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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佔畢齋 金宗直에 대한 退溪 李滉의 評價

        鄭錫胎(Jung Suk-Tae) 동양한문학회(구 부산한문학회) 2010 동양한문학연구 Vol.31 No.-

        “佔畢齋金宗直은 文章을 한 사람이지 道學을 한 사람이 아니다.”라는 退溪李滉의 말은 그가 만년에 자신의 기존 생각을 바꾸어서 점필재 김종직을 평가한 말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 말은 점필재 김종직을 學者가 아닌 文人으로 수정해서 평가한 말로 인식되어, 퇴계 이황 사후에 전개된 이른바 道學의 時代에 점필재 김종직을 우리나라 道學의 歷史에서 그 위상을 대폭 축소시키는 주요한 근거로 활용되었다. 또 지금도 변함없이 점필재 김종직이라는 인물을 평가하는 주요한 근거로 활용되고 있다. 그러나 관련자료를 실증적으로 검토해보면, 퇴계 이황의 이 말은 점필재 김종직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하려는 일부 사람들이 퇴계 이황이 일정하게 제한된 상황속에서 상대, 곧 주로 제자들의 일시적인 물음에 답한 말을 그 자신들의 입장에서 적절하게 潤色한 것, 그렇게 해서 퇴계 이황을 의빙한 것이지, 퇴계이황의 本意와는 상관없는 말임을 알 수 있다. 도리어 퇴계 이황은 일생 동안 변함없이 점필재 김종직을 존경하면서 그가 우리나라 도학의 역사에서 큰 공헌을 한 인물로 높이 평가하는 한편, 그가 주로 거주했던 밀양에 그의 서원을 세우는 데 몹시 적극적이었음을 확인해볼 수 있다. 퇴계 이황의 점필재 김종직에 대한 평가의 晩年定論, 다시 말하면 점필재 김종직에 대한 퇴계 이황의 본의는 그가 1550년 경술년 50세와 1551년 신해년 51세에 처음 짓고 난 다음 만년까지 계속해서 개고했던 閒居次趙士敬具景瑞金舜擧權景受諸人唱酬韻十四首제12수와 和陶集飮酒二十首·其十六두 수의 시에 잘 드러나 있다. “Jeompiljae Kim Jong-Jik was not one who studied neo-Confucianism but one who practiced literature." This is a widely known new perspective on Kim by Toegye Yi Hwang during his later years, which is just opposite to what he had in mind in his earlier years. Interpreted as Toegye's assessment of Kim Jong-Jik as a literary man, not as a scholar, his comment served as a critical justification for substantially diminishing Kim's presence in the history of neo-Confucianism that bloomed after the death of Toegye Yi Hwang during the Chosun Dynasty. However, an empirical study on related documents points otherwise. Yi Hwang's remarks were made in a specifically confined situation such as his disciples questioning him about Kim Jong-Jik whom they were inclined to underestimate. Simply put, parties standing against Kim Jong-Jik made their own interpretations of what Yi Hwang said, but these were not exactly the inner thoughts of Yi Hwang about Kim Jong-Jik. Contrary to the perception, Toegye Yi Hwang had deep respect for Jeompiljae Kim Jong-Jik throughout his life and ppreciated him for being the big man behind the history of neo-Confucianism during the Chosun Dynasty. Related literatures also indicate how ardent he was about building a memorial hall for him in Milyang where Kim Jong-Jik resided most of his life.

