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SS 학술연구정보서비스

검색
다국어 입력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예시)
  • 中文 을 입력하시려면 zhongwen을 입력하시고 space를누르시면됩니다.
  • 北京 을 입력하시려면 beijing을 입력하시고 space를 누르시면 됩니다.
닫기
    인기검색어 순위 펼치기

    RISS 인기검색어

      검색결과 좁혀 보기

      선택해제
      • 좁혀본 항목 보기순서

        • 원문유무
        • 원문제공처
        • 등재정보
        • 학술지명
          펼치기
        • 주제분류
        • 발행연도
          펼치기
        • 작성언어
        • 저자
          펼치기

      오늘 본 자료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더보기
      • 무료
      • 기관 내 무료
      • 유료
      • KCI등재

        「봉오동부근전투상보」를 통해 본 봉오동전투

        이상훈(Yi, Sang-hun)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20 한국독립운동사연구 Vol.0 No.72

        봉오동전투는 그 중요성로 인해 다각도로 연구되어 왔다. 하지만 관련 자료와 현지 조사의 제한 등으로 전투사적 연구는 미진한 편이다. 본 연구에서는 먼저 일본측 기록의 전거가 되는 「봉오동부근전투상보」의 의문점들을 살펴보고, 그를 바탕으로 봉오동전투의 현장을 복원하고자 하였다. 「봉오동부근전투상보」는 전사상자의 소속, 계급, 성명, 부상 부위까지 기록되어 있어, 신빙성 높은 자료로 평가되어 왔다. 하지만 주제별로 편성된 목차에 오류가 있고, 시간별로 일본군 병력수 기록에 차이가 있으며, 사상자 현황에도 오류가 있다. 또 부상자 후송에 의문점이 남아 있으며, 일부 장교의 활동 부재도 확인되고 있다. 「봉오동부근전투상보」는 여러 차례 가필이 있었으며, 시간에 쫓겨 급히 정리된 문서로 파악된다. 봉오동전투 당시 독립군 주력부대는 봉오동 상촌의 삼차로를 기준으로 동산, 서산, 북산을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일본군이 삼차로 일대에 들어서자, 독립군이 일제 사격을 가해 큰 피해를 입혔다. 독립군의 공격을 받은 야스카와 소좌는 당황했다가, 독립군 주력이 배치된 쪽이 아닌 남쪽 735고지를 향해 전진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일본군의 목표가 독립군 섬멸이라는 점에서 볼 때, ‘토벌’이나 ‘공격’ 명령이라 보기 어렵다. 일본군은 독립군의 매복 공격에 피해를 입고, 남쪽으로 철수를 감행했던 것이다. 「봉오동부근전투상보」에 보이는 야스카와 소좌의 명령서는 공격명령서가 아니라 퇴각명령서였음을 알 수 있다. The Bong-o-dong Battle(鳳梧洞戰鬪) is a very important battle in korea independence movement history. But a field survey is difficult to the Bong-o-dong Battle(鳳梧洞戰鬪). It’s lacking in related material. 「Bong-o-dong battle report(鳳梧洞附近戰鬪詳報)」 is a battle report of the Japanese army. There are a lot of various moot points in 「Bong-o-dong battle report(鳳梧洞附近戰鬪詳報)」. Therefore it isn’t possible to believe it just as it is. An Korea Independent Army(獨立軍) gathered at Sang-chon(上村) of Bong-o-dong(鳳梧洞). The Japanese army came under the fire from an Korea Independent Army(獨立軍) and lost. A target of the Japanese army was an extermination of an Korea Independent Army(獨立軍). But the Japanese army didn’t attack an Korea Independent Army(獨立軍). 「Bong-o-dong battle report(鳳梧洞附近戰鬪詳報)」 isn’t an aggressive order and is a retreat order. It’s clear that an Korea Independent Army(獨立軍) won at the Bong-o-dong Battle(鳳梧洞戰鬪).

