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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지용 시의 새로움 : "美"개념을 중심으로

        권창규 연세대학교 대학원 2003 국내석사

        RANK : 247631

        『정지용 시집』(1935)은 당대부터 많은 화제를 모았다. 시가 지닌 새로움이 무엇이었는지 시인 스스로 설명하게끔 했다. 본고는 시인의 산문에 나타난 '미'와 '미술', 나아가 '언어미술'의 개념을 통해 새로움에 대한 나름의 해명을 시도하였다. 미적 인식이 근대성의 함의를 갖는 까닭에 근대적인 주체의 확립 및 미적 해방 가능성까지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언어미를 통해 시 고유의 장르성을 확보하려했던 시인의 독자적인 면모를 확인하였다. 본고는 종래의 유미주의 비판이 작품 바깥에 치우쳐 있다는 결벽에서 출발했다. 시인에 대한 뿌리깊은 유미주의 비판을 작품 안쪽에서 살피고 답하고자 했다. 시인이 지닌 감각적 구체화의 기본기량이 시적인 새로움의 토대가 됨을 I장에서 살폈다. 새로움을 찾는 감각적 기량은 근대 체험과 맞물리면서 독자적인 미감을 표출하게 된다. 이미지의 전개과정을 통해 시인의 미감을 확인하는 것이 III장의 주요 내용이다. 언어실험에서 시의 독자적인 미를 찾는 시인에게 이미지야말로 언어의 가능성을 극대화시키는 현장일 것이다. III장의 마지막 부분 '관조하는 窓'에서는 시인의 미적 감각이 극단화되는 양상을 포착하고, 카톨릭 시편에 나타난 미의식의 전회과정과 함께 살펴 후기 미의식의 실마리를 찾았다. 마지막 장의 논의와 더불어 후기 시 세계에 대해 일정한 예감을 던지고자 했다. 마지막 장은 미감과 현실의 필연적인 갈등양상을 포착한다. 종래의 유미주의 비판에 대한 나름의 해답이기도 하다. 고향이라는 일상적이고 현실적인 시공간에서 그 갈등양상이 부각될 수 있으리라 보았다. 특히 고향이라는 동질적인 토대는 시인이 보여주는 분열된 근대체험에 대한 하나의 해답이 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중요성을 지닌다. 하지만 시인 자신의 심리적이고 의식적인 타향화로 인해 고향체험은 여지없이 분열된 상태이다.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의식이 끊임없이 충돌함으로써 고향시편은 성공작으로 남아있다. 고향에서도 분열되는 자기 정체성의 문제는 근대 체험을 겪은 조선의 지식인들이 부딪혀야 했던 공통적인 물음이다. 30년대 시단에서 부각되는 자기 정체성의 문제는 후대 시인들에게도 어김없이 적용될 것이다. 고향의 부재, 카톨릭과의 만남 실패에 이어 시인은 또 다른 미학적 현장을 통해 자기 정체성에 대한 물음을 계속해야 할 것이다. 그 모색의 결과가 후기시의 '자연'(산수)이라 했을 때 자연 역시 고요와 허정의 미학으로 일관되지는 못할 것이다. 자연 역시 자기 정체성의 물음을 계속하는 미학적 현장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후기 시의 자연이 어떤 방식으로 나타나는지 본고의 숙제로 남겨둔다. Jeong Ji-yong made a sensation in its day. What caused a sensation? That would be a "difference" from the traditional poetry. The study tried to answer the question of "difference" through the concept, 'beauty'. Jeong regarded the poetry as 'the beautiful art of language'('言語美術'). This study also would an answer about the traditional criticism against his taste in beauty. First of all, the study follows after the development of his own sense of beauty. His early works shows defamiliarizing way, the basics of writing a poem. He renews ordinary language as well as object. During his stay in Kyung-do(the capital of Japan), he got his own sense of beauty. His finely imaging way outshines especially in works about the experience of modern culture through Japan in 1920's. The visual stands first on his image list but various sensation does interplay. Images of strong sensibilities are the evidence of the active interaction with the new world. Also images(esp. visual images) make his opinion clear that the beauty of language is the essence of poetic art. Beautiful poetic art is to maximize the possibility of language. Against the anti-aesthetic critique the study follows after his aesthetic appreciation in works themselves. Chapter IV discuss the dissociation of his sense of beauty. His aesthetic sense cannot but dissociate in the pre-modern realities of Cho-sun(in 1930's). Because the beauty didn't get its own field until the modern times. The 'native place' as the subject matter makes the complications obvious. Besides his 'native place' got its importance because it could be an answer about the dissociated modern experience. The modern experience met his outer requirements but couldn't satisfy his true self. While all experience of old home could not be compromising. His unconsciousness(including his earlier memory) seemed to be relaxed but his modern way of thinking rejects the pre-modernities of Cho-sun. Supposed 'native place' were the ground of self-identity, it would not be true any more. Through the native place or catholicism his identity could not be established. He couldn't help searching for the other aesthetic object. If that were 'Nature'(landscape) in his later works, it would not go through the beauty of silence(or universality), either. Because he would continue asking for the self-identity through Nature.

