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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면문사제의 처변논리 연구

        백도근 ( Do Geon Paeg ) 한국윤리교육학회 2007 윤리교육연구 Vol.0 No.14

        면문의 ``심즉리(心卽理)`` ``리발일도(理發一途)``의 처변이념은, 마음이 모두 ``리에서 발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하여, 수양을 통하여 "마음이 욕구하는 바를 쫓아 행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從心所欲不踰矩)" 경지 곧 ``심즉리``에 도달한 후, 시대사회의 모순에 대해 "크게 경장하고(=大更張)", "크게 쇄신하는(=大振刷)." 행동력을 갖추려는 데 뜻이 있었다. 면문의 ``심즉리`` ``리발일도``의 이념은 한주의 리발일도설심즉리설에서 나왔고, 한주의 리발일도 설심즉리설은 퇴계학의 심합리기설(心合理氣說)·리기호발설(理氣互發說)에서 나왔다. 양설의 차이는 퇴계의 설이 봉건사회의 가치를 담보하는 심학인데 비하여, 한주의 설은 선말의 위급한 상황에서 지식인들의 개방적 진취성을 담보하는 심학이란 점에 있다. 면문의 대경장대진쇄의 이념도 한주가 「묘충록」에서 제시한 개혁의 이념으로, 면문사제에 있어서는 전자는 반성적 자기긍정의 논리로, 후자는 비판적 타자수용의 논리로 전개되었다. 면우 곽종석은 한주가 별세한 이후에도 상당기간 스승 한주의 배외의식(排外意識)을 충실히 따랐으나 국내외 교역증가와 국제정세의 변화 그리고 유입된 한적들을 통해 외세에 대하여 일정한도의 정보를 가지고 있었던 터에 을미사변 등을 계기로 서양문물에 대해 보다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을미사변으로부터 을사조약에 이르는 시기 면문의 신학적(新學的) 인식은 양무운동가들의 인식에서 변법운동가들의 과도기적인 인식으로 바뀌어 가던 것으로, 당시 일반유학자들의 봉건적 사고와는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즉 면문에서 신봉하던 도는 영원한 공맹의 도이지 정주의 체제옹호적인 도가 아니었고, 면문학자들의 변법자강론의 나라는 성리학파의 군신부자의 나라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것이 인상적으로 표현된 것이 "나라는 망해도 도는 망하지 않으며, 임금은 굴해도 도는 굴하지 않는다.(=國家亡, 道不可亡, 君可屈, 道不可屈也; 晩松集, 附, 郭鍾錫疏)"는 선언이다. 면문의 이러한 처변적 학문정신은 그의 제자들에게도 승계되어, 봉건사회에서 근대적 사회로 넘 어가는 과도기에도 면문사제 공히 봉건과 근대 사이에서 실족하지 않고, 함께 파리장서 사건에 동참하기도 하고, 또 각기 입장에 따라 자유롭게 처변적 행보할 수 있었던 동력이 되기도 하였다. The research which it sees is regarding Match-Change Theory of Myun-U School who was active from 19 century latter halves extended in 20 century middle. Them it put an interest to initially in only research of Sung-Li Philosophy, crisis the country with aggression of Japan, to start the research of Western civilization. Them is not a possibility of defending Confucianism with only the fact that it keeps out an imported civilization. They thought that it is not a possibility of defending the country with only the fight with the outside power. It does to suppress the aggression of Japan which with them approaches letting in close at hand, and learned the Western philosophy and the Western democracy system, it overcame feudalism, modernized Confucianism gradually. Kwak Myun-U, Lee In-Jae, Ha Gyum-Jin, Lee Byung-Hyun was representative in them. The Kwak the Myun-U demanded the fact that it will learn the study and a system of the West with the as it has a Confucianism sense of value in the disciples. Lee In-Jae He in order to reform Confucianism researched a Western philosophy. He in order to reform a feudalism studied the democracy of the West. Ha Gyum- Jin thought, if not lose a traditional ethics, there is a possibility also the country taking back. Lee Byung-Hyun Confucianism Christianity anger makes the religion of same form and it maintains, it wanted. Their study and patriotic activity to time level very with the rational and sincerity thing, on mind of the people are remaining in deep impre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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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近畿 退溪學派 禮學觀 연구

