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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 회의주의의 기원으로서 고르기아스 -『이지 않음에 관하여』와 섹스투스의 고르기아스 평가를 중심으로-

        박승권 범한철학회 2018 汎韓哲學 Vol.91 No.4

        In history of philosophy, just Socrates and Pyrrhon are usually considered to be Origin of Ancient Skepticism. However, the attitudes and methods of the ancient skeptics can not be explained by them alone. I think that Gorgias' On not Being is the origin of skepticism in discussions related to Logos. For not only in the attitude, but also in the way of refutation and philosophical position, Gorgias is similar to the ancient skeptics. Through the analysis of On not Being and the evaluation of Sexus to Gorgias, we can grasp the role of skepticism in the philosophical context of ancient skepticism, especially in the discussion of Logos. First, Gorgias has the position of a counter-argument in discussions related to Logos. This position is by no means a position to believe and speak, that is, to seriously suggest theories. Gorgias seems to be a negative dogmatist, not a skeptic, because he presented the proposition that "nothing exists." However, he did not suggest this proposition as a serious theory, merely speaking in the place of the counter-argument. On the contrary, he has done a dialectical refutation of the skeptic, and thus can be regarded as showing the character of the skeptic as a count-argument in the discussion on Logos. In addition, the method of disputation used by Gorgias in On not Being is repeated as it is in Sextus' Outlines of Pyrrhonism. Sexus uses the method of Gorgias while refuting the criterion of truth of the Stoics. This method is useful to reveal the internal contradictions of the theories suggested by the dogmatists in the discussion on Logos, on the one hand, and the consistency of the skeptics. The skeptic who disputes the doctrines on the basis of the assumptions and rationality of the doctrines, but does not accept them, is consistently disputing the beliefs of the doctrines. Skeptics dispute the premises and rationalities of the dogmatists, but do not accept their premises and rationality. Thus, refuting each of the beliefs of the dogmatists makes the skeptic's actions consistently. 고대 회의주의의 철학사적 맥락에서 기원으로 여겨지는 철학자는 대개 소크라테스와 피론이다. 그러나 고대 회의주의의 태도와 방법은 이들만으로는 설명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나는 고르기아스의『이지 않음에 관하여』가 로고스와 관련된 논의에서 회의주의자의 기원이 된다고 본다. 논변에 임하는 태도에서 만이 아니라, 철학적 입장과 논박의 방식에서도 고르기아스는 고대 회의주의자들과 유사하기 때문이다.『이지 않음에 관하여』에 대한 분석과 섹스투스의 고르기아스에 대한 평가를 통해 고대 회의주의의 철학사적 맥락, 특히 로고스와 관련된 논의에서 회의주의의 역할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우선 고르기아스는 로고스와 관련된 논의에서 반론자의 위치를 가진다. 이 위치는 결코 자신의 반론을 믿고 말하는, 즉 진지하게 이론을 제시하는 위치가 아니다. 고르기아스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무언가 존재한다 해도 알 수 없다. 무언가 존재하고 알 수 있어도 남에게 전할 수 없다”라는 명제를 제시했기에 회의주의자가 아니라 부정적 교조주의자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는 반론자의 자리에서 말한 것뿐이지 이 명제를 진지한 이론으로서 제시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회의주의자의 변증적 논박을 행한 것이며, 따라서 로고스와 관련된 논의에서 회의주의자의 반론자로서의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또한 고르기아스가『이지 않음에 관하여』에서 사용한 논박의 방법은 섹스투스의『피론주의 개요』에서 그대로 반복된다. 섹스투스는 스토아학파의 진리의 기준을 논박하면서 고르기아스의 방법, 곧 전제를 논박한 후 그 전제를 인정한 채로 주장을 검토하는 방법을 구사한다. 이 방법은 한편으로는 로고스와 관련된 논의에서 교조주의자가 제시하는 이론들의 내적 모순을 드러내기에 유용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회의주의자의 일관성을 드러내게 한다. 교조주의자의 전제들과 합리성을 기준으로 교조주의자를 논박하되 이것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회의주의자는 교조주의자들의 믿음 각각을 논박하는 것이 일관적이기 때문이다.

