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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당(毅堂) 박세화(朴世和)에게 있어서 ‘구인(求仁)’의 문학적 실천

        安世鉉 ( Ahn Se-hyun ) 동방한문학회 2020 東方漢文學 Vol.0 No.82

        본고는 한말의 학자이자 순국열사인 毅堂 朴世和(1834~1910)의 求仁 사상을 분석하고, 산문을 중심으로 求仁의 문학적 실천 양상을 고찰한 것이다. 「仁問答」·「克己復禮爲仁說」 등의 분석을 통해 의당이 程朱와 마찬가지로 인을 우주 만물의 생명 원리로 이해하였으며 인을 행하는 중요한 방법으로 ‘사욕을 제거함[去私]’을 제시한 점을 확인하였다. 다만 의당은 求仁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剛明’한 자질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였는데, 이 점이 求仁에 관한 의당 사상의 특징이었다. 의당의 산문 창작은 求仁의 실천과 强忍한 자질의 함양에 있었는데, 크게 두 가지 양상을 보였다. 하나는 自警의 글을 지어서 서세동점의 난세에 의당 스스로가 仁人과 志士로서의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강인한 의지를 함양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지인과 제자들에게 送序나 記文을 지어주며 강인한 정신을 바탕으로 求仁去私의 실천을 권면한 것이다. 이러한 강인함이 의당으로 하여금 殺身成仁과 捨生取義의 결행을 가능하게 하였던 것이다. This paper is a review of the ideas and literature of Uidang(毅堂) Park Se-hwa(朴世和), who is a patriotic martyr to the Korean Empire. First I analyzed Park Se-hwa's views on how to realize Ren(仁). He suggested the removing private desire as a way of realizing Ren, and that stressed the need for firmness mind to do this. The uniqueness of his ideas lies in his emphasis on the importance of firmness mind in the practice of Ren. Next I looked at the two aspects of his realizing Ren through prose creation. Uidang developed a strong will to live as a man of heroic and noble mind by creating prose that was wary of him. He also exhorted friends and students to realize Ren based on a strong spirit in his writings given to them. In short, for him, the creation of prose was a way to realize Ren and foster a firmness mi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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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세기 전반 누정기(樓亭記) 창작의 일양상 -신식(申湜)의 "용졸재(用拙齋)"에 붙인 기문(記文)을 중심으로-