      • KCI우수등재

        프랑스에서 표현의 자유에 관한 연구 - 표현의 자유 제한을 중심으로 -

        강명원(Kang, Myoung Won) 한국공법학회 2021 공법연구 Vol.49 No.3

        표현의 자유는 개인 인격 실현의 기초이자, 민주주의 질서를 구성하는 핵심적 요소로서 정치적 기본권으로서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이러한 점에서 표현의 자유를 ‘우월적 기본권’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그 제한에 대해서는 보다 엄격한 요건이 적용된다. 이러한 본질을 속성으로 하는 표현의 자유는 서구세계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으며, 프랑스에서 표현의 자유는 1789년에 발생한 프랑스 대혁명과 깊은 연관이 있다. 왜냐하면, 프랑스는 1789년 8월 26일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 제11조에서 생각과 의견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표현의 자유를 규정하였고, 이후 프랑스에서 표현의 자유는 자연권으로서의 권리와 국가가 정한 권리로서의 성격이 혼합된 권리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즉, 표현의 자유란,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다만, 필요적 제한은 사회에 해로운 행위만을 금지할 수 있도록 한정된 것이다. 이는 표현의 자유 제한에 관한 프랑스 법률 및 판례 기조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구체적으로 표현의 자유 남용을 제외하고 자유롭게 말하고, 쓰고, 인쇄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으며, 개인의 존중 무시, 미성년자 미보호, 언론을 통한 모욕 및 명예훼손 그리고 사생활 침해, 인종차별 및 반유대주의 등을 범죄로 규정하여 표현의 자유 행사 남용만을 제한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프랑스에서의 표현의 자유는 역사적 기원 및 인식, 법률과 판례에서 볼 수 있듯이 표현의 자유 그 자체를 제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표현의 자유 행사 남용만을 제한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만, 프랑스는 종교와 관련된 표현의 자유 행사에 있어서 약간의 다른 태도를 보이고 있는데, 이는 프랑스 대다수 국민의 종교가 카톨릭이라는 연유에서 주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 KCI등재

        退溪의 拾遺詩

        鄭錫胎 영남퇴계학연구원 2008 퇴계학논집 Vol.1 No.-

        이 글은 退溪의 拾遺詩48제 69수(이 글 맨 끝의 「題武夷九曲 圖次櫂歌韻」 1제 10수는 제외함)를 모아서 엮은 것이다. 저작 연 월이 밝혀지는 작품들부터 순서대로 일련번호를 붙여서 먼저 엮 은 다음, 그 뒤에 저작 연대 미상인 작품들을 소재 문헌 등을 기 준으로 분류해서 이어 붙였다. 수록한 작품들은 『退溪集』 草本, 『韓國文集叢刊』과 『退溪學資料叢書』 등에 수록된 退溪와 유관한 인물들의 문집과 연보, 退溪관련 자료, 서화 관련 도록과 읍지 등 문헌 자료와 누정의 시판 등을 조사해서 찾아내었고, 그런 다 음 그 하나하나에 대한 습유 여부와 저작 진위 여부를 확인하는 과정을 거쳤다. 저작 연월이 밝혀지는 작품들은 대부분 편자의 『退溪先生年表月日條錄』 1∼4(퇴계학연구원, 2001∼2006)를 통 해 이미 소개한 적이 있지만, 나머지 저작 연대 미상인 작품들 은 이번에 처음 소개하는 것이다. 이 글을 엮은 방식은 다음과 같다. 1. 각 작품은 제목을 먼저 들고, 그 옆에 저작 연월과 저작 장소, 그리고 연작시의 경우는 작품 편수를 밝혔다. 2. 작품 원문은 연작시 경우만 매 작품마다 행을 달리해서 기록 하고, 한 편일 경우에는 그대로 이어서 기록하였다. 3. 작품 원문은 각 구가 나누어지는 곳에 한 칸씩만 띄어 놓았 고, 현대식 부호를 사용한 별도의 표점은 하지 않았다. 4. 각 작품에는 자료 관련 사항, 연월 고증 내용, 편집 관련 사항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해설을 붙였다. 이 글에 수록한 退溪의 拾遺詩48제 69수는 현전하는 退溪詩 2,300여수(이 글에 수록한 拾遺詩를 포함함. 하동)를 두고 본다 면, 실상 그리 많은 작품을 수집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특히 退溪詩의 경우 『退溪集』 편집 당시만 해도 4,000수에 이를 것으 로 추정되는 2,000여제가 수집되었다가, 그 중 2,243수만 문집에 실리고 나머지는 유실되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따라서 拾遺詩 는 이 글에서 찾아 수록한 48제 69수 외에도 앞으로 작품이 더 발견될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그러한 작품들은 평상적으로 조사 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곳에 존재할 가능성이 크다. 가령 개 인 소장 유묵 등의 형태로 말이다. 이번에 자료를 소개하는 것을 계기로, 詩뿐만 아니라 退溪의 다른 저작 관련 자료를 수집하는 데 주변의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으면 한다. 이것은 편자뿐만 아니라, 편자가 작업자로 참여하고 있는 퇴계학연구원 정본팀 구

