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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 평양의 위치를 통해서 본 발해 중경현덕부의 위치에 관한 연구

        민성욱 ( Min¸ Sung Woog )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국학연구원 2021 선도문화 Vol.31 No.-

        단재 신채호는 한국사에서 평양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었다. 그것은 역사지리 연구의 어려움을 간파한 것이었다. 일본이 식민주의사관의 일환으로 심어준 반도사관 등의 영향으로 패수를 지금의 대동강으로, 고대 평양을 지금의 북한 평양으로 인식함으로써 고구려 평양성뿐만 아니라 단군조선과 위만국의 왕검성까지 지금의 압록강 이남으로 설정, 민족의 강역을 반도 안에 갇히게 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한사군도 한반도 안에 설정, 식민지배의 역사성을 강조함으로써 역사에 대한 피해의식이 여기에서부터 기인한다. 고대 평양은 고유 명사라기보다는 도읍지로 할 만한 넓은 평야지역을 일컬었던 일반명사일 가능성이 높다. 이것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기록으로 본 고구려 천도의 역사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말갈은 고구려를 구성하는 주요 종족 중 하나로 고구려가 건국되기 전부터 존재했었고, 특히 고구려 초기 건국지에 정착해서 살고 있던 말갈집단은 갈등도 있었지만 고구려에 흡수되어 그 이후 고구려의 주요한 군사자원이 되어 주었고 고구려가 멸망하자 고구려를 계승하여 대진국, 곧 발해를 건국하게 이른다. 이러한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하기 위해서 장수왕 때 고구려 수도였던 평양으로 도읍지를 옮기게 되는데, 그곳이 바로 발해 3대 문왕 때 옮긴 도읍지, 중경현덕부다. 이것은 발해 5경 중 하나이며, 요나라 때는 동경요양부로 지금의 요령성 요양지역에 해당된다. 이와 같이 고대 만주지역에서 발원한 국가들은 평양지역을 거점으로 삼았는데, 대표적인 나라가 고구려가 있고, 고구려의 정통성을 계승한 발해가 있다. 고구려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성과 발해 문왕이 천도한 중경이 지금의 요양으로 같은 곳이었다. 고대 평양성을 매개로 고구려와 발해 그리고 고구려의 구성원으로서 발해 건국의 주체이기도 한 말갈의 위치를 헤아려 볼 수 있다. The ancient Pyongyang(平壤) is a common noun rather than a proper noun. Pyongyang means a wide, flat area with remarkable Goguryo(高句麗) capital. This can be checked through the history of Goguryo the transfer of the capital with Samguksagi(三國史記) record. Malgal(靺鞨) was one of the major races that make up the Goguryo existed even before the founding. Malgal population were living with extreme settled in the early Goguryo area of the founding the conflict but also the Goguryeo was absorbed. Since then, the Malgal is consist of the major military resources of the Goguryo, After fall of Goguryo, the Daejinguk(大震國) was founded to succeeded Goguryo. Daejinguk is Balhae(渤海). To transfer Pyongyangseong(平壤城) of the Goguryo’s capital transferred by Jangsuwang(長壽王), The third King of the Balhae, Moonwang(文王) was transferred Balhae’s capital. That’s the Joongkyunghyundeokbu(中京顯德部), one of the Balhae’s Five Capital.(渤海五京) The Balhae was founded to the succeeded the Goguryo. And so it was succeeded Goguryo’s capital. The Pyongyang which Jangsuwang transferred to was not Pyongyang of North Korea of today but I confirmed that it was Pyongyang of Liaoyang (遼陽) city, in Lioning province(遼寧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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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랑과 백제와의 관계 고찰을 통한 말갈의 위치 연구

        민성욱 ( Sung Woog Min )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국학연구원 2013 선도문화 Vol.15 No.-

