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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CI등재

        후기 비트겐슈타인과 칸트

        김영건 서강대학교 철학연구소 2010 철학논집 Vol.22 No.-

        나는 후기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칸트주의적 해석, 선협주의적 해석을 비판하는 윌리엄스의 주장을 다음처럼 비판한다. (1) 그녀가 보여준 것은 기껏해야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이 칸트의 철학이 아니라는 자명한 사실 이외에 없다. (2) 윌리엄스는 경험독립적 한계를 부정하는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으로부터 한계가 없다는 것을 추론하는 실책을 범하고 있다. (3) 윌리엄스는 선험성과 내재성을 대립시킴으로써 선험성을 초월성으로 이해하는 실책을 범하고 있다. (4) 윌리엄스는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를 경험적 서술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개념적이며 문법적 탐구이다. (5) 윌리엄스는 선제조건을 오직 인식적 의미로만 이해한다. 다라서 그녀는 그것의 논리적, 개념적 의미를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 (6) 오히려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철학을 그의 전기 철학이 보여주었던 선험적 역설을 해소하는 선험주의적 문맥 속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7)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후기 비트겐슈타인이 보여주는 선험논증의 고유성을 파악할 수 있다. 소여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은 이성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문제라는 것이다.

      • KCI등재

        리어(J. Lear)의 비트겐슈타인

        김영건 서강대학교 철학연구소 2013 철학논집 Vol.33 No.-

        후기 비트겐슈타인을 선험적 시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에 대한 비판은 선험적 관념론에 대한 오해에 근거하고 있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을 선험적 시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근거는 개념적, 문법적 선제성과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메타철학 때문이다. 리어는 후기 비트겐슈타인을 선험적 관념론의 비트겐슈타인적 형태로, 혹은 선험적 인간학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리어의 비트겐슈타인은 선험적 관념론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개념적, 문법적 선제성과 감성적 제약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지 않다.

      • KCI등재

        해창(海窓) 송기식(宋基植)의 사상과 교육관 — 해창집과 유교유신론을 중심으로 —

        김영건 동양고전학회 2022 東洋古典硏究 Vol.- No.86

        Born in Andong, Kyŏngsangbuk-do Province, Song Ki-Sik 宋基植 is both an independence activist who resisted against Japan in Japanese colonial period and a Confucian reformist who corrected the evils of Confucianism and accepted various Western studies and ideas. He protected the orthodox and repelled the heterodox 衛正斥邪 under the influence of Chŏng Ku-hyŏn 鄭九鉉, and Kim To-hwa 金道和, Kim Hŭng-rak 金興洛, and Yi Man-do 李晩燾 who were his mentors when Korea implemented isolation policies, but after Japan-Korea Treaty of 1876, he was converted into moderate reformists positively accepting Western ideas and civilizations, predicated on Confucianism under the influence of Sŏkju 石洲 Yi Sang-ryong 李相龍 since he did realize the limitations of reality. However, rather than comprehending Western culture and ideas from completely new perspectives, he interpreted them based on Confucianism, and even applied the ideas of Confucianism to the scientific field. These perspectives also had effects on his educational activities. In 1909, under Yi Sang-ryong's orders, he built Bongyang Sŏsuk 鳳陽書塾 and devoted himself to educational activities. In his educational activities, he placed more importance on studying Confucianism because he believed that Confucianism had the principle to unify the world's religions by encompassing all religions, philosophies, and scientific ideas. In other words, he prioritized religious education over academic education such as science. Furthermore, his philosophy of education did not stop in the ideological stage. Criticizing the current education system, he translated the scriptures into Korean for the popularization of education, and argued that not only men but women have the right to receive education. In addition, while prioritizing Confucianism, he encouraged the public to learn Western studies and ideas. Although it is no exaggeration to say that Song Ki-Sik devoted his entire life to educational work, he did not achieve many practical results in education. This seems to be due to the fact that it was not easy for those who clung to the existing social order to accept his Confucian reform and equality theories. As such, his ideas and views of education were not accepted by people at the time, but it is undeniable that he had more progressive ideas than any other intellectual of the time did 송기식은 경상북도 안동 출신으로, 의병활동과 교육활동을 통해 국권피탈기 당시 항일운동을 한 독립운동가이자 기존 유교의 폐단을 개혁하고 다양한 서양 학문과 사상을 받아들인 유교개혁론자이다. 그는 처음 우리나라가 쇄국 정책을 펼쳤을 때 위정척사파로 활동하였다가 개국 이후에는 유교를 바탕으로 서양 사상과 문물을 적극 수용하는 온건개화파로 전향하였다. 청년기 때 위정척사로 활동한 것은 당시 외국 문물이 좋지 않게 밀려오던 상황과 조부(祖父) 정구현(鄭九鉉) 및 그의 스승 김도화(金道和), 김흥락(金興洛), 이만도(李晩燾)의 영향 때문이었다. 이후 현실의 한계를 깨닫고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의 영향을 받아 서양의 문물과 사상을 수용하였다. 하지만 완전히 새로운 관점에서 서양의 문물과 사상을 바라보았기보다는 유학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해석하였으며, 심지어 과학 분야에까지 유학의 사상을 접목시켰다. 이러한 유학에 입각한 관점은 그의 교육활동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는 1909년 이상룡의 분부에 따라 봉양서숙을 지어 교육을 시작할 때부터 일본으로부터 해방 될 때까지 교육활동에 전념하였다. 그는 교육활동에서 어떤 학문보다 유학을 중시하였는데, 이는 유학이 동서고금의 종교⋅철학⋅과학의 사상을 모두 포괄하여 세계의 종교를 통일할 원리를 가지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신념을 바탕으로 도덕성 함양을 근본으로 삼고 학문적 지식을 지엽으로 보았으며, 도덕성 함양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지식만을 쌓는 것을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는 지식을 가르치는 교육 자체를 반대한 것이 아니라 과학과 같은 학문적 교육보다 종교 교육을 우선시한 것이다. 나아가 그의 교육철학은 관념적인 단계에 머물지 않았다. 현재의 교육 제도를 비판하며 교육의 대중화를 위해 경전들을 국문으로 번역하고,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 또한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음을 주장하였다. 그는 성별과 지위와 무관하게 대중을 계몽하고자 노력하였으며 그를 위하여 한문 경전을 국문으로 번역하는 등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였다. 또 유학 교육을 우선시하면서도 서양 학문과 사상의 장점을 인정하며 배우기를 권장하였다. 그는 일평생 교육 사업에 전념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나 교육에 관한 실질적인 성과를 크게 남기지는 못했다. 이는 기존 사회 질서에 입각한 사고를 유지하던 유학자들에게는 그의 유교개혁론과 평등 이론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그의 사상과 교육관은 당시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하였지만, 현대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오히려 그가 당대 지식인들보다도 진보적이고 진취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 SCOPUSKCI등재
      • 선험적 심리학과 선험적 언어학

