school labor mobilization, making it virtually impossible for graduates to prepare for the entrance examination normally as in previous years. In conclusion, the purpose of the entrance examination policies of the Governor-General of Korea was Japaniz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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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체제기(1937-1945) 조선총독부의 전문학교정책의 성격 규명

        김자중 고려대학교 교육문제연구소 2019 敎育問題硏究 Vol.32 No.3

        This study aimed to analyze the characteristics of junior college policies of the Governor-General of Korea(GGk) during the wartime period. The results were as follows. Firstly, the GGK reformed junior college system in Korea for training professional manpower of natural sciences during the wartime period. In the period before and after the Sino-Japanese War, the GGK established Gyeongseong Junior College of Mines and Busan Junior College of Fisheries. After Pacific War, the GGK established Pyongyang Junior College of Technology and Daegu Junior College of Agriculture, changed from Yeonhui Junior College and Boseong Junior College to Gyeongseong Junior College of Technology and Business and Gyeongseong Junior College of Colonization and Economics, closed Hyehwa Junior College and Myeongnyun Junior College, changed from Ewha Women’s Junior College and Sookmyung Women’s Junior College to schools for the training of female teachers or instructors. Secondly, the GGK strengthened intervention and control of junior colleges’ educational management during the wartime period. The GGK reduced the years required for graduation from the junior college by three months in 1941, and by six months since 1942, attached active army officers to private junior colleges as well as governmental junior colleges and increased in military training instructional time per week, organized junior college students into the School Labor Patriotism Corps and mobilized them to work. 본 연구는 전시체제기 조선총독부의 전문학교정책의 성격을 규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전시체제기에 조선총독부는 이과계 전문인력의 양성을 위해 식민지 조선의 전문학교체제를 전시전문학교체제로의 개편했다. 즉 중일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조선총독부는 경성광산전문학교와 부산고등수산학교를 신설했다. 이어 태평양전쟁 이후 조선총독부는 평양고등공업학교와 대구농업전문학교를 신설했으며 문과계 전문학교 중 연희전문학교와 보성전문학교를 각각 경성공업경영전문학교와 경성척식경제전문학교라는 이과계 전문학교로 전환, 혜화전문학교와 명륜전문학교를 폐교, 경성법학전문학교와 경성고등상업학교를 경성경제전문학교로 통합, 이화여자전문학교와 숙명여자전문학교를 조선여자청년연성소 지도원양성기관으로 전환시켰다. 둘째 동 시기에 조선총독부는 전문학교 재학자를 동원하기 위해 학사운영에 대한 간섭과 통제도 강화했다. 먼저 조선총독부는 전문학교의 수업연한을 1941년에 3개월, 1942년부터는 6개월 단축했다. 다음으로 조선총독부는 관립전문학교뿐만 아니라 사립전문학교에도 육군현역장교의 배속에 의한 교련교육을 실시하고 매주 교련교수시수를 확대했으며 이후 1943년에 ‘학도지원병제도’, 1944년에 ‘징병제’를 실시하여 전문학교 재학자를 병력자원으로 동원했다. 마지막으로 조선총독부는 전문학교 재학자를 학교근로보국대 등으로 조직하여 각종 근로에 동원했으며 연간 근로일수도 최초 10일에서 30일, 60일, 4개월로 점차 확대하고 전시체제기 말기에는 통년동원까지 실시했다. 결론적으로 전시체제기 조선총독부의 전문학교정책은 조선인의 교육을 파행화(跛行化)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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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 식민지기 통신학교의 설립과 중학강의록의 발행에 관한 연구