        안세현 (,Se Hyun Ahn ) 민족어문학회 2008 어문논집 Vol.- No.58

        본고는 申湜(1551~1623)의 `用拙齋`에 붙인 崔립(1539~1612), 洪可臣(1541~1615), 鄭逑(1543~1620), 柳夢寅(1559~1623), 李埈(1560~1635), 李수光(1563~1628) 등의 記文을 비교 분석하여, 17세기 전반 樓亭記 창작의 한 양상을 살펴보는 데에 목적을 두었다. 이를 통해 한문 산문의 장르적 연구 방향과 누정기에 대한 문학적 접근 방법을 모색해보았다. 먼저 창작 연대의 고증을 통해 당대 최고의 문장가인 최립의 「用拙齋記」가 가장 먼저 창작되었고 여타 문인들의 기문은 이를 의식하고 지어졌음을 밝혔다. 아울러 이수광의 「用拙齋記後敍」, 이준의 「用拙齋銘」, 정구의 「拙齋說」이 각각 `後敍`, `銘`, `說`이란 제목을 달고 있지만, 한문 산문의 장르 분류상 누정기의 범주에 포함되어야 함을 논증하였다. 6편의 누정기 분석을 통해 도출한 17세기 전반 누정기의 특징을 몇 가지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의론의 확대와 성리학적 사변성의 강화이다. 6편의 누정기 모두 齋名에 대한 의론이 주를 이루고 있다. 특히 최립의 「용졸재기」는 성리학적 사변성이 대단히 강하며, 홍가신의 「졸재기」에는 성리학에 대한 보다 엄격한 적용이 엿보인다. 이는 16세기를 거치면서 성리학에 대한 보다 철저한 이해가 이루어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둘째 장자적 사유를 수용하고 諸子書의 구법을 활용하는 등 새로운 경향의 누정기 창작의 확대이다. 유몽인의 「용졸헌기」는 장자적 사유에 기초하여 논의를 전개시키고 「열자」, 「한비자」 등의 제자서의 구법을 활용하였다. 이수광의 「용졸재기후서」에도 `用`과 관련된 장자적 사유가 보인다. 이 시기 장자의 영향을 받은 누정기가 양적으로 크게 늘어나는데, 장자의 寓言 방식을 차용한 蜃樓記 계열의 누정기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는 기존의 연미한 당송문을 벗어나 새로운 문체를 구사하려는 움직임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셋째 누정기에서 자신의 불우함이나 당대 현실에 대한 불만을 우의적으로 표현하는 경향이 많아졌다는 점이다. 유몽인은 「용졸헌기」에서 자신의 정치적 불우함을 우의적으로 표현하였으며, 「月波亭記」와 「恩波亭記」에서는 임금의 인척인 권세가들을 은근히 풍유하기도 하였다. 허균의 「慟哭軒記」에서는 당대 정치 현실과 화합되지 못하는 허균의 불평지기를 엿볼 수 있다. 이는 붕당간의 정치적 대립이 본격화되는 17세기 전반기의 정치 상황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이 시기 누정기의 전반적인 특성을 구명하기 위해서는 최립과 유몽인을 비롯하여 비교적 많은 누정기를 남기고 있는 이정귀, 신흠, 허균, 이식, 장유 등의 누정기에 대한 연구도 함께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There were a considerable numbers of notable writers in the field of Chosun prosaic history from the late 16th century through the first 17th century. Choi Lib(崔립), Yoo Mong-in(柳夢寅), Lee Jeong-gui(李廷龜), Shin Heum(申欽), Heo Kyun(許筠), Lee Sik(李植) and Zhang You(張維) were outstanding writers during that period. While they gave themselves up to improve the prosaic theory, they also tried to compose actual writings. But we don`t have enough knowledge about their writings compare to their prosaic theories. To figure out aspects of pavilion writings, in this paper, I compared a series of writings about a pavilion Yongjol(用拙齋), which was owned by Shin Sik(申湜), composed by six different writers-Choi Lib, Yoo Mong-in, Hong Ka-shin(洪可臣), Chung Ku(鄭逑), Lee Zhun(李埈) and Lee Su-kwang(李수光). As a result of this, I figured out that Choi Lib`s writing was the first one among them, and partly influenced on the following writings of other coming writers. Beside this, as a critical criticism, I focused on their individual composition methods. Then I recognized some typical features. First of all, they tried to imbue Sung confucianism in their writings. Second, they adopted Taoism and other philosophers` way of thinking to flourish their writings. Third, they expressed their adversity and discontents with society using allegory. I believe that this work will contribute to figure out individual writer`s special distinctive and their way of thin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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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말~일제강점기 강릉향교의 변화와 지역사회에서의 역할 : -화산학교(花山學校)의 설립을 중심으로-

