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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건 신부의 해로를 통한 조선 입국로

        김수태(Kim, Soo Tae) 한국교회사연구소 2016 敎會史硏究 Vol.0 No.49

        김대건 신부는 신학생 때인 1842년에 프랑스 함대를 타고 조선으로 들어오려다 실패하였다. 1845년 부제로서 육로로 조선에 입국하였던 그는 서해를 건너 중국에 들어간 최초의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이후 신부가 된 그는 조선에서 타고 갔던 배로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와 함께 다시 돌아왔다. 그러나 귀국한지 얼마 안 되는 1846년에 그는 백령도 부근을 거점으로 해서 조선과 중국을 연결하는 새로운 입국로를 개척하려다가 체포되고 말았다. 따라서 그는 바다와 함께 살다가 순교한 사제였다고 일컬을 수 있다. 이러한 까닭에 김대건 신부의 서해를 통한 선교사들의 입국로 개척에 대해서는 최근에 들어와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페레올 주교가 구상하고, 김대건 신부가 개척하였기에 가능하게 되었다고 파악되고 있다. 그러나 김대건 신부의 해로를 통한 입국로 개척에 대해서는 새롭게 다룰 측면이 있다. 우선 페레올 주교와 김대건 신부의 활동은 그 보다 앞선 선교사들이 시도한 해로 개척의 연장선상에서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김대건 신부의 활동이 주도적이거나, 능동적으로 제대로 그려지고 있지 않다는 점을 커다란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해로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던 김대건 신부에 의해서 프랑스 선교사들의 해로 입국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지게 되는 과정을 새롭게 살펴보고자 한다. 사실 프랑스 선교사들은 조선배로 조선에 입국하는 문제에 대해서 망설였다. 김대건 부제가 중국으로 타고 온 배가 너무나 작고 초라해서 서해를 건너서 갈 수 있는 배로 생각하지 않았다. 더욱이 김대건 신부의 항해 지식이나 해로 개척 가능성에 대해서도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이들은 조선배가 아니라 중국배로 조선으로 돌아가고자 희망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대건 신부는 조선의 배로 두 명의 프랑스 선교사를 태워서 입국하였다. 더 나아가 그는 새로운 지도 작성을 바탕으로 프랑스 선교사들이 백령도 부근을 통해서 조선으로 들어올 수 있는 길을 개척하였다. In 1842, when Kim Daekeon was a seminary student, his attempt to enter Chosun dynasty on the French fleet was frustrated. In 1845, as a deacon whom already entered Chosun by land, he became a first Catholic who entered China by crossing the Western sea. Later, becoming an ordained priest, he came back to Chosun with Bishop Ferréol and Father Daveluy by a ship which he took from Chosun. However in 1846, just after returning from China, he was arrested near the Baengnyeong island attempting to pioneer a new entrance connecting China and Chosun dynasty. Therefore, he can be called as a martyr who dwelled on seas. Due to this, Father Kim Daekweon"s efforts to pioneer missionary entrance through the western sea are currently gaining more interest. This was identified as a feasible plan because Baptiste Ferréol has conceived and Father Kim Daekweon has carried out. However, there is an another perspective to consider regarding Father Kim"s pioneering entrance through seaway. Above all, Bishop Ferréol and Father Kim"s attempts should be considered as an extension of efforts of the previous missionaries. Also, another crucial problem is that Father Kim"s activities are not being portrayed as leading, nor active. In this regard, different examination on how French missionaries" seaway entrance took place by the efforts of Father Kim Daekweon and his expert knowledge about seaway is required. In fact, French missionaries were reluctant at entering Chosun through seaway. The boat that Deacon Kim Daekweon took during his voyage to China was considered too small and flimsy to cross the Western sea. Moreover, Father Kim Daekweon"s nautical knowledge and his vision of pioneering a seaway entrance were thought to be reckless. Hence, they hoped to return to Chosun by chinese ship instead of Chosun"s boat. Nevertheless, Father Kim Daekweon managed to enter Chosun riding Chosun"s boat along with two French missionaries. Furthermore, he pioneered new entrance to Chosun for the French missionaries through mapping areas around Baengnyeong is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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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건 신부의 중국 여행기

