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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일본연구에 대한 비판적 검토 : 주로 문화론·사상사 연구 방면에서 Focuse on the Studies on Japanese Culture and Thoughts

        姜海守 韓國外國語大學校 外國學綜合硏究센터 日本硏究所 2003 日本硏究 Vol.20 No.-

        本稿は、 これまでの韓國における日本硏究を、 主に文化論と思想史の硏究分野において檢討し、 そこに看取される問題點とその克服のための方策を筆者なりに考えてみたものである。 すなねち、 『日本大衆文化開放時代』にあたり、 大學の敎壇だけではなく、 大衆消費財としても量産されている『日本文化論』のほとんどが、 實體としての『日本文化』を受け入れた『文化本質主義』に貫かれたものであるといえる。 これは、 他の表現でいえば、 韓國の日本硏究が『日本文化』という境界を外部から支えてしまうことを意味する。 日本語·日本文學界をはじめとする韓國の日本關係學界が深刻な『內なる植民性』の狀態に置かれているとすれば、 こうした理由によるものである。 これは、 韓國における日本硏究の持つ積極的な意味を求めようとする姿勢の欠乏と、 そのための方法論の不在による當然の歸結といえよう。 その結果、 韓國における日本硏究は、 韓國の學界の周邊部に置かれたままであり、 かつ、 韓國の社會に向けて何の批判の聲も擧げていない現狀となっている。 したがって、 韓國における日本硏究は、 <日本からの日本硏究>から<韓國からの日本硏究>へ のコ-ド轉換が必要であるといえる。 これは、 一力的な知識生産の回路から、 相互疎通の知識生産の回路に轉換すべきことを意味している。 すなわち、 韓國における日本硏究は韓國社會の內部からの學問的な要求および實踐とはかけはなれたまま、 日本の硏究者から一方的にその學問的な方法論と成果を受容しつづけてきた。 こうした狀況は、 一次的な文獻史資料と日本の硏究成果を參照しながらも、 自分たちの獨自の方法論と立場に基づいて硏究活動を活發におこなう北米圈の日本硏究とは對照的である。 それゆえに、 現在、 韓國の日本學に與えられた最も切實な課題は、 こうした『知的植民性』を克服し、 韓國における日本硏究の獨自性を追求することである。 また、 それを通じ韓國の學界において周邊部に留まる現狀を打破する必要がある。 このための具體的な提案としては、 まず、 日本文化論の硏究は『日本文化論』の機制(性格)を論じる『<日本文化論>論』の方向に轉換するという發想を持つべきである。 また、 日木思想史の硏究は、 『國民國家』の成立のための『近代知』の核心としての『日本』という言說を分析し、 ひいては近代以降の『韓國』という自己像の設定に關係してきた『他者としての日本』の意味を積極的に解明していく作業が不可欠であろう。

