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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춤무덤(舞踊塚)의 사신도와 조우관(鳥羽冠)에 대한 재검토

        서길수(So, Gil-su) 한국역사민속학회 2014 역사민속학 Vol.0 No.46

        이 논문은 의정(義淨)이 지은 『대당서역구법고승전(大唐西域求法高僧傳)』에 나오는 아리야바르마(阿難耶跋摩)에 관한 자료에서 나온 다음 두 가지 새로운 정보를 분석한 것이다. 첫째, 그 나라는 닭신(鷄神)을 공경하고 높이 우러러 보았다. 둘째, 그렇기 때문에 (닭의) 깃털을 머리에 꽂아 겉을 꾸몄다. 이 논문은 이와 같은 두 가지 문제에 대한 검토를 통해서 고구리(高句麗)의 닭신(鷄神) 숭배사상을 조명하고 이어서 닭신 숭배사상의 대표적인 상징인 이른바 새 깃털 관(조우관, 鳥羽冠)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한 결과 몇 가지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다. 1. 이 논문의 주제가 된 춤무덤(舞踊塚)의 사신도에 대한 현재까지의 연구를 검토한 결과 현재 학계와 일반 미디어에서 춤무덤(舞踊塚)에 그려진 수탉 두 마리는 주작이라는 설이 일반상식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수탉 두 마리는 다른 사신도에 나오는 주작과 모습이 완전히 다르고, 대칭되는 반대 자리에 현무가 아닌 태껸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어 전통적인 사신도의 구도와 완전히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두 마리 수탉은 주작이 아니고 닭신(鷄神)이라는 것을 밝혔다. 2. 『위서(魏書)』에서 『신당서』까지 여러 사서에서 고구리(高句麗)=고리(高麗) 사람들은 ‘소골(蘇骨)’이라는 절풍(折風)을 쓰고 다닌다고 했다. 그런데 『대당서역구법고승전(大唐西域求法高僧傳)』에서 ‘고리(高麗)에서는 닭신(鷄神)을 공경(敬)하고 높이 우러러보기 때문에 (닭의) 깃털을 머리에 꽂아 겉을 꾸민다’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사서에서 이야기 하는 새깃털관(鳥羽冠)이란 바로 닭의 깃털로 만든 관(鷄羽冠)이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3. 지금까지 고구리(高句麗) 벽화에 그려진 깃털을 꽂은 관은 스키타이를 비롯한 유목민으로부터 들어온 풍습이라는 설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고구리(高句麗)가 닭의 깃털을 꽂고 다니는 것은 그처럼 다른 곳에서 들어온 단순한 풍습이 아니라 닭의 신(鷄神)을 공경하고 우러러 보았기 때문에 닭의 깃털을 머리에 꽂고 다녔으며, 고구리(高句麗) 사람들이 이처럼 굳은 믿음을 가지고 닭깃털관을 쓴 생활이 고구리(高句麗) 사람들의 상징적 이미지가 된 것이라는 것도 밝혔다. 4. 끝으로 고구리(高句麗) 사람들이 닭신을 받들어 그 깃털을 꽂고 다니는 풍습을 그린 벽화들을 검토하여 종합하였다. 벽화에 닭깃털관(鷄羽冠)을 그린 벽화는 춤무덤(舞踊塚)이 가장 대표적이고, 그 밖에 장천1호무덤, 마선구1호무덤, 감신무덤(龕神?), 쌍기둥무덤(雙楹塚), 개마무덤 (鎧馬塚) 같은 곳에서도 머리에 닭 깃털을 꽂은 관을 쓴 그림이 발견되어 당시의 상황을 입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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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세기 인도의 천하관(天竺=中國)과 高(句)麗의 위상에 관한 연구