        김수태(Kim Soo Tae) 서강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8 서강인문논총 Vol.0 No.52

        이 연구에서는 김대건 신부의 서한에 포함되어 있는 두 개의 중국 여행기, 즉 「남경여행기」와 「훈춘여행기」의 내용을 집중적으로 분석해보았다. 김대건 신부의 여행기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내용은 크게 지리, 문화, 역사를 중심으로 살펴볼 수 있다. 그의 여행기에서 먼저 등장하는 내용은 지리이다. 그가 방문하는 지역의 자연환경이나, 동・식물을 비롯해서 교통로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주고 있다. 이때 그의 지도에 대한 관심은 주목해야 할 사실이다. 그것은 자신을 비롯해서 프랑스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로를 모색하는데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여행을 통해서 육로가 아니라 해로를 통한 조선입국이 결정되었던 것이다. 김대건 신부의 여행기에서 지리 다음으로 비중을 차지하는 부분은 문화였다. 그는 어떠한 사람들이 일정한 지리적 환경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에 대한 내용을 다루었다. 인종이나 인구, 주거시설과 같은 풍속, 도시에 대한 인상, 원시신앙이나 불교와 같은 여러 종교들에 대해서 서술하였다. 이때 당시 중국이나 조선의 천주교에 대한 동향도 소개하고 있다. 이는 천주교와 이들 종교와의 비교를 시도하면서 천주교에 대한 관심을 촉구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무엇보다 김대건 신부의 여행기를 보면 역사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그의 서술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중국사에 대한 서술이다. 「남경여행기」에서는 중국현대사에 대한 서술이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훈춘여행기」 에서는 만주에서 건국한 이후 청나라의 역사를, 그리고 만주지역의 역사에 대한 그의 설명을 새롭게 찾아볼 수 있다. 이때 그가 만주와 조선의 역사적 관계에 대해서 주목하고 있는 점은 인상적이다. 더욱이 그는 만주를 둘러싸고 있는 전개되고 있는 러시아나 일본 등의 움직임에도 관심을 가지면서 동아시아로까지 그의 시야를 확대시키는 모습도 드러내주었다. 이러한 점에서 김대건 신부는 조선후기에 한국인 성직자로서 최초의 만주사를 서술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This research concentrated on analyzing the contents of two travel reports, 「Nanjing Travels」 and 「Hunchun Travels」, which were included in priest Kim Taegon’s letters. The contents dealt in Kim Taegon’s travel reports can be broadly categorized as mainly dealing the geography, the culture and the history. Contents that appear first in his travel reports are about the geography. Kim Taegon expressed his interest in traffic routes including the natural environment, animals and plants of places where he visited. His interest about routes and maps should be taken into consideration. That was the most crucial part for finding the entrance to Choseon dynasty for the French missionaries including himself. Through these travels, Kim decided entering Choseon using sea routes instead of overland route. The next important contents in Kim Taegon’s travel reports were regarding the culture. Kim dealt about what kind of people and how they lived in certain geographical environments. In addition, he described in details about the ethnicity, population, his impression on a certain city, general customs such as residential facilities, and religions including Buddhism and primitive beliefs. Also, he introduced about the social trend toward the Catholic in both the China and the Choseon of that time. This can be said that Kim Taegon tried to demand interest in the Catholicism through comparing Catholic with other religions. Above all, it can be said that Kim Taegon’s interest about history was extremely high when looking at his travel reports. Description of Chinese history is the largest proportion of his travel reports. Description of Chinese modern history is the major part of 「Nanjing Travels」. History of the Ch"ing dynasty which was established in Manchuria, and history of the Manchu province can be found in 「Hunchun Travels」. His attention about the historical relationships between the Choseon dynasty and the Manchuria is impressive. Furthermore, he showed expansion of his interest to the East Asian situations through dealing Russian and Japanese movements regarding the Manchu province. In this way, Kim Taegon can be said to the first Korean priest to narrate about the history of the Manchu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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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약용과 천주교의 관계 재론