      • KCI등재

        피론학파 회의주의는 철학인가 - 『피론주의 개요』의 철학의 의미를 중심으로 -

        박승권 범한철학회 2016 汎韓哲學 Vol.81 No.2

        In order to establish the relation between sceptics and philosophy this paper tries to show that Pyrrhonian Scepticism can have a status of philosophy. There were many criticisms that the Pyrrhonian Scepticism was no philosophy because it offered no positive claims but reputing the other philosophical arguments. A methode for solving this problem is clarifying how Pyrrhon understands the concept of philosophy. This paper carries out this task depending on the interpretation of Sextus on Pyrrhon in his Outlines of Pyrrhonism. According to Sextus Pyrrhonian Scepticism investigates just theories of truth of dogmatic philosophies without establishing a positive theory of truth. The skeptics consider everything as a phenomenon that emerges in Agogē (the course of life). The theories of truth of dogmatic philosophies too are just intellectual phenomena from the course of life, not theories showing the unchanged essence of things. This attitude of skepticism comes from a thought that philosophy is just a empty theory. It means that theory and life lie not in a hard relationship. So, Pyrrhonism is not a philosophical school in the sense they have a unique theory of truth, but in the sense they investigate to be given theory of truth. 피론학파 회의주의가 철학인지에 관한 논란이 오래전부터 있었다. 이 논란은 회의주의와 철학의 관계를 정립하기 위해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 다른 철학자나 학파의 진리론을 그저 논박하기만 할 뿐, 스스로는 아무런 주장도 하지 않는 회의주의를 철학이나 철학적 학파라고 부를 수 있는지가 문제이다. 이 논란을 해명하기 위해서 섹스투스의 『피론주의 개요』에 대한 독해를 통해 피론주의자의 철학과 학파의 개념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개요』는 피론주의를 하나의 철학이라고 서술한다. 그런데 피론주의가 철학인 이유는 고유한 진리론을 가지기 때문이 아니라, 교조적 철학자들의 진리론을 탐구하기 때문이다. 이 때, 탐구의 대상은 진리 자체가 아니라 진리론이다. 그리고 피론주의가 학파인 이유는 고유한 진리론을 가지기 때문이 아니라 삶의 방침으로서 현상을 따르기 때문이다. 교조적 철학의 주장은 지적현상으로 주어지는 것이고, 피론주의자는 이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논박함으로써 삶의 방침을 따라 철학적 탐구를 수행해 나간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피론주의자가 인식론과 삶의 방침 사이의 연관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교조적 철학의 인식론적 주장들을 철저히 검토하고 다루지만 결코 그와 같은 종류의 인식론적 주장을 세우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한 주장들은 삶에 주어지기는 하지만 삶의 방침과는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회의주의자는 교조주의자의 철학적 주장들을 면밀히 검토하고 논박함으로써 철학적 탐구에 동참하게 된다. 피론학파 회의주의는 고유한 진리론을 가지고 있는지를 기준으로 삼았을 경우 철학학파가 아니지만, 주어진 진리론을 탐구한다는 점에서 철학학파인 것이다.