      • KCI등재

        ‘황도유학’과 ‘도의’ 담론, 그리고 식민지조선

        강해수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2 한국학연구 Vol.0 No.28

        이 논문은 식민지조선에서 발화되었던 ‘황도유학’이란 용어 및 그 담론을, 한국의 기존 연구와는 달리 당시 제국일본 내의 담론 전개와의 관련 속에서 고찰한 것이다. 즉 근세 일본의 ‘황도’ 담론의 전개를 먼저 살펴본 후, 주로 1930년대 초·중기 이후의 ‘일본정신’론의 회자 속에서 발화된 “황도에 醇化된 유교”로서의 ‘일본유교의 성립’의 담론에 관해 고찰하였다. 그 과정에서 일본의 “儒祖 儒宗”으로서의 ‘하카세 와니[博士 王仁]’ 상이 등장하는 의미에 관해서도 함께 논하였다. 그 후 이런 ‘일본유교’ 담론은 식민지조선에서는 ‘황도유학’이란 이름으로 전개되어가는 바, 이를 특히 조선총독부 및 경학원과 ‘조선유도연합회’ 인사들의 ‘도의’ 담론과의 상관 관계 하에서 분석하였다. 아울러 이 과정에서 이퇴계가 “조선 도의철학의 창시자”로 조명되는 의미와, 그의 연속성 문제를 해방 후의 박종홍의 이퇴계론에서 찾아보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고찰을 통해, 전후 일본뿐만 아니라 식민지 시기로부터 현재까지 연속되어온 한국의 권위적인 정치구조가 초래한 딜레마적 상황을, 이 ‘황도유학’ 담론과의 연관 속에서 생각해보고자 하였다. 本論文は, 植民地朝鮮で用いられた「皇道儒学」という語およびその言説を, 従来の韓国での研究の視点とは異なり, 当時の帝国日本における言説展開との関わりの中で考察したものである。 まず, 近世日本以来の「皇道儒学」言説の展開を概観した。 そして, 主に1930年代の初・中期より「日本精神」論が膾炙する中で語られた「皇道に醇化になった儒教」としての「日本儒教の成立」の言説について探った。 またその過程で, 日本の「儒祖 儒宗」としての「博士王仁」像が登場する意味についても論じた。 その後, この「日本儒教」言説は植民地朝鮮では「皇道儒学」として展開していくが, こうした言説を, ことに朝鮮総督府および経学院と「朝鮮儒道連合会」儒者における「道義」言説との相関関係の中で分析した。同時に, この過程で16世紀の朝鮮王朝の儒者李退渓が「半島における道義哲学の創始者」として照らし出される意味と, その言説の連続性の問題を解放後の朴鍾鴻の李退渓論において探った。 そしてこうした考察を通して, 戦後日本だけではなく, 植民地時期から現在まで連続してきた韓国の権威的な政治構造などがもたらしたジレンマ的状況を「皇道儒学」言説との関わりで考えた。

      • KCI등재후보

        다케우치 요시미의 ‘방법으로서의 아시아’와 ‘조선’이라는 토포스

        강해수 국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일본공간 Vol.18 No.-

        This paper is to figure out what we can still learn from Takeuchi Yoshimi(竹内 好)’s two articles of “Asia as a Method” and “Pan-Asianism” to understand the topos of Choson at that time and Korea now. In other words, in writing this paper, there are two ultimate questions I deal with. What roles and positions do Choson or Korea have in his “Pan-Asianism”? What does it mean to talk about “Asia as a Method” now in Korea? By taking a closer look at what Takeuchi Yoshimi proposed in these two articles, I will try to find out what we can still learn from his “Asia” discourse. And hopefully, I will try to use it to question and problematize recent “East Asia” discourses of our own time. 이 논문은 이 글은 ‘중국(문학)연구자’로 알려진 다케우치 요시미(竹内好)의 ‘방법으로서의 아시아’ 및 ‘아시아주의’론의 논지를 ‘한국(조선)’이라는 장소에서 되새겨본 것이다. 여기에는 식민지 경험을 가진 ‘한국(조선)’이 다케우치의 ‘아시아주의’론에서 어떠한 위상을 가지는가 하는 문제와, ‘방법으로서의 아시아’를 말한다는 것이 한국에서 어떠한 문맥을 가질 수 있는가 하는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다케우치가 1963년 8월에 「아시아주의의 전망」을 발표했을 당시, 일본의 조선사연구자들을 비롯한 역사연구자들로부터 격렬한 비판이 일어났다. 이러한 상황은 현재도 그다지 다르지 않다. 당시의 비판에 대한 다케우치로부터의 반박은 단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나, 대체로 그가 주장하고자 했던 바는 여기에서 엿볼 수 있다. 본고에서는 이처럼 다케우치가 당시에 ‘아시아주의’론 및 ‘방법으로서의 아시아’를 통해 제기하고자 하였던 문제를, 현재의 ‘우리의 물음’으로 검토하고 그 의미를 묻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일본의 ‘포스트 다케우치’ 담론을 전개한 연구자들의 한국에서의 번역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를 함께 생각해보고자 하였다. 이러한 물음은 아시아의 ‘동시대적 상황’과의 부단한 연관 속에서, 앞으로의 한중일의 다케우치연구의 의미를 제고하기 위한 중요한 과제임에 틀림없다.