        김수태(Kim, Soo Tae) 한국교회사연구소 2013 敎會史硏究 Vol.0 No.42

        지금까지 정약용과 천주교의 상호 관계에 대해서는 여러 부분에 걸쳐서 논쟁이 있었다. 이 글에서는 기존의 접근 방법과 달리 정약용이 〈자찬묘지명〉에서 언급한 천주교와 관련된 부분만을 구체적으로 검토해보고자 한다. 〈자찬묘지명〉의 내용에 대한 이해 역시 정약용이 천주교 신자임을 말해준다는 긍정론과 이와 달리 전혀 그렇지 않다는 부정론으로 크게 나누어진다. 이 가운데 현재 부정론이 우세한 형편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왜냐하면 〈자찬묘지명〉에 대한 본격적인 분석이 행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약용이 남긴 두 개의 묘지명인 ‘광중본’과 ‘집중본’에서 천주교를 서교라고 표현하고 있는 점이 우선 주목된다. 더 이상 천주교가 서학이 아니라, 이제는 새로운 종교로서 조선에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정약용이 한국 천주교회사를 서술하고 있다는 점 또한 그러하다. 그가 천주교 박해의 정치적 원인을 밝혀주는 한편, 순교사 중심의 한국 천주교회사 이해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더 나아가 정약용이 이를 통해서 조선정부의 천주교에 대한 관용책 내지 포용책을 주장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들게 한다. 정치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자신처럼 반대파의 무고로 인하여 그러한 고통을 받는 인물이 다시는 나오지 않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정약용이 배교하면서 1796년에 작성한 〈비방을 변명하고 동부승지를 사양하는 소〉에서 천주교를 사교라고 규정하면서 비판하던 양상과는 크게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약용이 만년에 들어와서 천주교에 대해 다시 달라진 태도를 가지게 된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대체적으로 정약용에게 그러한 변화가 일어난 시기는 유배에서 풀려난 이후인 1820년대 무렵, 늦어도 1822년의 일로 파악된다. Over the years there has been extensive, varied, and critical discussion about the significance and meaning of the prominent Joseon scholar, Jung Yak-yong, often simply known as Dasan(1762~1836), and his relationship with Catholicism. This paper will differ from other approaches, in concretely focusing on those parts of the two extant epitaphs which specifically relate to Catholicism. Although written in 1822, these works including the Guang-jung-pon (found on his memorial stone) and the Jip-jung-pon, (published post-posthumously) are, as per Jung’s instructions, considered his final statements. Whether his memorial inscription affirm he was a Catholic believer is both positively and negatively asserted. While most contemporary scholarship tends to favour the negative point of view, this position is difficult to sustain because there is a lack of an exhaustive analysis of the actual inscription. Both the Guang-jung-pon and the Jip-jung-pon posit Catholicism as a Western Religion. However, there is need for a more nuanced position given that both works suggest that Catholicism has now been accepted in, and provide a description of, this new religion in Joseon. Significantly, the epitaphs provide both a political reason for the persecution of Catholic believers and an insight into understanding the significance of martyrdom in the history of the Catholic Church in Korea. Furthermore, through these words Jung Yak-youg suggests the need for a broader, more tolerant government policy towards Catholics in Joseon. He is concerned that there will not be a re-emergence of the same political and ideological suffering that has been inflicted on him as a falsely accused member of the opposition faction. Jung’s final words are significantly different from those he wrote in the “Memorial”(1796). In that work he criticised Catholicism as a heretical religion and a perversion of the truth. This difference in language allows us to postulate that Jung Yak-yong, somewhere in the early 1820’s, and following his release from exile, changed his attitude to the new religion from the W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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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태조의 예산진 조서