      • 근대 문화자본의 태동과 소비 주체의 형성 : 1920~30년대 광고 담론을 중심으로

        권창규 연세대학교 대학원 2011 국내박사

        RANK : 247631

        광고는 오늘날 사람들의 눈길과 발길이 향하는 곳마다 포진해있고, 지금으로부터 8,90여 년 전 근대광고의 성숙기였던 1920,30년대부터 소비주의의 발단을 확인할 수 있다. 1920년대는 매체의 발달기였으며 30년대는 근대 광고의 전성기를 맞았다. 민간 매체의 정착과 함께 했던 광고는 매체의 상업화경향을 주도했으며 그 결과 광고주가 부족했던 식민지 ‘조선’에서 일본광고가 범람했다. 매체와 그 ‘물주’로서 광고는 자본주의적 질서를 옹호하는 무기로서 사람들을 겨냥하게 되었다. 근대 광고는 이전 사회의 생활관습에 대항하여 대량 소비주의를 보급하고자 했으며 사람들이 자본주의적 생산의 필요에 따라 물건을 지속적으로 구매하도록 만들고자 했다. 상품은 부의 단위이자 취향 및 사회적 지위에 대한 기표로 자리 잡았으며 차이/구별에 대한 사람들의 욕구는 이에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광고는 새로운 시대의 가부장으로 자처하여 대중을 여성화하고 근대소비의 가치를 훈육하고 설득하는 형태를 띠었지만 사람들의 사회적 욕망이 이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면서 광고주와 수용자, 매체로 이루어진 근대 커뮤니케이션을 완성했다. 1920년대 중반을 넘기면서 광고의 도안과 사진이 증가함에 따라 소비자의 해석과 수용의 여지는 더욱 확대되었다. 또한 높은 광고료를 부담해야하는 이미지 광고가 늘어났다는 것은 독과점 기업의 증가를 반영하며, ‘상표충성도’를 지닌 소비자 만들기를 목표로 했던 전국-상표광고의 물질적, 의식적 영향력이 확산되어갔던 상황을 일러준다. 이상이 II장의 논의로 광고커뮤니케이션의 구조가 소비대중을 향한 기업적 가부장의 메시지로 광고메시지를 규정하는 양상을 살폈다. 이어지는 III장에서는 광고메시지가 어떤 이데올로기를 갖고 있으며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했는지를 살폈다. 소비이데올로기가 사람들을 개별적, 집합적인 주체로 구성하는 과정을 사회적, 문화적, 신체적, 민족적 네 가지 측면에서 논의했으며, 다른 미디어담론이나 문학담론을 참조하여 소비이데올로기의 수용과 지연, 변용의 양상을 함께 살폈다. 다른 미디어 담론과 구별되는 광고담론의 특징은 기존의 근대가치를 수단으로 삼아 실용가치를 추구한다는 것인데, 광고가 활용했던 근대 상징은 곧 시대와 사회에 지배적이었던 근대 진보의 담론을 특징적으로 포착하고 있다. 광고는 세세한 제품 설명보다 보편적인 요구를 통해 사람들의 지속적인 소비를 겨냥하는데 광고의 요구와 사람들의 욕구가 만드는 현장은 소비자로서 근대인으로 구성되는 의식적, 감각적 과정을 잘 보여준다. 첫 번째는 사회적 능력의 개발이라는 측면에서 제시되었던 능력가 되기의 명제로 광고의 민주주의와 능력주의의 기치에 관한 것이다. 사람들의 신분상승 욕구는 이에 적극적으로 부응하였으며 계급적, 민족적, 성적 차별이 유지되는 선에서 자유와 평등의 이데올로기가 설파되었다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광고의 문화인, 교양인 되기 이데올로기는 사회적인 능력에 걸맞는 취향이라는 근대적 신분격차가 형성되고 사람들을 서울사람과 촌뜨기, 문명인과 야만인으로 구획했던 현장을 보여준다. 유행이라는 위계구조의 형성을 비롯하여 여가경험의 상품화 과정에는 계급적, 민족적, 인종적 이해가 맞물려있는데 이는 ‘모던 미’의 실제상을 혼종적으로 구성했다. 