        백도근(Paeg Do-Geon) 대한철학회 2004 哲學硏究 Vol.90 No.-

        본 논문의 목적은 星湖禮學의 연원과 이념을 밝혀서 그 성리학적 영남예학으로서의 전통과 장차 전개될 실학적 예학으로서의 독창성을 구명하는 데 있다. 개국이래 관학파의 국가의전 제정에 대한 노력과, 사림파의 주자가례의 실천을 위한 열정을 통하여 예에 대한 인식이 점증하는 것을 계기로 발달하기 시작한 조선시대의 예학은, 그 학적 이념을 달리하면서 기호예학과 영남예학으로 갈라지게 된다. 기호예학의 특징이 주자가례를 근본으로 하면서 그 부족한 점을 고례나, 시왕례 등으로 보완하여 주자가례의 실천을 보다 용이하게 하는데 있었다면 영남예학의 특징은 주자가례도 존중하지만, 고례와 시왕, 시속, 인정 등과 절충해서 時宜에 맞도록 한다는 데 있었다. 성호의 예학은 고례, 시속, 시왕, 인정 등의 요소를 계승하고 있다는 점에서 영남예학의 전통을 따랐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영남예학이 여전히 行禮의 목표를 ‘군신부자의 의리’를 밝히는 것에서 옮기지 못함으로써 士庶와 下民의 경제적 기반을 저해하는 虛禮的 자취를 방치할 수밖에 없었던 데 비해, 성호예학은 自主的 입장에서 驗古準今을 통해 禮를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士民의 삶을 支持하는 방편으로 삼으려 했다는 점에서 확연히 구분된다고 할 수 있다. 성호는 자신의 예학이 육경의 ‘일용평상’의 이념에 맥락이 닿아 있음을 밝혔지만 그의 학문연원으로 볼 때 세계사적 근대성과도 무관하지 않음을 보게 된다. 이 견해가 옳다면 성호로 하여금 조선사회에 구축된 봉건적 사유를 뛰어넘게 했던 것이 바로 근대정신임을 알 수 있다. 성호예학의 이러한 특징은 성호좌파 학맥을 통해서는 더욱 강조되어 양명학과 서학의 보다 적극적 수용으로 나타나고, 성호우파를 통해서는 점차 희석되어 끝내는 본래의 영남예학의 모습으로 회귀해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본 논문에서는 성호예학의 이념부분을 밝히는 데 그치고 성호예학의 구체적인 부분과 성호학파의 예학부분에 대한 해명은 다음을 기약코자 한다. This study is to establish the identity of Sung-Ho Yae-Hak(禮學) that is Sil-Hak(實學) whose goal is to make the people not be hungry, while Young-Nam Yae-Hak is to Sung-Li-Hak(性理學) which is to think of righteousness with respectable mind. Yae-Hak in Cho-Sun Dynasty has started to develope with the gradually increased recognition for Yae(禮) through both the effort to legislate its protocol by the school of Gwanhak(官學派) after the foundation of the dynasty, and the practical passions for Chu Tzu’s Chia Li(朱子家禮) by the school of Ssarim(士林派), which Yae-Hak in Cho-Sun(朝鮮) Dynasty is to be divided into Ki-Ho Yae-Hak(畿湖禮學) and Young-Nam Yae-Hak(嶺南禮學) according to the differences in their academic ideas. Ki-Ho Yae-Hak not only based on Chu Tzu’s Chia Li but also supported by Book of old property, Present Dynasty Ceremony, etc., is characteristic of practicing Chu Tzu’s Chia Li easily. Although Young-Nam Yae-Hak respects Chu Tzu’s Chia Li, its characteristic is to compromise Book of old property, Present Dynasty Ceremony, the mores of times, and tenderness etc. and then to be timely. It could be said that Sung-Ho Yae-Hak(星湖禮學) has followed the tradition of Young-Nam Yae-Hak with respect that Sung-Ho Yae-Hak has succeeded to Book of old property, Present Dynasty Ceremony, the mores of times, and tenderness. While Young-Nam Yae-Hak based on the idea of Sung-Li-Hak is limited to identify righteousness between lord and vassals, father and sons, Sung-Ho Yae-Hak is to identify the ideas of ‘everyday use in ordinary times’ in ‘Book of old property’ and then make them its new ideas, which is definitely different with Young-Nam Yae-Hak. While Sung-Ho has identified its Yae-Hak to be in collusion with the idea of ‘everyday use in ordinary times’ in the six chinese classics(六經), it hasn’t had no connection with modernity of world history in its academic background. If this opinion is right, modernity has made Sung-Ho overcome the federal speculation built in Cho-Sun Society. The leftist of Sung-Ho has positively accepted the Wang Yang-ming(陽明) school and Western Leaning emphasizing the characteristics of Sung-Ho Yae-Hak, while the rightist of Sung-Ho has recurred to original Young-Nam Yae-Hak diluting the characteristics of Sung-Ho. This study is only limited to identify the ideas of Sung-Ho Yae-Hak pledging tomorrow’s study with explanation about concrete parts of Sung-Ho Yae-Hak and Yae-Hak of the suchool of Sung-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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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 서인 열암 하시찬의 삶과 학문