        김수태 ( Kim Soo-tae ) 이화사학연구소 2022 梨花史學硏究 Vol.- No.64

        This article deals King Taejo’s Yesan-jin royal message which was issued in 934 with a new perspective. Although this royal message has been frequently mentioned, a full-scale review of its entire contents has not been made. This royal message, which was issued right before the battle with the Later Baekje, was more than economic policy regarding the Chungcheong-do region. Rather, unlike what Taejo had pursued before, it was a seminal data revealing how Goryeo implemented new economic policies after unifying the Later Three Kingdoms. Above all, on the basis of strengthened king's authority, Taejo promoted a new policy that effectively protected the peasants from not only taxes but also from the burden of labor. This can be seen in the fact that Taejo even allowed the peasants to have the right to sue for defending themselves from excessive burden. This shows that Goryeo was changing to a nation that focus more on the tax revenues based on the land productivity while reducing the direct control over the peasants’ labor. In this regard, it can be said that Taejo’s Yesan-jin royal message is Goryeo’s practical turning point from the Ancient period to the Medieval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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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기 천주교회사와 공주

        김수태(Kim, Soo-tae) 호서사학회 2015 역사와 담론 Vol.0 No.73

        이 논문에서는 조선에서 천주교회가 창립된 1784년부터 1801년에 일어난 신유박해 시기까지를 중심으로 공주 지역의 초기 천주교회사를 다루었다. 일반적으로 공주지역에서의 천주교 수용에 대해서는 1790년대를 언급해왔다. 이 경우 내포지역을 통해서 공주지역으로 천주교가 전해졌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존창이 내포지역에서 선교하기 시작한 1784년 무렵에 공주지역에서도 천주교가 수용되는 움직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공주지역출신으로 전라도 진산에 살고 있던 권상연을 통해서이다. 이미 1784년에 천주교 서적을 공부하였던 권상연은 1786년부터 1787년 사이에 윤지충의 뒤를 이어 천주교 신자가 되었던 것이다. 이는 신분적으로 평민과 천민이 중심이 되었던 내포지역과는 달리, 공주지역에서는 양반출신의 사람들이 천주교에 커다란 관심을 가졌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후 1791년에 권상연이 조상제사 거부문제로 순교하자 공주지역에서 천주교는 양반신분으로 더 이상 확산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양반신분의 사람들이 아니라 공주지역에서 이제는 평민 혹은 천민 신분의 사람들이 천주교 신자가 되는 새로운 현상이 나타났다. 공주지역의 사람들이 내포지역에 가서 천주교를 수용하거나, 내포지역 천주교 신자들이 공주지역에 적극적으로 진출한 것과 관련이 있다. 그 결과 서로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던 공주문화권과 내포문화권은 천주교를 통해서 구체적으로 만나게 되었다. 이존창이 신유박해로 말미암아 공주지역에서 처형된 사실이 그것을 상징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This paper mainly focused on early history of Catholic Church in Gongju from 1784, foundation of Catholic church in Joseon dynasty to 1801, the Catholic Persecution of 1801. Reception of Catholic in Gongju was generally refered as in the 1790s. In this case, It seemed that Catholic was introduced to Gongju through Naepo region. However, movement of reception of Catholic in Gongju was confirmed around 1784, when Lee Jon Chang started to propagate Catholic in the Naepo region. This happened through Kwon Sang Yeon origins to Gongju, who lived in Jinsan of Jeolla province. Kwon Sang Yeon, who already studied Catholic books in 1784, became Christian between 1786 to 1787 succeeding Yon Ji Chung. This proves, in Gongju, that people of noble family(Yangban) had great interest in Catholic, in contrast to the Naepo region where Christians were mainly composed of the common people and the lowest class. After martyrdom of Kwon Sang Yeon 1791 due to refusal of ancestral rites, Catholic in Gongju could not further spread in the noble class. However, a new phenomenon that not the noble class but people of the common and the lowest class becoming Christian occurred in Gongju. This was related to either people from Gongju going to the Naepo region to embrace Catholic or Christians from the Naepo region actively advance into the Gongju. As a result, Gongju cultural area and Naepo cultural area that have distinct aspects of culture have met in Catholic. This is symbolically described through the execution of Lee Jon Chang in Gongju province due to the Catholic Persecution of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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