        김자중 한국교육사상학회 2019 敎育思想硏究 Vol.33 No.2

        This study aimed to analyze the establishment of correspondence schools and the publication of lecture notes for secondary school in Korea under Japanese rule. The results are as follows. Firstly, the first correspondence school in Korea was Joseonsamunhakhoe(朝鮮斯文學會) which Shakuo Shunjo(釈尾春芿) organized in the 1910s. The reason why he organized the correspondence school and published lecture notes for secondary school was to assimilate Korean who could not enter secondary school into Japanese. Secondly, numbers of the correspondence schools organized after the 1920s. it was because the number of elementary school graduates increased and introduced the Qualification Exam for Jeonmunhakkyo(專門學校) Entrance. As a resut, at that time, four correspondence schools organized at least. Thirdly, the correspondence schools in Korea under Japanese rule is divided into correspondence schools organized by Korean and correspondence schools organized by Japanese. The two had different purpose of organization. Correspondence schools organized by Korean aimed to spread secondary school-leveled knowledge to Korean who could not enter secondary school. In comparison, correspondence schools organized by Japanese aimed to assimilate them into Japaneses. But both also aimed to help Koreans to succeed in life because they had to recruit members. And Korean subscribed to lecture notes for secondary school for success in life. In other words, lecture notes for secondary school was mean to satisfy desire for success in life. 본 연구는 일제 식민지기 통신학교의 설립・운영과 중학강의록의 발행 현황을 분석하고 그 의의를 고찰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그 결론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일제 식민지기 통신학교의 효시는 1910년대에 조선잡지사 사장 샤쿠오가 설립한 조선사문학회였다. 둘째 1920년대 이후에는 이전 시기에 설립된 조선사문학회 외에 다수의 통신학교가 설립됐다. 그 배경으로는 보통학교 졸업자 수의 증가와 ‘전검제도’의 도입을 거론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이 시기에는 적어도 4교의 통신학교가 설립되어 중학강의록을 발행했다. 셋째 일제 식민지기에 설립된 통신학교는 설립주체별로 조선인계 통신학교(조선통신교육관・조선교육학회)과 일본인계 통신학교(조선사문학회・고등보통학회・조선고등보통학회)로 나눌 수 있는데 양자는 각각 설립목적에서 차이가 있었다. 즉 조선인계 통신학교의 설립목적은 주로 조선인의 ‘실력양성’이었으나 일본인계 통신학교의 설립목적은 주로 조선인의 ‘체제 내화’였다. 다만 양자는 모두 회원 모집이라는 현실적인 이유로 ‘입신출세’라는 또 하나의 설립목적을 내세울 수밖에 없었다. 또한 조선인이 중학강의록을 구독한 동기도 주로 ‘입신출세’의 욕망이었다. 이를 보면 일제 식민지기에 설립된 5교의 통신학교는 고등보통학교・여자고등보통학교의 부족과 극심한 입학경쟁, 경제적 문제 등으로 인해 고등보통학교・여자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할 수 없었던 다수의 조선인에게 고등보통교육을 보급하고 ‘입신출세’의 욕망을 실현시킬 수 있는 수단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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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성제국대학 교육학 교수 마쓰즈키 히데오(松月秀雄)의 개성교육론 -그 형성과 전개를 중심으로-

        김자중 한국교육사상학회 2022 敎育思想硏究 Vol.36 No.1

        This study aimed to analyze the theory of Individual Education of Matsuzuki Hideo, a professor of education at Gyeongseong Imperial University, and to clarify an example of the acceptance of the thoughts of the New Educational Movement that developed worldwide in the late 19th and early 20th centuries. Matsuzuki formed his theory of individual education as he studied at the Graduate School of Tokyo Imperial University and Hamburg and developed it after taking office as a professor of education at Gyeongseong Imperial University. His theory of individual education defined personality as a result of scientific and experimental research methods, limited individual education to educational methods, rather than educational purposes, and emphasized community schools’ (Gemeinschaftsschule) Free Work (Frei Beschäftigung) in Hamburg and personal education based on students’ ability in the Winetka System to develop individuality. Furthermore, he proposed writing scientific and psychological records to investigate the individuality of students. Matsuzuki’s theory of individual education in the development of educational history in Korea under Japanese rule is significant in that this is an example of the acceptance of the thoughts of the New Education Movement in Korea in the 1920s, that there was a certain tension with the education policy of the Governor-General of Korea, and that it seems to have had some influence on the theory of education after Liberation. 본 논문은 경성제국대학 교육학 교수 마쓰즈키 히데오(松月秀雄, 1892-1993)의 개성교육론을 분석하고 이를 통해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전세계적으로 전개된 신교육운동 사조가 조선에도 수용되는 하나의 양상을 규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마쓰즈키는 도쿄제국대학 대학원 재학시기와 함부르크 유학시기에 그의 개성교육론을 형성했으며 경성제대 교육학 교수로 부임한 이후 이를 전개했다. 그의 개성교육론이란 개성을 과학적, 실험적 연구방법에 의해 조사된 것이라고 정의하고 개성교육을 교육목적이 아니라 교육방법에 국한한 것, 또한 개성을 신장시키기 위해 함부르크 공동사회학교의 자유작업과 위넷카 시스템의 능력에 따른 개별교수를 강조하고 이를 조사하기 위해 과학적, 심리학적 개성조사부를 제안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마쓰즈키의 개성교육론이 일제 식민지기 교육학사의 전개과정에서 갖는 의의는 첫째 1920년대 조선에 신교육운동 사조가 조선에도 수용된 하나의 사례로 위치지울 수 있다는 점, 둘째 조선총독부의 교육정책과 일정 정도 긴장관계를 갖고 있었다는 점, 셋째 해방 후의 교육론에도 그 흔적을 일부 남기고 있다는 점이다.

