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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도유학’과 ‘도의’ 담론, 그리고 식민지조선

        강해수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2 한국학연구 Vol.0 No.28

        이 논문은 식민지조선에서 발화되었던 ‘황도유학’이란 용어 및 그 담론을, 한국의 기존 연구와는 달리 당시 제국일본 내의 담론 전개와의 관련 속에서 고찰한 것이다. 즉 근세 일본의 ‘황도’ 담론의 전개를 먼저 살펴본 후, 주로 1930년대 초·중기 이후의 ‘일본정신’론의 회자 속에서 발화된 “황도에 醇化된 유교”로서의 ‘일본유교의 성립’의 담론에 관해 고찰하였다. 그 과정에서 일본의 “儒祖 儒宗”으로서의 ‘하카세 와니[博士 王仁]’ 상이 등장하는 의미에 관해서도 함께 논하였다. 그 후 이런 ‘일본유교’ 담론은 식민지조선에서는 ‘황도유학’이란 이름으로 전개되어가는 바, 이를 특히 조선총독부 및 경학원과 ‘조선유도연합회’ 인사들의 ‘도의’ 담론과의 상관 관계 하에서 분석하였다. 아울러 이 과정에서 이퇴계가 “조선 도의철학의 창시자”로 조명되는 의미와, 그의 연속성 문제를 해방 후의 박종홍의 이퇴계론에서 찾아보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고찰을 통해, 전후 일본뿐만 아니라 식민지 시기로부터 현재까지 연속되어온 한국의 권위적인 정치구조가 초래한 딜레마적 상황을, 이 ‘황도유학’ 담론과의 연관 속에서 생각해보고자 하였다. 本論文は, 植民地朝鮮で用いられた「皇道儒学」という語およびその言説を, 従来の韓国での研究の視点とは異なり, 当時の帝国日本における言説展開との関わりの中で考察したものである。 まず, 近世日本以来の「皇道儒学」言説の展開を概観した。 そして, 主に1930年代の初・中期より「日本精神」論が膾炙する中で語られた「皇道に醇化になった儒教」としての「日本儒教の成立」の言説について探った。 またその過程で, 日本の「儒祖 儒宗」としての「博士王仁」像が登場する意味についても論じた。 その後, この「日本儒教」言説は植民地朝鮮では「皇道儒学」として展開していくが, こうした言説を, ことに朝鮮総督府および経学院と「朝鮮儒道連合会」儒者における「道義」言説との相関関係の中で分析した。同時に, この過程で16世紀の朝鮮王朝の儒者李退渓が「半島における道義哲学の創始者」として照らし出される意味と, その言説の連続性の問題を解放後の朴鍾鴻の李退渓論において探った。 そしてこうした考察を通して, 戦後日本だけではなく, 植民地時期から現在まで連続してきた韓国の権威的な政治構造などがもたらしたジレンマ的状況を「皇道儒学」言説との関わりで考えた。

