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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직시민행동이 공무원의 혁신행동에 미치는 영향 연구 - 직무자율성과 절차공정성의 매개효과 분석 -

        황의동,심문보 한국지방행정학회 2022 한국지방행정학보 (KLAR) Vol.19 No.3

        정부에서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정부혁신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가기 위해선 공무원들의 자발적인 혁신행동이 필요하다. 공무원들의 혁신행동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요인으로 공무원의 직무특성과 연관이 있는 조직시민행동의 이타적 행동의 영향력을 분석과 이들 간의 관계에서 직무자율성과 절차공정성이 매개하여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 지를 확인하였다. 분석결과로 첫째,조직시민행동의 이타적 행동은 혁신행동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으로 나타났다. 둘째, 조직시민행동은 직무자율성과 절차공정성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으로 나타났다. 셋째, 직무자율성과 절차공정성도 혁신행동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으로 나타났다. 넷째, 조직시민행동과 혁신행동 관계에서 직무자율성과 절차공정성은 직・간접효과를 주는 것으로 나타났다. 조직시민행동과 혁신행동 간의 영향관계를 직접적으로 실증검증한 것에 의의가 있다. 지속적인 정부혁신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공무원들 스스로 혁신행동을 할 수 있는 내재화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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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頤齋 黃胤錫의 學風과 性理學

        황의동 범한철학회 2008 汎韓哲學 Vol.48 No.1

        Lije(頤齋) Hwang Yunseok(黃胤錫, 1729~1791) is a representative Confucius scholar in Joson Dynasty in the eighteenth century. His academic achievement and ideas are shown in Lijenango(頤齋亂藁), which is his life long journal. He is not only Sung Confucius scholar that advocates Juja(朱子) ideas but also Silhak(實學) scholar, which distinguishes himself from other eighteenth century Silhak scholars who do not follow Sung Confucianism. He learned from Kim Wonheng(金元行), a member of Kiho(畿湖) school, who believes that the human nature is the same as that of things. His Sung confucianism generally follows Yulgok's ideas but he considers Ki(氣) as more significant. 頤齋 黃胤錫(1729~1791)은 18세기 조선조 호남의 대표적인 유학자이다. 齋亂藁는 그가 10살 때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쓴 일기인데, 그의 학문과 사상을 알 수 있는 대표적인 문헌이다. 본고는 이를 중심으로 그의 학풍과 성리학을 검토하는데 목적이 있다. 그는 기호학파의 非師承 율곡 계열인 陶庵 李縡의 문인인 金元行에게서 수업을 받았다. 그의 학풍은 성리학풍과 실학풍을 겸비한데 특징이 있다. 그는 朱子를 매우 존숭하였고, 性理大全의 주석에 매달려 性理大全註解를 저술하기도 했다. 그리고 李基慶, 安衡玉과 湖洛理氣心性說에 대해 토론하기도 하였고, 金璲와 明德 및 退栗의 四七理氣論에 대해 토론하기도 하였다. 또한 스승인 金元行의 務實학풍에 영향을 받아, 성리학에서 한 걸음 나아가 폭넓은 지식을 섭렵하고, 象數學, 천문학 등 다양한 학문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아울러 그는 洪大容, 朴趾源, 朴齊家, 李德懋 등 北學派 실학자들과 교유하면서 실학자로서의 길을 걸었다. 황윤석의 학문적 특징은 성리학과 실학을 겸하고 있는데 있지만, 18세기 북학파 실학자들이나 丁若鏞에 이르러서는 성리학과의 단절이 분명히 드러나는 것과는 달리, 아직도 성리학에 대한 깊은 관심과 주자학에 대한 尊信이 철저했다는 점에서 구별되는 바 있다. 그의 성리학은 기본적으로 율곡의 학설을 좇고 있다. 理氣二元의 존재관, 理發의 부정, 氣發理乘一途說 등이 그것이다. 다만 간헐적으로 氣論的 사고가 엿보이는데, 이는 洪大容, 朴趾源 등 실학자들의 세계관과 상통한다. 그의 심성론은 湖洛논쟁과 明德에 대한 견해가 주류를 이룬다. 그는 스승인 金元行과 마찬가지로 人物性同論의 입장에 선다. 그는 사람과 사물의 다른 차이를 ‘氣發而理隨之’로 설명하는데, 이는 理보다 氣에 그 주도권을 인정하는 논리로 특이한 점이다. 그는 明德을 本心으로 보고, 그 본체는 스스로 밝아 성인과 범인이 다르지 않다고 보았다. 끝으로 수양론에 있어서는 敬을 중시했고, 戒, 箴을 세워 마음공부에 진력하였다. 또한 朱子의 설에 따라 知와 行의 竝進을 주장하였고, 王陽明의 卽行, 卽知의 知行合一說을 비판하였다.