      • 자료의 집성과 정리 작업의 필요성 - 퇴계 이황의 경우를 중심으로

        석태 동양한문학회 2012 동양한문학회 학술발표대회 Vol.2012 No.-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에 대한 본격적인, 다시 말하면 현대적인 연구는 그의 문집과 기타 자료를 모은 퇴계전서(退溪全書)』가 영인 출간된 1958년을 기준으로 한다면 지금까지 60여년이 지났다. 그간 단독 저서를 포함해서 퇴계 이황 관련 많은 논문들이 나와있다. 특히 한국철학사에 대한 연구가 오랜 기간 동안 퇴계 이황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면서 철학 분야에서 연구 성과가 집중적으로 나오다가, 1980년대 이후부터는 한시와 문학론 등 문학 분야에서도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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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양 읍성경관 제영과 십이경의 전개 : 월연대십이경과 금시당십이경을 중심으로

        석태(Jung, Suk-tae) 동양한문학회(구 부산한문학회) 2021 동양한문학연구 Vol.59 No.-

        서울 한강에서 출발한 십이경은 서울이 아닌, 서울 한강이 아닌 밀양의 응천강에서 월연 이태의 월연대십이경에서 금시당 이광진의 금시당십이경을 거치면서 활짝 꽃피운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응천강의 제일 승지 두 곳에 이미 영남루와 월연정이 위치한 그 사이의 좁은 공간에다 금시당을 절묘하게 앉히고, 영남루와 월연정과는 또 다른 독자적인 경관을 열어낸 금시당 이광진의 높은 안목을 통해, 밀양에 터 잡은 여주이씨 일문이 임진왜란 이전까지 향유하던 세련된 문화수준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된다. 서울 한강에서 출발한 십이경은 조선전기 밀양의 응천강에서 이태의 월연대십이경과 이광진의 금시당십이경을 낳고, 조선후기로 가서는 밀양 전역으로 퍼져서 밀양의 낙동강에서는 낙강십이경[남수정십이경] 등을 낳으면서 화려하게 꽃피웠다고 이야기해볼 수 있을 것이다. 조선 최고의 누정문화가 서울, 서울의 한강이 아닌, 서울에서 천 리 멀리 떨어진 밀양, 밀양의 응천강과 낙동강에서 화려하게 꽃피웠다고 이야기해볼 수 있을 것이다. 조선조 밀양 여주이씨 일문의 주도로 한양 도성의 최고 문화수준에 육박해갔을 밀양의 옛 모습을, 아름다웠을 그 옛 모습을 다시 한 번 그려보게 된다. From the Han River in Seoul, the twelve scenery seem to have blossomed not in Seoul but in the Eungcheon River in Miryang, through Woryeon Lee Tae’s the Woryeondae and Geumsidang Lee Kwang Jin’s Geumsidang the twelve scenery. In particular, Geumsidang was placed in the narrow space between Yeongnamnu and Wolyeonjeong in the two most scenic spots of the Eungcheon River. Through Lee Gwang-jin s high-profile view of Geumsi-dang, which opened up another independent view from Yeongnamnu and Wolyeonjeong, Yeo Ju-yi, who founded Miryang, thinks again about the sophisticate. during the early Joseon Dynasty in the Eungcheon River in Miryang twelve scenery gives birth to Lee Tae’s the Woryeondae and Lee Kwang Jin’s Geumsidang the twelve scenery. during the lately Joseon Dynasty, It spread throughout Miryang, giving birth to Nakgang Sibyeong (Namjeong Sipgyeong) in the Nakdonggang River in Miryang. It can be said that they bloomed splendidly. It can be said that Joseon s best pavilion culture blossomed in the Eungcheon River and Nakdong River in Miryang, a thousand miles away from Seoul, not the Han River in Seoul. Under the Yeo Joo-yi of Miryang, the founder of the Joseon Dynasty, once again depicts the old image of Miryang, which would have reached the highest cultural level of Hanyang City W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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