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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락사에 관한 기독교적 고찰 : 영남지역 신학도들이 이해한 안락사에 대한 윤리적 고찰

        안효욱 영남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2003 국내석사

        RANK : 249647

        본 논문에서는 안락사에 대한 기독교적 고찰을 함으로서 신학적 의미의 생명을 생각해 볼 때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주셨고 하나님께서 친히 인간을 자기의 형상으로 만드신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죽음의 문제도 우리의 죄와 불순종으로 인해 당연히 이 세상에서 고통 받고 사는 인생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었다. 이러한 인간이 생명공학의 발전으로 생명의 연장이 이루어졌고 더 나은 삶의 질의 문제에 직면함으로 죽을 때도 편안한 죽음을 선택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안락사라는 것을 생각한 것이다. 즉 안락사는 죽음이 임박한 환자가 견딜 수 없을 만큼의 극심한 고통으로 인한 경우, 의학적으로도 소생의 가능성이 전혀 없을 때 인위적인 방법으로 생을 마감하게 하려는 것을 가르친다. 그러나 성경은 죄로 말미암아 죽음에 이르며 고통을 피하기 위하여 죽음을 인위적으로 선택한다는 것은 명백한 하나님이 주신 생명에 대한 살인행위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으며 어떤 방법으로도 죽일 수 없다는 것 뿐 만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존엄한 가치로 유지시켜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서 안락사는 죽음의 문제에 대한 바른 이해에서 시작되어야 하며 하나님이 주신생명은 안락사라는 의료적 문제나 사회 법적 문제보다 기독교인으로서 우리의 신앙양심의 문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각 국에서는 안락사법안 마련되어 시행되고 있는 것을 볼 때 우리로서는 충격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 우리 영남지역 신학도들이 이해한 안락사에 대한 윤리적 고찰에서 신학도들은 안락사 문제와 그에 따른 윤리적 문제를 설문을 통해서 알아보았다. 여기에서 안락사 문제를 생각해 볼 때 인간의 생명과 관련해서 신학도들은 환자의 극심한 고통 경감에 대해서 안락사를 찬성한다는 응답자들이 많았지만 가족의 고통경감을 덜어주어야 한다는 의미에서와 가족들의 경제적 부담 때문에 안락사를 동의한다고 하는 사실에 대해서 많은 응답자들이 그것에 동의하지 않은 사실을 발견한다. 이것은 아직도 우리 한국사회가 정서적으로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음을 생각할 수 있다. 힘들지만 어려움을 같이 하겠다는 뜻으로 생각 될 수 있다. 또한 안락사에 대해서 반대하는 입장을 살펴볼 때 생명의 존엄성 때문에 반대한다는 응답자가 매우 많다는 사실을 보면 신학도들이 하나님이 주신 생명에 대해서 귀중히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반영하며, 종교적인 이유와 윤리적인 이유에서도 많은 응답자들이 반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에서 신학도들은 생명을 사랑하고 윤리적으로도 바른 신학관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소생가능성 없는 환자에 대한 의사의 치료 중단에 대한 윤리적 이해를 봤을 때 치료를 중단에 대해서도 안 된다는 입장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데까지 치료를 해줌이 윤리적으로 찬성함을 볼 수 있다. 이 설문에 대해서 연령을 보면 다수의 응답자가 젊은 층임을 볼 수 있고 청. 장년기에 많은 사람들이 응답해 주었다. 이러한 사실을 종합해 볼 때 아직까지 우리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안락사에 대해서는 찬성하는 경향이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생명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죽음이란 죄로 인해 이 사랑의 관계에서 끊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은 귀하고 아름다운 것이며, 죽음은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다. 인간의 생명이 기능주의적으로 무가치한 것으로 취급받아서 안락사를 행한다거나 또한 죽음을 필요이상으로 미화하여 안락사를 자행하는 것은 기독교 윤리적인 면에서 철저히 배격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성서에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인간에게 살인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고 생명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다. 설문을 하면서 요즘 젊은 세대들이 효에 대한 관심이 없고 점점 서구화되어 가는 이 때에 안락사를 찬성하지 않겠느냐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의외로 신학도 들이라서 인지 이러한 예상을 뒤엎은 사실을 볼 때 내심 반가운 마음도 앞선다. 요즈음에 생명을 경시하는 풍조가 만연하는 시대에 스스로 생명을 끓는 현실에서 우리는 생명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응답해야 할 것인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이런 사회의 저변에 놓여 있는 자살이나 안락사에 대해서 한국 교회에서는 좀더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생명의 존엄성에 대해서 하나님이 생명의 주권자 되심을 주지시키고, 아직도 불치의 병으로 고통 받는 환자에 대해서 죽음에 대한 공포를 부활의 소망으로 위로하며 생의 마지막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는 사실을 심어주어 자연스런 죽음을 맞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상과 같이 기독교인의 생명과 죽음에 대한 바른 이해는 안락사를 거부하며 인간의 생명이 무가치한 것으로 취급받아 안락사를 행한다거나 또 죽음을 필요이상으로 미화시켜 안락사를 자행하는 것은 기독교 윤리적인 면에서 배격되어야 한다.