        본 논문에서 말갈의 실체적 연구를 위하여 주요 주변국인 낙랑과 백제와 관계를 고찰하고, 낙랑과 백제 초기 도읍지를 토대로 말갈의 위치를 새롭게 비정하고 고증하고자 했다. 그 동안 말갈연구는 단편적으로 이루어지거나 오래된 고정관념에 서 벗어나지 못하고, 이해관계에 따라 왜곡된 연구로 일관되어 왔다. 주변국 중에서 말갈과 가장 많은 관계 기록을 갖고 있는 백제와 말 갈의 위치 고증을 위해서는 반드시 그 관계 정립이 필요한 낙랑을 통해 말갈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다. 낙랑은 크게 세 가지로 분류되는데, 첫 번째, 난 하 동부연안에 위 치한 한 사군의 낙랑군, 두 번째, 한반도 북부에 위치한 최 리의 낙랑 국, 세 번째, 낙랑 국이 고구려에 의해 멸망하자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서 낙랑 국 자리에 후한 광무제가 설치한 낙랑이 있다. 이 중에서 말갈의 위치를 고증해 줄 수 있는 낙랑은 한 사군의 낙랑군으로 요서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 백제는 말갈에 대응하기 위하여 성을 축성하고, 무기체계도 보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왕권강화를 통한 고대 국가로서 체제도 정비하였다. 즉, 말갈과 전쟁을 수행하면서 오히려 고대 국가로서의 기틀을 마련하였고, 중국사서에 표현한 것과 같이 동이 중에서 강력한 국가 가 될 수 있었다. 또한 백 제왕계가 고이왕계로 바뀌면서 그렇게 싸우던 말갈하고 친화적인 정책으로 전환한다. 말갈도 추장이 좋은 말 열 필을 선물로 백 제왕에게 바친다. 그리고 고이 왕은 고대 국가로서의 기틀을 다진다. 고이왕계는 진 씨 왕조로 북방에서 내려온 말갈 계일 가능성이 높다. 말갈의 위치는 ‘國家東有樂浪, 北有靺鞨’을 대전제로 해서 『삼국 사 기』의 기록과 중국사서 기록들을 종합하고 정황적인 근거를 통하여 비정하고 고증할 수 있었다. 그래서 말갈은 실체가 없는 것이 아니라 그 동안 연구를 제대로 안한것이다. 본 연구에서 다시 한 번 느낀 것이지만 고대에는 주변국과의 관계 속에서 고대 국가로서의 체제를 정비하여 강력한 고대 국가로 부상할 수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반면에 낙랑처럼 이원화되어 국력이 집중이 안 되고, 다른 나라들과 의 틈바구니 속에서 정체성이 약화되면 멸망의 기로에 놓이게 될 수 있음을 또한 알 수 있었다. 결론적으로 말갈과 관계 속에서 적극적으로 임한 백제는 강력한 고대 국가로 성장하였고, 소극적이었던 낙랑 은 결국 멸망하게 되었다. 말갈은 최소한 삼국의 경쟁 구도 속에서 삼국 성립에 기여하였고, 삼국의 흥망성쇠 과정에서 역동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This study is on the location of the Mohe(靺鞨) through the consideration about the relationship of the Nakrang(樂浪) and Baekje(百 濟) as the important neighboring countries for the substantive approach of the Mohe. The Mohe is considered as the member of the korean people, but as the northeast other minority tribes in China. For the Korean history to accept the Balhae`s history as the category of the Korean history, there is a need of being premised how the Mohe will be considered. The Nakrang can be classified into three categories that the first, Nakranggun(樂浪郡) in the Luan River(欒河) as one of the Hansagun(漢 四郡), the second, Nakrangguk(樂浪國) in the northern part of the Korean Peninsula, the third, Nakrang belonging to the Huhan(後漢) that the Emperor Guangmu(光武帝) of the Huhan installed for the purpose of the containment of the Goguryeo(高句麗). One of them is the Nakranggun as one of the Hansagun that it is important to define the location of the Mohe. Therefore, The Baekje build the castle against the attack of the Mohe. Not onlythe supplement of the weapon system, but also the organization of the national through the strengthen royal authority. The Baekje be capable of creating a productive diplomatic relationship through the war against the Mohe. The Baekje have established the foundation of a nation as through the Mohe`s war. As the result of the study on the relationship among the neighboring countries (Nakrang and Baekje....), the location of the Mohe is that north area of the Baekje, and west area of the Nakranggun that is located in the west of the Liao River(遼河) region. The Mohe was widely distributed across the western area of the Liao River region to the northern part of the Korean Peninsula.

