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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방병원 간호사의 감정노동, 역할갈등 및 극복력이 이직의도에 미치는 영향

        장정란,정경희 전남대학교 간호과학연구소 2022 Nursing and Health Issues(NHI) Vol.27 No.2

        This study researched effective personnel management methods to improve the quality of nursing in traditional medicine hospitals in Korea by examining the effects of emotional labor, role conflict, and resilience on turnover intention among nurses. Methods: This study designed a descriptive survey, and the subjects were 179 nurses from nine traditional medicine hospitals in Korea. Data were collected from August 1 to 20, 2019. The data were analyzed with means, standard deviations, frequency analysis, t-test, one way ANOVA, Pearson’s correlation coefficient, and multiple regression using SPSS/WIN 18.0 program. Results: We found positive correlation Us between emotional labor and turnover intention (r=.17, p=.022), and between role conflict and turnover intention (r=019, p=.013). The factors affecting turnover intention were role conflict (=.24, p=.001) and emotional labor (=.20, p=.013 ). The model explained 11.0 % (F=5.11, p<.001) of nurses’ turnover intention in traditional Korean hospitals. Conclusion: Korean traditional medicine hospitals need to decrease the degree of emotional labor and present clear roles of nurses based on clinical experiences to reduce turnover inten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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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잡도가 높은 모바일 어플리케이션 설계를 위한 아키텍처 패턴과 적용지침

        장정란,라현정,김수동,Jang, Jeong-Ran,La, Hyun-Jung,Kim, Soo-Dong 한국정보처리학회 2012 정보처리학회논문지D Vol.19 No.1

        안드로이드 OS, iOS 등 여러 모바일 디바이스 운영체제를 통해서 모바일 디바이스는 다양한 소프트웨어 어플리케이션을 설치 운영하는 모바일 컴퓨팅 기능을 제공하고 있다. 나아가 개인용 컴퓨팅 용도뿐 아니라 엔터프라이즈를 위한 어플리케이션 클라이언트 단말기로도 사용될 것으로 예상한다. 그러나 모바일 디바이스는 자원의 제한성, 모바일 무선 네트워크 지원 능력 등 이전의 피처폰이나 개인용 컴퓨터에는 없는 특징이 있다. 따라서, 모바일 어플리케이션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어플리케이션의 설계 시에 모바일 디바이스가 가진 속성을 반영하는 방법이 필요하다. 아키텍처는 소프트웨어의 특성을 반영하는 비기능적 요구사항을 충족시켜 소프트웨어의 품질을 향상시키는 설계 방법이다. 아키텍처 설계를 하기 위해서 모바일 어플리케이션의 특징으로부터 아키텍처 비기능적 요구사항인 아키텍처 드라이버를 추출한다. 기존의 소프트웨어 아키텍처 설계는 여러 패턴 제공하고 있지만, 모바일 어플리케이션의 특징을 반영하지 않았기 때문에 적용하기가 어렵다. 본 논문에서는 모바일 어플리케이션의 주요 특징을 반영한 어플리케이션 개발을 위해, 모바일 어플리케이션에 적합한 아키텍처 패턴을 정의하고, 각 패턴을 설계하는 지침을 제안한다. 먼저, 모바일 디바이스 및 어플리케이션의 특징을 정의하고, 이 특징으로부터 아키텍처 드라이버를 추출한다. 그리고 모바일 어플리케이션 개발을 위한 아키텍처 패턴을 정적 뷰와 동적 뷰 관점으로 설명하고, 각 아키텍처 패턴을 적용하여 모바일 어플리케이션 아키텍처를 설계하기 위한 적용 지침을 제공한다. 그리고 제시된 아키텍처 패턴의 사례 연구를 통해 적용 가능성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제시된 아키텍처 패턴을 아키텍처 드라이버 별로 평가하고 또한 기존 연구와의 비교를 통해 본 논문에서 제시하는 아키텍처 패턴을 평가한다. Mobile devices with Android OS and iOS have been emerged as mobile computing devices where various software applications are deployed. Furthermore, they are anticipated to be used not only for traditional personal computing but also for enterprise computing. However, such mobile devices have their intrinsic characteristics such as limited resources and flexible network capabilities, which are not revealed in traditional computers. Hence, there