        백도근 ( Do Geon Paeg ) 한국윤리교육학회 2012 윤리교육연구 Vol.0 No.27

        이 논문은 조선시대 후기 대구지역 서인노론계에 속하는 열암(悅菴) 하시찬(夏時贊)의 삶과 학문에 관한 보고서이다. 범 대구지역에 광범위하게 분포해 있으면서 아직 그 정체가 완벽하게 가늠되지 않은 대구지역의 서인노론에 대한 실존적 삶의 모습을 그려 보는 것은 조선 후기 대구 유생들의 사회를 입체적으로 조명하는 데 꼭 필요한 작업이다. 대구의 서인노론은 어떻게 형성되고 사라지는지, 그들과 기호의 노론과는 어떤 관계였는지, 또 대구지역 남인들과의 관계는 줄 곳 비우호적이었는지, 기호노론과 대구남인을 소통시키는 대화통로 같은 역할이 있었는지, 그들의 지역 유생사회에 있어서 혼반(婚班)관계, 영향력, 경제력 등은 어떠했는지 등에 관한 연구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영남의 노론 유생 한 사람, 한 사람의 실존적 삶과 학문을 살펴보는 것은 마치 주자가 ``오늘 한 건을 궁리하고 내일도 한 건을 궁구하기를 오래 하게 되면, 확연하게 저절로 관통할수 있게 된다. (수시금일(須是今日), 격일건(格一件), 명일우격일건(明日又格一件), 적습기다연후(積習旣多然後), 탈연자유관통처(脫然自有貫通處); 『근사록』, 권2 위학류)" 고 한 것처럼, 수많은 개인사 연구의 축적을 통해서만 효과를 거둘 수가 있다. 최근 17세기 후반 대구 노론 유생인 단구(丹邱) 전극념(全克念)의 생애사를 쓰고 이어 18세기 후반의 대구유생열암 하시찬의 개인사에 관해 연구하는 것도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다. 하시찬의 유집 『열암문집』을 보면, 하시찬의 생애는 대략 대구의 평범한 노론 유생의 가문에서 태어나 유달리 독서를 좋아하는 소년시절을 보내고, 18세 전후로부터 37세에 이르는 20여년 동안은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서 동서로 분주히 쫓아 다녀야만 했는데(=분주동서(奔走東西)) 거기서 아무런 소득이 없자 그 동안 농사도 학업도 소홀히 한 후회와 좌절감이 엄습하게 된다. 가령, 34세 되던 해초(1783 계묘(癸卯), 정월(正月))에 쓴 ``처음으로 흰머리를 보다(「초견백발(初見白髮)」)`` 이란 시에서는 벼슬도 하지 못하고 학문도 게을리 하면서 나이만 먹는 자신에 대해 후회하고, 37세(1786, 丙午年) 의 시 ``과거를 폐하려 한다(「廢科擧」)``에서는 고민 끝에 더 이상 벼슬을 구하는 일이 부질없는 일임을 깨닫고 과거를 폐하고자 하는 결심을 밝히며, 39세 때(1778, 戊戌年)의 시 ``양식이 떨어지다(「絶粮」)``와``생계음(「生計吟」)``에서는 극심한 가난을 표현하였고, 39세 때(1788년, 戊申年)의 시 ``면화 밭을 인마가 손상하였다(「綿田爲人馬損傷」).`` 에서는 면화 농사를 지었는데 놀러 나온 사또 일행이 면화 밭을 짓밟아 버렸다고 불평을 늘어놓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41세(1790, 庚戌年)에 당대 최고 예학자 중 한 사람인 경호(鏡湖) 이의조(李宜朝)를 찾아가 예학에 관해서 묻고, 이어 당대 성리학 최고 이론가 중 한 사람인 성담(性潭) 송환기(宋煥基)에게 성리학에 관해 물어 자신의 학문의 전통을 수립함을 보여준다. 이후 그는 스스로 1789년에 건립한 독무암서(獨茂巖棲)에 기거하면서 예학과 성리학에 관해 지인들과 문답하고, 학문을 쌓고, 수양을 닦으며, 저술과 강학으로 만년을 보내다가 7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그의 성리사상은 『열암문집』권4의 「성설(性說)」등을 통해서 엿볼 수 있고, 예학사상은 『문집』, 권2의 「상경호선생의례문목(上鏡湖先生儀禮問目)」이나 「제자신알변(諸子晨謁辨)」그리고 단행본인 『팔례절요』등을 통해서 대강을 볼 수 있다. 그가 당대 예학과 리학의 최고 경지에 오른 두 스승(경호, 성담)이 인정한 학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예학과 성리학 사상에 관한 체계적인 저술이 없고 그나마 분량도 많지 않아서, 그가 대가의 반열에 들었다고 증빙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그가 50여세 이후 독무암서에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저술 『팔예절요』를 통해 강학을 한 후 지역 유생사회의 풍속이 크게 변화되고, 이를 역대 경상감사나 지방수령들이 다투어 칭송해온 것과, 대구 유생들의 그에 대한 존모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는 것을 보면 그가 교육자로서는 분명 크게 성공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연구자의 안목으로 보다 귀중하게 여기는 것은, 『열암문집』을 통해서 스스로 기록한 18세기 후반 대구의 평범한 늦깎이 노론 집안 출신인 열암 하시찬의 진솔된 모습을 통해, 같은 시기 비슷한 형편의 대구의 노론가문 출신의 유생들이 겪어야 했을 - 총명했던 어린 시절, 과거시험에서의 거듭된 낙방, 좌절, 가난 그리고 안빈낙도의 여생 이라는 - 삶의 모습을 실존적으로 그려볼 수 있다는 데 있다고 할 것이다. In the late 18th century, Ha-Shi-Chan(夏時贊, 1750-1828) who lived in Daegu, dreamed that pass in the ``big test (大科)`` and to become a management (官吏), In spite of the adverse society, he exist for 20 years not to study more eagerly, but find someone can help him. He later mentioned that he lead a life of a wanderer during 20 years. And it was not enough to pay for charge to ``testing ground(科擧試驗場)`` by income from his small farm. When he failed and returned to hometown dragging his fatigued body, there was a poverty with starving family, He became a sophisticated scholar late in his life, however, he did not become a great scholar, And he did not wrote many books during his lifetime, but The book he wrote help us understand about that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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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서인 단구(丹邱) 전극념(全極念)의 노론의식 연구