      • KCI등재

        662년 김유신의 군량 수송작전

        이상훈 ( Sang Hun Yi ) 국방대학교 안보문제연구소 2012 국방연구 Vol.55 No.3

        660년 백제가 멸망하고, 661년 당은 고구려를 다시 공격하였다. 소정방은 고구려의 평양성을 포위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당은 신라에 군량을 요청하였고, 662년 김유신이 평양으로 군량 수송을 담당하게 되었다. 5만 명이 한 달간 사용할 수 있는 군량을 육로로 수송해야 하는 위험한 작전이었다. 김유신은 소로를 이용하여 마식령 산맥을 넘었으며, 수안을 거쳐 양오(楊?)라는 곳에서 당군에게 군량을 전달해 주었다. 군량을 전달한 후 김유신의 부대도 서둘러 철수를 해야 했다. 고구려군이 김유신의 부대를 차단하려고 하자, 김유신은 소를 이용하여 기만작전을 폈다. 결국 고구려군을 따돌리고 야음을 틈타 무사히 신라로 귀환하였다. 김유신의 군량 수송작전은 주로 해곡도와 다곡도로 이루어졌는데, 668년 나당연합군의 평양성 공격시에도 그대로 활용되었다. 662년 군량 수송작전의 성공적 경험은 평양성 공격과 점령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판단된다. The Union of Silla and Tang overthrew Baekje in 660. Tang attacked Koguryo again in 661. The army of Tang surrounded the Pyong-yang castle. And Tang requested provisions from Silla. The provisions can carry out one-piece month-long use of the 50,000 people. The provisions was transmitted to the army of Tang by Yang-o(楊?). The army of Tang retreated from the Pyong-yang castle soon. The army of Kim Yu-shin also had to go back. However, the army of Koguryo was intercepting the street corner. Kim Yu-shin used deception strategy. After all, Kim Yu-shin returned to Silla safely. The provision transport operations of Kim Yu-shin in 662 was successful. Silla and Tang attacked the Pyong-yang castle in 668. At this time, the experience in 662 is important, a certain role was carried out.

      • KCI등재
      • KCI등재

        고구려 영류산의 위치와 나당연합군의 진군로

        이상훈(Yi, Sang-Hun) 한국고대사탐구학회 2020 한국고대사탐구 Vol.34 No.-

        668년 나당연합군은 고구려의 평양성을 함락했다. 당시 당군과 신라군 선발대는 안주 일대에서 합류한 후 남하하여 영류산에 주둔했다. 영류산은 일제시기 일본학자가 평양 동북쪽의 20리 지점에 위치한 대성산을 영류산으로 비정한 이후, 별다른 의심없이 학계에 수용되어 왔다. 하지만 대성산은 평양 북쪽에 위치한 영류산과 별개의 산으로 추정된다. 나당연합군은 안주-숙천-순안-평양으로 이어지는 교통로를 이용한 것으로 판단된다. 교통로와 지형을 감안할 때 평양 북쪽에 위치한 봉수산과 부산이 주목된다. 봉수산과 부산은 평양에서 북쪽으로 20~30리 거리에 있으 며, 봉수산에는 전근대시기 주요 통신수단이었던 봉수대가 위치했고, 부산에는 장수가 도끼로 적을 무찔렀다는 전설이 남아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평양 북쪽 20리에 위치했던 영류산은 봉수산(부산) 일대를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진다. The Silla-Tang Allied forces(羅唐聯合軍) destroyed Goguryo(高句麗) in 668. At that time, the Silla-Tang Allied forces was stationed at Youngryusan(嬰留山). Youngryu-san is considered Daesung-san(大城山) in Pyongyang(平壤). However, Youngryu-san and Daesung-san are other mountains. Daesung-san is a mountain located northeastern of Pyongyang. Youngryu-san is a mountain located north of Pyongyang. The Silla-Tang Allied forces used a line of march between Pyongyang and Anju(安州). Youngryu-san is estimated at Bongsu-san(烽燧山). There is a signal beacon on the mountain, and the legend of the general remains on the mountain.