      • 칼빈의 성화론에 관한 연구

        박성근 영남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2003 국내석사

        RANK : 249631

        칼빈은 성화를 가장 명쾌하게 체계화한 신학자이다. 그의 성화교리는 교리적으로 타당하며, 논리적으로 설득력이 있다. 그가 말하는 성화는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가 하나님의 요구하심에 따라 성령의 능력으로 그분의 사역하심에 참여하는 진지한 응답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거룩하게 된 인간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동참하는 기본적인 자세이다. 성화는 전적으로 하나님 편에서 주어지는 것으로 칭의와 함께 수동적이며 이중적인 은총이다. 그러므로 칼빈의 성화는 인간의 편에서 공로의 잣대로 삼거나 업적의 수행으로써 자랑하려는 경향성을 철저하게 배제하는 구도를 가진다. 칼빈의 성화는 칭의에 따른 회개와 동시에 주어지는 중생의 사건이다. 칭의가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주어지는 반면, 성화는 성령의 은혜로운 역사이다. 이 두 가지는 모두 하나님을 즐겁게 하는 최고의 요체이다. 칭의가 일시적인 것이라면 성화는 점진적이고 지속적인 과정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성화의 삶을 통하여 칭의를 견고하게 한다. 칭의와 성화는 신앙에 있어서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으로 필요충분조건의 관계에서 상호 의존적이다. 그러나 성화가 칭의에 대하여 어떤 변수로써의 기여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이미 칭의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취득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써 독립성과 완전성을 가진다. 그러나 칼빈이 주장하는 성화는 칭의 이후에 반드시 칭의를 필연적으로 수행(隨行)해야하는 동반자로 이해된다. 칼빈에게 있어서 성화는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원인이 되며, 일평생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 걸어가야 할 제자도의 삶이다. 이를 칼빈은 경건의 삶으로 규정하면서 독특한 제자도를 설정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인의 삶은 곧 경건의 삶이며, 그 삶은 자기를 부정함으로써 하나님을 신뢰하고, 자기 십자가를 짊으로써 하나님 앞에 겸손해지고, 내세에 대한 명상을 통하여 종말을 바라보며, 현세를 선용함으로써 종말을 현재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성화의 삶은 현세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현세를 긍정하며 적극 활용하는 것이다. 이처럼 칼빈의 성화는 폐쇄된 주제가 아니라 성도의 삶의 자리를 폭넓게 하고, 현세를 더욱 풍성하게 하는 개방성을 가진다. 칼빈은 성화의 삶을 성령하나님께 완전히 의존시킨다. 성화를 주도하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사역인 성화의 영역을 축소하거나 통제하여서는 안 된다. 만약 성화의 범위를 특정 대상이나 특정한 분야로 제한한다면 그것은 성령의 사역을 제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와 성도는 보다 적극적인 성화의 사역에 참여함으로 보다 적극적인 성화의 삶을 살기 위해 힘써야 한다. 특별히 성령의 사역은 생명을 살리는 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것은 칼빈이 이미 주지한 사실이다. 그 범위는 육체적인 생명과 영적인 생명을 모두 포함한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의 성화론은 지구촌의 모든 생명을 아우르는 성령의 사역에 참여하는 은혜의 수행으로 볼 수 있다. 칼빈의 성화론은 종말론에 있어서도 효력이 있다. 성화가 천국에 이르게 하지는 못하지만 성화는 하나님께서 선택한 사람들을 인도하여 천국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그리고 완전한 성화는 종말에 실현된다고 보았다. 이는 죽음이후에 예수그리스도가 재림할 때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성화가 종말에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의 삶의 윤리는 약화되고 말 것이다. 그리고 종말의 구원과 부활 역시 값싼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스스로 자신의 구원과 종말을 보배롭고 풍성하게 맞이하도록 성실하게 예비할 필요가 있다. 이는 오로지 주어진 현세에서 성화의 삶을 삶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이 칼빈의 입장이다. 이제 칼빈의 성화론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은 거룩한 공동체의 일원으로써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삶으로 참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1인칭 단수로 표현되는 우리의 신앙적 사고와 삶의 언어가 1인칭 복수로 바뀌어져야 한다. 즉 '내 믿음, 내 가정, 내 교회, 내 나라'라고 하는 편협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우리모두의 믿음, 우리모두의 가정, 우리모두의 교회, 우리모두의 지구촌' 등 공동체와 타자(他者)들을 향해 나아가는 신앙적 사고를 가져야 한다. 성화의 삶은 빛과 같이 적극적이며 능동적이며 포용적이다. 오늘을 살아가는 한국교회와 성도는 이러한 성화의 삶에 대한 취약한 한계를 극복하고 역동적인 성화의 삶을 살 때 한국교회는 미래는 견고하게 설 것이며, 세상 속에서 그 영향력은 확장 될 것이다. 그리고 성화의 삶이 있는 그 현장에는 마침내 진정한 샬롬의 평화가 임할 것이다.