        안세현 ( Ahn Se-hyun ) 한국한문고전학회(구 성신한문학회) 2019 漢文古典硏究 Vol.38 No.1

        본고에서는 한말~일제강점기 강릉향교의 변화 양상과 지역사회에서의 역할을 고찰하였다. 이를 위해 먼저 갑오개혁 이후 향교 제도의 개편에 따라 강릉향교에 어떠한 변화가 일어났는지 정리하였다. 갑오개혁 이후 學部의 조치로 인해, 강릉향교는 유생을 입적하거나 입적한 유생을 교육하는 전통적인 향교 교육은 정지되었다. 그러나 祭享 기능을 유지하며 지역 유림의 교류와 결속을 다지는 구심점 역할을 여전히 수행하였다. 더욱이 講會나 考試 등의 행사를 개최하며 교육과 학술 기관으로서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 시기 강릉향교의 변화 중에서 본고가 특히 주목한 것은 1908년에 있었던 화산학교의 설립 과정이었다. 『花山學校雜錄』, 『遯湖遺稿』 등의 관련 자료를 통해, 화산학교가 1907년에 이미 서당 교육을 하는 사립학교의 형태로 강릉향교 내에 존재하였으며, 1908년에 학부의 <사립학교령>이 공포되면서 정식 설립 절차에 들어가 1909년 봄에 개교하였음을 밝혀내었다. 아울러 학교의 설립을 주도하였던 鄭顯東(1850~1921)이란 인물의 인적 사항과 행적을 최대한 추적하였다. 정현동은 양양을 대표하는 유림인데 학자로 이름이 나서 화산학교의 강사로 초빙되었으며, 학교장이자 일족인 鄭顯運(1843~1913)의 후원 아래 화산학교의 설립을 주도할 수 있었다. 특히 화산학교는 설립 과정에서 강릉 지역 신식학교의 반대에 부딪히는 등, 지역 사회에서 갈등이 있었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화산학교는 전통 서당식 교육에 신식을 가미한 학교로서, 서구식 근대교육을 통한 인재 양성을 기치로 내걸었던 신식 사립학교와는 성격을 달리했기 때문이었다. 곧 화산학교는 신학문과 구학문의 갈등, 신학교와 구학교의 대립 등을 겪으면서 설립되었던 것이다. In this paper, I tried to explored the changing patterns of Gangneung Hyanggyo and Its Role in the Community from 1894 to 1945. In 1894, following the action of the Ministry of Education, education in Hyanggyo was virtually suspended. However, Hyanggyo continued to serve as an exchange space for local Confucian scholars while maintaining the ritual function. In particular, Gangneung Hyanggyo maintained its reputation as an educational and academic institution by holding lectures, exams and other events. I particularly noted the process of setting up a Hwasan school in 1908. I have rediscovered the personal information and track record of Jeong Hyeon-dong, who led the school's establishment. Hwasan school offered traditional Confucian education, and in this regard that were different from Western modern schools. For this reason, people who pursued Western studies and founded modern schools opposed the establishment of Hwasan sch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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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체반정을 둘러싼 글쓰기와 문체 논쟁 -정조의 문장의식을 통해 본 박지원과 이옥의 글쓰기 태도 및 문체-

        안세현 ( Se Hyun Ahn ) 민족어문학회 2006 어문논집 Vol.- No.54

        본고는 문체가 經學 및 世道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인식하에 일련의 문체순정책을 펼쳤던 正祖(재위:1776~1800), 『열하일기』로 인해 정조로부터 문풍 쇠퇴의 장본인으로 지목되었던 朴趾源(1736~1805), 문체반정을 촉발시킨 한 사람이자 科文의 문체 인해 充軍 처벌까지 받았던 문체반정의 최대 피해자 李鈺(1760~1815)을 대상으로 하여, 문체반정을 둘러싼 글쓰기와 문체에 관한 논의를 살펴보았다. 이를 위해 정조의 문장의식을 기준으로 박지원 This paper focused on three writers Jeongjo(正祖), Park Ji-won(朴趾源) and Lee Ok(李鈺) as a way of understanding Munchebanjeong(文體反正). I suggested Jeongjo as a literary level of those days, and set last two writers in contrast point for this study. First of 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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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옥(李鈺)의 「각로선생전(却老先生傳)」: 노쇠한 신체의 발견과 자기 서사