      • 植民地朝鮮における「東方」という〈境界〉と‘民族知'の形成

        姜海守 동북아시아문화학회 2003 동북아시아문화학회 국제학술대회 발표자료집 Vol.- No.-

        본 연구는 ‘帝國日本’과의 ‘思想連鎖’, 혹은 ‘知의 回路’와의 연계 속에서 성립된 「植民地 朝鮮에 있어서의 ‘國學的 學知’의 形成」이라는 필자 관심의 연장선상에서 진행되는 연구이다. 여기서 ‘學知’라 함은 여러 학문으로 구성된 言說(談論)공간을 가리킨다. 특히 ‘國學的 學知’는 ‘民族’과 ‘傳統’, 그리고 ‘自己’를 表象하는 학문을 의미한다. 현재까지의 연구 결과 近代 朝鮮의 ‘國學的 學知’는, 1920,30년대에 성립된 ‘日本版 오리엔탈리즘’과의 대항관계에서 형성되었음이 주목된다. 植民地 時期 대표적 지식인의 한 사람인 崔南善이 1927년에 간행한 『不咸文化論』은 이러한 과제를 해명하는 데 적절한 소재 중의 하나이다. 이 텍스트의 서술을 계기로 그가 ‘親日派’로 전향하였다는 현재까지의 평가와는 달리, 崔南善의 ‘不咸文化’論 구상 자체는 1922년에 출판된 『朝鮮歷史通俗講話 開題』에 이미 나타나 있다. 여기서 그는 일본인에 의한 古蹟調査事業에 충격을 받고, 朝鮮人에 의한 ‘朝鮮學’의 구축을 강조하였다. 즉 白鳥庫吉와 內藤湖南 등이 주도하는 ‘東洋學’의 일환으로서의 朝鮮 연구에 대항하기 위해 ‘朝鮮學’의 필요성을 주창한 것이다. 崔南善은 『不咸文化論』의 서두에서도 朝鮮을 중심으로 한 “東洋學의 참된 건립”을 저술의 주요 동기라고 밝혔다. ‘支那’라는 용어의 사용이 “日本이 주체가 되는 東洋學을 기술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스테판 다나카(Stefan Tanaka)의 지적처럼, 崔南善은 朝鮮을 중심으로 하는 ‘東洋學’을 구축하기 위해 『不咸文化論』에서 朝鮮, 日本 등과는 문화적 원류를 달리하는 他者로서의 中國, 즉 ‘支那(文化)’觀을 克明하게 드러내었다. 그러한 전제 위에서 崔南善은, 日本人 學者들의 ‘檀君否認(抹殺)論’에 대항하여, ‘東方 = 不咸文化圈’에서 차지하는 檀君의 表象化 작업을 적극적으로 시도하였고, 이 지역에서의 朝鮮의 君臨을 의미하는 ‘觀念的 帝國’ 또는 ‘文化的 아시아主義’를 설계하였다. 『不咸文化論』과 그 이후에 전개된 일련의 ‘朝鮮神道’, ‘固有信仰’論이 日本의 ‘天皇制’ 및 ‘國家神道’에 대한 이해와의 쌍곡선상에서 전개되고 있는 점도 이러한 문맥에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朝鮮’ 혹은 ‘民族’이라는 메터 내러티브의 구성에는 ‘比較言語學’, ‘比較人種, 人類學’, ‘比較神話, 宗敎學’, ‘民族心理學’, ‘民俗學’ 등 ‘比較’를 중심으로 하는 ‘近代的 學知’가 수용되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필자는 여기서 崔南善의 『不咸文化論』이 ‘日鮮同祖論’에 同調한 텍스트라거나 그 사회적 영향력이 미약했다는 지금까지의 평가에 주목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텍스트가 1920년대 植民地 時期에 ‘自己’를 表象하는 ‘近代的 境界’ 혹은 ‘自己淵源’의 거점으로서의 ‘東方’을 구성한 것으로 보고자 하며, 아울러 그것이 오늘날의 한반도에서 어떻게 民族的인 ‘自己言及’的 言說의 무대로 기능해 왔는가를 함께 살피고자 한다. 본 연구는 동아시아, 구체적으로는 韓國과 日本에서의 오리엔탈리즘의 침투를, ‘近代的 學知’의 도입과 전개라는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이 오늘날까지 通用되고 있는 ‘韓國思想史’, ‘日本思想史’라는 一國思想史的인 記述을 뛰어넘는 인식을 확보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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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道義의 제국’과 식민지조선의 내셔널 아이덴티티