      • 현대선교신학의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에 관한 연구

        이동혁 영남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2003 국내석사

        RANK : 249631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님의 선교"의 정확한 기원을 살펴보면서 하르텐슈타인이 본래 의도했던 바를 흔히 "하나님의 선교"가 공식으로 채택되었다고 알려진 빌링겐 대회와 연관하여 살펴보았다. 그러나 하르텐슈타인이 의도하고 목적했던 방향과는 다르게 그의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이해가 발전되어간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선교가 삼위일체 하나님 스스로가 주체가 되시며 그 선교의 목적은 하나님 나라라는 것을 알았다. 이 하나님 나라의 기대 속에 선교가 기초하며 존재한다는 것, 즉 그리스도로 '이미' 시작되었으나 '아직'은 그의 완성을 기다리는 이 중간시기에 수행하여야 할 종말론적 과제임과 동시에 그 하나님 나라에 속한 구원은 하나님 스스로가 이루어 가실 뿐 아니라 그의 구원계획 안에서 이루어짐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하르텐슈타인을 각자의 견해에 따라 서로 다르게 이해할 수 있으나 적어도 그가 지금까지 세계 교회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하나님의 선교"를 가장 먼저 사용한 영향력이 있는 신학자였음을 감안하여 그에 대한 보다 신중한 평가를 내리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일부에서는 "하나님의 선교"를 아주 위험한 급진주의적인 신학으로 이해하고 있을 뿐 아니라, 한편에서는 현재 세계교회 협의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일부 학자들의 "하나님의 선교" 신학을 맹종하고 있는 상황에서 과연 하르텐슈타인이 말하려고 했던 원래의 "하나님의 선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 그러므로 여기서 논자는 "하나님의 선교"의 올바를 이해를 위하여 세 가지 방향을 제시함으로써 이 논문을 마치고자 한다. 첫째, "하나님의 선교"는 통전적 선교신학이다.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세계교회 협의회의 정치적 사회적 참여를 적극적으로 뒷받침하는 급진주의적인 신학이라는 인식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교"를 현재적 종말론의 시각에서 지나치게 해석하였기 때문이며, 이것은 하르텐슈타인이 본래 의도했던 바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그는 종말론적 시각에서 뿐만이 아니라 구속사적인 시각에서 "하나님의 선교"를 또한 말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그가 개종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의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개인적인 회심은 여전히 "하나님의 선교"의 중심이며 언제나 그래야 한다.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또 다른 오해는 영혼구원을 위한 복음전도를 강조하는 복음주의 선교와 적대되는 개념이라는 인식이다. 그러나 복음전도와 사회적 책임은 선교의 양면으로서 서로 뗄 수 없는 관계라는 통전적 선교 이해는 도리어 복음주의자들의 세계선교대회인 로잔 대회에서 존 스토트(John. Stott)에 의해 강하게 주장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교"는 세계교회 협의회의 전유물은 결코 아니며, 오히려 이와 같은 복음주의 선교관을 보완하는 것이다. 우리는 개인 구원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사회적 책임을 다함으로써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게 된다. 둘째, "하나님의 선교"는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의 선교이다. 하르텐슈타인은 선교의 근원이 삼위일체 하나님 스스로이시며 성령의 능력을 통해 모든 사람들과 화해하시는 아들의 파송이 선교의 토대이며 목적임을 분명히 하였다. 그리하여 선교의 근거를 삼위일체의 교리에서만 다루지 않고 기독론에 의존하여 그리스도의 성육신, 십자가와 부활의 역사를 진지하게 수용함으로써 삼위일체에 따른 선교의 근거는 더 나아가서 성령론에서 나타나다. 성령은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현존이 곧 그리스도의 현존이며, 아들의 선교는 성령의 선교로 계속되며, 세계 속에서 그의 제자들의 선교로 구체화 된다. 그리스도의 선교 위임령에는 성령의 약속이 따른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교"는 성령의 선교이다. 이때 성령의 활동에 대한 올바른 판단의 시금석은 삼위일체 하나님, 즉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온 성령이다. 이 성령의 자유로운 활동은 교회의 한계를 넘어서게 된다. 셋째, "하나님의 선교"는 제3세계의 선교신학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제3세계 교회의 강한 도전에 대해 국제선교 협의회는 신학적 대답을 주어야만 하였다. 그리하여 빌링겐 대회는 서구의 우월주의나 정복적인 태도가 아닌 전적으로 "십자가 아래에서의 선교"(빌링겐 대회의 공식 보고서 제목)만이 해답을 줄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에 대해 하르텐슈타인은 서구 교회가 아닌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선교의 주체가 되셔서 그의 나라와 그리스도의 통치를 이 땅에 세우시는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함으로써 진정한 선교가 이루어짐을 말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교"는 제3세계의 도전으로 이루어진 그들의 선교신학인 만큼 6대륙, 특별히 제3세계의 문화와 환경 속에 뿌리를 내리게 하여야 할 것이다.