      • 근대 일본의 이퇴계연구

        姜海守 영남퇴계학연구원 2008 퇴계학논집 Vol.2 No.-

        '스콜라' 이용 시 소속기관이 구독 중이 아닌 경우, 오후 4시부터 익일 오전 9시까지 원문보기가 가능합니다.

        본고는 근대 일본에서의 이퇴계연구에 관해 고찰함을 목적으로 한다. 근세부터 근대에 걸쳐 요코이 쇼난(?井小楠)을 거쳐 모토다 나가자네(元田永孚)에 의한 교육칙어 기초에 이르기까지 이퇴계의 학문이 큰 영향을 끼쳤다는 내러티브는, 그 선구적 제창자인 마쓰 다 고(松田甲)와 아베 요시오(阿部吉雄)뿐만 아니라 현재의 한국 유학연구자들에 있어서도 공통된 인식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러 한 내러티브가 동아시아 삼국에서 차지하는 조선유학(주자학)의 우위성, 혹은 ‘한일문화교류사’상에서 전개된 한국의 주도적 역할 을 나타내는 한 징표로서 기능해 온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다. 본 논문은 이와 같은 점에 유의하면서, 근대 이후 일본과 한국 에서 보여지는 이퇴계像, 즉 ‘이퇴계의 근대’적 담론의 ‘시초 이야 기’와 그 전개에 관해 논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여기서 보여지는 ‘제국의 유산(즉 식민知)’과 그 ‘공유’의 한 측면을 조명하고, ‘한일 문화교류사’라는 장르가 가진 허구성의 일면을 아울러 생각해보고 자 한다.

      • KCI등재

        근대 조선의 ‘세계사’ 경험과 역사철학자00 -‘교토학파(京都學派)’의 논의와 관련하여-

        강해수 동아시아일본학회 2006 일본문화연구 Vol.18 No.-

        주 제 어ヨロッパ世界史, 京都派, 現代日本の世界史的使命, 世界の多中心性, 民族的主性Western Europe, the Kyoto School, Counter-Imperialism of Japan, Multi-Polarization, National Identity

      • KCI등재

        “皇道에 醇化․融合된 유교”로서의 ‘황도유학(교)’ 담론 - 다이토(大東)文化學院과 경학원의 관계를 중심으로 -

        강해수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9 한국학연구 Vol.0 No.52

        이 논문은, 국가총동원체제(1938년) 이후 조선총독부의 식민지 조선을 대상으로 한 정책과 이를 사상적으로 뒷받침하는 다카하시 도루를 기점으로 분석되어온 기존 한국에서의 ‘황도유학’ 연구를 제고하기 위한 것이다. 실제 황도유학의 이데올로기적 원형으로서 기능한 “황도 및 국체에 순화된 유교”라는 내러티브는, 1923년 9월의 도쿄 다이토문화학원의 설립과 함께 발화되었다. 이후, 제국 일본의 국제연맹 탈퇴에 따른 ‘고립 일본’의 시기인 1934년 1월에는, “황도 및 국체에 순화된 유교”로서의 ‘일본유교’라는 담론으로 나타난다. 이때 ‘황도’와 ‘유교’가 한 단어로 결합된 ‘황도유교’라는 용어도 비로소 등장하는 것이다. 이를 전후한 시기의 『경학원잡지』과 『유도』를 살펴보면, 다이토문화학원 관계자들을 비롯한 일본인 기고자 등의 글에서, 이 “황도 및 국체에 순화된 유교”라는 내러티브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즉 ‘황도유학’ 담론에서 차지하는 다카하시 도루는 결코 중심에 있지 않는 것이다. 한편 위 다이토문화학원을 졸업한 조선 경학원의 유력 유학자가 바로 안인식과 주병건인 바, 이들은 경학원 및 조선유도연합회를 중심으로 “황도․국체에 순화된 유교”의 재발화자로서의 중추적인 역할을 다하였다. 안인식의 경우는 특히 위 내러티브을 바탕으로, 제국 일본의 “동아신질서건설” 주창을 “孔夫子의 理想인 大同世界” 실현를 위한 정신으로서 해석하면서, ‘국민’으로서의 ‘충효도의’를 강조하였다. 이 ‘국민’으로서의 ‘충효도의’를 안인식은 이후, 박정희에 의한 ‘新建國家’ 성립 후에 재소환하고 있다.