        강해수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08 한국문화 Vol.41 No.-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consider “national identity” in Colonial Korea. What was national identity in Colonial Korea, a society without “nationhood”? If it did exist in what way was it created? If the creation of the national identity by Colonial Korean intellectuals was formed as a thing in opposition to the imperial Japanese construct that national identity equaled imperial identity what exactly was it? Under the all-out war system that accompanied the outbreak of the Sino-Japanese War, what kind of conditions prevailed that made the production of a national identity in Colonial Korea possible? And was there continuity or discontinuity of this national identity after “liberation” from Japan in 1945? In order to carry out this research on the “joint ownership” of Korean nationality, this study focuses on national identity in Colonial Korea in the 1930s and 1940s. In the “National Studies” (Joseon Studies) of the 1930s and 1940s we can find an emphasis on the analysis of the discourse of “morality and righteousness” as in the “Rhetoric of the Empire” between Imperial Japanese and Colonial Korean intellectuals after the Sino-Japanese War. The discourse of “morality and righteousness” also occupied the central position in the formation of Korean national identity after “liberation”. This study examines how the colonial-period discourse on “morality and righteousness” among Korean intellectuals of Colonial Korea in the 1930s and 1940s prepared the ground for post-liberation discourse on national identity.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consider “national identity” in Colonial Korea. What was national identity in Colonial Korea, a society without “nationhood”? If it did exist in what way was it created? If the creation of the national identity by Colonial Korean intellectuals was formed as a thing in opposition to the imperial Japanese construct that national identity equaled imperial identity what exactly was it? Under the all-out war system that accompanied the outbreak of the Sino-Japanese War, what kind of conditions prevailed that made the production of a national identity in Colonial Korea possible? And was there continuity or discontinuity of this national identity after “liberation” from Japan in 1945? In order to carry out this research on the “joint ownership” of Korean nationality, this study focuses on national identity in Colonial Korea in the 1930s and 1940s. In the “National Studies” (Joseon Studies) of the 1930s and 1940s we can find an emphasis on the analysis of the discourse of “morality and righteousness” as in the “Rhetoric of the Empire” between Imperial Japanese and Colonial Korean intellectuals after the Sino-Japanese War. The discourse of “morality and righteousness” also occupied the central position in the formation of Korean national identity after “liberation”. This study examines how the colonial-period discourse on “morality and righteousness” among Korean intellectuals of Colonial Korea in the 1930s and 1940s prepared the ground for post-liberation discourse on national ident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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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케우치 요시미의 ‘방법으로서의 아시아’와 ‘조선’이라는 토포스

        강해수 국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5 일본공간 Vol.18 No.-

        This paper is to figure out what we can still learn from Takeuchi Yoshimi(竹内 好)’s two articles of “Asia as a Method” and “Pan-Asianism” to understand the topos of Choson at that time and Korea now. In other words, in writing this paper, there are two ultimate questions I deal with. What roles and positions do Choson or Korea have in his “Pan-Asianism”? What does it mean to talk about “Asia as a Method” now in Korea? By taking a closer look at what Takeuchi Yoshimi proposed in these two articles, I will try to find out what we can still learn from his “Asia” discourse. And hopefully, I will try to use it to question and problematize recent “East Asia” discourses of our own time. 이 논문은 이 글은 ‘중국(문학)연구자’로 알려진 다케우치 요시미(竹内好)의 ‘방법으로서의 아시아’ 및 ‘아시아주의’론의 논지를 ‘한국(조선)’이라는 장소에서 되새겨본 것이다. 여기에는 식민지 경험을 가진 ‘한국(조선)’이 다케우치의 ‘아시아주의’론에서 어떠한 위상을 가지는가 하는 문제와, ‘방법으로서의 아시아’를 말한다는 것이 한국에서 어떠한 문맥을 가질 수 있는가 하는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다케우치가 1963년 8월에 「아시아주의의 전망」을 발표했을 당시, 일본의 조선사연구자들을 비롯한 역사연구자들로부터 격렬한 비판이 일어났다. 이러한 상황은 현재도 그다지 다르지 않다. 당시의 비판에 대한 다케우치로부터의 반박은 단발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나, 대체로 그가 주장하고자 했던 바는 여기에서 엿볼 수 있다. 본고에서는 이처럼 다케우치가 당시에 ‘아시아주의’론 및 ‘방법으로서의 아시아’를 통해 제기하고자 하였던 문제를, 현재의 ‘우리의 물음’으로 검토하고 그 의미를 묻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일본의 ‘포스트 다케우치’ 담론을 전개한 연구자들의 한국에서의 번역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를 함께 생각해보고자 하였다. 이러한 물음은 아시아의 ‘동시대적 상황’과의 부단한 연관 속에서, 앞으로의 한중일의 다케우치연구의 의미를 제고하기 위한 중요한 과제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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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 일본의 ‘동아의 주자학’과 이퇴계