      • 家族에 의한 주부 우울증 치료에 대하여 牧會相談學의 제안

        남기세 영남신학대학교 대학원 2007 국내석사

        RANK : 249631

        21세기의 목회는 ‘치유의 목회’라는 명제아래 대도시의 일부 큰 교회들과 신학교들에서는 목회상담의 프로그램들을 현장과 교육에 있어서 실행에 옮기고 있다. 그러나 가부장제에 의한 가족문화와 씨족사회의 전통과 단일부락 특유의 폐쇄성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는 농촌의 교회들과 교인들 간의 특수한 갈등들을 안고 있는 농촌교회들은 목회상담학적인 제안들이 목회의 현장에서 절실히 필요하다. 왜냐하면 집안의 문제가 교회의 문제가 되고, 동네의 문제가 교회 안의 문제로 비화가 되기 때문이다. 본 연구논문은 사례에 나타난 대로 지역사회에 살고 있는 내담자의 경우를 대상으로 하여 내담자의 우울증원인과 및 분석을 하면서 목회상담학의 제안을 하고자 하였다. 내담자는 가족체계 구성원들과의 정서적 지지를 받지 못하는 데도 가족간의 경제적인 문제를 내담자 측이 시부모와 주변가족들을 열성적으로 대해 주는 편이다. 여기에다가 분화되지 못한 가족체계에서 볼 수 있는 시부모의 가부장적 권위와 남편의 가부장적 태도 속에서 일상의 삶을 이어 가야 되는 내담자는 상담자와의 대화에서 다음과 같은 태도들을 많이 보였다. 이에 대한 내담자의 우울증 원인 및 분석결과는 다음과 같다. 가족의 기능으로서 정서적 지지기능이 있는데 정서적 지지기능의 역기능적인 면이 개인 및 가족문제의 발단이 되는바, 내담자는 가족 체계 구성원들로부터 그다지 정서적 지지를 받지 못하는 형편인데도 가족간의 경제적인 협조 문제나 시부모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내담자가 거의 일방적으로 헌신을 하는 편이다. 이런 가운데 내담자가 신경증(Neurosis)의 일종인 우울증에 상당히 노출되어 있다고 판단되는 이유는 방어기재의 일종인 투사(projectio) 부정(否定,denial), 반사 감정에 의한 짜증이나 신경질적인 대화자세가 자주 보이는 점, 그리고 대화를 한번 시작하면 대화의 중심점과 간결성이 없이 장황하게 긴 시간을 이어가는 것 등이 자주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방어기재의 일종인 투사(projection) , 부정(否定,denial), 반사 감정에 의한 짜증이나 신경질적인 대화자세가 자주 보이는 점, 그리고 대화를 한번 시작하면 대화의 중심점과 간결성이 없이 장황하게 긴 시간을 이어가는 것 등을 발견한 점이다. 내담자의 우울증세 대하여 목회상담학의 상담가로서 갖추어야 할 상담자의 자세들은 다음과 같다. 내담자의 어려움을 진정으로 들어주면서 공감하려고 노력하는 것, 내담자가 자신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파악하려고 노력하는 것, 내담자에게 우울증을 유발시킨 요인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 내담자가 획득하지 못한 자기 애적(自己 愛的) 욕구의 파악, 내담자에게 공격성이나 분노와 관련된 죄책감의 유무를 판단하는 것, 내담자가 신앙적으로 힘들어하는 것을 파악하는 것, 내담자의 신앙적인 지지구조를 파악하는 것, 내담자가 실현되기 힘든 너무 이상적인 기대를 가지고 있는 경우에는 보다 현실적인 기대를 갖도록 하는 것 등이다. 목회상담자로서 내린 목회상담학적인 결론들은 첫째: 내담자가 진정한 자기정체성 회복과 궁극적이고 역동성이 있는 자기 삶의 목표를 추구하도록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회복하도록 이끌어 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들에게 있어서 모든 관계성에 기초가 되는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성의 不 確立(불 확립)은 인간으로 하여금 진정한 자기의 正體性(정체성)을 갖추지 못하게 하며 삶의 궁극적인 목적도 없이 자기만족과 자기성취라는 人本主義(인본주의)적인 목표들을 따르게 하기 때문이다. 둘째: 내담자들이 사람들과의 관계성, 더 나아가 환경과도 관계성을 회복하도록 하게 하는 것이다. 이유는 모든 인간들에게는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성과 함께 사람들과의 수평적인 관계성이 있는데 사람들과의 관계성이 불안하거나 깨져도 인간의 인격은 심리적 불안이나 장애를 유발하기 때문이다. 