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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선서(權先曙)의 한시와 새로운 시조 작품 3수

        구사회(Gu, Sa-Whae) 한국시조학회 2014 시조학논총 Vol.41 No.-

        이 논문은 19세기에 안동 지방에서 활동했던 권선서(權先曙)라는 문인의 새로운 시조 작품 3수를 학계에 보고하려는 의도에서 작성된 것이다. 아직 학계에 알려지지 않은 이들 3수의 시조는 권선서의 시문집인 『선서재시고(先曙齋詩稿)』에 207수의 한시 작품과 함께 수록되어 있었다. 먼저 권선서의 생애에 대해 조사를 하였지만 확인하기가 쉽지 않았다. 선서(先曙)라는 명칭도 실제 이름이 아니라 자호(自號)이다. 그는 일찌감치 세속을 벗어나 안동 사명산(四明山)에 선서재(先曙齋)라는 초당을 짓고 일사(逸士)를 자처하였다. 그는 유학자로서 도학적 성향이 강했고, 역학(曆學)과 천문에 밝았다. 특히 선기옥형(璿璣玉衡)이라는 천체를 관측하는 기계를 제작하여 천문 관측에 심혈을 쏟기도 하였다. 그의 한시는 자연 경물을 읊고 있는 것과 교유 과정에 지어진 화답시나 차운시가 대부분이다. 극히 일부이지만 19세기에 유행했던 언어유희의 특징을 드러내는 희작시도 있었다. 그 중에서 지인들에게 주목을 받았던 것은 자연물을 통해 그것에 내재되어 있는 우주 만물의 이치를 탐색하는 시들이었다. 다른 하나는 그가 세속을 벗어나 궁벽한 시골에 초당을 짓고 일사적(逸士的) 삶을 추구했던 내용을 시로 형상화한 것들이었다. 『선서재시고(先曙齋詩稿)』에 실려 있는 3수의 시조 작품은 다분히 도식적이고 한문현토체에 가까웠다. 그 중에서 2수는 충효의 유교적 이념을 읊고 있었고, 나머지 1수는 방미(?眉) 이숭연(李崇延)이라는 사람의 중뢰연(重牢宴)에서 만수무강을 축원하는 송축적인 내용이었다. 이들 한시와 시조 작품을 비교해보면, 권선서가 이들 양식을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한시를 본격적인 문예물로 인식하여 자연 경물을 읊으면서 그것의 내재적 의미를 탐색하였다. 반면에 시조는 충효사상과 같은 유교적 이념을 교훈한다든가, 연회에서 만수무강을 축원하는 송축적인용도로 사용하고 있었다. 한편, 『선서재시고(先曙齋詩稿)』는 19세기 중엽을 전후로 안동지역에서 활동했던 지방 문사들의 삶의 양태와 문화적 특성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적 가치가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주목되는 것은 시조와 한시가 서로 다른 문예 양식임에도 생활 속에 함께 창작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This thesis aimed to report three new sizo of Kwon-SeonSeo, a literary figure in Andong in the 19th century. These reported sizo are contained in 207 Chinese poem anthology of 『Seonseojaesigo』 of Kwon Seon Seo. From his early years, he lived in seclusion in Andong where he built a house called Seonseojae. Majority of his Chinese poems dealt with natural landscape and objects and his communication with them. What are attentive among them were those that sought the reason of cosmos through the natural objects. Another topic he sought was a secluded life in a remote rural area out of the secular world. There are some works that demonstrate features of word game which were popular of the time. The poem anthology contained three works of Sijo (traditional three-verse Korean poem). Two were on Confucian concept of filial duty and the other one was to wish the long life. When Chinese poems and Sijo were compared, he recognized Chinese poem as the center of literary works and sought the intrinsic meaning of natural objects through Chinese poem. To the contrary, he employed Sijo to give Confucian lessions such as filial duties and to wish long life in a fea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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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정 이정직의 논시시 연구 -<희위이십사절구(戱爲二十四絶句)>를 중심으로-