        안세현 ( Ahn Se-hyun ) 근역한문학회 2016 한문학논집(漢文學論集) Vol.45 No.-

        본고는 李鈺(1760~1815)의 「却老先生傳」을 老化와 自傳 두 가지 측면에서 고찰한 것이다. 「각로선생전」은 족집게를 각로선생으로 의인화하고, 혹자와 나와의 문답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글은 假傳의 형식을 가탁한 일종의 自傳으로, 50세에 접어든 이옥이 노쇠한 신체를 발견하고 자신의 처지를 우의한 작품이다. 「각로선생전」의 특징적 면모를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첫째, 문체적 파격성이다. 假傳이든 自傳이든 ‘가계-행적-평결`이라는 傳의 서술방식을 준용하는데 반해, 「각로선생전」은 각로선생을 두고 혹자와 나와의 가설적 논쟁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도연명의 「오류선생전」 이래 대개의 자전이 작자 자신을 가탁한 제3의 인물을 제시하고 남들과는 다른 자신의 삶을 자부심 있게 그려내는 데에 반해, 「각로선생전」에서 이옥은 자신의 신체적 노화에 놀라고 지나 온 삶을 안타까워하며 여전히 삶의 지향을 찾지 못하는 ‘불안한 자기`를 내보였다. 「각로선생전」의 문체적 파격성은 여기에서 연유한 것이다. 둘째, 노화에 대한 인식에 있어 신체적 변화를 섬세하게 관찰하고 이를 極微하게 묘사한 점이다. 이옥 문학이 지닌 특징 중에 하나가 사물을 미시적으로 관찰하고 이를 섬세한 언어로 묘사하는 것이다. 「각로선생전」에도 이러한 특징이 그대로 나타났는데, 특히 새까만 터럭이 백옥처럼 하얗게 새는 과정이나 몸에 있는 터럭이 새는 순서에 대한 묘사는 극치를 보여준다. 이옥에게 신체의 노쇠함은 추상적으로 인식된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다가왔던 것이다. 셋째, 노화에 대처하는 태도이다. 이가 빠지고 머리가 새는 등의 노화는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징후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노화에 놀라고 이를 지연시키고자 노력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노화를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삶을 반추하며 노년의 삶을 차분하게 준비한다. 그러나 이옥은 지나 온 삶을 정리하지도 못하고, 노년의 삶의 지향점을 찾지도 못하고 머뭇거릴 뿐이다. 이런 점에서 「각로선생전」은 오십 줄에 접어든 이옥 자신의 삶을 가탁한 자전적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I analyzed Kangnoseonsaeng-Jeon(却老先生傳) of Lee Ok(李鈺) focusing on the aging and autobiography. Kangnoseonsaeng(却老先生) is the personification of tweezers and Kangnoseonsaeng-Jeon is a kind of autobiography. This works are typically as follows: First of all, Kangnoseonsaeng-Jeon is unconventional style of writing. Lee Ok did not keep the narrative style of jeon(傳) and used hypothetical question and answer. This allows the psychological anxiety according to the aging. The second, Lee Ok was sensitive aware of the aging and described the aging of the body in detail. Descriptions of the process of change in hair color is especially impressive. In addition, Lee Ok has the attitude to cope with the aging differed from others. Generally people accept aging as a destiny and that are trying to mentally mature. But Lee Ok just depressed aging, it was not wisely designed the life of the elderly. In conclusion, Kangnoseonsaeng-Jeon is autobiographical work of Lee Ok entering old 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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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강점기 시호(詩湖) 박원동(朴元東)의 강릉 지역 유교문화 유산의 정리 활동과 그 의미

