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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당 한원진의 도통(道統) 개념 -정통, 학통의 결합과 정치로의 지향-

        송재혁 ( Song Jae Hyeok ) 한국사상사학회 2019 韓國思想史學 Vol.0 No.61

        남당 한원진(南塘韓元震, 1682~1751)은 주자 이후 유학의 도가 동방으로 옮겨와 이이(李珥), 송시열(宋時烈), 권상하(權尙夏)로 이어졌다고 생각했다. 그는 스승인 권상하의 행장에서 비록 권상하가 평생 벼슬을 하지 않아 송시열과 같은 사업의 공로는 없었지만, 전현들의 학문을 잇고 이를 발전시켰다는 이유로 도통(道統)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한원진은 자신이 언급한 도통의 계보를 잇기 위해 평생 노력을 경주했다. 불교와 양명학과 같은 이단, 그리고 같은 주자성리학 내에서도 퇴계학파, 낙학파에 대한 그의 격렬한 비판은 그러한 노력의 실천이었다. 기존 연구에서 김태년은 “입정학(立正學)”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이러한 한원진의 사상을 설명하고 있다(김태년, 2006). 그의 연구는 한원진의 행적을 “학문적 권력을 획득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한원진이 일생동안 끊임없이 보여준 정치로의 지향을 고려한다면, 그가 얻고자 했던 권력은 단순히 학문적인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그는 송시열의 도통에 대해 설명하면서, “천지를 위해 마음을 세우고 생민을 위해 도를 세워, 성대한 사업을 더불어 다툴 수가 없었다.”고 표현하면서 정치적 업적의 측면을 강조했다. 한원진은 이이와 송시열을 본받아 현실정치를 꿈꾸었으며, 이후 실제로 권력으로의 지향을 끊임없이 보여준 인물이었다. 이 글에서는 도통이라는 개념에 주목하여, 실록과 문집에 나타난 한원진의 행적을 순차적으로 추적한다. 그가 사용한 도통의 개념은 이이와 송시열이 그랬던 것처럼, 정치적 업적의 측면인 정통(政統)과 학문적 측면인 학통(學統)이 결합된 것이었다. 한원진은 당대의 군주였던 영조(英祖)를 설득하는 데 실패하고 결국 권상하의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지만, 항상 이이, 송시열과 같은 정치가가 되고자 하는 정치적 지향을 품었던 인물이었다. Han WonJin(韓元震, 1682~1751) believed that after the death of Zhuxi(朱熹) Confucian Dao(the Way) had been transmitted to those scholars in Joseon(東方) including Lee Yi(李珥), Song SiYeol(宋時烈), and Gwon SangHa(權尙夏). As an academic successor of Gwon SangHa, he wrote in Gwon's eulogy that Gwon was one of the transmitters of the daotong(道統) despite the fact that Gwon had never served in the government as Song SiYeol had. Through his whole life, Han made effort to transmit the daotong of the teachers he mentioned. This is why Han strongly disapproved of other schools of neoconfucianism, not to mention heresies including Buddihism and Yangming school. While explaining Han’s thought using the concept of “Lizhengxue(立 正學)”, Kim TaeNyeon’s work does not go further than arguing Han intended to “seize the academic power.” Considering Han’s lifelong orientation to politics, however, his ultimate goal should be more than that. Han wanted to work in real politics and kept trying to hold political power. The supporting evidence is that Han honoured Song SiYeol’s outstanding political achievement, saying Song was the one“make up his mind for the world, build the dao for the people, so there is no one who can compete with him in those great works.” This paper reviews Han’s life in the Annals of the Joseon Dynasty, focusing on the concept of the daotong. Han’s concept of the daotong, similar to those of Lee Yi or Song SiYeol, is the combination of Zhengtong(political orthodoxy, 政統) and Xuetong(academic orthodoxy, 學統). Although Han failed to persuade the then king Youngjo(英祖) and followed suite of Gwon SangHa, he always dreamt of becoming politicians like Lee Yi and Song SiYe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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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 역사를 고치다: 세종 20년 신개(申槩)의 상소와 무인정변(戊寅政變)의 재구성