      • KCI등재

        말갈과 여러 민족 간의 관계에 대한 시론적 연구

        민성욱 ( Min Sung Woog )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국학연구원 2018 선도문화 Vol.24 No.-

        선행연구에서 한국사에서 말갈을 어떻게 인식해 왔는지 살펴보았고, 낙랑과 백제와의 관계 고찰을 통한 말갈의 위치를 비정해 보았으며, 또한 한국사에서 말갈의 위상과 그 역할에 대해서도 정립한 바 있다. 이제 다른 민족과의 관계사 연구를 통해 말갈의 정체성 확립과 만주지역의 역사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 본격적인 관계사 연구에 앞서 사전 연구로 관계사 연구를 시도하는 것이 말갈연구에 어떤 도움이 되고, 한국사와 동북아시아 역사 연구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접근하는 것이 좋은지에 대한 시론적인 차원의 연구가 필요한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말갈의 존재는 고대부터 근·현대까지 이어져 온 친연성과 기록으로 남겨진 관계사 그리고 동일한 역사 공간에서의 고고학적 발굴 성과, 당대의 역사인식 등 우리 역사로 편입할 수 있는 요인을 많이 갖고 있다. 특히 발해사를 한국사로 온전하게 편입하려면 발해 건국 시조인 대조영의 출자관계부터 비롯되는 건국세력의 형태, 즉 고구려 유민이냐 아니면 속말말갈인이냐에 따라 역사 귀속 문제가 생긴다. 이렇게 혼란스러웠던 것은 당대의 기록인 『구당서』와 『신당서』의 기록 내용이 다르기 때문이다. 『구당서』에서는 ‘고구려 별종’으로 되어 있고, 『신당서』에는 ‘속말말갈인’으로 되어 있다. 동일한 시대의 기록이 왜 이렇게 상반된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을까를 생각해 보면 대조영의 출자가 두 가지 성격을 다갖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즉 ‘고구려 별종’과 ‘속말말갈인’을 합치면 ‘말갈계 고구려인’이 된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지배계층은 고구려 유민이고, 피지배 계층은 말갈족이라고 하는 이원화된 구조는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고구려인이 고구려를 계승하고자 발해를 건국하였던 것이다. 다만 고구려 영토가 아닌 지역에는 토착민들이 살고 있었을 것이다. 그 토착민들중에서 말갈을 비롯하여 소수민족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도 이미 고구려인이거나 발해인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거란족이든 여진족이든 서로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자처했던 것이다. 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해 말갈족이 세운 발해는 중국의 소수민족이 세운중국지방정권의 역사라는 논리를 펼치고 있는데 우리가 계속 말갈족이 아니라 고구려 유민이 세운 나라라고 주장해 보아야 설득력이 없다. 오히려 역사적 사실을 그대로 인정하되 그 사실이 주는 의미를 새롭게 해석함으로써 우리 역사에 유리하게 적용하는 것이 더 현명한 길이라고 생각한다. 지금부터라도 말갈은 이민족 오랑캐로 여길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한민족을 이루는 다양한 종족 중 하나이고 이들은 분명 고구려인이고 발해인으로서 현재 대한민국을 구성하는 주요한 구성요소가 될 수 있음을 천명해야 될 것이다. 즉 다시 말해서 말갈은 한국사에서 일정한 지분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말갈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발해사를 온전하게 한국사로 편입하기는 어렵다. 역사 해석의 일대 전환이 필요한 것이다. 이젠 더 이상 말갈의 실체를 부정하는 논쟁을 지속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렇게 서기전 삼국의 성립 이전부터 수 없이 등장하는 관계사 기록을 무시하면서까지, 또 고고학적 발굴 성과를 외면하면서까지, 고대부터 이어져 왔던 역사인식과 역사적ㆍ민족적 친연성을 배제한 채 실체를 부정하는 논쟁은 무의미하고 불필요한 일이 되었다는 것이다. 대조영은 고구려를 계승하기 위해서 발해를 건국하면서 동생 대야발을 시켜 단군조선의 역사서를 쓰게 한다. 이것은 그들의 뿌리의식이 단군조선에 미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말갈인들의 의식 속에는 그 뿌리가 단군조선에 있음을 알려 주는 내용이기도 하다. 이것은 또한 한반도와 만주지역에 걸쳐 있었던 모든 민족들의 뿌리가 단군조선에 있음을 사서의 기록이나 자의식 차원에서 스스로 주장하는 내용으로 볼 때 알 수가 있고 단군조선의 뒤를 이은 그들은 고구려 및 발해의 구성원이자 후예이기도 한 것이다. 또한 한국사의 불편한 진실인 한사군 문제도 말갈의 위치를 밝혀냄으로써 낙랑군 등 한사군이 한반도가 아니라 오늘날 요서지역에 있었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다. 