        강해수 영남퇴계학연구원 2020 퇴계학논집 Vol.- No.26

        This article explores the pathway of research on Yi T’oegye’s philosophy in modern Japan with a focus on Abe Yoshio (a representative scholar of Yi T’oegye) who published a book entitled YiT’oegye in 1944 when he was an assistant professor at Keijō Imperial University. By examining what both the scholars of the Kimon (Yamazaki Ansai) School and those of the Kumamoto Practical Learning School discussed about Yi T’oegye’s philosophy, I find that Abe actually combined the interpretations of both schools, which maintained different academic orientations, into a coherent whole. Before Abe amalgamated the interpretations of both schools, Oka Naokai (a disciple of Kusumoto Sekisui who was a Confucian scholar in the Hirado domain of Hizen) had already suggested such amalgamation in his edited volume Kimongaku myakukeifufuroku(崎門学脈系譜付録) in 1940. Oka’s volume clearly showed that both Yamazaki Ansai (Kimon School) and Motoda Nagazane (Kumamoto School) had already been influenced by Yi T’oegye. When seen through the key concept “morality,” the debates on Yi T’oegye in the 1940s had little to do with discussions of Yi T’oegye that had unfolded in the Meiji period. Instead, Abe’s interpretations of Yi T’oegye’s philosophy from the perspective of “morality” were rather grounded in a variety of discourses that gained currency in Imperial Japan and Colonial Korea. Abe characterized Yi T’oegye as “the founder of morality studies in the peninsula and the pioneer of moral philosophy” and he related Yi’s philosophy to the theories of morality proposed by Yamazaki Ansai and Motoda Nagazane, respectively. In particular, Abe tried to shed light on Yamazaki Ansai’s thought from the perspective of “morality.” In this article, I contextualize how the interpretations of Yi T’oegye’s moral philosophy, which the Kimon scholars and Kumamoto Practical Learning scholars (who are often discussed in the context of “Imperial Rescript on Education”) proposed, were closely interconnected. 이 글은 일본의 대표적인 이퇴계연구자였던 아베 요시오(阿部吉雄)가 게이죠(京城)제국대학 조교수 시절의 1944년에 저술한 『이퇴계』(‘일본교육선철총서’ 최종권인 제23권)에 이르기까지의, 근대 일본의 이퇴계연구의 발자취를 담론 분석의 시선에서 고찰한 것이다. 이를 위한 분석 대상은 메이지(明治)시대 이후의 ‘기몬(崎門, 야마자키 안사이[山崎闇齋]학파)’과 ‘구마모토(熊本)실학파’의 이퇴계를 둘러싼 논의들이다. 『이퇴계』에는 학문적 계통이 서로 다른 ‘기몬’의 이퇴계론과 ‘구마모토실학파’의 그것이 전체적으로 결합된 서사가 보인다. 이와 같은 양 학파가 통합된 형태의 이퇴계론은, 히젠(肥前) 히라도(平戸)번의 유학자 구스모토 세키스이(楠本碩水)의 문인이었던 오카 나오카이(岡直養)가 1940년에 정정 보완해 간행한 『기몬학맥 계보(崎門学脈系譜)』의 오카 나오카이 편록(編録) 「기몬학맥 계보 부록일(崎門学脈系譜付録一)에 이미 보이고 있다. 여기에서 야마자키 안사이 및 모토다 나가자네(元田永孚)가 함께 이퇴계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이퇴계연구의 단서가 보이는 것이다. 본 논문은 이와 같은 1940년대의 이퇴계담론을, 주로 “황국의 도(道)”로서의 ‘도의(道義)’라는 키워드로 분석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20세기 초를 전후한 메이지 시기의 이퇴계담론은 그 같은 ‘도의’ 관점으로 고찰하기 곤란하다는 것, 또 그것이 1940년대를 전후한 이퇴계담론과 연속되지 않는 측면이 보인다. “황국의 도”로서의 ‘도의’ 시점에서 명확히 이퇴계사상을 논하는 아베의 『이퇴계』 등장은 이퇴계담론에만 국한되지 않는, 전후(前後)의 제국 일본 및 식민지 조선에서의 다양한 담론 공간의 변화와 연계되어 있다. 아베는 『이퇴계』에서 이퇴계를 “반도에서의 도학의 교조”라고 규정하면서 야마자키 안사이 및 모토다 나가자네의 ‘도의사상’을 이퇴계의 그것과의 관계 속에서 논하고 있는 바, 특히 야마자키 안사이의 사상을 ‘도의’의 관점에서 조명하려는 입장은 이미 1939년의 글에서도 나타난다. 본고에서는 이처럼 메이지시대 이후의 ‘기몬’의 이퇴계론과 더불어, 주로 ‘교육칙어’의 문맥에서 발화되기 시작한 ‘구마모토실학파’ 및 이퇴계와의 관계를 둘러싼 논의에 관해 고찰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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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도유학’의 계보학 -동양문화학회ㆍ다이토(大東)문화학원ㆍ사문회(斯文會)에서 ‘황도’와 ‘국체’-