        安世鉉 ( Ahn Se-hyun ) 동방한문학회 2021 東方漢文學 Vol.- No.86

        본고는 일제강점기 강릉의 유학자 詩湖 朴元東(1873~1949)이 강릉의 유교문화 유산을 정리한 활동을 고찰한 것이다. 박원동은 강릉향교의 直員을 비롯하여 강릉의 4대 院宇인 鄕賢祠·五峯書院·松潭書院·晦庵影堂의 有司나 管理人을 역임하였다. 본고에서는 『江陵鄕賢行錄』·『五峯書院實記』·『江陵鄕校實記』 등의 편찬 배경과 과정을 집중적으로 탐색하여 박원동이 지닌 지역학 연구자의 위상을 부각하고자 하였다. 『강릉향현행록』은 향현사에 배향된 12향현의 행록을 모으고 향현사의 연혁을 덧붙인 것으로, 1931년 석판본 1책으로 간행되었다. 『강릉향현행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문중 간의 갈등을 조정하고 철저한 고증을 통해 12향현의 位次를 바로잡았다. 『강릉향현행록』의 편찬은 12가문을 기리는 것인 동시에 강릉이 지닌 儒鄕으로서의 위상을 재확인하는 활동이었다. 한편 총독부의 출판허가 과정에서 「범례」를 비롯한 일부 내용의 수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오봉서원실기』는 오봉서원이 설립된 1552년(명종 7)부터 祭田을 확충한 1930년까지의 연혁을 정리한 것인데, 1933년에 편찬을 완료하였다. 순조 연간 우암 영정을 오봉서원에 배향할 때에 지역의 유림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되었는데, 박원동 당대까지도 갈등이 여전하였다. 박원동은 『오봉서원실기』에 우암 영정의 배향과 관련된 역사 기록을 충실하게 수록하여 당시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한편 유림 사회의 단합을 촉구하였다. 『강릉향교실기』는 1932년 박원동이 金秉煥(1871~1947)과 함께 편찬한 것으로, 이듬해 강릉고적보존회에서 연활자 1책으로 간행하였다. 간행본의 ‘編輯人’에는 강릉 군수이자 강릉고적보존회의 설립자인 ‘다키자와 마코토[瀧澤誠]’의 이름도 들어 있는데, 이 책이 군수의 주도 하에 지역의 유림이 협력하여 간행한 官撰이었기 때문이다. 『강릉향교실기』에는 일제의 향교 정책과 관련된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데, 특히 「東洋尊聖錄」은 ‘동양’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유교를 식민 통치의 정당화에 이용하였던 일제의 정치적 의도가 반영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박원동이 『강릉향교실기』를 편찬한 것은 강릉의 유교문화를 계승하고 재건해야 한다는 의지가 강했기 때문이었다. 유학이 침강하는 시대에 강릉의 유교문화 유산을 정리하고 재건하였던 박원동의 활동은 오늘날 지역사회에서 유교문화를 계승하는 데에 많은 시사점을 제공해 주었다. In this paper, I studied Park Won-dong's efforts to organize and rebuild the Confucian cultural heritage of Gangneung in the Japanese colonial era. In particular, I focused on his exploring the background and process of his compilation of Gangneunghyanghyeonrok, Obongseowonsilgi, and Gangneunghyanggyosilgi. In the process of compiling Gangneunghyanghyeonrok, Park Won-dong coordinated conflicts between families and corrected the order of 12 Hyang-hyeon's plaque through thorough examination. The compilation of this book is meaningful in that it reaffirmed Gangneung's status as a town of study abroad. Obongseowonsilgi is a compilation of the history from the establishment of Obongseowon to the era of Park Won-dong. When the portrait of Uiam was enshrined in Obongseowon in the year of the Sunjo, the local Confucianism was divided into Noron and Soron, and conflicts continued until the time of Park Won-dong. Park Won-dong faithfully included historical records related to the deflection of the Uam portrait in this book, revealing the truth of the incident and urging the unity of the local Confucianism. Gangneunghyanggyosilgi was compiled by Park Won-dong in 1932 with Kim Byeong-hwan, and published by the Gangneung Historic Preservation Society in 1933. The publication's Editor also contains the name of Makoto Takizawa, the governor of Gangneung and founder of the Gangneung Historic Preservation Society. This is because this book was published in cooperation with local Confucianism under the leadership of the county governor. This book includes contents related to the Japanese colonial policy, reflecting the Japanese political intentions of using Confucianism to justify colonial rule. Even in this situation, Park Won-dong compiled this book because he had a strong will to inherit and rebuild Gangneung's Confucian culture. Park Won-dong's activities to clean up and rebuild Gangneung's Confucian cultural heritage in an era of declining study abroad provided many implications for inheriting Confucian culture in today's commu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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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후기 초학자를 위한 독서 교육의 방법과 현대적 전망 - 언어 교육 및 작문 교육과의 연계성에 주목하여 -