is high demand for methods to develop mobile applications with reflecting their intrinsic characteristics. Since those characteristics belong to non-functional requirements, they should be reflected in architecture design while designing mobile applications. To design architecture, the architecture drivers that are architecture non-functional requirements are decided from mobile application characteristics. Conventional architecture design methods do not consider those characteristics so that the methods cannot be straightforwardly applied to mobile applications. In this paper, to efficiently develop mobile applications reflecting those characteristics, we propose a set of architecture patterns and define a guideline to apply those patterns. First, we define the characteristics of mobile applications distinguished and derive architectural drivers from them. Then, we propose architecture patterns in terms of static and dynamic views and define an architectural guideline to apply the patterns to designing architecture for mobile application. And, we perform case studies to verify the applicability of proposed patterns. Finally, we assess the proposed architecture patterns by proving how the patterns can fulfill identified architecture drivers and by comparing our approach with previous wor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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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국 선교회의 한국 선교 : 독일 베네딕도회의 원산교구 시대 German Benedictines in Wonsan(1920~1949) 1920~1949

        장정란 가톨릭대학교 인간학연구소 2004 인간연구 Vol.- No.7

        독일 베네딕도회의 한국선교 제2기에 해당하는 원산교구 시대의 교육활동에 관한 연구이다. 베네딕도회는 파리외방전교회에 이어 1909년 두번째로 한국에 진출한 외국 선교회다. 한국 최초의 남자 수도회이기도 한 베네딕도회는 문화적, 간접적 선교 활동을 표방하며 교육을 담당하기 위해 내한하여 서울 백동에 한국 가톨릭 교회 최초의 고등교육기관인 사범학교와 실업학교를 설립하였다. 그 후 1920년 함경남북도와 만주 지역을 관할하는 원산교구가 서울교구로부터 분할, 독립되자 교구 설정과 동시에 선교를 위촉받아 수도원을 원산 부근 덕원으로 이전함으로써 원산교구 시대를 열었다. 베네딕도회는 원산교구를 위임받자 교구사목을 담당할 사제 양성을 목적으로 1921년 서울수도원에 신학교를 세웠는데 이 학교는 원산 이전과 함께 덕원신학교가 되었다. 또한 1921년 원산에서 선교를 개시하며 빈민야학교인 해성학교를 세워 교육사업을 시작하였다. 이 학교는 포교 대상 을 위한 선교 수단이라는 점에서, 또한 당시 한국 사회가 가장 필요로 하는 교육을 통한 국민 계몽에 기여하였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베네딕도회는 "성당이 있는 곳에 학교가 있다"라는 칭송을 들을 만큼 교육 사업에 전념하여 한국의 교육 발전에는 물론, 교육을 통한 선교 사업에도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 논문에서는 베네딕도회의 원산교구 시대 역사를 교구의 설립으로부터, 그 발전, 1949년 공산정권에 의한 강제 폐쇄에 이르기까지 고찰하였다. 특히 일제 치하인 이 시기에 베네딕도회가 한국인의 교육에 기울인 노력과 활동을 덕원신학교와 해성학교를 중심으로 살펴보고 그 의미와 의의를 분석하였다. This study concentrates on the educational activities of the German Benedictines in Wonsan during the second period of their Korea mission. The German Benedictine, being the second foreign missionary committed to Korea in 1909 after the French MEP(Socie'te' des Missions Etra'nge'res de Paris), formed the first monastery in Korea. The Benedictine missionaries, established the first advanced educational institutions of the Catholic church in Korea when they opened a teachers' school and a vocational school at Baekdong in Seoul right after their arrival in Korea, as a long-term strategy of cultural and indirect mission. However, when the Wonsan area including