셋째: 牧會常談(목회상담)의 本質的(본질적)인 부분은 내담자(혹은 교인)들의 영적이고 심리적인 결함, 왜곡된 자기 방어기재, 해를 끼치는 지배적 신념, 스트레스를 증폭시키는 불안한 성격, 현재의 스트레스 요인들을 정확하게 분석을 함과 동시에 혹시 내담자가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내리막길로 치닫는 것 같은 파괴적인 방법 같은 것들을 선택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다. 넷째: 목회상담사역의 궁극적 목표로서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점들이 있는데 이는 목회상담자들이 내담자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구원의 신비를 체험하도록,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사랑 하심이 체험이 되어 지도록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섯 째: 목회상담가는 내담자 스스로가 변화가 되도록 허용할 수 있어야 한다. 목회상담은 상담자가 일방적으로 내담자를 돕는 다고하기 보다는 상담자가 내담자와 더불어 經驗(경험)과 처지를 이해하면서 관계를 맺고 함께 동반 성장해가는 과정 신학이다. 여섯 째: 상담자는 상담현장이 아닌 다른 곳이나 상담현장에서나 하나님의 성육신의 현존을 깨닫는 신앙의 체험이 있어야 한다. 이런 신앙의 바탕과 목회상담학의 방법들을 가지고 내담자로 하여금 예수께서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한10:10절)고 말씀을 하신 것을 체험하도록 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풍성하고 건강한 삶을 누리게 하려는 데에 있는 것이 목회상담학의 목적이요, 기능인 것이다.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생각은 천 길 물 속과 같아 슬기로운 사람이라야 그것을 길어 올린다”. 라는 말씀이 의미하는 바와 같이 목회상담자는 내담자들이 놓여진 상황을 이해하고 내담자들에게 방향제시를 함에 있어서 자신의 신학적인 견해 때문에 내담자들의 문제에 대해서 신앙이나 신학적인 기준에서 민감한 반응을 보이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본 연구 논문에서 연구자는 사례에 나타난 내담자가 우울증의 극복 및 치유의 과정을 위해 상담자의 입장에서 다음과 같은 조치를 취하였다. 내담자의 남편과 내담자 주변의 가족들과 자주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노출되지 않는 방법을 가지고 그들 서로 간에 적절한 칭찬과 격려를 주고받을 것, 가족들 서로 간에 이해와 공감대를 구축하도록 하게 하면서 아울러 예수 그리스도와의 깊은 만남이 가족들끼리의 화해나 주변 모든 사람들과도 화해를 이루는데 절대적인 도움이 된다는 것과 심어주는데 노력을 하였다. 그리고 내담자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데 있어서도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이 꼭 필요함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성령의 도우심과 찬송의 힘을 상담자도 의지하였고 내담자에게도 이를 알려주었음을 물론이다. 추가적인 제언으로서, 농촌지역의 열악한 목회상담학의 체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총회차원의 목회상담 인프라 망을 구축하거나 최소한 노회 차원에서라도 상담지원체계를 구축해서 활용을 한다면 질적·경제적·시간적·인적자원 면에서 효과의 극대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제도의 도입 시기는 지금이 적절하다고 판단된다. 그리고 이런 제도는 앞으로 한국교회가 생명력 있는 교인들을 양육하기 위해서라도 필요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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