        安世鉉 ( Ahn Se-hyun ) 동방한문학회 2020 東方漢文學 Vol.0 No.83

        본고는 조선후기 초학자를 위한 독서 교육의 성격을 고찰하고, 오늘날 학교 교육에서 활용할 만한 독서 교육의 방법을 제시하는 데에 목적을 두었다. 선행 연구가 주로 조선 시대의 독서 문화나 개별 문인의 독서관·독서 방법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던 데에 반해, 본고는 오늘날 학교 교육에서의 활용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조선후기 초학자를 대상으로 한 독서 교육의 성격과 방법을 집중적으로 논의하였다. 조선후기 초학자를 위한 독서 교육은 성현의 학문을 탐구하여 자신을 수양하는 데에 목적을 두었으나, 한문이라는 언어를 습득하고 한문으로 글을 지을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데에도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곧 유교 교육을 목표로 하면서도 언어 교육과 작문 교육을 병행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오늘날 학교 교육에 적용해 볼만한 독서 방법으로는 언어 교육과의 연계로서 音讀·多讀·記誦을, 작문 교육과의 연계로서 抄讀·箚記·抄書를 제시하였다. 음독·다독·기송은 글을 소리 내어 읽고 여러 번 반복하여 암송하는 것인데, 언어 교육의 측면에서 문자를 식별하고 문법을 깨치는 데에 유용한 방법이다. 초독·차기·초서는 중요한 부분을 발췌하여 읽는다거나 의문 나는 점을 기록한다거나 특정 주제와 관련된 내용을 여러 책에서 뽑아 편저를 엮는 것이다. 이는 독법인 동시에 작법으로서 작문 능력을 기르는 데에도 효과적인 방법이다. 오늘날 학교 교육에서 독서 교육과 작문 교육은 분리되어 있으며, 독서 교육에서 音讀을 초급한 수준으로 치부하고 작문 교육에서 抄書를 표절과 같이 여기는 풍조가 있다. 그러나 음독·다독·기송의 과정에서 텍스트의 이해와 수용을 위한 사고 작용이 함께 이루어지며, 특히 음독의 과정에서 수반되는 속도·억양 등의 비문자적 자질들은 의사소통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들이다. 초독·차기·초서의 과정에서 텍스트에 대한 비판적·창의적 이해가 가능하며, 특히 초서는 작문의 과정에서 중요한 관련 정보의 수집과분석, 재구성을 익히는 데에 유용하다. 본고가 오늘날 독서 교육을 언어·작문 교육과 연계시키는 데에 도움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In this paper, I examined the characteristics of reading education for beginner students in the late Joseon Dynasty and presented a method of reading education that is suitable for use in today's school education. I noted that reading education for beginners in the late Joseon Dynasty was aimed at Confucian ethics education, but it also had the characteristics of language education and writing education. Therefore, I suggested the oral reading and summarizing reading as reading methods suitable for today's school education. The qualities of speed and intonation that accompany the process of oral reading are important factors in communication. The summarizing reading is useful for training in the collection, analysis and reconstruction of relevant information that is important in the course of writing. I hope this paper will help link today's reading education with language and writing educ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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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후기 상상의 공간을 소재로 한 기문의 창작 배경과 특징 -權燮(1671-1759) 夢記와 柳慶種(1714-1784)의 意園誌를 중심으로-

        안세현 ( Se Hyun Ahn ) 한국한문고전학회(구 성신한문학회) 2013 漢文古典硏究 Vol.27 No.1

        玉所權燮(1671-1759)의 夢記와 海巖柳慶種(1714-1784)의 『意園誌』를 중심으로 조선후기 상상의 공간을 소재로 한 기문의 창작 배경과 그 특징을 고찰하는 데에 목적을 두었다. 『몽기』와 『의원지』 는 모두 현실에 실재하지 않는 상상의 공간을 소재로 하고 있고, 글뿐만 아니라 그림도 함께 제작되었 다는 점에서 조선후기 문학사.예술사에서 주목해 볼만하였다. 옥소는 노론, 해암은 남인으로 당색은 달랐으나,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전반에 정점으로 치달은 당쟁 속에서 소외.고립된 지식인이라는 점에서 같은 처지였다. 그리하여 옥소와 해암은 현실에서 결코 성취할 수 없는 욕망을 『몽기』 와 『의원지』 라는 상상의 공간을 설정하여 정신적인 淸福을 누리고자 하였다. 해암은 비록 정치적으로 소외.고립된 처지였으나, 경제적.문화적 으로는 풍요로운 삶을 살았다. 옥소는 청풍의 한천장.능강동과 문경의 화지장 등의 장원을 경영하였고, 해암은 안산에 근거를 두고 해암동천을 경영하며 만권장서가로서 문화교류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또한 옥소와 해암은 18세기 문학과 예술을 주도하였던 農淵그룹이나 안산의 남인 그룹에 소속되어 일찍부터 京華문화의 세례를 받았다. 이에 힘입어 문학과 회화의 교섭이 활 발하였던 풍정 속에서 성장하였고, 이를 적극적으로 향유하였다. 경화 문화 속에서의 성장과 장원 경영의 경험이 밑바탕이 되어, 문학과 회화가 교섭을 이루고 閑適한 삶을 즐기는 自娛의 공간을 탄생시켰던 것이다. 이는 전대 상 상의 공간을 소재로 한 기문에 주로 보이는 불우한 지식인의 표상이나 세상에 대한 비분강개한 태도와는 다른 것이었다. This paper focuses on the Kimun of Kwon Sub and Yoo Kyung-jong in the late Choson dynasty. I tried to analyze the backgrounds and characteristics of their writings, named Mongki(夢記) and Uiwonji(意園誌). These two articles are about imagined space, and drawings about these articles followed up. So that there are enough reasons to arouse researchers` interests. Both Kwon Sub and Yoo Kyung-jong were marginalized intellectuals, while they belonged to different faction. And they lived comfortably as they were well off both economically and culturally. Kwon managed several number of manor, and Yoo was one of famous book collector at that time. And they received the benefits of senior scholars. Therefore, they could realize the worth of literature and arts from their early life, and they enjoyed their privileges. They wrote their desires what they couldn`t achieve in their real life through writings. They could solve their realistic limit by writing articles. This attitude is totally different from earlier writ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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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강원도의 문화적 정체성과 현재적 의미