        구사회 ( Gu Sa-whae ) 국제어문학회 ( 구 국제어문학연구회 ) 2008 국제어문 Vol.43 No.-

        이 논문은 한말의 문예이론가였던 석정(石亭) 이정직(李定稷, 1841-1910)의 논시 작품에 대한 논의인데, 그 중에서 <희위이십사절구(戱爲二十四絶句)>라는 논시절구(論詩絶句)에 주목하였다. 지금까지 연구자들은 <희위이십사절구>를 간과하여 논시절구로 파악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이 논문에서 다뤄진 석정의 <희위이십사절구>는 한국 `이시논시(以詩論詩)`의 양식사에서 하나의 발굴적 성과라고 말할 수 있다. 석정의 <희위이십사절구>를 살펴보기 이전에 먼저 역대 논시절구의 양식사적 흐름에 대해 살펴보았다. 논시절구는 당나라 두보의 <희위육절(戱爲六絶)> 이래로 금나라에 이르러 시인에 대한 비평을 앞세우는 원호문(元好問, 1190-1257)의 그것과 시 자체에 대한 관점이나 법식을 위주로 하는 대복고(戴復古, 1167-1250)의 그것으로 전개된다고 보았다. 한국에서의 논시절구는 19세기 전기에 신위의 <동인논시절구(東人論詩絶句)>에서 시작되는데, 그것은 자하 신위→추금 강위→매천 황현→석정 이정직으로 이어졌다. 석정의 <희위이십사절구>는 벗이었던 매천과의 교류에서 얻어진 문예적 성과물로서 1902년도에 지어졌다. 한편, 신위와 황현은 작품론으로, 이정직은 창작론으로 방향을 달리한다. 석정은 <희위이십사절구>와 같은 논시절구를 비롯하여 70여수의 논시시를 남겼다. 석정의 논시시들은 그 대부분이 작가나 작품보다는 성정이나 시정신과 같은 본질론, 학시와 작시상의 문제와 같은 창작론으로 귀결되고 있었다. 특히 석정의 논시절구인 <희위이십사절구>는 전체적으로 시를 지어나가는 과정에서 생기는 언어나 시어, 용사나 표현의 문제 등과 같은 창작론으로 이뤄져 있었다. 논시절구에 드러난 석정의 시론은 독창적이거나 개성적인 작품보다 평이하고 담박한 풍아의 유풍과 함께 심성에서 우러나온 진실한 시작품을 옹호하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석정의 시론은 『시경』ㆍ 「풍아」로 대변되는 동양 고전의 예술 정신에 의미를 부여하여 이를 현대적으로 계승하려는 고전주의적 속성을 지니고 있었다. 문학사적 측면에서 신위나 황현의 논시절구는 역대 작가에 대한 시평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비해, 석정의 그것은 작시나 학시 과정에서 유의해야할 창작상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This paper discusses Seokjeong Lee Jeong-jik`s `nonsisi` or `sirons`i (poem-criticizing poetry). In particular, this paper focuses on < huiwi isipsa jeolgu(희위이십사절구) >, a "poem-criticizing" quatrain. Until now, researchers have overlooked the importance of the quatrain. Therefore, the discussion of Seokjeong`s < huiwi isipsa jeolgu > is the first of its kind in the field that has studied the evolution of the formats of poem-criticizing poetry. The first poem-criticizing quatrain in Korea was Shin Wi`s Donginnonsi jeolgu(<동인논시절구>), a work in the early 19th century. The tradition was sustained by Jaha Shin Wi, Gohwandang Kang Wi, Maecheon Hwang Hyeon, and Seokjeong Lee Jeong-jik. Seokjeong`s < Huiwi isipsa jeolgu >, written in 1902, was a literary output enabled by his friendship with Maecheon. The poets specialized in different fields. Shin Wi and Hwang Hyeon worked on theory of individual works whereas Lee Jeong-jik focused on theory of creative writing. Seokjeong was not interested in individual poets or their works. Most of Seokjeong`s nonsisi (poem-criticizing poetry) dealt with theory of essence on temperament and theory of creative writing on haksi (learning-oriented poetry) and jaksi (poetry writing) issues. In particular, Seokjeong`s < huiwi isipsa jeolgu > deals with issues of theory of creative writing : general issues of language and poetic language that are encountered as poems are written, citations, and expressions. In his "poem-criticizing" quatrain, Seokjeong displayed a preference for simple, unambitious, and veracious works rather than unique and individualized works. Overall, Seokjeong`s theory of poetry upheld the artistic spirit of the East`s classicaltradition and tried to sustain it in the modern context.