the whole Hamkyung Provinces and the Manchuria was separated from Seoul diocese, to form a new Wonsan diocese in 1920, this new diocese was endowed to the German missionaries, whereupon the Benedictine monastery moved to Dukwon by Wonsan, and a new era of Wonsan diocese has opened. After the commission of Wonsan diocese to the Benedictines, the German missionaries have launched a seminary in Seoul in 1921 to educate priests for the new diocese, which became later Dukwon Seminary after their move to Wonsan area. With the commencement of their missionary activities in Wonsan in 1921, they also opened Haesung night school for the impoverished population, which step was very significant as a means of mission in view of the fact that an enlightenment of the Korean people through education was most urgently needed at that time. The Benedictine missionaries, successful in their educational activities, could achieve advances not only for the general development of education in Korea, but also, in their mission in Korea, to earn a praise, "Where there is a Catholic church, there is also a school!". The present article provides an overview of the activities of the Benedictine mission during the Wonsan period, covering from the establishment of Wonsan diocese to closing thereof by the communists in 1949, by highlighting the significance of their missionary activities in the examples of Dukwon Seminary and Haesung Sch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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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 베네딕도회의 한국 진출과 교육 활동

        장정란 가톨릭대학교 인간학연구소 2003 인간연구 Vol.- No.5

        본 고는 독일 베네딕도회를 중심으로 그들의 한국 진출 경위와 1909년부터 1927년까지의 초기 서울 시기의 주 선교 활동인 교육 사업에 관한 연구이다. 한국 최초의 남자 수도회이기도 한 베네딕도회는 문화적, 간접적 선교 활등을 표방하며 한국 교회 최초의 고등교육기관인 사범학교와 실업학교를 설립하였다. 특히 실업학교는 13여 년에 걸쳐 독일 도제제도(徒弟制度) 방식의 기능 교육을 시행하여 한국 실업 교육사에서도 주요한 의미를 갖는다. 베네딕도회는 1909년 1월 11일 사우어와 엔쇼프 등 2명의 신부가 서울에 도착하여 6월 백동(栢洞, 혜화동)에 수도원과 학교를 신축하며 한국에 그 첫발을 내디뎠다. 그 후 12월 신부 2명과 수사 4명의 입국을 필두로 1911년부터 해마다 신부와 수사들이 증원되어,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인 1914년 7월 서울 수도원은 신부 9명, 수사 12명, 총 21명의 선교사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베네딕도회의 수련 모토인 '기도하고 일하라'(ora et labora)를 실천하는 한편 자신이 보유한 재능을 교육이라는 문화적 활동을 통해 전수하며 포교의 한 방법으로 택했던 것이다. 베네딕도회는 1910년 내한 목적대로 숭공학교(崇工學校)를 세워 실업교육을 시작하는 한편, 1911년에는 숭신학교(崇信學校)를 세워 사범교육을 실시하였다. 숭공학교는 독일식 도제제도를 적용한 실습 위주의 실업학교로 뜻 있는 많은 사람들이 주목하였고 또한 우수한 교육기관으로 인정받았다. 사우어 원장은 숭공학교의 설립 목적을, 자립적 가톨릭 수공업자 계층을 탄생시켜 지금까지 (교난 등으로 생활 근거를 잃어) 가난했던 교인들을 중산층으로 발돋움시키는 것, 가톨릭 신앙의 전파, 유능한 한국인 수사(修士)의 양성에 두었다. 숭공학교의 교육 과정은 3년이었으며, 학과는 목공부, 정밀금속부, 철공부, 제차부(製車部) 등으로 다양한 직종을 망라하였다. 학생 수는 1910년부터 꾸준히 늘어 1914년에는 70명이었다. 1914년 가을 신입생 모집때에 200명이 지원하였으나 학교가 협소하고 또 재정이 어려워 적은 수의 학생만 선발하였다. 학습은 실업학교답게 매일 이론 2시간과 실습 8시간으로 구성되었다. 이론은 가장 중요한 기초 이론을 학습하였고, 실습은자신이 택한 학과를 작업장에서 수업하는 독일 도제제도 방식의 실습 위주 교육이었다. 그러나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학교 확장에 따른 경비를 마련하기 어렵게 되었고, 교사로 일하던 네 명의 수사들도 징집되어 학생증원은 불가능하였다. 또한 전쟁 중은 물론 종전 후에도 패전국이 되어 모국으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기대할 수 없었다. 그 위에 독일은 일본의 적성국이었으므로 일제의 숭공학교에 대한 사찰과 압박이 심각하였다. 