        백도근(Paeg Do-Geon) 새한철학회 2012 哲學論叢 Vol.68 No.2

        This study is about partisan thinking of 'Seo-in(西人)' who lived in Daegu of the late 17th century, The progress of the work begins by reading a book written by Jeon-Geuk-Nyeom 全極念, 1645-1704). He was the third of five brothers of Jeon-family(全氏家門), the main activist of Daegu's Seo-in group. He was then a popular figure in Daegu, but was not a national figure. View the contents of books, his first contribution is the Kim-Jang-Saeng(金長生) is being recommended as a teacher of the country. Because its success should mean the victory of Central-Seo-in. His second contribution is this: he wrote for 'Indong-Hyanggyo's conflicts(仁洞鄕校鄕戰)' in the late 17th century, and left records(『丹邱遺稿』), this is made to future generations known about the incident. He accepted the central Seo-in's orthodoxy, but his basic point was the Daegu's local Seo-in's eclectic attitude. He did not write a lot of books, wrote only one book Dan-gu-yu-go(『丹邱遺稿』) only. But Dan-gu-yu-go was in the second half of the 17th century Neo-Confucians(西人-南人)' local conflicts only book that tells us today. Jeon-Geuk-Nyeom is also known to us today through the book. 서인노론(西人老論)으로서의 단구(丹邱) 전극념(全克念)의 의식은 사계 김장생(金長生)의 성무종향(聖廡從享) 문제와 인동향전의 과정에서 단구가 취한 태도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사계의 성무종향 문제와 관련하여, 기호학파 유생으로서 서인노론의 기본적 인식을 수용하고 있지만, 친가와 외가를 막론하고 퇴계(退溪) 이황(李滉)으로부터 한강(寒岡) 정구(鄭逑)로 이어지는 영남 남인의 사회적, 문화적 전통 아래 있었기 때문에 학문적 입장이나 남인에 대한 태도에서 기호지역 출신의 노론과는 꼭 같지는 않음을 보여준다. 이는 그가 학문적 입장에서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제자이면서도 이학(理學)과 예학(禮學)에 관해서 특별히 영남학파의 학설과 모순되는 주장을 하지 않았던 태도에서도 엿볼 수 있고, 사계학문의 연원을 말할 때도 위로 율곡(栗谷) 이이(李珥)까지만 언급하고 그 이상에 대해서는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거나, 사계의 성무종향을 주장하면서도 그것이 회재나 퇴계, 율곡과 우계의 전례에 따를 것을 주장했을 뿐, 회재나 퇴계를 추숭하는 남인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는 태도에서도 엿볼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그는 극단적 사계성무 반대 입장도 일부 남인 당파주의자(=黨人)들에 의한 것이지 남인 일반의 입장은 아니라고 그 의미를 축소하여 서인 -남인 간의 갈등을 완화하고자 하였다. 그는 또 인동향교(仁洞鄕校)를 둘러싼 향전에 심각하게 말려들고 있으면서도 향전이 오로지 지역 유생들 사이에 서로 교임직(校任職)을 차지하려는 사소한 갈등에서 빚어진 것일 뿐, 노론과 남인을 갈라놓을 중대한 이슈가 내포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특히 「대거도통문(對擧道通文)」의 경우처럼 지속적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자들은 남인이 아니라 행실이 옳지 못한 기회주의자들일 뿐이라 하여, 이 문제 처리로 골머리를 앓는 경상감사(慶尙監司)의 입장까지도 배려하는 태도를 볼 수 있다. 이처럼 전극념은 과감하였지만 매우 신중한 유생이었고, 문제를 감정적으로 풀어 가기보다 합리적으로 풀어가려했던 온건주의자였다고 할 수 있다. 당시 거듭되는 환국의 와중에서 노론의 입장을 지키면서도 지역사회에서의 갈등을 최소한으로 줄이려 했던 그의 태도는, 갈등을 야기할 수 있는 성리학상의 쟁점이나 예학상의 쟁점에 관해서도 거의 언급하지 않아서 뛰어난 자질과 식견을 가진 학자이면서도 저술을 많이 하지 않은 이유가 되기도 하지만, 이후 대구지역에서 서인과 남인 사이의 갈등이 더이상 격화되지 않고 소강상태를 유지하게 되는 한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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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호학과 성호우파학의 이동문제

        이수환(Lee Soo-hwan),정병석(Jung Byung-seok),백도근(Paeg Do-geon) 대한철학회 2007 哲學硏究 Vol.101 No.-