      • 석정 이정직 시론의 형성 과정과 문예론적 검토

        구사회 ( Gu Sa-whae ) 동국대학교 한국문학연구소 2005 한국문학연구 Vol.0 No.29

        이 논문은 한말의 시인이자 실학자였던 石亭 李定稷의 詩論에 대하여 고찰했다. 먼저 시론의 형성 과정을 먼저 살핀 다음, 그것의 내용을 검토했다. 논의된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석정은 당대까지 내려왔던 시에 관한 관점을 정리하여 여러 방식으로 비평을 하거나 의론하고 있다. 석정의 시론은 ‘性’을 위주로 문학적 관점을 구축하고 있었기 때문에 ‘情’을 중시하는 神韻論이나 性靈論에 대하여 경계의 시각을 견지하고 있었다. 자연히 그의 시론은 格調論이나 肌理論에 더욱 우호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석정 시론은 본질론과 창작론으로 대별된다. 석정 시론의 본질론은 성정론과 시경론이, 창작론은 학시론과 작시론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는 성정론에 있어서는 ‘天性’을, 시경론에서는 ‘風雅’의 정신, 창작론에서는 학식에 바탕을 두는 ‘博悟’의 경지를, 작시론에서는 ‘理法’의 원리를 각각 강조했다. 성정론과 관련하여 석정은 시속이 변해도 인간사와 관련된 天性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으며 시인은 마땅히 시세에 따라 변하지 않는 시를 지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런 경지에서 우러나온 시가 雄渾超逸이라는 높은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시경론과 관련하여 석정은 시를 고대의 시경 에 근본을 두면서 그것이 풍아에서 나왔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시를 지으면서 방자하고 날카롭거나 부박한 시풍을 버리고 고대 시경의 풍아가 지닌 진실하고 넉넉하며 순수한 시정신을 되찾자는 의미였다. 학시론과 관련하여 석정은 선천적 자질보다는 후천적인 노력의 학력을 중시하는 시론이었다. 석정은 자신이 설정한 고도의 시적 경지라고 할 수 있는 천성에서 우러나온 진실한 시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후천적인 노력의 학력에 바탕을 두는 ‘博悟’의 과정을 거쳐 ‘造化’의 경지에 들어간다고 보았다. 作詩論과 관련하여 석정은 자신이 언제나 ‘理法’을 위주로 시문을 짓고 있다고 말하였다. 석정에 의하면 시란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법의 주도면밀한 의도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그는 시작에 있어서 지나치게 이법을 염두에 두면 시가 너무 인위적이지 않을까라는 의구심에 대해서 이법이 제대로 이뤄진다면 천의무봉의 훌륭한 작품이 만들어진다고 보았다. 석정 시론은 전통적으로 자리를 잡아온 심성을 중시하는 효용론적인 관점을 계승하면서도 청 고증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석정의 시론은 역사적 격변기에 처해서 당대 현실에 대처하거나 그것을 극복하기에는 지나치게 복고적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는 20세기 초엽까지 전개되었던 한국시론사를 풍성하도록 일조했던 마지막 시기의 시론가였다고 규정하였다 The present study is to investigate poetics of Suckjeong, Lee Jeong-jik. For this, the author reviewed the process of his poetic formation and then its contents. Suckjeong organized his viewpoint on poems that were inhered, and then criticized them in many ways. Through a heated controversy with Maecheon(梅泉) Hwang-hyun(黃玹, 1855~1910), for example, he developed his arguments or criticized others' in many fields including the essential and creative part of what is poetry and how should it be written, or formality and inspiration inherited from the existing literary circles. Poetics of Suckjeong can be broadly classified into two areas such as the theory of essence and the theory of creative writing. The theory of essence includes the theory of nature and the theory of Shijing(詩經), while the theory of creative writing does learning theory through poetry and the art of verse making theory. He emphasized ‘nature’ for the theory of nature, the mind of ‘folk poetry’ for the theory of Shijing, the state of ‘great illumination’ based on learning for the theory of creative writing, and finally ‘the principals’ for the art of verse making, respectively. Suckjeong selected and adopted a few poetry among the existing ones inherited from the past and then integrated them depending on his ideology and viewpoint. He rejected criticism on the work itself but reviewed the essence of the poem, on which he developed his poetics. His poetics is based on ‘nature’ as well as writing and philosophy. There exists limits to his poetics by subsiding into only learning itself, leaving the swift reality of the late colonial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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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전환기 조선인의 세계 기행과 문명 담론