      • KCI등재

        피론학파 회의주의자의 행위에 관한 연구

        박승권 범한철학회 2021 汎韓哲學 Vol.100 No.1

        피론학파 회의주의는 실천에 있어 무능해 보인다는 문제가 있다. 섹스투스 엠피리쿠스는 회의주의를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실천적인 것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논박의 실천 이외에 인간의 행위 일반이나 윤리적 실천에 관하여 충분한 설명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 더욱이 교조주의자들의 주장을 철저하게 논박하기 위해 논변형식들을 만들어 모든 것에 대한 판단의 유보가 가능해진 피론주의자는 믿음을 구성할 수 없을 터이니 행위 할 수도 없다는 행위불가 반론에 답변하기 어려워 보인다. 그러나 피론학파는 행위에 믿음을 전제하지 않고 강제된 동의인 현상이 우리의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기준이라 주장한다. 현상은 이성의 검토 이전에 이미 받아들여지고 우리의 행위를 일으키는 것이므로 회의주의자는 믿음 없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이러한 삶은 동물로서의 인간행위를 설명할 수는 있지만 대안이 있는 것에서 하나를 선택하는 행위나 기계적이지 않은 삶의 행위들을 비롯해 특히 윤리적 행위를 설명하기 어렵다. 이에 대해 피론학파는 현상의 더 구체적인 기준들을 제시한다. 특히 공동체적 삶과 윤리적 행위는 관습을 기준으로 삼는다. 관습은 주어지는 것이며, 한 사회의 규범으로 이미 작동하고 있는 것이므로 현상이라 할 만 하고, 선호 없이 행위 선택을 하게하며, 삶의 목표 설정까지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이렇게 반성의 대상이 아닌 현상으로서의 관습으로는 예외적이 상황이나 상충하는 윤리적 선택지가 있는 경우에 어떻게 행위 할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피론학파는 헬레니즘 철학의 주요 개념들인 무관심과 선입견을 보충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으로 보인다. There is a problem that pyrrhonian skepticism seems incompetent in practice. Sextus Empiricus describes skepticism as not theoretical but practical, but does not provide sufficient explanations for human behavior and ethical practices. Furthermore, it seems difficult to answer the apraxia argument that a pyrrhonist, who has created tropoi to refute dogmatic arguments and has made it possible to the suspension of judgment on anything, cannot construct beliefs and cannot act. However, the pyrrhonists argue that the appearances of enforced assent is the criteria by which our actions are made possible, without presupposing that belief is necessary to do them. The appearance is already accepted before the examination of reason, so skeptics can live without belief. Such life can explain human activity as an animal behavior, but it is difficult to explain the act of choosing one from what has an alternative, especially ethical actions. In response, the pyrrhonists suggest more specific criteria for the appearance and argues that the criteria of ethical conduct is convention. That is given, and already applied as norms of a society, so that deserve to be a appearance, make action choices without preference, and even set life goals. However, That is not sufficient to explain how to act in exceptional situations and in the presence of conflicting ethical options. I It seems to me that the pyrrhonists solve this problem through adiaphora and prolepsis.