또한 낙랑군이 있던 위치가 고조선의 중심지였다고 한다면 고조선이 한반도 내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한반도를 비롯한 만주, 요동, 요서지역까지 그 강역이 미칠 수 있음을 알 수 있으며, 고구려와 백제의 초기 건국지역을 가늠할 수 있고, 특히 요서백제의 근거가 될 수도 있다. 그런가하면 최소한 7세기말 신라인들의 세계관은 삼국이 아니라 사국체제가 되어야 한다. 신라가 백제를 병합하고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옛고구려인들과 백제인들을 회유하기 위한 일환으로 군제를 개편할 때 중앙군인 구서당의 편성 시 신라계 3개, 고구려계 3개, 백제계 2개, 말갈계 1개로 구성했는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제6서당으로 말갈국민으로 편성한 ‘흑금서당’의 존재이다. 앞 선 시대에 왕조국가로 오랜 기간 이름을 날렸던 부여와 가야는 배제가 되고 말갈계를 구서당이라는 왕의 친위 부대에 편성했다고 하는 것은 그 동안 알고 있었던 말갈에 대한 관념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보여주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말갈은 한국고대사를 이해하는 데 주요한 변수가 되어 왔고 한국사에서 말갈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에 따라 역사가 확장될 수도 있고, 축소될 수도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역사는 과거의 사실도 중요하지만 그 사실을 어떻게 수용하고 해석할 것인가도 중요하다. 그래서 사관이 중요한 것이다. 가치관을 배제하고 역사를 판단할 수는 없다. 역사적 사실에 집중하되 그 사실이 주는 의미와 영향을 고려하여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적극적으로 해석하여야만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것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말갈이 의미있게 다가 오는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관심에 비해 남겨진 사료는 많지 않다. 말갈족은 유목민족이다 보니 스스로 남긴 역사서가 없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그들이 세운 발해왕국에 대한 역사서가현존하지 않는다는 것이 오늘날 이해관계에 있는 모든 나라들이 자기네들 역사라고 주장하는 단초를 제공하였다. 이제 기존의 사서 중심의 연구로는 한계가 있고 제대로 된 연구를 할 수 없다. 따라서, 말갈의 민족적 특성을 살펴보고 그러한 특성이 다른 북방민족들과 어떻게 다르고 어떻게 같은지, 그리고 상호 존재인식은 어떠했는지 등을 정확하게 살펴보아야만 제대로 된 관계를 설정할 수 있다. 사람들은 만나면 관계부터 정립하려고 한다. 역사도 그 주체가 사람이기 때문에 관계부터 정립이 되어야 그 뒤 후속작업이 가능한 것이다. 말갈의 민족적 특성으로 볼 때 한민족과 얼마나 친연성이 있는지 그리고 다른 여러 민족들과 관계를 어떻게 형성하였으며, 각각 그 연원은 어디에 두고 있는지 살펴봄으로써 한국 고대사의 주된 공간적 배경이 되어 주었던 만주의 역사를 이해하고 전대의 고조선시대와 그 이후 한국사의 전개 과정이 어떻게 논리적으로 연결되는지 우리는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말갈은 지금까지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거나 관심을 가졌다고 해도 피상적이거나 단편적인 내용에 그쳤다. 하지만 고대 동북아시아 역사에서 말갈이 안 걸리는 데가 없다. 한、중、일 역사에서 말갈의 존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 그 시대의 역사를 온전하게 이해를 할 수 없게 된다. 특히 한국은 발해의 역사를 온전하게 한국사로 편입하려면 말갈 문제는 반드시 해결하고 가야 된다. 그리고 그 동안 한국사 연구에 있어서 만주가 공백이었다. 말갈사가 풀려야 만주사가 풀리는 것이다. 한국 고대사의 주된 공간적 배경이 한반도를 비롯한 만주지역이었다. 그런데 그 동안 한반도에 국한해서 역사연구가 이루어진 것이 사실이다. 이제는 북방으로 눈을 돌릴 때이다. 한반도에 갇힌 역사관이 아니라 동북아 전체를 대상으로 확장시키려면 만주가 그 가교 역할을 할 것이고 그 만주의 주인이 말갈이었다. 그러므로 만주의 주인으로서 말갈사를 정확하게 이해를 하게 되면 한국사의 원류와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즉 말갈사가 해결이 되면 만주의 역사가 정립이 된다. 