        서길수(So Gil Su) 백산학회 2014 白山學報 Vol.- No.100

        This paper analyzed the name of Kori in 『Fanyu zaming 梵語雜名』 and 『Tang fan liang yu shuangdui ji 唐梵兩語雙對集』, and judging from the thorough examination, the author was able to deduce the following conclusions. 1. India(Indu) 天竺 possessed the world view that they called themselves as the central country 中國 and the others as border countries 邊地. This kind of a notion had existed since the historical Buddha lived in the 6th~5th century BC. The differentiation between the central country and the border countries in the Buddhist texts depended on the moralistic and religious judgement whether the Buddhist dharma was on the practice or not. Afterward, those regions where Buddhist law flourished, especially like the Magadha kingdom, the most prosperous kingdom in India, were called the central country while small kingdoms in the neighbor were called border areas. Later, when Buddhist pilgrims from other countries such as Kingdom of Han 漢國 and Kori 高麗 traveled to India, it clearly turned out that the Indians considered India as the central country 中國 and the other countries like Kingdom of Han 漢國 as the border countries. 2. The Kingdom of Han 漢國 in the northeast, the Persia 波斯 in the west, and the Turk in the northwest were regarded as the most powerful among the border countries of India 天竺國. 3. The border countries on the way from India to Kingdom of Han 漢國 like Karpiśaya 罽賓, Tukhara 吐火羅, Kucīna 龜玆, Korttana 于闐, Bhuṭa 吐蕃 were called Sulī 胡. Also, they thought Jipāttala 崑崙, which currently denotes the islands near the Indonesia and the Malay peninsula, as the sea route to Kingdom of Han. And there was Kori 高麗 at the end of the sea route. 4. Kori (高麗) in Sanskrit is mukuri 畝俱理 which is most likely the compound word of Mu-kuri. In this case, Kori 高麗 is the same as kori, hence, we can understand ‘kori=kuri.’ However, further research will be needed why they added [mu] in the front. 5. We can assume that Kori 高麗 kingdom was well known to India because of many visitors from the kingdom. But, along with the name of Mu-kuri, the kingdom had another name of Kukkutesvara which lets us consider another possibility other than Buddhist pilgrims’ activities. The name of Kukkutesvara was derived from the custom of the people of the kingdom who worshiped the God of a rooster and accordingly decorated their heads with rooster feathers. Buddhist pilgrims would not have adored themselves with such hairdress. Therefore, the names of Mu-kuri and Kukkutesvara could be valid evidence which tells us that Kori and India could have had deeper relationships than we supposed. 6. There is a problem concerning the compilation date of 『Tang fan liang yu shuangdui ji 唐梵兩語雙對集』 on which 『Fanyu zaming 梵語雜名』 was based. ① 『Tang fan liang yu shuangdui ji』 was written by a Buddhist pilgrim from The Kingdom of Han to India and must have been complied later than 399-412 AD when Faxian first traveled to India. ② Since 『Tang fan liang yu shuangdui ji』 mentioned Kori 高麗, it must have been compiled later than 423 AD when the name of Koguri 高句麗 was changed to Kori 高麗. ③ Around in 533 AD, the Turks established an independent country, and it was about in 555 AD that they built the nomadic empire. Thus, the compilation date of the 『Tang fan liang yu shuangdui ji』 must have been done afterward. In the meantime, the Tang, the ruling power of Asia in the second half of the 7th century, was not shown in the text while the names of the Three Kingdoms like the Shu 蜀 and the Wu 吳 appeared in it. Accordingly, the text must have been written before the Sui-Tang 隋唐 periods. The Tang was built in 618. The text could have been compiled around the time from the mid 6th century when the Turks approached to India and the late 6th century before the Tang was established. 중국(中國)이란 ‘가운데 나라’라는 뜻으로, 강한 나라들이 스스로 주변에 비해 우월하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썼고, 세력이 약한 나라들이 자국 보호를 위해 강대국을 섬기면서(事大) 불렀던 이름이다. 최근 중국은 고대의 중국(中國)에 해당하는 나라는 물론 스스로 네 가지 오랑캐(四夷)라고 불렀던 민족까지도 모두 ‘중국(中國)’이라는 이름 속에 넣어 이른바 통일적다민족국가를 이룩하는 새로운 나라이름으로 자리바꿈을 하고 있다. 이와 같은 역사관에는 ‘중국(中國)’이란 이름은 옛날부터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땅에 살던 선조들만이 썼다는 역사적 인식이 바탕에 깔려 있다. 이 논문은 지금의 인도(印度)인 천축국(天竺國)이 스스로를 중국(中國)이라고 불렀고, 동진(東晋)을 비롯하여 당(唐)나라 사람들까지 천축국을 중국(中國)이라고 높여 불렀던 사료를 새롭게 발굴하여 그 기록을 정리ㆍ분석한 뒤, ① 당시 천축국이 스스로를 중국(中國)이라고 자부했던 천하관과 그에 대칭되는 주변 국가(邊地)들을 아우르는 고대 아시아의 세력구도를 살펴보고, ② 아울러 그 자료에 돌궐 페르시아 같은 강대국들과 함께 나오는 高麗(=高句麗)의 위상을 헤아려보는 것이 연구목적이다. 그 결과 중국(中國)인 천축국을 중심으로 한국(漢國), 파사(波斯), 돌궐(突闕) 같은 큰 나라들과 계빈(罽賓), 토화라(吐火羅), 구자(龜茲), 우전(于闐), 토번(吐蕃), 곤륜(崑崙) 고리(高麗) 같은 주변 나라들이 세력구도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당시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땅에 있던 나라들은 한나라가 멸망한 뒤 진(晋), 송(宋), 제(齊), 양(梁). 진(陳), 전연(前燕), 전진(前秦), 북위(北魏) 같은 수많은 나라들이 오갔지만 모두 아울러 한국(漢國)이라고만 부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통해 중국(中國)인 천축국이 변지(邊地)인 한국(漢國)을 어떻게 인식하였는지 알 수 있었다. 한편 그 동쪽에는 신라, 백제, 일본 같은 나라들이 있지만 高麗만 나타난 것을 통해 천축국에서 高麗의 위상이 꽤 높았다는 사실을 밝힐 수 있었다. 그 밖에도 일본도 스스로를 중국(中國)이라고 일컬으며 신라를 섬기도록 강요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던 사실을 통해 중국(中國)이란 이름은 강대국을 자처하는 나라가 주변 나라에게 사대를 강요하는 수단으로 쓰였다는 것을 밝혔다. 이런 점은 천축이 문화적 정신적인 측면에서 주변국을 변지라하고 자신을 중국이라 했던 역사적 사실과 크게 다른 것으로, 일본은 물론 진나라와 한나라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은 정치와 권력을 통한 상하관계를 만드는 도구로서, 이웃나라 역사를 빼앗는 수단으로서, 중국(中國)이란 이름을 잘못 쓰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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