      • KCI등재

        1920년대 신교육운동의 이론가 파커스트(H. Parkhurst)의 조선 강연과 달턴플랜(Dalton Plan)의 소개

        김자중 한국교육사상학회 2023 敎育思想硏究 Vol.37 No.1

        This study aimed to analyze a lecture by H. Parkerst, a theorist of the New Education Movement in the 1920s, and to consider the introduction of the Dalton Plan in Korea under Japanese rule. The results are as follows. First, before Parkerst’s lecture, the Korean education community had already accepted the information on the Dalton Plan from the Taisho Liberal Education Movement. This demonstrates the Korean education community’s acceptance of the new education theory through the Daisho Liberal Education Movement of the 1920s. Second, the organizers, Gyeongseong Ilbo and Maeil Shinbo, had accepted the new education theory to the extent that it did not conflict with the educational purpose and content prescribed by the Japanese during colonial rule, which reflected the Government General of Korea’s attitude toward the new education theory. Third, the Korean educational community responded enthusiastically to Parkerst’s lectures. Considering that the new education theory was most actively accepted during the mid-1920s, this enthusiasm reflects the high interest of the Korean education community in the new education theory and the Dalton Plan. Fourth, the Koreaneducation community’s interest in the Dalton Plan was maintained after Parkerst’s lecture but declined rapidly after the late 1920s. It is worth noting that the Taisho Liberal Education Movement gradually declined in the Japanese education community during the same period. 본 연구는 1925년 파커스트의 조선 강연과 그 전후 상황을 분석함으로써 달턴 플랜이 조선 내에 소개되는 양상에 대해 고찰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파커스트의 강연 이전에 이미 조선교육계는 다이쇼자유교육운동으로부터 달턴 플랜에 관한 정보를 얻고 있었다. 이는 1920년대 조선교육계가 다이쇼자유교육운동으로부터라는 경로를 통해 신교육이론을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또 하나의 사례이다. 둘째 주최측인 경성일보사와 매일신보사는 신교육이론에 대해, 일제가 정한 교육목적과 교육내용을 저촉하지 않는 한도 내에서, 교육방법의 연구에 한정되는 한 용인하는 관점을 갖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이는 총독부가 신교육이론에 대해 취한 태도와 동일한 것이다. 셋째 파커스트의 강연에 대한 조선교육계의 반응은 열광적이었다. 이와 같은 강연 열기는 기존 학교교육의 획일주의, 주입주의에 대한 반발과 그 대안으로서 달턴 플랜을 포함한 신교육이론에 대한 높은 관심을 토대로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넷째 달턴 플랜에 대한 조선교육계의 관심은 파커스트의 강연 직후 유지되다가 1920년대 후반 이후에는 급속하게 쇠퇴했다. 이에 대해서는 같은 시기 일본교육계에서도 달턴 플랜에 대한 관심을 비롯하여 다이쇼자유교육운동 그 자체가 점차 침체됐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결론적으로 1925년 파커스트의 조선 강연은 당시 조선교육계가 신교육이론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경로와 조건, 신교육이론에 대한 조선교육계의 높은 관심을 나타내는 상징적 사건이다.

      • KCI등재

        1910-1920년대 조선 내 신교육이론의 수용과 실천에 관한 사례연구 : 데즈카 기시에(手塚岸衛)의 자유교육론을 중심으로

        김자중 한국교육사학회 2022 한국교육사학 Vol.44 No.4

        본 연구는 1910-1920년대 신교육이론이 조선 내로 수용되고 실천되는 양상을 데즈카 기시에의 자유교육론이라는 사례를 중심으로 분석하고, 그것이 한국 교육사에서 갖는 의의에 대해 고찰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1910-1920년대에 조선교육계와 일본의 다이쇼자유교육운동 간에는 교류가 있었다. 그 경로로는 조선교육계의 일본교육시찰과 다이쇼자유교육운동 이론가들의 조선 강연 등을 거론할 수 있다. 이에 따라 데즈카의 조선 강연 이전에도 이미 조선교육계에는 그의 자유교육론이 수용되고 있었다. 즉 당시 조선에는 이미 100명 이상의 백양회 회원이 있었으며, 여러 교육단체의 회원 중에도 이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다수 있었다. 이와 같은 배경 하에서 그의 조선 강연은 성사될 수 있었다. 그는 강연을 통해 아동의 자학을 중시하는 자신의 자유교육론을 알리려 했다. 또한 그는 조선에서도 자유교육론의 실천이 가능하다는 점을 역설했다. 그의 강연 이후 조선에서 자유교육론은 단순히 소개나 수용에 그친 것이 아니라 실천으로까지 옮겨지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대구수창보통학교의 모리카와와 경성사범학교 부속보통학교의 이기능의 실천이다. 이 사례는 지금까지 1910-1920년대 조선을 다이쇼자유교육운동과는 그다지 관련이 없는 지역으로 간주했던 기존 인식의 전환을 요청한다. 앞으로는 여기에 추가적으로 일본 내에서 다이쇼자유교육운동의 세례를 받은 일본인의 조선 이주(조선 내 각 교육기관으로의 부임 등) 등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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