      • KCI등재

        이항로(李恒老)와 전우(田愚)의 역사의식에 관한 철학적 비교 연구

        황의동 한국동서철학회 2001 동서철학연구 Vol.21 No.1

        華西 李恒老(1792-1868)와 艮齋 田愚(1841-1922)는 민족적 위기였던 한말의 격동기를 살았다. 서구열강의 침략과 西學의 문화적 도전 그리고 일제의 침략에 대한 양자의 현실인식과 그 대응양상에는 다른 점이 있었다. 이는 양자의 역사의식의 문제이면서 이를 근거지우는 철학적 문제라는 시각에서 본 연구는 비롯되었다. 존재론에 있어서 양자는 모두 理氣二元의 존재관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화서는 理의 근원성과 주재성을 지극히 강조하여 理의 능동성을 인정하고, '理生氣'의 논리로까지 나아간다. 반면 간재는 율곡의 氣發理乘 내지 理氣之妙의 입장을 고수하여 理의 발용을 인정하지 않고 발용의 기능을 오로지 氣에 국한한다. 가치론에 있어서는 양자가 모두 理의 優位性을 인정하는 主理的 입장에 서 있다. 이는 한말의 역사적 상황과 무관치 않다. 그런데 같은 主理的 시각에서도 화서는 17세기 華夷論에 바탕한 衛正斥邪의 역사의식을 지니고, 지켜가야 할 '正'과 물리쳐야할 '邪'를 엄격히 구별하였다. 그 '正'은 道學이요 전통문화였고, 그 '邪'는 西學이요 外勢였다. 따라서 正과 邪의 구별은 곧 理와 氣의 구별로 나타나, 理貴氣賤, 理尊氣卑, 理主氣役의가치적 位階를 설정하게 되었고, 양자의 엄격한 혼동을 경계하였다. 이에 대해 간재는 그의 主理的 가치의식을 '性師心第'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그가 性을 높이고 心을 낮춘다는 것은 곧 理를 높이고 氣를 낮추는 것으로 대치된다. 이러한 主理의식은 화서와 간재가 일치한다. 다만 간재는 존재론에서 理氣의 妙合구조와 相補的인식을 전제하기 때문에 主性, 主理를 말하더라도 그 강도가 화서에 비해 약화된다. 화서는 퇴계처럼 기본적으로 윤리적, 가치적 지향성을 갖는다면, 간재는 율곡처럼 존재론적 철학정신을 잊지 않는데 그 차이가 있다. 따라서 화서에서는 주자의 '理氣不相離'의 정신이 잘 드러난다. 또한 화서는 主理를 사회적, 정치적 측면에서 철저하게 적용한 감이 있으나, 간재의 '性師心第'에 표방된 主理는 개인의 수양론에 적용된 감이 많다. 같은 맥락에서 화서의 역사적 대응은 간재보다 실천적이요 적극적이었다면, 간재는 학문적이요 이론적이요 소극적이었다. 이 점에서 화서는 南冥에 가깝고 간재는 퇴계에 비교된다. 또한 한말의 현실인식에 있어서는 양자가 '衛正斥邪'라는 역사의식을 가지고 대응하였지만, 화서는 '衛正'보다는 '斥邪'에 더 비중을 둔 것으로 보여지고, 간재는 '斥邪'보다 '衛正'에 더 비중을 둔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화서는 斥邪의 측면에서 의병투쟁 등 적극적인 대응을 강조하였고, 간재는 衛正의 측면에서 道學의 연구와 講學이라는 소극적인 대응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화서는 의병을 주로 하면서도 內修를 결코 잊지 않았고, 간재 또한 守道와 自靖의 대응을 중시했지만 의병의 의리를 결코 경시하지 않았다는 점을 반드시 유의해야 한다. 이렇게 볼 때, 양자의 현실인식과 이에 기초한 역사의식은 나름대로의 논리와 타당성을 갖는다. 다만 화서의 '擧義'와 간재의 '守道'를 상보적으로 보려는 균형잡힌 시각이 필요하다.