      • KCI등재후보

        칠곡 松林寺의 입지조건과 창건배경

        이상훈(Yi, Sang-hun) 한국고대사탐구학회 2014 한국고대사탐구 Vol.18 No.-

        송림사는 팔공산의 서남 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사찰이다. 현재까지 송림사에 대한 연구는 유적과 유물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기 때문에 사찰의 창건배경은 그다지 주목되지 못했다. 송림사의 사리장엄구는 감은사의 것과 거의 동일한 보장형 사리장엄구로서, 7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사리장엄구가 7세기 후반에 조성된 것이라면, 이 시기에 송림사가 창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7세기 후반 신문왕은 9주 5소경 제도를 완성하고, 달구벌 천도를 시도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를 전후하여 팔공산이 중악으로서 중시되기 시작하였다. 팔공산 서남쪽에 자리잡은 송림사가 창건된 시기이기도 하다. 달구벌로 천도가 될 경우 서쪽은 낙동강이라는 자연해자가 있고, 북쪽으로는 팔공산이 자연병풍 역할을 하게 된다. 이럴 경우 팔공산을 우회하여 남하할 수 있는 교통로를 통제할 필요성이 대두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송림사의 입지조건이 중시되어 창건된 것으로 파악된다. The Songlim-sa Temple(松林寺) is located in the southwestern side of the Mt. Palgong(八公山) in Daegu. A research work to the Songlim-sa Temple has stood up focusing on relics. And it wasn"t watched about a background of establishment. A bone of a Buddhist saint tool(舍利具) of the Gameun-sa Temple(感恩寺) and The Songlim-sa Temple are similar. Therefore it"s possible to think to have been made in the second half in the 7th century. The King Shinmun(神文王) tried to move the capital at the same time. The king Shinmun thought the capital moved to Daegu from Gyeongju. When Daegu becomes the capital, the Songlim-sa Temple on the north side will be a center in military way. After all, the Songlim-sa Temple established this time.

      • KCI등재

        나당전쟁기 신라의 대규모 축성과 그 의미

        이상훈(Yi, Sang-hun) 한국고대사탐구학회 2016 한국고대사탐구 Vol.23 No.-

        이 논문의 목적은 나당전쟁 당시 신라가 대대적인 축성작업을 시행한 것에 대한 의미를 파악하고자 함이다. 670년 신라의 선제공격으로 나당전쟁이 시작되었고, 당은 671년부터 한반도로 남하해 오기 시작했다. 672년에 신라와 당은 황해도 일대에서 격전을 벌였는데, 당시만 하더라도 신라의 전략은 공격이 우선이었다. 하지만 그 해 석문전투에서 당군에게 크게 패하면서 전략을 방어로 전환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신라는 대대적인 축성작업을 진행하였다. 석문전투 이후 673년까지 10여 개의 성들이 새롭게 축조되거나 보수되었다. 673년에 축조된 10여 개의 성들은 신라의 방어전략을 엿볼 수 있는 중요지표가 된다. 방어하는 입장에서 부족한 곳을 보완하기 위해 방어성을 지었기 때문이다. 신라는 임진강 방어선 후방에 주장성・주양성・주잠성 등을 신축하여 새로운 방어선을 설정하였고, 국원성・사열산성・만흥사산성 등을 신축하여 소백산맥을 중심으로 하는 방어선을 강화하였다. 또한 소문성・이산성・골쟁현성 등을 신축하여 경상도 내륙 방어를 보완하였으며, 서형산성・북형산성 등을 신축하여 수도 방어를 완비하였다. 이렇듯 신라는 673년 대대적인 축성작업을 통해 수도 경주를 중심으로 전방위에 걸쳐 방어망을 보완하였다고 할 수 있다. The Silla(新羅) attacks the Tang(唐) first, and a war has started in 660. This is the Silla-Tang war(羅唐戰爭). The Tang has begun to move south in Han peninsula(韓半島) in 671. The Silla fought against the Tang in Hwanghaedo(黃海道). The Silla was defeated and changed the strategy in 672. The Silla"s strategy was defense and was construction of a castle extensively. The castle shipped at the same time was about 10. The Silla strengthened the defense line and equipped well with metropolitan(首都) defense. Construction of a castle of Bukhyeongsanseong(北兄山城) was to stop a channel attack in particular. The Silla formed a defense network to all directions.