        송재혁 ( Jae-hyeok Song ) 서울대학교 한국정치연구소 2022 韓國 政治 硏究 Vol.31 No.1

        이 글의 목적은 무인정변(戊寅政變, 1차 왕자의 난)에 대한 정당화의 정치적 수사가 어떠한 변화의 과정을 거쳐 고정되었는지 추적하는 것이다. 1398년(태조 7) 8월 26일, 정변을 일으킨 이방원은 정변의 이름을 “무인정사(戊寅定社)”, 즉 “무인년에 조선의 사직을 안정시킨 사건”으로 부르며 정당화를 시도했다. 이후 정변을 정당화하는 수사로서 무인정변에 대한 기술은 점차 정교하게 변화하였다. 1447년(세종 29) 편찬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는 이러한 기술의 최종본이다. 『용비어천가』의 98장은 무인정변을 다루고 있는데, 『태조실록』 7년 8월 26일의 기록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다. 세종은 재위 후반기에 무인정변과 관련된 기록들을 수정하였고, 『용비어천가』 98장은 이렇게 수정된 기록을 바탕으로 기술된 것이다. 이 글에서는 정변에 대한 기록을 고정시킨 계기로 『세종실록』 20년(1438) 9월 25일의 한 기사에 주목한다. 이 기사는 신개(申槩)라는 인물이 올린 상소와 이에 대한 세종의 대응을 기록하고 있다. 신개는 상소를 통해 ‘병기(炳幾; 기미를 밝힘)’라는 표현으로 태종 이방원의 행위를 기술하는 것이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였다. 후일 누군가 정변을 일으킬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상소를 받은 세종은 몇 개월간의 고민 끝에 일부의 대신들 및 승지들과 문제를 논의하고, 무인정변에 대한 기록을 수정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린다. 실록의 편찬자들은 전지적인 시점에서 몇 개월 동안 일어난 이 사건의 전말을 이 날짜의 기사에 모아서 기록해 두었다. 이 글은 신개가 상소에서 문제를 제기한 ‘병기(炳幾)’의 표현을 중심으로 무인정변의 기록이 변화하는 과정을 고찰한다. 세종 20년 신개의 상소를 중심으로, 『태조실록』의 무인정변에 대한 기록, 정종의 즉위교서와 선위교서, 제릉(태조의 첫째 왕비의 묘, 1404년), 건원릉(태조의 묘, 1409년), 헌릉(태종의 묘, 1422년)의 신도비문과 같은 비문들, 그리고 『용비어천가』에 기록된 무인정변에 대한 기술 등을 분석할 것이다. 당대의 대학자인 권근(權近), 변계량(卞季良), 그리고 집현전의 학사들이 이러한 문건들을 작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작성자의 전유물이 아니라 태종과 세종, 그리고 주요 대신들의 합의를 거친 정치적 수사였다. Since the First Prince’s Rebellion in August of 1398, Joseon’s politicians were trying to find a more sophisticated way of justifying the political upheaval. It seems that the 98th chapter in the Songs of Flying Dragons to Heaven (or Yongbieocheonga, 龍飛御天歌), compiled in 1447 (29th year in Sejong’s reign), was the final version of the description. Making Songs of Flying Dragons to Heaven, King Sejong edited records of the First Prince’s Rebellion in Taejo Silok. This paper focus on the record of September 25, 1438 in Sejong Silok. The article contains Shingae’s petition and King Sejong’s response to it. In this petition, Shingae pointed out that there was a serious problem in describing Taejong Yi Bangwon’s behavior with the expression ‘byeong-gi (炳幾; revealing a sign)’. Shingae’s petition eventually led to the description of 98th chapter in the Songs of Flying Dragons to Heaven. In analyzing this case, I will track how the political rhetoric to justify the Yi Bang-won’s political coup had chang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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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제문감별집(經濟文鑑別集)』의 인용전거 탐색 : 『사림광기(事林廣記)』, 『서전집록찬주(書傳輯錄纂注)』, 『십칠사찬고금통요(十七史纂古今通要)』를 중심으로

        송재혁(Song, Jae-Hyeok)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2020 亞細亞硏究 Vol.63 No.3