        구사회(Gu Sa-whae) 국어문학회 2016 국어문학 Vol.61 No.-

        After implementation of the open-door policy at the end of the 19th century, world travels by Koreans were not limited to China and Japan but to the Western world. This paper is a discussion on world travels by Koreans and the following discourses on the civilization during the Transition Period between Gaehwagi (Period of Enlightenment) and the period of Japanese colonialization. I, first, glanced through the records of world travels made by Koreans in that period. Started with Seoyugyeonmun (1895) by Giljun Yoo, Yeonghwan Min and his party each left a record in 1896 and 1897. Mansu Kim, the Korean Minister to France, Jongeung Lee and Hanhong Kim each left records of world travel in 1901, 1902 and 1908, respectively. Each of their records from the Transition Period displays astonishment and inquisitiveness about the modern civilization. They wanted to bring in the advanced Western civilization, institution and scientific progress to Korea to inspire enlightenment. With this new door open to the Western hemisphere, we were able to moved away from the previous notion that China was the center of the world and taking notice of world geography with expanding time and space. Another common substance in their journals was a sense of anguish they felt regarding the fallen behind realities of their home st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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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논문 : 이충무공의 선양 사업과 『튱무공행장』 소재 새로운 가사 작품 <난부가> 2편에 대하여

        구사회 ( Sa Whae Gu ),김영 ( Ryung Kim ) 퇴계학부산연구원 2014 퇴계학논총 Vol.24 No.-

        이 논문은 새로운 가사 작품인 <난부가(懶夫歌)>와 <난부가(懶婦歌)> 2편을 소개하려는 목적에서 작성되었다. 이들 작품은 우리한글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던 충무공 이순신의 전기물인 『튱무공힝장』에 필사되어 있다. 조선후기에 덕수이씨 이충무공 문중에서는 이충무공에 대한 선양 사업을 벌였다. 그것의 일환으로 이충무공에 대한 행적과 위업을 정리하여 『행록』과 『충무공가승』을 출간하였다. 그것을 바탕으로 『이충무공전서』와 같은 국가적 차원의 문헌 사업이 이뤄졌다. 이것은 한문을 이해할 수 있는 남성 식자층을 위한 사업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이충무공 후손가에서는 문중 아녀자들에게도 조상인 충무공 이순신에 대한 행적을 알리고 가문에 대한 자부심을 심어주려고 하였다. 이를 위해 충무공 이순신의 생애와 위업을 충무공행장으로 엮어서 문중 아녀자들로 하여금 읽게 하였다. 한편, 문중 아녀자들에게 충무공 이순신이라는 위대한 조상의 위업을 알리는데 그치지 않고 그들로 하여금 윤리적 규범과 바른 행실을 갖추기 위한 교육 방법을 모색하였다. 이를 위해 충무공 이순신 후손가의 어른들은 교육용으로 교훈가사 나부가류 가사 작품을 지어서 집안 아녀자들이 읽게 하였다. 이번에 소개하는 <난부가> 2편도 그런 과정에서 나온 것이다. 이들 작품을 살펴보면 어휘 형태나 표기법이 19세기 후반 이전에 필사되거나 지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발굴된 나부가류 가사 작품 4편은 모두 덕수이씨 이충무공 후손가에서 나왔는데, 모두 집안 아녀자들을 염두에 두고 지어진 것이었다. 이들 나부가류 가사 작품은 이충무공가라는 특정 문중에서 후손들의 교육을 위해 문중 내에 전승시키며 활용했던 매우 특이한 사례로 여겨진다. 그리고 이들 나부가류 가사 작품들은 조선후기 나쁜 여자들의 세태를 풍자하기보다는 반면교사로 경계하려는 교육적 문예물로 보인다. The aim of this study is to introduce two new Gasa works <Nanbuga>. These works are transcribed at 『Chungmugong Haengjang』, a biography of Chugnmugong Yi Sun-shin, which is possessed by Hangul Museum. The clan of Yi Chungmugong intended to spread out the life and works of Chungmugong Yi Sun-shin to women of the families in order to give pride for family. For this purpose, the life and works of Yi Sun-shin was edited as Chungmugong Haengjang for the read of women in the clan. Meanwhile, it was not only to spread out the magnificent achievement of Chungmugong Yi Sun-shin to women in the clan, but also to seek educational method for ethical norm and upright behavior. For this purpose, the leaders of the Chungmugong Yi Sun-shin composed Nagugaryu Gasa works for the education of women in the family. Two Gasa works of <Nanbuga> were produced for this purpose. Gasa works on Nabugaryu discovered so far were all from Deoksu Yi Clan, descendents of Yi Chungmugong and they were all for the women in the clan. Nabugaryu Gasa works are very unique cases to be inherited in a specific clan for the education of descendent. And, these Nabugaryu Gasa works are closer to educational literary works to warn the social situation of bad women in the late Joseon as a good lesson instead of simply satire of th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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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의 성기 숭배와 지증왕의 음경