        안세현 ( Ahn Se-hyun ) 한국한문고전학회(구 성신한문학회) 2017 漢文古典硏究 Vol.34 No.1

        본고는 조선왕조실록, 지리지, 문집 등을 검토하여 조선시대 강원도의 문화적 정체성을 고찰하고, 그것이 지니는 현재적 의미를 찾아보기 위해 작성된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등의 `풍속`조를 보면, 강원도는 경기도를 비롯한 여타 지역에 비해 유교적 문명화가 덜 된 지역으로 인식되었다. 강원도가 유교문화의 미답지로 인식된 데에는 강릉과 원주를 제외하고는 향교가 활성화 되지 못하였고 향약이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강원도는 태초의 순박한 풍속을 그대로 간직하고 토착 문화가 잘 보존되어 있는 지역이기도 하였다. 유교문화의 정착 정도를 기준으로 보면 강원도의 풍속에 대한 인식은 부정적이었으나 자연 지리에 대한 인식은 달랐다. 관동팔경을 비롯하여 금강산, 설악산, 오대산 등 강원도의 형승은 사대부 문인들의 대표적인 유람의 공간이었다. 고려 말 安軸의 『關東瓦注』와 李穀의 東遊記등과 같은 기행 시문을 통해, 강원도의 형승이 발견되고 사대부 문인들에게 문화적 공간으로 인식되었다. 나아가 강원도는 세속의 명리와 규범으로부터 벗어나는 탈속의 공간이자, 정치적 좌절에서 오는 우수나 번뇌를 해소하는 치유의 공간이었다. 대표적인 사례로 金時習과 淸平寺, 金壽增과 谷雲, 金昌翕과 雪嶽山 등을 살펴보았다. 이제 맹목적인 중앙 추수를 지양하고 지역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가치에 주목할 때이다. 강원도는 도시문명에 찌든 현대인을 태초의 시간으로 이끌어 아름다운 산수 속에서 몸과 마음을 안정시키고 삶의 에너지를 재충전할 수 있는 공간이다. 따라서 현대의 도시문명을 좇아가기보다는 문명의 때가 묻지 않은 시원적 공간, 지역의 토착문화가 지니고 있는 특수성, 형승과 산수가 가져다주는 휴식과 치유 등의 문화요소를 보다 적극적으로 개발해야 할 것이다. In this paper, I tried to navigate the cultural identities of Gangwon Area in Joseon dynasty and that searched for its current meaning. In Sillok(實錄), geography and anthologies, Kangwon area was negatively recognized: A solitary society isolated by mountain villages, an economically backward area, an area where Confucianism has not been established. On the other hand, Kangwon area was seen as an unsophisticated source space, and was noted as space of Unworldliness and Healing through traveling Scenic spot. Now we should refrain from blindly pursuing the center and that need to pay attention to the cultural values of the region. Modern people can repair the mind and body of the city through a travel to Gangwon area. Therefore, we should actively develop cultural elements of Gangwon a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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