      • 朝鮮民族巫俗與我國北方各民族薩滿敎比敎硏究

        朴承權 韓國暻園大學校 아시아文化硏究所 中國 中央民族大學 韓國文化硏究所 1997 亞細亞文化硏究 Vol.2 No.-

        본 논문에서는 한민족의 무속과 중국북방 여러 민족의 샤마니즘에 대하여 역사적인 변혁, 세계관, 부락공동신앙, 입무(入巫)과정 그리고 사제자 등 다섯개 부분으로 나누어 비교하면서 이것들 사이에 존재하는 같은 점과 차이점을 지적하고 거기에서 양자의 연원관계를 밝히려고 꾀하였다. 첫부분에서는 한민적 무속의 역사와 중국 북방에 거주하고 있는 몽고족, 만주족 샤마니즘의 역사적인 흐름에 대하여 서술하였다. 현재 이슬람교를 신앙하고 있는 중국서북부, 그리고 동북부에서 로씨야 동정교를 신앙하고 있는 여타 민족의 샤마니즘의 변혁의 과정에 대하여서도 약간 취급하였다. 두번째 부분에서는 세계관에 대한 비교였다. 양자는 모두 원시적인 종교로서 우주의 기원과 구조, 자연에 대한 인격화, 신격화하는 방식과 내용 그리고 영혼의 안식처에 대한 구상에서는 일치를 보여주고 있다. 세번째 부분은 부락공동신앙으로 취급되는 서낭당과 오보에 대한 비교였다. 서낭당과 오보는 모양, 지리적위치, 기능 등에서 너무나도 흡사한 부분이 많다. 그러나 세계관이나 부락공동신앙의 비교에서 보면 한민족이 모시는 신들은 가신, 농신, 부락공동신이 대부분이며 그 하나하나의 내용도 매우 풍부하다는 데서 큰 차이를 보여준다. 네번째 부분에서는 입무과정에 대한 비교였다. 무당이나 샤만이 되려면 반드시 일정한 조건을 갖추어야 되는데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무병이다. 무병의 경력이 없다면 무당이나 샤만이 될 수가 없다. 그리고 무병을 앓고난 사람도 반드시 당분간 공부를 하여야 하며 또 입무의식을 진행하여야 한다. 무당이나 샤만이 되고자 하는 이에게 있어서는 입무의식이 하나의 고비라 하겠다. 또한 자신의 신력을 과시하고 인심을 농락하는 가장 좋은 기회이다. 그런데 한민족의 무당의 입무의식은 중국 북방샤만의 입무의식보다 형식이 단촐하며 위험성은 적은편이다. 거의 퇴화되어 원시적인 형체만 찾아 볼 수밖에 없다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다섯번째는 사제자에 대한 비교였다. 주로 당골과 씨족샤만에 대하여 비교하여 보았다. 당골과 씨족샤만은 모두 혈연적관계를 맥으로 세습되고 어느 한 군체에 소속된 사제자로서 자기가 소속된 무리를 위하여 일을 하게 되며 비교적 고정적인 신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당골은 이미 사회화한 조직을 구성하였으며 비성문화된 항업규률과 조직이 이루어져 있다. 혼인은 그 당골사회 내부에서 이루어 지고 전승의 대상은 직계친속이며 굿의 대상은 혈연적 관계를 초월한 부락민들이다. 중국 북방의 씨족샤만의 전승은 비직계적인 친속도 가능하며 굿의 대상은 단지 씨족 내부에만 국한되어 있다. 이상에서 비슷한 점과 차이 점을 찾아 보았는데 이러한 일치성의 존재는 한민적의 무속과 중국 북방의 샤마니즘이 본질적으로 같은 계통의 원시종교에서 연원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보아진다. 양자 사이에 차이점이 존재하는 원인에 대하여 아래와 같은 세가지 점에서 찾아 보았다. (ㄱ) 생활방식과 생산방식사이의 차이이다. 한만족은 비교적 전형적인 농업민족으로서 정착된 생활이 위주인만큼 원시종교에도 이러한 냄새가 풍기기 마련이다. (ㄴ) 한민족이 계급사회에 들어간 시간이 중국 북방에 사는 여타 민족보다 일찍하다. 때문에 원시종교가 퇴화된 정도가 보다 엄중하며 사회적인 요소가 더 많이 첨가되어 있다. (ㄷ) 한반도의 특수한 지리적 조건이다. 한반도는 세면이 바다에 둘러싸여 있으며 육지로 대륙과 이어진 부분인 북부는 산이 많고 사람이 적게 살던 곳이다. 대신 남부에는 평원이 많고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았다. 이렇게 천연적으로 외계와 떨어진 지리적인 여건은 한민족 무속의 독립적인 발전에서 빼여 놓을 수 없는 원인으로 된다.

      • KCI등재

        피론학파 회의주의자의 고통과 평안

        박승권 범한철학회 2022 汎韓哲學 Vol.104 No.1

        피론학파 회의주의자들의 궁극적 목표는 평안이다. 평안은 고통의 상대개념이고 따라서 회의주의자의 평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벗어나고자 하는 고통이 무엇인지 파악되어야 한다. 피론학파의 평안과 대비되는 고통은 가치나 실천에 관한 고통(가치-고통)과 불규칙한 사태의 진리를 파악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고통(인식-고통), 그리고 로고스의 대립에 의한 고통(로고스-고통)이 있다. 가치-고통은 어떤 것이 본성적으로 가치있다는 믿음에 의한 고통이므로 이 믿음을 유보함으로써 평안을 획득할 수 있다. 하지만 인식-고통은 그렇지 않다. 인식-고통은 진리를 발견하지 못했기에 발생하는 고통이므로 진리발견을 통해 해소 해야 한다. 게다가 인식-고통은 탐구를 시작하는 모든 이의 고통이지 피론주의자의 평안과 관련된 고유한 고통이 아니다. 인식-고통을 해결하려는 과정에서 발견하는 로고스의 대립과 이로 인한 로고스-고통이 회의주의자가 해결하려는 고통이다. 로고스의 대립은 로고스의 진리함축적 성격에 의한 것이므로, 회의주의자는 판단유보를 통해 진리로부터 현상으로 돌아선다. 또한 진리로부터 현상으로 방향을 바꿈으로서 로고스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며, 진리발견의 필수적 성격이 제거되어 인식-고통도 해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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