이와 같은 존폐의 위기를 겪으면서도 숭공학교는 건실하게 운영되어 폐교를 획책하던 일제까지도 견학 학교로 선정하는 우수 학교로 자리 매김하였다. 그러나 숭공학교는 결국 1921년에 폐교되었다. 숭신학교는 교회학교에 적합한 교사를 배출할 2년제 사범학교로 1911년 출범하였다. 첫 입학생인 15세 이상 28세 미만의 초등학교를 졸업한 남학생 23명의 일과는 독일 사범학교 및 기숙학교와 똑같이 짜여졌다. 1913년 7월에 17명이 졸업하였는데 졸업생들은 교사가 되거나 혹은 교직이 아니어도 대부분 쉽게 취업하였다. 그러나 수도회는 숭신학교 지원자가 4명밖에 없다는 것을 이유로 개교 2년 만인 1913년 9월 폐교를 결정하였다. 학생은 1911년 23명, 1912년26명, 1913년에는 17명으로 수가 줄었고, 1913년 9월 신입생 모집 때는 지원자가 4명뿐이었다. 그러나 폐교의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교육을 통제하고 특히 한국인이나 외국인이 교사를 양성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일제의 식민지 교육 정책에 있었다. 서울에서 베네딕도 수도회의 활동은 1921년 숭공학교의 폐교와 더불어 사실상 끝나고, 그 후 1927년까지 서울에서의 활동은 덕원으로의 이전을 준비하는 작업에 불과하였다. 베네딕도회의 서울 시기의 유일한 선교 활동은 교육 사업이었다. 이수도회가 한국 가톨릭교회 최초의 사범학교와 실업학교를 지속시키지 못한 것은 한국 교회뿐만 아니라 한국 사죄를 위해서도 큰 손실이었다. 만약 베네딕회의 숭신학교를 유지하여 교사를 배출하고, 숭공학교를 꾸준히 지속시켜 진정한 실업 교육을 구현하였다면, 1920년대 이후 한국 가톨릭교회에서 교사 부족으로 빚어졌던 교육 사업의 문제점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도 우리 역사에서 암담했던 이 시대에 한 줄기 및 같은 참교육의 모범을 제시했음은 물론, 베네딕도회에서 소망했던 대로 선교에도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었을 것이다. Die vorliegende Arbeit bezieht sich auf die Entstehungsgeschichte der Koreamission der Benediktiner und ihre erzieherische Aktivita¨ten in Seoul, was die Hauptaufanliegen dieser Mission wa¨hrend ihrer ersten Periode von 1909 bis 1927 waren. Die benediktiner Mission, die zugleich der erste Ma¨nnerorden u¨berhaupt in Korea darstellt, hat ihre Missionsarbeit in Korea mit einer indirekten, kulturellen Aufgabe begonnen, indem sie einen Lehrerbildungsanstalt und eine Handwerkerschule gru¨ndete. Zum einen war dieser Lehrerbildunsanstalt der erste katholische ho¨here Schule in Korea und, zum anderen, war die Handwerkerschule bedeutsam fu¨r die koreanische Be-rufsausbildungsgeschichte, da sie eine praxisbetonte Berufsausbildung nach dem Modell vom deutschen Lehrlingswesen in Korea einfuhrte. Die deutschen Benediktiner kamen nach Korea auf Bitte von Bischof Gustave Mutel, dem damaligen Apostolischen Vikar von Seoul, der zu dem Pariser Missionsseminar (MEP) angeho¨rte. Seit dem Jahr 1905, es herrschte eine allgemeine Stimmung in Korea, dass Erziehung ein sehr wirksames Mittel zum Schutz der nationalen Souverenita¨t sei durch ihre Fo¨rderung des Patriotismus und Aufkla¨rung. Die katholische Kirche in Korea war auch bemu¨ht um ihre Bildungskapazita¨t zu erweitern, und hat zwischen den Jahren 1905 und 1909 insgesamt 60 Schulen neu gegru¨ndet oder erweitert. Aus diesem Hintergrund, sah Bischof Mutel eine dringende Notwendigkeit fur einen Bildungsanstalt zur ausbildung gla¨ubigen Lehrer, die spa¨ter an der kirchlichen Schulen lehren sollen. Der erste Schritt der Benediktiner auf dem koreanischen Boden wurde gemacht als zwei Patres, Bonifatius Sauer and Dominikus Enschoff am 11. Januar 1909 in Seoul ankamen. Die Patres konnten einen Grundstu¨ck von ca. 10 ha. am nord-o¨stlichen Teil der Stadt, am Paektong (heutige Hoehwadong) erwerben and begannen im Juni desselben Jahres darauf ein Kloster and eine Schule zu bauen. Zwei weitere Patres und vier Bru¨der kamen nach Korea im Dezember 1909. Die Missionare wurden versta¨rkt ja¨hrlich zwischen 1911 and 1914, so