      • KCI등재

        근대 일본의 ‘동아의 주자학’과 이퇴계

        강해수 영남퇴계학연구원 2020 퇴계학논집 Vol.- No.26

        '스콜라' 이용 시 소속기관이 구독 중이 아닌 경우, 오후 4시부터 익일 오전 9시까지 원문보기가 가능합니다.

        This article explores the pathway of research on Yi T’oegye’s philosophy in modern Japan with a focus on Abe Yoshio (a representative scholar of Yi T’oegye) who published a book entitled YiT’oegye in 1944 when he was an assistant professor at Keijō Imperial University. By examining what both the scholars of the Kimon (Yamazaki Ansai) School and those of the Kumamoto Practical Learning School discussed about Yi T’oegye’s philosophy, I find that Abe actually combined the interpretations of both schools, which maintained different academic orientations, into a coherent whole. Before Abe amalgamated the interpretations of both schools, Oka Naokai (a disciple of Kusumoto Sekisui who was a Confucian scholar in the Hirado domain of Hizen) had already suggested such amalgamation in his edited volume Kimongaku myakukeifufuroku(崎門学脈系譜付録) in 1940. Oka’s volume clearly showed that both Yamazaki Ansai (Kimon School) and Motoda Nagazane (Kumamoto School) had already been influenced by Yi T’oegye. When seen through the key concept “morality,” the debates on Yi T’oegye in the 1940s had little to do with discussions of Yi T’oegye that had unfolded in the Meiji period. Instead, Abe’s interpretations of Yi T’oegye’s philosophy from the perspective of “morality” were rather grounded in a variety of discourses that gained currency in Imperial Japan and Colonial Korea. Abe characterized Yi T’oegye as “the founder of morality studies in the peninsula and the pioneer of moral philosophy” and he related Yi’s philosophy to the theories of morality proposed by Yamazaki Ansai and Motoda Nagazane, respectively. In particular, Abe tried to shed light on Yamazaki Ansai’s thought from the perspective of “morality.” In this article, I contextualize how the interpretations of Yi T’oegye’s moral philosophy, which the Kimon scholars and Kumamoto Practical Learning scholars (who are often discussed in the context of “Imperial Rescript on Education”) proposed, were closely interconnected. 이 글은 일본의 대표적인 이퇴계연구자였던 아베 요시오(阿部吉雄)가 게이죠(京城)제국대학 조교수 시절의 1944년에 저술한 『이퇴계』(‘일본교육선철총서’ 최종권인 제23권)에 이르기까지의, 근대 일본의 이퇴계연구의 발자취를 담론 분석의 시선에서 고찰한 것이다. 이를 위한 분석 대상은 메이지(明治)시대 이후의 ‘기몬(崎門, 야마자키 안사이[山崎闇齋]학파)’과 ‘구마모토(熊本)실학파’의 이퇴계를 둘러싼 논의들이다. 『이퇴계』에는 학문적 계통이 서로 다른 ‘기몬’의 이퇴계론과 ‘구마모토실학파’의 그것이 전체적으로 결합된 서사가 보인다. 이와 같은 양 학파가 통합된 형태의 이퇴계론은, 히젠(肥前) 히라도(平戸)번의 유학자 구스모토 세키스이(楠本碩水)의 문인이었던 오카 나오카이(岡直養)가 1940년에 정정 보완해 간행한 『기몬학맥 계보(崎門学脈系譜)』의 오카 나오카이 편록(編録) 「기몬학맥 계보 부록일(崎門学脈系譜付録一)에 이미 보이고 있다. 여기에서 야마자키 안사이 및 모토다 나가자네(元田永孚)가 함께 이퇴계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이퇴계연구의 단서가 보이는 것이다. 본 논문은 이와 같은 1940년대의 이퇴계담론을, 주로 “황국의 도(道)”로서의 ‘도의(道義)’라는 키워드로 분석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20세기 초를 전후한 메이지 시기의 이퇴계담론은 그 같은 ‘도의’ 관점으로 고찰하기 곤란하다는 것, 또 그것이 1940년대를 전후한 이퇴계담론과 연속되지 않는 측면이 보인다. “황국의 도”로서의 ‘도의’ 시점에서 명확히 이퇴계사상을 논하는 아베의 『이퇴계』 등장은 이퇴계담론에만 국한되지 않는, 전후(前後)의 제국 일본 및 식민지 조선에서의 다양한 담론 공간의 변화와 연계되어 있다. 아베는 『이퇴계』에서 이퇴계를 “반도에서의 도학의 교조”라고 규정하면서 야마자키 안사이 및 모토다 나가자네의 ‘도의사상’을 이퇴계의 그것과의 관계 속에서 논하고 있는 바, 특히 야마자키 안사이의 사상을 ‘도의’의 관점에서 조명하려는 입장은 이미 1939년의 글에서도 나타난다. 본고에서는 이처럼 메이지시대 이후의 ‘기몬’의 이퇴계론과 더불어, 주로 ‘교육칙어’의 문맥에서 발화되기 시작한 ‘구마모토실학파’ 및 이퇴계와의 관계를 둘러싼 논의에 관해 고찰하고자 한다.