계급적 취향을 명백하게 드러내주는 신체를 둘러싼 명제는 건강인으로 집약될 수 있다. ‘건강’은 각종 상품광고의 가장 흔한 표제어 중 하나였다. 우등과 우성의 은유로서 건강은 제국의 건강신화와 맞물려있었으며, ‘일제’ 화장품 및 위생용품, 일본약품이 시장을 제패했던 결과로 이어졌다. 건강이데올로기는 질병과 고통으로부터의 해방과 쾌락을 담보했던 동시에 생산력 관리 및 동원의 성격을 동반했다. 여기에는 위생제국의 건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형태로 나타났던 국민 되기의 욕망이 함께 했다. III장의 마지막 절에서 논의했던 광고의 민족/국민 이데올로기는 소비주체의 논의에 대한 소결을 포함하고 있다. 민족과 국민은 식민지였던 한국에서 건강과 함께 가장 빈번하게 등장했던 광고 전략으로 민족과 국민의 상징을 활용하여 소비자로서 민족주의자 및 애국자를 호출하는 경우다. 광고의 민족마케팅은 외제/외화에 대응하는 우리 토산 및 일본 국산의 규정과 그 잉여분을 잘 보여준다. 민족감정을 공략하고 강한 민족으로서의 국민 되기의 욕망을 자극하는 전략은 ‘조선’의 기업이었든 일본의 기업이었든 공통적으로 나타났다. 기업의 이해는 국가의 기획을 벗어나기도 했으며 소비자 역시 민족과 국민을 초과하는 집합적인 무리로 등장하기도 했다. 민족과 국민은 소비대중이 전제되고서야 가능했던 집합적 주체라고 할 수 있다. 이전 사회와 달리 소비주의는 새로운 집합적인 무리를 만들어냈으며, 민족과 국민은 소비대중이라는 방향성이 없는 무리를 토대로 하여 도덕적, 종교적 의식을 부여한 강력한 상상적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당시 국가주도의 합리적 체제 구축과정 역시 생활의 합리화라는 이름의 상품소비와 직결되어 있었으며 그 목표는 국민통합(대중의 국민 만들기)이었다. 1,2차에 걸친 세계전쟁기의 정치선전과 대중동원의 시대 속에서 광고가 호출했던 소비대중의 집합적 성격은 근대광고의 가장 큰 특색 중 하나다. 소비대중의 형성은 국민 만들기의 기반이 되었던 동시에 또한 독자적인 자본주의적 인간의 탄생을 예고했다. 상품을 중심축으로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는 과정은 소비대중으로 통합되는 과정인 동시에 전근대적인 운명과 순응의 굴레에서 벗어나 소비력을 지닌 개인으로 해방되어 개별적인 감각과 욕망을 발견하는 과정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국민을 초과하는 소비자가 되어 자신의 욕망과 자유를 구가하기도 했다. 근대 한국사회에서는 이미 생산물과 대면할 수 없는 소비자의 무리가 탄생했고, ‘소비인간(Homo consumans)’의 미래는 오늘날 개인과 사회, 민족과 국가의 요청 속에서 다양한 진폭을 보여주고 있다. 소비인간이란 자본주의적 질서에 따라 재편된 인간으로 이전의 소비윤리 및 생활관습을 비합리적이고 야만적인 것을 대립항으로 해서 성립했다. 전통적인 삶의 윤리와 대치했던 광고의 소비윤리는 서유럽과 미국이 주축이 된 세계자본주의의 ‘중심부’에서 이 자본주의적 중심부와의 거리에 따라 정의되는 ‘주변부’로 퍼져나갔던 소비윤리였으며, 근대성과 진보, 합리성의 비전을 강화했다. 근대 상징을 ‘밝은’ 쪽으로 전유했던 광고는 일상의 근대가 더욱 더 감각화되고 대상화되는 양상을 예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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