        구사회(Gu Sa Whae) 서강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6 서강인문논총 Vol.0 No.46

        이 논문은 신라시대의 성기 숭배에 대해 살펴보고, 이어서 『삼국유사』 「기이」편의 <지철로왕>조에 수록된 지증왕의 관련 설화를 분석하였다. 한국인들은 문명 이전부터 생식기를 생산과 풍요를 가져다주는 생명의 원천으로 인식해온 것을 유적이나 유물, 또는 문헌 자료를 통해 확인하였다. 한반도에는 지금도 청동기시대 울산 반구대 암각화나 농경의기 등에 성기신앙의 유적과 유물이 남아 있다. 문헌 자료에서도 고구려의 국중대회에서 남근을 모셨다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신라의 성기신앙은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고 그것의 연장선상에서 전개되었다고 판단된다. 삼국시대에 신라인의 성기신앙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고분에서 나온 교합하는 토우나 안압지에서 나온 목제 남근과 같은 유물을 통해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고 본다. 문헌 자료에서도 신라인의 성기신앙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고 그것이 신라사회에서 얼마나 깊이 자리를 잡고 있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본고에서 필자는 『삼국유사』「기이」편의 <수로부인>조에 수록된 향가 작품인 <헌화가>야말로 성기신앙에서 비롯된 노래인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리고 『화랑세기』에 나오는 법흥과 옥진의 교신상에서부터 ‘색공’이나 ‘마복자’ 제도를 인간의 몸과 성을 중시하는 신라인의 문화적 가치체계에서 비롯된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것의 이면에는 신라인의 성숭배와 관련된 성기신앙이 자리를 잡고서 직간접적으로 작동된 것으로 보았다. 『삼국유사』「기이」편의 <지철로왕>조에 수록된 지증왕의 성기 관련 설화도 신라인들 사이에서 내려온 성기 숭배가 내재되어 있다고 보았다. 특히, 한 자 다섯 치나 되는 왕의 옥경은 왕의 비범함과 권위를 상징하며, 여기에는 신라인들이 생각하고 받아들인 몸에 대한 보편적 인식을 담고 있다고 짐작된다. 왕비로 간택된 처녀의 큰 똥도성적 매개물로 파악하였다. 여기 지증왕의 성기 관련설화는 당시 신라사회에 자리를 잡고 있던 성기 숭배라는 문화적 코드가 내재되어 있던 것으로 파악하였다. The study examined sexual organ worship of Silla followed by the analysis on the legend on King Jijeung recorded on 〈Jicheolrowang〉, 『Samgukyusa』· 「Giyi」. Koreans have recognized sexual organ as the symbol of production and fertile and the source of life before the period of civilization. Sexual organ worship of Silla did not appear suddenly, but was connected with such idea. Clay dolls from ancient tomb of Silla showing sexual intercourse and wooden penis give an idea of sexual organ worship of Silla. Literature resources also allude sexual organ worship of Silla, which demonstrates how deeply sexual organ worship was rooted in the Silla society. This study argues that 〈Heonhwaga〉 a Hyangga work in 〈Surobuin〉 at 『Samgukyusa』· 「Giyi」is the song derived from sexual organ worship. And, Gyosinsang of Beopheung and Okjin in 『Hwarangsegi』, "Saekgong" and "Mabokja" system were originated from cultural value system of Silla that weighed high on human body and sexual organ. At the background, sexual organ worship of Silla lied behind it. A legend on sexual organ of King Jijeung recorded in 〈Jicheolrowang〉 in 『Samgukyusa』· 「Giyi」 also shows inherited sexual organ worship of Silla. In particular, Penise of King which was 1 Ja and 5 Chis symbolized outstanding dignity of King, which seems to contain universal awareness of Silla people on body. Huge dung of queen candidate was figured out as a sexual medium. Here, the legend on sexual organ of King Jijeung demonstrates cultural code of sexual organ worship at Silla of the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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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고시조 작품의 발굴과 검토