        정도전(鄭道傳)은 태조 6년(1397)에 역대 제왕들의 통치를 요약, 평가한 『경제문감별집(經濟文鑑別集)』을 편찬하였다. 이 책은 중원의 당(唐)나라, 우(虞)나라부터 원(元)나라까지 역대 정통왕조의 제왕들을 다루고 있으며, 여기에 한반도의 고려왕조 사례가 추가되어 있다. 이 글은 정도전이 이러한 『경제문감별집』을 편찬하면서 참조한 중화(中華)의 매뉴얼들을 추정해 본 것이다. 정도전은 이 책 이외에도 태조 3년(1394)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 태조 4년(1395) 『경제문감(經濟文鑑)』을 편찬하여, 총 세 권의 방대한 책을 단기간에 완성했다. 창업기라는 시대적 상황, 그리고 다양한 행정 분야에서 영향력을 발휘했던 고위 관료로서의 개인적인 여건상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작업이 가능했던 이유는 그가 활용할 수 있었던 다양한 중화의 매뉴얼들이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정도전의 사례를 분석하는 작업은 조선 초기 정치이론가들이 국가 건설 과정에서 활용한 자료들을 밝히는 출발점으로서의 의미를 갖고 있다. 『조선경국전』과 『경제문감』의 인용전거는 어느 정도 밝혀져 있지만, 『경제문감별집』의 경우 연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본문은 『사림광기(事林廣記)』, 『서전집록찬주(書傳輯錄纂注)』, 『십칠사찬고금통요(十七史纂古今通要)』에 주목하여, 정도전이 『경제문감별집』 군도(君道) 편에서 이 책들을 활용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In 1397 Jeong Do-jeon (鄭道傳, 1342-1398) wrote Kyŏngjemun"gambyŏlchip (經濟文鑑別集), a summary of past kings" political achievement from the ancient kingdom of Tang (唐), Wu (虞) to Yuan (元) and Koryŏ (高麗). This paper aims to reveal Kyŏngjemun"gambyŏlchip"s bibliography. Prior to Kyŏngjemun’gambyŏlchip, Jeong also wrote Chosŏn"gyŏnggukchŏn (朝鮮經國典) in 1394 and Kyŏngjemun"gam (經濟文鑑) in 1395, which means he completed three of large-volume books while serving as a high official during early years of Chosŏn dynasty. This paper argues that Jeong made it possible by using referenced from various compendiums, specifically Shilinguangji (事林廣記), Shudianjiluzuanzhu (書傳輯錄纂注), and Shiqishigujintongyao (十七史纂古今通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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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도전은 군주의 사유재산을 제한하려 했는가 : 『조선경국전』 「부전」 상공 편에 대한 분석을 중심으로

        송재혁(Song, Jae-Hyeok),이아영(Lee, Ah-Young)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2019 亞細亞硏究 Vol.62 No.3

        『조선경국전』 「부전」 상공 편 서두에 등장하는 “인군무사장(人君無私藏)”이라는 표현은 흔히 정도전이 군주의 전제적 재정권을 제한하려 했다는 주장의 근거로 인용된다. 해당 구절은 일반적으로 “인군은 사유재산이 없다.”로 번역한다. 그런데 이러한 번역은 군주가 모든 토지와 인민을 독점한다는 정도전의 앞선 서술과 내용상 모순된다는 문제가 있다. “인군무사장”은 왕권의 제한보다는 군주의 공공성에 대한 표현으로 독해할 수 있다. 이러한 분석의 근거는 두 가지다. 첫째, 전거의 내용이다. 정도전은 “인군무사장”이라는 결론을 도출하면서, “왕유천하”, “왕자무사”, “천자무사장” 등 최소한 세 가지 이상의 복합적인 전거를 활용하고 있다. 정도전은 고대의 “왕유천하” 관념을 가지고 군주의 강력한 권력과 지위를 인정하면서, “왕자무사” 및 “천자무사장”의 전거를 활용해 군주의 공적인 성격을 강조한다. 둘째, 상공 편의 내용이다. 『조선경국전』 「부전」은 조세의 수납과 사용에 관한 내용이다. 특히 상공 편의 경우, 군주가 사용하는 비용을 국고에서 사용하는 것을 정당화하려는 목적이 저술의 배경이다. “인군무사장”은 2천년 이상의 기간 동안의 동아시아 지식인들의 권력에 대한 이해와 정치 환경의 변화가 내재된 표현이다. 그러므로 단순 번역만으로는 정도전의 의도를 읽어내기 어렵다. 이 논문은 먼저 그가 해당 구절을 작성하기 위해 참고한 전거들을 분석하고, 『조선경국전』과 『조선경국전』 「부전」의 전체 구조 속에서 정도전의 진의를 규명하고자 하였다. Previous research on Jeong Do-jeon’s political thoughts asserts that Jeong intends to restrict King’s property rights. One of the evidence they refer to is “Renqunwusicang(人君無私藏),” a short phrase in Joseongyeongkukjeon meaning. The phrase in question is generally translated into “King does not have private property.” This translation, however, is problematic because in this way the paragraph containing “Renqunwusicang” starts with saying “King solely owns all the lands and all the people,” and ends with arguing King does not have anything. This paper aims to clarify the meaning of “Renqunwusicang” by analyzing the theoretical resources Jeong put to use. The five-letter phrase represents changes in both real politics and political understandings for more than 2,000 years in East Asia. Thus, diversity in translation is implied. It is doubtable that Jeong is a restrictionist because he was a political advisor for King Taejo and because it would hardly be in his interest. Nevertheless, “Renqunwusicang” had a potential for alternative use as one can see from the case of politicians referring to “Renqunwusicang” to argue against King’s private property in Jos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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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도전(鄭道傳)의 국가론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과 원(元) 제국의 유산-