        실학일반(實學一般)에 있어서도 그렇지만, 대표적 실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학문이 어떤 성격의 것인가를 규정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상당한 진전을 이루었으나 아직 매듭이 지어진 것은 아니다. 완전히 매듭이 지어지려면 몇 세대나 더 지나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성호학을 규정하는 문제와 함께 꼭 수반되어야 할 문제가 성호우파학(星湖右派學)을 규정하는 문제이다. 성호우파라는 이름 속에는 이미 성호학에서 희박해졌던 성리학적인 색채가 도리어 농후해졌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그동안 성호우파학의 보수적 색채는, 성호학이 ‘천하에 굶주리는 백성이 없게 한다.(使天下無窮民)’는, 봉건주의로부터 근대로의 진일보로서의 계량적인 정치목표를 지향하는 경험성을 드러내는 데 상당히 걸림돌이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여기서 의문이 이는 것은 성호와 순암(順菴)을 과연 진정한 사승관계(師承關係)로 볼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동양적 사승관계는 스승의 학문을 액면 그대로 물려받거나 아니면 정신이라도 물려받은 경우를 말한다. 그런데 비록 순암이 그 삶의 역정가운데서 일정기간동안 성문(星門)에 출입하였고, 성호의 사후에도 성호를 존경했다고는 하나 성호학은 수사(洙泗)의 실무주의(實務主義)를 이념으로 한 반면, 순암은 자양(紫陽)의 의리주의(義理主義)를 이념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순암은 성호가 크게 여긴 것을 작게 받아들이고 성호가 작게여긴 것을 크게 받아들였으므로, 양자의 학문은 대이소동(大異小同)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순암(順菴)과 그 학맥이 스승인 성호까지도 퇴계학맥의 성리학자로 분식부회(粉飾附會)했던 것은 당시 정황으로서는 이해될 수 있으나 학문적으로는 배반일 수 있다. 왜냐하면 백호 윤휴로부터 성호좌파 인사들에 이르기까지 차라리 죽을지언정 신념을 바꾸지 않은 전통이서 있었던 것으로 보아서, 성호가 동의해 줄 수 없었던 문제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본 연구에서는 성호학이 실무실용을 이념으로 하는 소위 실학임과는 달리, 주자학(朱子學), 퇴계학(退溪學), 순암학(順菴學), 하려학(下廬學)은 ‘군신부자의 의리’를 이념으로 하는 성리학임을, 성호학과 여타의 학을 차례로 비교해 봄으로써 확인해 보았다. 특히 본 연구의 귀결점인 성호학과 우파학의 이동문제에 관해, 성호가 주자와 퇴계를 지극히 존경하면서도 경학이나 사칠설 전반에 제기한 이설(異說)에 대해 순암과 하려가 주자나 퇴계의 성리설을 묵수하면서 오히려 성호의 주장 -예를 들면 자득지식설(自得知識說), 공칠정이발설(公七情理發說), 대기소기설(大氣小氣說) 등 - 에 대해서는 전혀 수용의지가 없었다는 점에서, 성호와 그 우파제자들의 학문관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음이 확인된다. 이는 순암과 그 후속 학맥이 ‘사천하무궁민(使天下無窮民)’을 위한 실무학을 기치로 내건 성문(星門)을 경유하기는 하지만 그 이념에 있어서 여전히 성리학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While Chu-Hsi’ Hak(朱子學) was ethics for rule of the feudal system in Nam-Song Dynasty, but Seong-Ho Hak(星湖學) was a thought for providing aid for the class which faced in collapse of economical base under feudalism, This is the difference of both. Seong-Ho’s thought that Chu-Hsi’s thought for adherence to social-position’s of feudal rule order was misinterpretation about the Nine Chinese Classics (四書五經). According to him, the Nine Classics are not moral principle texts, but the full of necessary real knowledges and lessons in life. In Seong-Ho’s school, Seong-Ho’s left-wings intended to succeed compellingly Seong-Ho’s standpoint of practical use. But They were criticized for having the inclination of anti-Chu-hsi’s thought by Seong-Ho’s right-wings. Seong-Ho’s right-wings criticized their Master’s skeptical attitude to Chu-tz’s thought and Attitude which accepted Seo-hak’s theory. After Seong-Ho