      • KCI등재

        백제 멸망기 신라 수군의 성격과 역할

        이상훈(Yi, Sang-hun) 한국고대사탐구학회 2017 한국고대사탐구 Vol.27 No.-

        660년 나당연합군은 백제를 멸망시켰다. 당군은 산동반도에서 출발해 덕물도에 도착했고, 이때 신라의 수군 100척이 당군과 합류했다. 일반적으로 덕물도에 합류한 신라 수군 100척은 보급부대로 인식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당군의 보급준비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에서 기인한다. 실제 당군은 장거리 원정시 보급 준비에 만전을 기했다. 행국은 편성할 때 보통 30%를 기준으로 치증병을 할당했다. 당의 입장에서 볼 때 백제는 장거리 원정에 해당하며 육로로 보급로가 이어지지 않기 때문에 더 많은 군량을 준비했을 가능성이 높다. 신라 수군은 병선, 대선, 거함 등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승선한 인원도 병사나 병으로 묘사되어 있다. 당군의 보급 준비 실태나 신라국의 기록을 통해 볼 때, 신라 수군 100척을 보급 부대로 볼 가능성은 낮다. 그렇다면 신라 수군의 성격은 기록 그대로 전투 부대로 보아야 할 것이다. Baekje(百濟) extincted by the Silla-Tang Allied Forces(羅唐聯合軍) in 660. The Tang Navy leave the Shandong Peninsula(山東半島) and have arrived at Dukmul-do(德物島). The Silla navy joined at Dukmul-do. The Silla navy is recognized as a supplement troop(補給部隊). The military of Tang esteemed supplement. Baekje wasn"t connected to China and a land route. The military of Tang, using large shipping, it was replenished. The number of the Silla navy" ships is 100. It"s recorded by a warship(兵船) and a big ship(大船). A persons is recorded by a soldier(兵士). When seeing through supplement preparations of the Tang Navy and record of the Silla navy, the Silla navy was a combat troop(戰鬪部隊).

      • KCI등재

        羅唐戰爭의 軍事的 原因과 新羅의 戰爭準備

        李相勳(Yi Sang-Hun) 부산경남사학회 2011 역사와 경계 Vol.79 No.-

        나당전쟁의 주 원인은 당이 신라와 맺은 영토분할약정을 위반하였고, 신라가 백제ㆍ고구려 원정에 적극적이었지만 그에 따른 대가가 없었으며, 취리산 회맹을 통해 백제와 신라가 동등한 위치에 처해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원인들 외에, 백제와 고구려를 원정하는 과정상에서 당에 의한 신라 군령권 침해가 컸기 때문에, 신라 수뇌부의 반발이 컸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전략요충지인 비열홀을 둘러싼 나당간의 갈등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신라는 왜에 사신을 보내 후방의 염려를 줄이고, 본격적으로 전쟁준비에 박차를 가한다. 정치ㆍ외교분야에서 기만작전과 정보수집을 진행하였고, 사회ㆍ경제분야에서 사회 안정과 민심수습을 꾀하였으며, 군사ㆍ기술분야에서는 무기의 성능을 향상시키고 기병을 강화하였으며, 종교ㆍ심리분야에서는 민심수습을 하면서 심리전을 구사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신라는 668년 하반기부터 당에 대한 전략을 수립하고, 669년에는 이를 구체화시켜 나갔다. 치밀한 계획과 준비를 거쳤기 때문에, 신라가 요동으로 선제공격을 가할 수 있었으며, 나당전쟁 초기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A lot of researches worked out for Na-Tang War cause. However, it was not interested in a military cause. A lot of military command rights of Silla Kingdom were violated by the party. And, Silla Kingdom and Tang had the conflict for the problem of Biyeolhol(比列忽). The violation of the military command right and Biyeolhol problem brought the dissatisfaction of Silla Kingdom. The research did not work out for Na-Tang War efforts. Silla Kingdom actually prepared the war for 669 years. War efforts worked out in various fields of politics, diplomacy, the society, economy, military affairs, and the technology, etc. The preparation for such a war enabled Liaodong(遼東) attack of Silla Kingdom. After all, Liaodong attack of Silla Kingdom initiated the war.