      • KCI등재

        震黙大師와 儒敎와의 대화

        황의동 한국사상문화학회 2011 韓國思想과 文化 Vol.56 No.-

        Jinmook(震黙, 1562-1633) is a great Buddhist monk who lived from the late 16th Century to the early 17th Century. Although he rarely wrote and did not left works but he was a Zen monk who put Buddhism in practice. This article aims to comprehend his resolute life in a Confucianism perspective. He is one of the exemplary sons in the Korean Buddhism. His recognition on Confucianism can be understood through friendship with Kim Dongjoon(金東準). Kim Dongjoon is a representative disciple of Sagye Kim Jangsaeng(沙溪 金長生) who was an excellent Confucian of Kiho(畿湖) school in the 17th Century. The two had established academic association regardless the border between Buddhism and Confucianism. Jinmook neither left the mundane world and nor stayed there. He liberally oscillated across Buddhism and Confucianism. Jinmook was a great freeman who comprehended Buddhism, Confucianism, and Taoism in an integrated perspective. People respected his liberate life and personality and called him as a living Buddha. Although there are not writings or profound philosophies, we are able to discover a real monk through his life which practices mercy, pursues the harmonious status across religions and philosophies, and lives freely between the transcendent and the mundane world. 震黙(1562~1633)은 조선조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전반에 걸쳐 조선불교사에 큰 족적을 남긴 禪僧이다. 그는 평생 글과 저술을 별로 남기지 않았으며, 완주 鳳棲寺를 중심으로 전북지역 일대에서 수많은 일화와 기이한 종교적 체험을 통해 부처님의 화신으로 일컬어 왔다. 본고는 진묵의 생애와 행적을 통해 나타난 無碍行을 유교적 관점에서 이해하고자 논구한 것이다. 그는 한국불교에서 孝行으로 대표되는데, 출가후에도 모친을 절 가까운 곳에서 봉양했으며, 모친이 모기 때문에 괴로워하자 산신령에게 기도를 하여 모기를 좇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또한 그는 모친이 별세하자 묘지를 정해 모셨는데, 자손이 없이도 천년동안 香火가 끊이지 않는 곳이 되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아울러 모친에게 바친 제문을 통해서도 그의 효심을 잘 알 수 있다. 특히 그는 유학자 鳳谷 金東準(1575~1661)과 道義之交를 나누었는데, 봉곡은 조선 예학의 宗匠으로 일컬어지는 沙溪 金長生의 高弟였다. 이를 통해 진묵은 유교와도 소통했음을 알 수 있는데, 진묵의 행적을 기록한 『震黙禪師遺蹟攷』가 유학자들의 관심과 정성으로 전해지고 간행되었다는 점은 매우 주목할 만한 일이다. 진묵의 삶을 통해 드러나고 전해지는 일화와 신비한 기행들은 元曉의 無碍行과 비슷하다. 진묵은 儒佛道를 會通한 경지에서 세속과 초월세계를 자유롭게 넘나든 無碍僧이라는 점에서 유학자 金東準과의 交遊가 가능했고, 또 유학자들의 존경과 흠모를 받았던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러한 진묵의 無碍行은 종교의 벽을 넘어 유교의 이상인 修己治人, 內聖外王과 상통된다고 볼 수 있다.

      • KCI등재

        秋坡 宋麒壽의 生涯와 人品

        황의동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2006 儒學硏究 Vol.14 No.-

        추파는 16세기 사화시대의 행정가요 유학자였다고 볼 수 있다. 물론 그도 당시 유교사회의 일원으로 유학적 교양을 받고 수학한 독실한 학자였지만, 학문적 업적과 특성은 극히 미미하다. 그의 문집에서 볼 수 있듯이 전문적인 학설이나 토론은 볼 수 없다. 그것은 그의 평생에 걸친 관직생활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이때는 道學시대로서 성리의 이론적 천착보다는 小學的 실천이 강조되는 시대적 환경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을사사화 때의 처신으로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추파의 경우 현실참여의 문제는 별 문제가 없는 것 같다. 金安老의 미움을 사 불이익을 당하기도 했고, 尹元衡, 李樑, 李芑 등 당시 權奸, 戚臣들과 부단히 항거한 흔적이 이를 입증한다. 추파는 그 스스로 불의의 시대에 있어 벼슬살이가 얼마나 어려운 일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사양하고 또 사양하였으며, 아슬아슬한 칼날 앞에서도 명분과 의리에 어긋나지 않고자 노력하였다. 더욱이 을사사화 때 衛社功勳을 받은 사실은 그에게 큰 부담이 되고 멍에가 되기도 했다. 물론 그것은 그의 본의와 관계없이 주어진 것이요, 임금과 당시 추파의 錄勳을 시비했던 權奸들의 말처럼 실제로 추파는 아무런 공이 없었지만, 당시 도승지로서 전례에 따라 공훈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추파에게 이 공훈은 상이 아니라 벌이요 짐이요 부담이었다. 그러기에 이를 벗기 위한 그의 노력은 상소와 啓를 통해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또한 추파는 양재역벽서사건으로 억울하게 희생된 종형 宋麟壽의 伸寃을 간절히 주청하였고, 기묘사화 때 억울하게 희생된 靜庵 趙光祖의 신원을 주청하는가 하면, 을사사화 때 희생된 사림들에 대한 신원을 주청하기도 하였다. 아울러 난세의 국면을 전환시키기 위해 李滉, 李浚慶 등과 함께 유배되었다 석방된 白仁傑, 金鸞祥, 盧守愼, 柳希春 등의 등용을 주청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추파의 노력은 당시 형극의 가시밭길에서도 바른 길을 가야하고 할 일을 다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유학의 이상은 경제와 윤리, 實利와 義理의 겸비에 있지만, 만약 양자 택일을 해야 할 경우라면 부득이 목숨을 바쳐서라도 義를 취하는 ‘舍生取義’, ‘殺身成仁’이 필요한 것이다. 여기에서 현실적 이익, 경세를 통한 현실참여의 역할과 기능을 새롭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유학의 관점에서 16세기의 대표적인 관료 유학자 秋坡 宋麒壽의 삶을 이해할 필요가 있고, 더욱이 불의의 권력이 횡행하는 난세에서 명분과 실리를 조화하며 그 균형추를 유지하고자 부단히 노력했던 그를 새롭게 재인식해야 할 것이다.