        구사회(Gu, Sa-Whae) 한국시조학회 2012 시조학논총 Vol.36 No.-

        이 논문은 필자가 근래에 발굴한 새로운 시조 자료에 대한 논의이다. 자료에는 고시조 53수 이외에도 12잡가인 〈평양가〉와 〈선유가〉가 두루마리 한지에 함께 실려 있었다. 먼저 이 자료는 ‘ㅅ’계 합용병서, 음절말자음, ‘ㅣ’모음 역행동화 등의 사례를 통해 19세기 후기의 표기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시조 작자가 확인되는 것은 전체 53수에서 19수였다. 작자와 관련하여 자료에서 눈에 띄는 것은 흥선대원군의 시조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자료의 필사 시기는 빨라도 19세기 이후인데, 필자의 생각으로는 그것이 19세기 말엽이나 20세기 초기로 여겨진다. 다음으로 시조 작품을 분석해보았다. 자료에 실려 있는 시조 작품 중에서 3수는 기존에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작품이었다. 그리고 평시조에서 사설시조로 확장된 작품 1수, 잡가인 〈선소리〉의 ‘잦은산타령’ 일부가 시조로 바뀐 작품, 시조가 판소리 단가 〈운담풍경(雲淡風輕)〉의 일부로 양식 변화를 가져온 사례가 있었다. 이들 중에서 텍스트가 확장된 사설시조나 잡가에서 시조로의 양식 변화를 가져온 1수는 새로운 시조 작품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번 자료에서 발굴한 새로운 시조 작품은 모두 5수이다. 한편, 이 자료에는 이본 가치가 있는 작품도 8수가 있었다. 이 자료는 새로 발굴된 시조 작품 이외에도 시조가 잡가나 민요로, 또는 시조가 판소리 단가로 양식의 변화를 가져오는 사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시조는 다른 노래 양식과 교섭하며 다양성을 갖지만, 한편으로 가창 기반을 상실하는 처지로 내몰렸을 가능성도 있다. This paper is a discussion about recently discovered sijo materials. The sijo materials contain not only 53 sijos but also 12 vulgar songs, 〈Pyeongyangga〉 and 〈Seonyuga〉 on a hanji scroll. First, in these materials, the orthography of the latter part of the 19th century was used. Sijo writers could be identified in 19 out of 53 sijos in total. These materials seem to have been written at the end of the 19th century of at the beginning of the 20th century. Next, the sijo works were analyzed. Among the sijo works contained in the materials, three were new works that had not been known earlier. There were cases where part of a vulgar song and part of a pansori short song were changed into plain sijo styles. Those that brought about changes in styles as with these two works should be naturally seen as new sijo works. Furthermore, the materials included one work where the text was expended from a plain sijo to a long sijo. And 8works that had values as rare works where part of the sijo was changed, phrase expressions were changed or replaced.

