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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外順(Ahn Woi-Soon) 한국정치학회 1996 한국정치학회보 Vol.30 No.2
지금까지 大院君의 隱退, 곧 高宗의 親政이 단행된 계기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밝혀진 바 없다. 다만 갑작스런 崔益鉉의 상소 한 장으로 10년 동 안 鞏固하던 대원군의 권력이 무너졌다는 것이 대체적인 통설이었고, 그 외에는 그 계기가 무엇인지, 그 주체는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밝혀진 바 없다. 그러나 그렇게 鞏固하던 대원군의 권력이 아무런 준비 없이 하루아침의 상소 한 장으로 무너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글은 고종이 스스로 親政意志를 적어도 2년여 동안 키워 왔으며, 그 契機는 對外認識의 변화로부터 온 것임을 遣淸使臣과의 召見 내용을 통해 밝혔다. 고종이 대원군에게 정치를 의탁한 10년, 곧 大院君執政期는 국내정치만큼 대외정책이 중요한 과제였음에도 불구하고 대원군은 그 大綱을 斥邪ㆍ斥洋의 기치 아래 쇄국정책을 고수하며 內政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한편 공고한 대원군의 권력 앞에서 성언이 된 고종이 국왕으로서 독자적인 정치능력을 보유ㆍ발휘하고자 하였으나 여의치 않았다. 이때 遣淸使臣들의 召見을 통한 對外情報가 고종의 정치적 활로를 열어 주었다. 초기 8년 간은 고종도 대원군과 동일한 대외관을 지녔으나, 1872년 4월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던 淸 皇帝가 숙부 恭親王의 攝政으로부터 벗어나 親政하리라는 정보를 접한 고종은 스스로의 처지를 객관적으로 인식하게 되었고, 나아가 親政可能性을 모색하는 계기를 제공받았던 것이다. 또 쇄국적인 조선과는 달리 淸ㆍ日本이 서양과 通好하며 富國?兵을 꾀한다는 정보 역시 조선만 孤立되어 있는 것이 아닌지 懷疑하도록 만들었다. 이후 2년여 동안 고종은 견청사신을 소견할 때마다 使臣들의 답변이 궁할 만큼 적극적인 질문을 행하고 답변을 유도하면서 스스로의 친정의지를 키웠다. 이 와중에 1873년 10월 崔益鉉의 大院君 彈劾上疏가 올라왔고, 이때 모든 時原任 고위관료들이 그를 거세게 탄핵하며 아무도 지지하지 않는 속에서 고종은 홀로 최익현을 두둔하면서 끝내 친정을 결행했다. 즉 최익현의 상소는 단지 고종의 친정을 결행하도록 하는 도화선이었을 뿐이었다. 때문에 친정 후 취했던 고종의 개화정책 추진도, 그 결과의 성패와는 별개로, 단순히 민비측에 따르는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이미 1872년부터 키워온 고종 자신의 대외인식 변화에 따른 능동적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
양승태(Yang Seung-Tae),안외순(Ahn Woi-Soon) 한국정치학회 1999 한국정치학회보 Vol.33 No.1
이 논문은 송시열의 정치사상을 통해 현대 한국 보수주의의 사상사적 기원을 밝히고자 한다. 宋時烈은 17세기 후반, 이른바 國家再造期에 ‘朱子學 保守’를 自任하면서 이후 조선 정치이념의 기틀을 확립한 장본인이다. 송시열의 朱熹 및 朱子學 保守 노력은 단순한 학문적 노선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士大夫(지식인)支配體制를 추구하는 朱子學의 본질과 궤를 같이 하는 것으로서, 朝鮮 사대부지배체제를 보수하려는 것이었다. 이 논문에서는 이를 논증하기 위해, 기존에 宋時烈과 윤휴의 논쟁을 불화차원에서 검토하던 자세에서 벗어나 양자간의 理氣ㆍ性情論의 대립, 인식론상의 대립적 태도, 禮制에 대한 상이한 해석이 각각 道統論에 입각한 知識人, 곧 士大夫支配體制論과 王統論에 입각한 君主支配體制論간의 대립에서 비롯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송시열은 전자를 보수하기 위해 전생애에 걸쳐 ‘守朱子主義’로 일관하였음을 밝혔다. 나아가 바로 이러한 성격이 18세기 이후 노론 집권기의 反西學/反西歐/衛正斥邪로 표현된 조선보수주의 역사로 이어졌다. 이 점에서 송시열의 ‘守朱子主義’가 한국 보수주의의 기원으로서의 위상을 지닌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