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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문호 한국동학학회 2005 동학연구 Vol.0 No.18
19세기말 격변기 조선의 정치 및 대외관계에 다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인 淸의 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 袁世凱의 동학농민혁명과 관련한 제반 역할은 조선에 대한 淸의 宗主權 강화라는 점에 모아지고 있었다. 전통적 宗·藩의식에 따를 때 藩邦이 외침을 받거나 내부 소요로 말미암아 위기에 처할 경우 종주국이 군대를 파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淸軍 파병은 일본의 반응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駐韓 일본 대리공사 杉村濬 및 그 통역원 鄭永邦의 계속되는 淸의 ‘代戡’ 종용이나 일본의 조선에 대한 ‘無慾’ 강조 등은 원세개로 하여금 파병 결심을 굳히도록 만들었다. 결국, 宗主國적 관점에서 동학농민혁명 사태를 해결하려던 원세개의 의식과 일본에 대한 그의 오판이 淸·日 양국군의 파견으로 이어졌고, 나아가 淸·日戰爭으로 발전했던 것이다.
李鴻章, 伊藤博文과 19세기말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화
강문호 한국동학학회 2009 동학연구 Vol.0 No.26
이홍장과 이등박문은 19세기말 동아시아 국제질서 재편 과정에서 淸・日 양국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이들 두 사람은 평생 세 차례 만나 청・일 양국은 물론 동아시아의 명운을 결정짓는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그 첫 번째 만남은 1885년 4월, 갑신정변 사후처리를 위한 天津회담이었으며, 두 번째는 청일전쟁 사후처리를 위해 일본 마관에서 열렸던 회담이다. 그리고 마지막 회견은 청일전쟁 후 이홍장이 중국을 여행 중이던 이등박문을 초청하면서 이뤄졌다. 이홍장과 이등박문 두 사람의 첫 번째 만남, 즉 천진회담은 중・일 양국의 조선에서의 지위가 대등함을 인정하는 자리였다. 전통적으로 종주국과 藩屬國으로 인식되었던 中・韓관계에 변화가 나타났던 것이다. 청일전쟁 사후처리를 위해 마주앉았던 이홍장과 이등박문의 두 번째 만남에서는 淸・朝 양국의 전통적 宗・藩관계를 폐절한다는 것을 문서로 확정함으로써 전통 동아시아 국제질서가 와해되는 자리였다. 그리고 그들의 세 번째 만남은 청일전쟁 패배 후 부국강병을 위한 變法 필요성이 고조되면서 유신파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일본을 스승삼아 개혁을 진행하자는 분위기가 조성됨으로써 전통시대의 중국 중심 동아시아 천하질서가 일본 중심으로 바뀌었음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이홍장과 이등박문의 세 차례에 걸친 만남은 한・중・일 삼국의 관계를 중국 중심에서 일본 중심으로 바꾸는 과정을 결과하였던 것이다.
강문호 한국동학학회 2007 동학연구 Vol.0 No.23
東學農民戰爭을 계기로 일본은 淸軍의 조선 파병에 대응해 일본군을 파견, 淸日戰爭을 일으켰고, 그 결과 일본의 본격적인 대륙진출이시작되어 20세기 동아시아 현대사의 비극이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東學農民戰 爭은 동아시아 국제관계사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 전환의 과정에서 淸의 조선에 대한 정책 또한 변화를 일으켰고, 그리고 그 변화의 중심에 淸의 直隸總督兼北洋大臣 李鴻章이 있었던 것이다. 1895년 淸日戰爭(1894∼1895)에서 패하기까지 淸은 서양열강 및 일본과는근대적 조약관계를 체결 유지하면서도 조선을 비롯한 주변 약소국과는 전근대적 조공관계를 강요하여 그 대외인식 및 관계에서의 양면성을 보여 왔다. 주변 약소국에 대해 전통적 관계를 강화하려던 淸의 의지가 가장 분명하게 표출된 것이 바로 조선과의 관계였다. 이 글에서 논하려 했던 주지는 바로 淸의이러한 대외관계, 특히 조선과의 관계에서 그 외교적 양면성이 종식되는 전환점이 동학농민전쟁이었다는 점이다.
李鴻章, 伊藤博文과 19세기말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화
강문호 한국동학학회 2009 동학연구 Vol.26 No.-
이홍장과 이등박문은 19세기말 동아시아 국제질서 재편과정에서 淸 · 日 양국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이들 두 사람은 평생 세 차례 만나 청 · 일 양국은 물론 동아시아의 명운을 결정짓는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그 첫 번째 만남은 1885년 4월, 갑신정변 사후처리를 위한 天津회담이었으며, 두 번째는 청일전쟁 사후처리를 위해 일본 마관에서 열렸던 회담이다. 그리고 마지막 회견은 청일전쟁 후 이홍장이 중국을 여행 중이던 이등박문을 초청하면서 이뤄졌다. 이홍장과 이등박문 두 사람의 첫 번째 만남, 즉 천진회담은 중 · 일 양국의 조선에서의 지위가 대등함을 인정하는 자리였다. 전통적으로 종주국과 藩屬國으로 인식되었던 中 · 韓관계에 변화가 나타났던 것이다. 청일전쟁 사후처리를 위해 마주앉았던 이홍장과 이등박문의 두 번째 만남에서는 淸 · 朝 양국의 전통적 宗 · 藩관계를 폐절한다는 것을 문서로 확정함으로써 전통 동아시아 국제질서가 와해되는 자리였다. 그리고 그들의 세 번째 만남은 청일전쟁 패배 후 부국강병을 위한 變法 필요성이 고조되면서 유신파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일본을 스승삼아 개혁을 진행하자는 분위기가 조성됨으로써 전통시대의 중국 중심 동아시아 천하질서가 일본 중심으로 바뀌었음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이홍장과 이등박문의 세 차례에 걸친 만남은 한 · 중 · 일 삼국의 관계를 중국 중심에서 일본 중심으로 바꾸는 과정을 결과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