      • KCI우수등재

        충무공 이순신가의 문중 교육과 <나부가>류 가사 작품들

        구사회(Gu, Sa-whae) 국어국문학회 2015 국어국문학 Vol.- No.171

        지금까지 이충무공 후손가에서 문중 아녀자들의 교육을 위해 나부가류 가사 작품을 교육 매체로 활용했던 내력을 살펴보았다. 조선후기 덕수이씨 이충무공 후손가에서는 국가 존망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충무공 이순신의 위업을 기리고 선양하려는 목적에서 이순신의 「행록」과 『충무공가승』, 그리고 『이충무공전서』 등을 편찬하였다. 이들 문헌은 한문으로 지어졌고 양반 남성들이 주요 독자층이었다. 이 과정에서 이충무공 후손들은 눈을 문중 내부로 돌려 문중 아녀자들에게도 충무공의 위업을 인식시키고 가르치는 방법도 모색하게 된다. 이를 위해 한문을 모르는 집안 아녀자들을 위해 한글로 『충무공행장』을 저술하여 보급하여 가문에 대한 자부심을 일깨웠다. 그리고 <나부가>와 <직즁녹>, 그리고 <난부가>와 같은 가사 작품을 활용하여 문중 아녀자들에게 바른 행실과 부덕을 가르쳤다. 한 마디로 충무공 행장류나 나부가류 가사는 가문의 존속과 유지를 위한 교육적 목적에서 작성되었다고 판단된다. 결과적으로 덕수이씨 이충무공가는 근대시기에 이르러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애국자들이 족출하였다. 현재 전해지는 <나부가류>류 가사 작품은 모두 6편이다. 이 논문에서는 이들 <나부가>류 가사 작품의 작자나 필사자들이 모두 덕수이씨 이충무공의 후손들이었다는 점을 주목하였다. <직즁녹>의 작자인 이도희가 그렇고, <나부가>를 전사했던 이준영도 모두 이충무공의 후손이었다. 그리고 우리한글박물관에서 소장했던 『충무공행장』에 부기된 <난부가> 2편의 작자나 필사자도 이충무공의 후손일 것으로 추정하였다. 이들 이충무공 문중의 인사들이 나부가류 가사 작품을 창작한 의도는 문중 내의 아녀자들이나 자제들에 대한 교육 매체로 활용하려는 목적에서 지은 것으로 보았다. 충무공행장류는 자신들의 조상인 충무공 이순신에 대한 생애와 삶을 통해 문중내의 아녀자들에게 조상과 가문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를 심어주려는 의도에서 지어졌다. 그리고 <나부가>류 가사 작품은 그것에서 진일보하여 문중내의 여성들로 하여금 언행을 조심하고 부덕을 권려하려는 교훈서로 지어졌다는 점이다. 이들 작품들은 모두 덕수이씨 이충무공 후손가에서 지어졌고 문중 내부에서 전승되며 향유되었다. 지금까지 특정 가사 작품이 당색에 따라 전승된 사례는 있었지만, 이번처럼 <나부가>류 가사 작품이 특정 문중을 중심으로 전승된 사례가 보고된 경우는 거의 없었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사실은 이충무공 후손가에서 집안 아녀자들과 자손들의 교육을 위해 이들 나부가류 가사 작품들을 활용하였지만 작품마다 서술상의 차이를 보인다는 점이다. <난부가(懶夫歌)>는 과거 준비에, <난부가(懶婦歌)>는 여성의 소임에, <직즁녹>은 부인의 효행에, <나부가>는 부인의 나태함 경계에 각각의 서술 초점을 맞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이들 <나부가>류 가사 작품은 문학사적으로 서로 동일한 문예 양식을 공유하면서 작품 간의 내용을 답습에서부터 바꿔서 새로 쓰거나 개작하는 등과 같은 상호텍스트성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었다.