        김영건 서강대학교 철학연구소 2007 철학논집 Vol.14 No.-

        키춰는 분석적 칸트주의를 공박하면서 사유 주체에 대한 칸트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친근성을 부정한다. 키춰는 칸트의 선험적 심리학을 자연주의, 인지주의로 이해하고 있다. 나는 키춰의 주장을 다음처럼 비판한다. (i) 칸트의 사유주체는 현상적 자아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언어와 개념의 체계이다. (ii) 키춰는 칸트와 비트겐슈타인의 논리 개념이 다르다고 한다. 그러나 칸트나 비트겐슈타인의 논리는 선험 논리이다. (iii) 셀라스는 선험논리의 공간을 존재당위의 규칙으로 표현한다. 나아가 셀라스는 사유는 언어의 유비적 확장이라고 주장한다. (iv) 언어와 개념이 지닌 규범성은 인과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또한 비표상적 감각 경험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사유주체에 대해 칸트와 비트겐슈타인은 친근성을 보여주고 있다.

      • 당뇨병 돋보기 IV - 공복혈당 VS 식후혈당

        김영건,Kim, Yeong-Geon 사단법인 한국당뇨협회 2007 당뇨 Vol.212 No.-

        당뇨병은 발병 후 거의 완치가 불가능한 질환으로 당뇨병의 치료는 고혈당에 의한 증상을 개선, 여러 가지 급성 및 만성합병증을 예방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당뇨병 조절 및 합병증 연구 등에서 엄격한 혈당조절을 통해 당뇨병의 만성합병증이 예방되거나 이미 발생된 합병증도 진행이 지연됨이 알려졌으며, 이에 따라 지속적인 혈당조절의 필요성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지속적인 혈당조절을 위한 당뇨병관리의 기준이 되는 지표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대표적인 것으로 공복혈당, 식전혈당. 식후 2시간 혈당, 당화혈색소 등이 있다. 환자들은 어떤 검사가 나의 혈당변화를 가장 정확히 나타내 주는지 궁금할 때가 있다. 또한 혈당검사를 하루 중 언제 측정해야 가장 정확하고, 얼마나 측정해야 하는지도 궁금하다. 여기서는 혈당조절의 지표가 되고 합병증 예방의 가장 기초가 되는 검사의 종류와 검사 시기, 빈도를 알아보고자 한다.

      • KCI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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