      • KCI등재후보

        正統과 異端, 그 역사와 본질 - 율곡을 중심으로 -

        황의동 (사)율곡학회 2010 율곡학연구 Vol.21 No.-

        The tension between orthodoxy and heterodoxy has a long history. Mencius in the late Zhou Dynasty defines Yangzhou(楊朱) philosophy and Mohism as heterodoxy and prohibits. HanYu(韓愈) in late Tang Dynasty also expels Taoism and Buddhism as heterodoxy and JeongJa and Zhuzi(朱子) also proscribe Buddhism for the same reason. In Korea, An Hyang, Jeong Mongju, Jeong Dojeon, and others during the late Korean Dynasty forbid Buddhism and Taoism as heterodoxy, and Song Siyeol and others label Quing Dynasty as barbarians and argue theories on cultural orthodoxy and heterodoxy. Additionally, Western Learning was forbidden as heterodoxy in the Confucianism perspective during the 19th Century. YulGok also criticizes and proscribes Buddhism, Taoism, the Philosophy of Wang Yangming as well as other Confucians. This criticism is based on the belief that Confucianism is orthodoxy. Any philosophies which do not meet with the Confucianism’s principles of Humanism and ethics are regarded as heterodoxy. In Confucianism perspectives, Buddhism’s denying family and entering the Buddhist priesthood and Taoism’s renouncing the world and pursing transcendental life are selfish, unethical, and unrealistic. Multiple cultures and various religions coexist in modern society. It is not appropriate excluding others as heterodoxy while insisting oneself as orthodoxy. We need to live together by conceding others in a coexisting cultural scope. 孔. 孟이래 정통과 이단의 갈등은 역사적으로 있어 왔다. 唐末의 韓愈는 유교부흥을 내걸고 闢異端을 주장하였고, 송대 程. 朱도 벽이단에 앞장 섰다. 우리나라에서도 麗末 유학자들이 벽이단을 주장했고, 17세기 병자호란 후 의리파들은 華夷論의 입장에서 中華正統의 기치를 높이 들었으며, 한말 西勢東漸의 위기에서 華西學派를 비롯한 유학자들도 衛正斥邪운동을 전개하였다. 율곡의 경우도 다른 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불교, 도가, 육왕학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이를 비판하였다. 그는 불교, 도가, 육왕학만이 이단이 아니라 先王의 道를 부정하고 개인의 사사로운 이욕을 좇는 것은 모두 이단 아님이 없다 하였다. 율곡이 불교,도가, 육왕학을 이단으로 보는 중요한 논거는, 그들이 유학에 반하는 것이라는 점과불교의 출가나 도가의 초탈적 성격이 가정과 사회, 국가를 부정하는 이기적인 것이라 보는데 있다. 그리고 율곡을 비롯한 유학자들에게 있어 정통의 본질은 仁, 仁義之道, 孔孟之道, 聖賢之道, 先王之道, 堯舜之道로서 斯道, 斯文, 道學을 말한다. 유학이인간학이고 또 사회, 국가, 인류에 대한 투철한 우환의식과 윤리적 가치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불교, 도가, 양명학에 대한 정통론을 내세우는 것이라 볼 수 있다. 현대사회는 글로벌시대요 다문화, 다종교사회라고 볼 때, 정통과 이단의 갈등은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타 종교, 타 문화에 대한 너그러운 이해와 수용성이 요구된다. 유교가 아무리 훌륭한 철학사상이라 하더라도 타 종교, 타 문화를 수용해 보완할 줄 알아야 한다. 정통과 이단의 갈등을 극복하고 지구촌의 문화적 평화와 공존의 세계를 만들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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