      • KCI등재

        ‘道義의 제국’과 식민지조선의 내셔널 아이덴티티

        강해수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08 한국문화 Vol.41 No.-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consider “national identity” in Colonial Korea. What was national identity in Colonial Korea, a society without “nationhood”? If it did exist in what way was it created? If the creation of the national identity by Colonial Korean intellectuals was formed as a thing in opposition to the imperial Japanese construct that national identity equaled imperial identity what exactly was it? Under the all-out war system that accompanied the outbreak of the Sino-Japanese War, what kind of conditions prevailed that made the production of a national identity in Colonial Korea possible? And was there continuity or discontinuity of this national identity after “liberation” from Japan in 1945? In order to carry out this research on the “joint ownership” of Korean nationality, this study focuses on national identity in Colonial Korea in the 1930s and 1940s. In the “National Studies” (Joseon Studies) of the 1930s and 1940s we can find an emphasis on the analysis of the discourse of “morality and righteousness” as in the “Rhetoric of the Empire” between Imperial Japanese and Colonial Korean intellectuals after the Sino-Japanese War. The discourse of “morality and righteousness” also occupied the central position in the formation of Korean national identity after “liberation”. This study examines how the colonial-period discourse on “morality and righteousness” among Korean intellectuals of Colonial Korea in the 1930s and 1940s prepared the ground for post-liberation discourse on national identity.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consider “national identity” in Colonial Korea. What was national identity in Colonial Korea, a society without “nationhood”? If it did exist in what way was it created? If the creation of the national identity by Colonial Korean intellectuals was formed as a thing in opposition to the imperial Japanese construct that national identity equaled imperial identity what exactly was it? Under the all-out war system that accompanied the outbreak of the Sino-Japanese War, what kind of conditions prevailed that made the production of a national identity in Colonial Korea possible? And was there continuity or discontinuity of this national identity after “liberation” from Japan in 1945? In order to carry out this research on the “joint ownership” of Korean nationality, this study focuses on national identity in Colonial Korea in the 1930s and 1940s. In the “National Studies” (Joseon Studies) of the 1930s and 1940s we can find an emphasis on the analysis of the discourse of “morality and righteousness” as in the “Rhetoric of the Empire” between Imperial Japanese and Colonial Korean intellectuals after the Sino-Japanese War. The discourse of “morality and righteousness” also occupied the central position in the formation of Korean national identity after “liberation”. This study examines how the colonial-period discourse on “morality and righteousness” among Korean intellectuals of Colonial Korea in the 1930s and 1940s prepared the ground for post-liberation discourse on national ident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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