이렇게 정립된 만주사를 토대로 향후 한국사의 원류를 밝히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한국고대사의 체계를 정립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동북아시아의 역사 체계를 확립한다면 오래된 역사적, 민족적 갈등들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This study is on the exploratory research of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Mohe(靺鞨) and the several nations. The Mohe(靺鞨) is considered as the member of the korean people, but as the northeast other minority tribes in China. For the Korean history to accept the Balhae`s history as the category of the Korean history, there is a need of being premised how the Mohe(靺鞨) will be considered. Seeing the records in 『Samguksagi』「Sillabongi(新羅本紀)」and 『Samgukyusa(三國遺事)』, Silla formed it with 3 pieces of Silla kingdom, 3 pieces of Goguryeo kingdom, 2 pieces of Baekje kingdom, and 1 piece of Mohe kingdom when organizing Guseodang(九誓幢), which is the king’s Elite Guard and central military organization, in order to embrace people in the Three States after merging Baekjae and destroying Goguryeo. This divided only number of army according to scale, but is equally treating the Mohe in reality to Goguryeo, Baekje, and Silla. The Mohe kingdom was organized with ‘Heukgeumseodang(黑衿誓幢)’ as the sixthly Seodang(誓幢). Its members are recorded to be called as ‘Mohe people’. Seeing the world view of Silla in the 7th century at least, it might be right to be Four States, not Three States, in those days. The Mohe(靺鞨) was widely distributed across the western area of the Liao River region to the northern part of the Korean Peninsula. The Mohe history(靺鞨史) and the Balhae history(渤海史) cannot be separated. As recorded in『Geumsa(金史)』, what the Yeojin(女眞) tribe continued to mention on their ancestor in the self-consciousness dimension is accredited to which Balhae originated from the Mohe attached to Goguryeo. What Yeojin and Balhae are one family is accredited to which the Mohe-Balhae-Yeojin are ultimately the same racial kingdom in its root. As examined in the above, the Mohe has very extensive and diverse racial kingdoms depending on time and space. On the other hand, with concentrating on what even culture had notable difference, the form of the Mohe in each of korean history book and Chinese history book comes to be possibly understood. Also, the Mohe can be regarded as the race of the kingdom same as the Korean race. Thus, the Balhae history comes to be perfectly accepted as the Korean history. Also, the space comes to be created that can understood the northern race, which leads to Yeojin-Manchuria as the same kingdom as the Korean race. Given positively analyzing and accepting the Korean history in this way, the space comes to be created that the Korean history comes to be rich as much as it, to be broadened even the stage of history, and to be analyzed history diverse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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