died, his right-wings hoped left-wings to stop behaving which opposed to Chu-Hsi’s thought, but left-wings ignored this. When period of illiberality started, many peoples of left-wings arrested and received serious penalty, but his right-wings gived up Seong-Ho’s thought rapidly, and returned to Toe-Gye Hak(退溪學) for safety of school’s lif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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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겸암 류운용의 실천도학

        백도근 동방한문학회 2001 東方漢文學 Vol.0 No.20

        The Josun dynasty, after the fall of the Korea dynasty which was based on the Buddhist ideology, purports to establish a Confucius state supported by Neo-confucianists and new army circles. Because of that, neo-confucianism was sustained as the only ideology from the beginning to the end of the Josun dynasty. Gyum-Am Yoo Un-Lyong was the best student of Tye-Gye Lee Hwang. To understand why he is famous although there remain not many writings or analects of his, we need to distinguish the practical ethics from the theoretical ethics. In the primitive Confucianism there are remarks only about political ethics, social ethics, and family ethics, and the contemporary confucianists were mainly interested in how to put those ethics in practice. This we may call the practical Confucianism. In the Song dynasty, however, the confucianists became interested in metaphysical subjects, following the trend of Buddhism or Taoism. Their interests show their work getting more and more philosophical and theoretical, so as to change and redefine the characteristics of the primitive confucianism. We may call this the theoretical confucianism. After the Song dynasty, Hur-Hyung of the Won dynasty was critical of the theoretical Confucianism and created Neo-Confucianism that the Josun dynasty imported and used as its governing ideology. Neo confucianists show interests in both theoretical and practical sides of confucianism. Gyum-Am Yoo Un-Lyong and Nam-Myung Jo Sik were well known and respected for their practical confucianism, while the theoretical confucianism reached its highest with the works of Tye-Gye Lee Whang and Yulgok Lee Ih. The practical confucianism emphasizes on the unity of words and deeds, which is epitomized best in `Chung' and 'Hyo'. Confucianism purports practice, practice down below on the everyday morality and high up on the religious absolutism. There have been not many practical confucianists though many theoretical confucianists. Because of this, the gravity of Gyum-Am Yoo Un Lyong is no less than any in the school of Tye-Gye Lee Wh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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