        강해수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21 한국학연구 Vol.- No.62

        이 글은 1920년대부터 태평양전쟁 종전에 이르는 제국 일본의 ‘유교ㆍ유학’ 담론을 ‘황도유학(교)’의 계보학적 측면에서 고찰한 것이다. 여기에는 대외적으로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서구사조에 대한 일본 사회의 반동과 만주국 성립에 따른 국제연맹 탈퇴 후의 ‘고립 일본’이라는 ‘비상시’의 ‘황도’ 및 ‘국체’ 창출의 필요성과 연관 있다. 이는 “황도 및 국체에 순화(醇化)된 유교”로서의 ‘일본유교’ 혹은 ‘황도유학(교)’ 개념의 창출로 이어진다. 이의 진원지가 바로 다이토(大東)문화학원이다. 그러나 이의 설립은 대내적으로 ‘한문과(漢文科)폐지’론의 목소리에 대항해 발족된 ‘동양문화학회’가 그 기반이 되었다. “황도 및 국체에 순화(醇化)된 유교”라는 내러티브는 또 당시 최대의 ‘유교ㆍ유학(자)’ 단체였던 ‘사문학회’로 그 영향이 파급된다. 본 논문에서는 이와 같은 ‘일본유교’ 혹은 ‘황도유학(교)’의 계보학을 추적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작업은 나아가, 당해 시기 식민지 조선에서 정책적으로 ‘실천(articulation)’되었던 ‘황도유학’ 담론의 사고(思考)연환을 새롭게 조명하는 기초적 작업이 될 것이다. 本稿は、1920年代から太平洋戦争の終戦に至るまでの帝国日本における「儒教·儒学」言説の形成を、「皇道儒学(教)」の系譜学考察により明らかにするものである。この言説の形成には、日本社会における第一次世界大戦後の西欧思潮に対する反動と、満州国成立と国際連盟脱退によって生じた「孤立日本」という対外的な「非常時」における「皇道」および「国体」創出の必要性が関わっている。そして、それは、「皇道及国体ニ醇化セル儒教」としての「日本儒教」もしくは「皇道儒学(教)」概念の創出へと展開していく。言説形成の中心地となったのは、大東文化学院であった。同学院の設立は、対内的には、「漢文科廃止」論の声に対抗する形で発足した「東洋文化学会」を基盤とした。その「皇道及国体ニ醇化セル儒教」というナラティブは、当時の最大の「儒教·儒学(者)」団体であった「斯文会」に影響を与えている。 本論文では、こうした「日本儒教」もしくは「皇道儒学(教)」の系譜学を追跡しようとするものである。その作業はまた、同時期の植民地朝鮮において政策的に実践(articulation)された「皇道儒学」言説の思考連環を改めて照らし出す基礎的な仕事にもなるであろ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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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 후,전후의"도의"담론과 이퇴계 -<도의의 제국>론의 사정(射程)

        강해수 퇴계학부산연구원 2009 퇴계학논총 Vol.15 No.-

        현대 역사는 이미 전쟁의 비극의 피안에 건설되어야 할 새로운 세계질서의 구도를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 이 구도 속에 구체적인 도의의 내용을 채워 넣는 일이야말로, 현대 국가철학에 부여된 절실한 임무라 해야 할 것이다(오다카 도모오[尾高朝雄]『國家哲學』)"퇴계사상을 알지 못하고서 한국학을 말할 수 없는 것처럼,퇴계사상을 알지 못하고서는 근대 일본문화의 심원을 명확히 할 수없다"(『日本刻版李退溪全集』간행에 즈음한 『퇴계학보』의 광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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