      • KCI등재

        <헌화가>의 `자포암호(紫布岩乎)`와 성기신앙

        구사회 ( Gu Sa-whae ) 국제어문학회 2006 국제어문 Vol.38 No.-

        지금까지 <헌화가>에 대한 여러 해독과 많은 문예 분석들이 있었지만 아직 제대로 파악되지 못한 사안들이 남아있다. 필자는 그것이 `자포암호(紫布岩乎)`의 해석에 있다고 보았다. `자포암호`는 노랫말에 들어있는 한 어휘에 지나지 않지만 전체적으로 가요의 성격을 규정할 수 있는 결정적 단서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고에서는 `자포암호`를 남근과 관련된 `자지바위(좆바위)`로 해석하면서 <헌화가>에 대한 기존의 논의를 뛰어넘는 가요적 함의를 읽어낼 수 있었다. 필자는 <헌화가>를 남자 성기와 모양이 유사한 남근석에서 모종의 무속 의례를 벌이며 불렀던 노래로 보았다. 말하자면 <헌화가>는 남근석인 자지바위가 표상하는 생식과 생명력을 통해서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제의, 특히 아들을 기원하는 제의에서 불렀던 주술가요이다. 노인이 암소를 끌고 나타난 것도 천길 바위 아래에서 제의를 올리는 과정 중에 자지바위로 상징되는 양물과 암소로 상징되는 여성성의 모의적인 남녀 결합 행위로 파악된다. 그리고 천길 바위 위에 핀 꽃(척촉화)은 이른 바, 무속에서 접신의 매개체로서 생명의 잉태를 가져다주는 주술적 상관물에 다름이 아니다. `수로부인조`에는 그 어디에도 수로부인이 아들을 낳으려는 소망을 직접적으로 표출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이와 같은 맥락에서 기술물에 담긴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에는 남근석을 대상으로 다산과 풍요를 위한 제의, 특히 득남을 기원하는 성기신앙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필자는 <헌화가>가 수로부인조에 실린 <해가>와 함께 가요의 성격이 서로 비슷하거나 상통하는 측면이 많다는 것도 확인하였다. <헌화가>는 <해가>나 <구지가>와 더불어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주술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이들 가요에는 모두 양물로 상징되는 남성성과 그것을 받아들여 수태할 수 있는 여성성의 모의적인 결합 행위라는 성기신앙의 상징 체계가 내재되어 있다. 다만, <헌화가>는 무속 제의의 과정에서 수로를 위해 축원하던 샤먼 노인이 불렀던 즉흥적인 주술 노래인 데 반해서, <해가>와 <구지가>는 둘 다 그 이전부터 구전되던 고정된 주술가요였다는 특징이 있다. < Heonhwaga (Song of Presenting a Flower) > is an ancient poem that has already generated myriads of interpretations and literary analyses. Much, however, remains in mystery. This study purports to shed light on the song by providing a fresh interpretation of japoamho, the first four characters of the song. This study argues that < Heonhwaga > is a song used shamanistic rituals held at phallic stones. In other words, < Heonhwaga > is a sorcerous song used in rituals that wish to produce abundance and beget male offspring through the reproductive life force symbolized by phallic stones. In the song, an old man appears with a cow. A ritual takes place under a huge rock. The ritual symbolizes union of masculinity and femininity represented by phallic stone and cow, respectively. And the azalea on to stone is a shamanistic medium that enables conception of life. In `Surobuinjo` of 『Samgukyusa (Memorabilia of the Three Kingdoms)』, LadySuro does not explicitly express her yearning to beget a boy. An in-depth analysis, however, reveals that the song is centered on the phallic belief that supports the hope for fertility and abundance. In particular, begetting a son is the main goal of the ritualistic song. Along with < Haega > and < Gujiga >, < Heonhwaga > can be classified as a ritualistic song to achieve fertility and abundance. All of these ancient songs are inherently based on a system of symbols that portrays the union of the maleness represented by the male organ and the femaleness represented by the female organ that leads to conce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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