dass der benediktiner Kloster in Seoul umfasste insgesamt 21 Missionare (9 Patres and 12 Bru¨der) im Juli 1914 als der erste Weltkrieg ausbrach. Die Missionare fiihrten einerseits ein monastisches Leben nach dem Motto, "ora et labora", und andererseits engagierten sich in den Bildungsaufgaben als ein indirektes Mittel der Missionierung. Eine Handwerkerschule ('Sung-Gong Schule'' entsprechend dem Motto '`labora'') wurde gegru¨ndet im Jahr 1910 and ein Lehrerbildungsanstalt (''Sung-Shin Schule' entsprechend dem Motto 'ora'') im darauf folgenden Jahr, 1911. Die Handwerkerschule verdiente viel Beachtung and Anerkennung, da sie die erste praxisbetonte and moderne Berufsausbildung nach dem deutschen Muster darstellte, deren vier Aufgaben Abt Sauer wie folgt zusammenfasste: 1) Die Schule soil sowohl der japanischen Besatzungsmacht als auch dem koreanischen Volk zeigen, dass die katholische Kirche befa¨higt ist, die sozialer Frage zu lo¨sen; 2) Die koreanischen Katholiken, die durch die wiederholten Verfolgungen verarmt wurden, soli zum Mittelstand aufsteigen indem sie eine freie katholische Handwerkerstand schaffen; 3) Die Schule soli zur Verbreitung der katholischen Glauben beitragen; und 4) Die Schule soil als Brutstelle der tuchtigen einheimischen Laienbru¨ der dienen. Absolventen dieser drei-ja¨hrigen Handwerkerschule konnten, nach erfolgreichen Abschlussprufung in Theorie and Praxis, fu¨r weitere zwei Jahre am Abtei bescha¨ftigt werden, besoldet als Gesellen, eine Zwischenstufe zwischen Lehrling and Meister. Die ersten Absolventen der Handwerkerschule kamen zum Oster 1914. Die Lehrga¨nge der Handwerkerschule umfassten verschiedene Handwerkerberufe wie Zimmerei, Schreinerei, Schlosserei, Spenglerei, Wagnerei, and Schneiderei. Spater kam Ga¨rtnerei hinzu. Zwei Patres and einige einheimischen Lehrer gaben Theorieunterricht wa¨h-rend die Bru¨der, die in ihrem jeweiligem Fach Meister waren, gaben praxisorientierten Unterricht in den Werksta¨tten. Die Zahl der Schuler wuchs sta¨ndig seit dem Jahr 1910 and erreichte 70 im Jahr 1914. Wegen Mangel an Ra¨umen and finanziellen Mitteln nur ein kleiner Teil der Bewerber konnten als Schu¨ler aufgenommen werden als im Herbst 1914 ca. 200 Bewerber urn Aufnahme baten. Seit dem Jahr 1921, dem Beschluss der Schliessung der Handwerkerschule wegen des Umzugs nach Tokwon, keine neue Schuler wurden aufgenommen. Der Lehrprogram bestand aus einer ta¨glichen zwei-stu¨ndigen Theorieunterricht und acht-stundigen praktischen Unterricht in den Werk-sta¨tten, wobei der Theorieunterricht beschra¨nkte sich auf das Allernotwendigste. Aber, als der erste Weltkrieg ausbrach im Jahr 1914, finanzielles Mittel fur Erweitering der Unterrichtsra¨ume war schwer zu erhalten, and zudem, vier Bru¨der die als Lehrer ta¨tig waren wurden zum Wehrdienst einberufen. Nach dem Krieg, wurde die Lage fur die Schule noch ungu¨nstiger: Finanzielle Unterstu¨tzung vom Deutschland war nicht mehr zu erwarten, da Deutschland den Krieg velor; Da Japan ein Kriegsgegner war, Bewachung und Kontrolle der Handwerkerschule von der japanischen Besatzung wurden strenger. Trotz all diesen Schwierigkeiten, die Handwerkerschule