        송재혁 ( Song Jae Hyeok ) 한국사상사학회 2020 韓國思想史學 Vol.0 No.65

        이 글은 정도전이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에서 기획한 국가론을 ‘원(元) 제국이 남긴 정치적 유산의 수용’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본 것이다. 정도전은 태조 3년(1394)에 『조선경국전』을 편찬하면서 창업의 정당화, 정부의 조직 방식, 그리고 재상[총재]의 권한 등 다양한 측면에서 원 제국의 유산을 활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이 사실을 숨기고, 『주례(周禮)』의 정치모델을 내세웠다. 기존의 연구자들은 정도전의 이러한 수사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실제를 간과한 문제가 있다. 원 제국의 전장제도를 정리한 법전인 『경세대전(經世大典)』은 현재 일부 내용을 제외하고는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각 부분의 서문을 모은 『경세대전서록(經世大典序錄)』이 남아있다. 『조선경국전』이 서문 모음집의 성격을 지니고 있음을 고려할 때, 정도전은 오히려 이러한 『경세 대전서록』에 주목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 글은 원 제국의 유산 중에서도 전장제도의 핵심을 담은 『경세대전서록』에 주목하여, 이러한 가설을 두 저작의 원문 비교를 통해 확인하고자 하였다. This paper aims to explicate Jeong Dojeon's political theory in Chosŏn'gyŏnggukchŏn (CSGGC) with an emphasis on the political legacy of Great Yuan. In CSGGC, Jeong referred to ample resources of Yuan Dynasty to justify the foundation of Chosŏn Dynasty, organize the administration, and define the range of responsibility for the prime chancellor (or Chaesang). It is worth noting, however, that he was not explicit about his use of Yuan references and highlighted the political model of Zhōulì instead. Misguided by his disguise, many studies on Jeong's political vision put their focus on Zhōulì as the ideal model, but at the same time missed out on one of the most integral components. Jìngshì Dàdiàn Shūlǜ (JDS) is a complication of forewords of chapters from Jìngshì Dàdiàn (JD), a repository of Yuan's official documents and laws which is now lost. Jeong's CSGGC has more in common with JDS than with JD in that it has the same structural feature as JDS. In this paper, I will compare CSGGC and JDS and demonstrate how Jeong utilized Yuan's political resour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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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도전의 군주론

        송재혁(Song, Jae Hyeok) 한국정치사상학회 2016 정치사상연구 Vol.22 No.2

        정도전은 『경제문감』을 통해 신하들의 역할을 강조했다. 기존의 연구자들은『경제문감별집』을 이러한『경제문감』의 종속적인 저작으로서 해석해 왔다. 그러나 이 글은『경제문감별집』을 『경제문감』과 대등한 별도의 저작으로 간주하고, 『경제문감별집』에서 개진되고 있는 정도전의 군주론을 분석해 보고자 한다. 조선건국의 시기에 정도전은 신왕조의 제도론과 신하론을 서술한 『조선경국전』,『경제문감』에 이어, 군주론을 다룬 『경제문감별집』을 저술했다. 그는 당대의 국제적인 힘의 관계를 고려하여 제후국으로서 조선의 위계를 설정하고, 국내적으로는 일원적인 정치질서의 확립을 통해 정치의 정상화를 시도했다. 그의 이러한 구상 속에서 국내질서와 국제질서는 “위계(序)”라는 측면에서 통합되어 있다. 따라서 군주정에서 최고의 정치행위자인 군주의 바람직한 모델을 모색하고 있는 『경제문감별집』의 저작은 정도전의 정치질서 구상의 종착역이라 할 수 있다. Jeong Do-jeon’s work, Kyeongjemungam(經濟文鑑) is well known for emphasizing the role of subjects in politics. The earlier studies have interpreted his another work, Kyeongjemungambyeoljip(經濟文鑑別集) as subordinate to Kyeongjemungam. This article, however, considers Kyeongjemungambyeoljip as an independent work from Kyeongjemungam, and explains Jeong Do-jeon’s Confucian kingship theory stated in Kyeongjemungambyeoljip. Jeong Do-jeon published Kyeongjemungambyeoljip, which pays attention to the rule of king in politics, in 1397, the time of the founding of Joseon Dynasty. And this work is a series of Jeong Do-jeon’s political design along with the institutional theory in Joseongyeonggukjeon(朝鮮經國典) and the subjects theory in Kyeongjemungam. Through these three works, he designed a vassal state in Chinese world order(天下) as a political structure, by reflecting East Asian Confucian Classics and historical records. This article argues that Kyeongjemungambyeoljip should be understood as a work for establishing an absolute monarchy in Joseon Dynasty, considering the international context of East Asia of his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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