      • KCI등재

        신립의 작전지역 선정과 탄금대 전투

        이상훈(Yi, Sang-hun)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3 군사 Vol.- No.87

        The Japanese Invasion broke outin 1592. It was defeated although shinlip(申砬) was stationed to tangeumdae(彈琴臺) of chungju(忠州). Why was shinlip stationed to tangeumdae of chungju? It is that geographical feature and the weather acted heavily. Tangeumdae had only one approach of japanese army(倭軍). And japanese musket(鳥銃) was inefficient-like because of the wind. Shinlip chose tangeumdae which can utilize a trooper(騎兵) effectively. It is concluded that battle place selection of shinlip was the best. Probably, the nature of general(將帥) must be reappraised although shinlip was defeated by the battle.

      • KCI등재

        황산벌의 위치와 전투의 재구성

        이상훈(Yi, Sang-hun) 서강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21 서강인문논총 Vol.- No.60

        660년 신라는 당과 연합해 백제를 멸망시켰다. 당군 13만명이 덕물도에 도착하였고, 신라군 5만명이 경기도 이천으로 북상하였다. 신라군과 당군은 합군하지 않고, 각각 행군하여 백제의 수도로 향하였다. 당군은 수로로 이동하고, 신라군은 육로로 이동하였다. 황산벌에서 신라군 5만명과 백제 결사대 5천명이 격돌하였다. 황산벌이 논산 연산면 일대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만, 백제군이 설치한 3영의 위치에 대해서는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계백이 이끄는 결사대가 황산벌의 험한 곳에 3영을 설치하였다는 기록 때문에, 3영의 위치를 연산면 일대의 산성에 비정하는 경향이 강하였다. 하지만 ‘黃山之原’은 ‘黃山之谷’과 대비되는 말로서, 황산의 벌판에서 벌어진 전투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문무왕릉비문」을 음미해 보면, 백제 결사대는 3영이 서로 연계될 수 있도록 밀집해 배치된 것으로 보인다. 백제군 3영은 연산 일대의 교통로가 교차하는 연산리에 편성된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연산리 배후에 매봉이 위치해 있으며, 정상부에는 토축된 청동리산성이 자리잡고 있다. 백제 결사대는 매봉을 중심으로 북쪽, 동쪽, 남쪽 3곳에 방어진영을 편성해, 신라군을 막아선 것으로 보인다. The Baekje(百濟) extincted by the Silla-Tang Allied Forces(羅唐聯合軍) in 660. A guidance layer of Baekje split and an opinion was difficult to make identical. And it was also difficult to rally local army. A deceptive strategy of the Silla-Tang Alleid Forces succeeded at the same time. The Silla-Tang Allied Forces landed in Dangjin(唐津). Dangjin had a naval base in Baekje. It was difficult that Baekje makes a defense plan for this. A defense plan is divided into a master plan and an occurrence plan. A master plan is a side attack and an occurrence plan is the front attack. The Silla-Tang Allied Forces seemed to be to do the front attack. But this was something to trick Baekje. Silla army went to Tanhyun(炭峴) and Tang army went to Kumgang(錦江). Baekje couldn"t stop the offensive of the the Silla-Tang Allied Forces after all. 50,000 people of Silla army and 5000 people of Backje army fought by the Hwangsan(黃山)-Field in 660. The Hwangsan(黃山)-Field is Yeonsan (連山) of Nonsan(論山) area. But the location of the camp of Backje army isn"t clear. When seeing through a records, a battle occurred in the field. There were a lot of infantrymen for Silla army. There were a lot of troopers for Backje army. A military camp of Backje army was connected each other. A military camp of Backje army was installed in Maebong- Mountain. There is a mountain castle to the top of the mountain. The Backje army defended the north side, the east side and the south side focusing on Maebong-Mountain. Silla army had to consume 2 days in the Hwangsan(黃山)-Field.

      연관 검색어 추천

      이 검색어로 많이 본 자료

      활용도 높은 자료

      해외이동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