hat solide Forrschritte gemacht and entwickelte sich zu einer Modellschule, so dass die japanische Regierung, die einst versucht hatte, die Schule zu schliessen, stolz die Schule vorzeigte wenn hohe japanische Offiziere nach Korea kamen. Der Lehrerbildungsanstalt, eine Schule zur Ausbildung der Lehrer fur die katholischen Schulen mit einem zwei-ja¨hrigen Lehrprogram, wurde gegrundet im Jahre 1911. Zum ersten Direktor der Schule wurde Pater Andreas Eckardt ernannt, der die koreanische Sprache gut beherrschte. Als Lehrer waren zwei Patres und zwei koreanischen Laien ta¨tig. Die erste Aufnahmetest fand am 15. September 1911 and 23 ma¨nnliche Schu¨ler ausgewa¨hlt von den Bewerbern von 15 bis 28 Jahren, wurden aufgenommen. Der Lehrprogram der Schule wurde aufgebaut nach dem Muster der deutschen Lehrerschule and dem Internat. Die Schule entliess 17 Absolventen im Juli 1913, die schnell eine Besch a¨ftigung fanden als Lehrer oder in anderen Breufszweigen. Aber, die Zahl der Schuler ging zuru¨ck: 23 in 1911, 26 in 1912, 17 in 1913. Da es nur vier Neubewerber gab im September 1913, die Schule wurde daraufhin geschlossen. Die Grundursache dieser Schliessung soil abet in der Bildungspolitik der japanischen Koloniairegierung gesucht werden: Die Japaner wollten strenge Kontrolle u¨ber Koreaner beibehalten, and zu dieser Absicht passt eine Lererbildung weder von Koreaner noch von Europa¨er. Mit der Schliessung der Handwerkerschule im Jahr 1921, die a¨usseren Aktivita¨ten der Benediktiner in Seoul sind praktisch beendet, und ihre weitere Ta¨tigkeiten bis zum Jahr 1927 konzentrierten sich auf der Umzugsvorbereitung nach Tokwon. Die prima¨re Missionsaktivita¨ten der Benediktiner in Seoul waren die erzieherischen Ta¨tigkeiten. Dass sowohl die erste Lehrerschule als auch die erste Handwerkerschule nicht fortbestehen konnten, ist ein grosser Verlust fur die koreanische katolische Kirche wie auch fu¨r die gesamte koreanische Gesellschaft. Die Gru¨nde dieses Scheiterns ko¨nnen wie folgt zusammengefasst werden: 1) Die benediktinische Missionsbemuhungen fielen zum Opfer der Bildungspolitik der japanischen Kolonialregierung; 2) Es gab Unstimmigkeiten and Rivalita¨ten zwischen den franzo¨sischen Missionaren and den deutschen Benediktinern in Korea. Der erste Weltkrieg hat die Kluft zwischen den beiden vergro¨ssert; 3) Das Mutterkloster in Deutschland hatte finanzielle Schwierig-keiten; und 4) Die benediktiner Missionare selber wollten lieber direct missionieren in den Pfarreien, als indirect missionieren in den Schulen als Lehrer. Es is umso mehr bedauerlich dass diese benediktinischen Schulen geschlossen wurden, da die katholischen Schulen in Korea nach den zwanziger Jahren an chronischen Mangel an qualifizierten katholischen Lehrern leideten. Ferner, wenn diese Schule weiterbestanden batten, ha¨tten sie ein Modell der guten Erziehung geworden in einer traurigen und dunklen Phase der koreanischen Geschichte, and somit positive Einfluss auf die Missionierung erbracht wie die Bischo¨fe Weber and Sauer so sehr gewu¨nscht hatt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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