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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논문 : 의령(宜寧)의 학문적 전통과 특징

        허권수 ( Kweon Soo Heo ) 연민학회 2013 연민학지 Vol.20 No.-

        宜寧의 학문을 기록한 문헌은 비교적 늦게 나와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의 학문을 상고할 자료가 없다. 의령은 조선 중기의 대학자 退溪 李滉와 南冥 曹植이 밀접한 관계를 맺은 특별한 고을이다. 의령에서 학문이 시작 된 것은 退溪와 南冥의 제자들로부터 비롯된다. 退溪와 南冥 兩門의 제자인 竹유 吳澐의 『竹유集』이 의령의 학자가 남긴 현존하는 최초의 文集이라 할 수 있다. 그와 거의 동시대 사람으로 남명의 제자인 松巖 李魯의 『松巖集』이 의령에 관한 내용이 담긴 최초의 문집이라 할 수 있다. 송암은 『松巖集』 이외에도 『龍蛇日記』라는 壬辰倭亂 관계 전쟁문학 작품도 남겼고, 인물사 자료인 『四姓綱目』을 남겼다. 의령 사람으로서 본격적인 著書를 하기시작한 것은 송암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의령에서 우거했던 眉. 許穆은 대학자이나, 의령에서는 많은 제자를 양성하지는 않았다. 미수가 의령에 우거하던 시기에는 미수의 명성이 아직 대단하지 않아서 그랬던 것으로 볼 수 있다. 英祖 이후에 이르러서야 의령에서 많은 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19세기에 들어와서 南人系列의 학자로, 性齋 許傳의 문하와 四未軒 張福樞의 문하에서 대량으로 학자들이 배출되었다. 조선 말기에 이르러서는 后山 許愈 문하와 .宇郭鍾錫 문하에서 많은 제자들이 배출되었다. 의령 학자들의 문집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 많이 나왔고, 개인 문집의 분량도 점점 늘어났다. 의령에 사는 남인 계열 가문의 자제들은 18세기까지는 의령에서 주로 安東 부근의 대학자를 찾아가 입문하였다. 老論系列 가문의 자제들은 조선 말기 勉庵 崔益鉉, 艮齋 田愚, 老栢軒 鄭載圭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이들은 노론 학자 가운데서도 栗谷, 尤庵의 嫡傳이라할 수 있는 당대 최고의 학자들을 찾아가 배움을 청했다. 퇴계는 의령 학자들의 學問과 德行의 矜式이 되었다. 그를 향사하는 德谷書院은 의령에서는 유일한 賜額書院이고, 또 경남지방에서는 퇴계를 享祀한 유일한 서원이었으므로, 퇴계의 학문은 덕곡서원을 통해서 경남지역에 영향력을 펼쳐 나갔는데, 그 영향은 대단히 컸다. 의령 학자들의 관심과 언급은 늘 남명보다 퇴계에게 더 많이 있었다. 의령 학자들의 문집에서도 여타 학자들보다 퇴계에 관한 언급이 가장 많다. 후세 의령의 학자들이 스승을 구할 적에도 退溪學統을 이은 安東地方의 학자를 찾아가는 것도 다 이런 이유에서였다. 退溪學派와 學緣을 맺는 것이 자신이나 가문의 위상을 높이는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많은 제자가 살고 있고, 퇴계에 비해서는 의령과 지근의 거리에 살았던 南冥인데도 의령 학자들이 남명에 대한 관심이 퇴계보다 적은 것은, 仁祖反正 이후 南冥學派가 몰락하였고, 남명의 제자나 재전제자들이 처형되거나 유배 당하는 등 징벌을 받는 것을 보고, 의령의 학자들은 자신이 南冥學派라고 표방하는 것을 꺼려하는 마음이 생겼을 가능성이 크다. 거기다가 南冥學派 후예들에 의해서 주도된 1728년 英祖 戊申亂 이후 慶尙右道에 대한 의심과 감시가 더해지자, 退溪學派에 접근하거나 老論에 접근하는 분위기가 더 강하게 되었다. 의령의 학자 가운데는 노론계열의 학자가 여타 고을보다 많아 남인계열 학자와 노론계열 학자가 거의 절반씩 된다. 이는 당파의 대립으로 볼 수도 있지만, 의령의 학자들이 남인계열 학자들의 좋은 점과 노론계열 학자들의 좋은 점을 모두 배워와서 의령에 이식시킴으로 해서 의령의 학문을 더욱 새롭게 발전시킬 수 있는 선의의 경쟁의 장이 전개될 수 있었다. 그리고 또 서로 學問에 정진하고 行身을 신중히 하는 긍정적인 측면도 많았다. 의령에 사는 남인 노론 두 학파 학자들은, 극단적인 정쟁이나 이론적 투쟁 없이, 서로 협력하면서 의령의 학문을 발전시키고, 儒林의 사업을 처리해 나갔다. 조선후기 嶺南의 각 고을의 유림들이 鄕戰으로 분열된 양상을 보이는 곳이 많았는데, 의령은 두 학파간의 조화를 이루어 독특한 학문을 이룬 모범적인 곳이었다. The study of Uiryeong during the Three Kingdoms and Goryeo period have not remained. Toigae and Nammyeong was great scholar of the Chosun Dynasty, they were closely related with Uiryeong. So the start of the study in Uiryeong began in earnest by the disciples of Toigae and Nammyeong. Oun`s work called Jukujip was the first anthology to present in Uiryeong. But Songamjip containing information about Uiryeong can be called the first anthology. In addition to the Songamjip the Diary of Ryongsa was an important war literature. Misu lived Uiryeong temporarily, so he cannot educate many students. And there were no recordings about Uiryeong. Until after Yongjo King, Uiryeong was discharged from the many many scholars. Uiryeong`s anthology of scholars of the Chosun Dynasty came to a lot came out, also has escalated the volume of personal anthology. In the late CHosun, Noron series` scholars, visited Myeonam, Ganjae, lobaghon and served as mentors. Toegye have maintained his strong influence in Uiryeong. Because there was a academy to him sacrifices. In Uiryeong, Nammyeong was always more weak than Toegye. The anthologies of many scholars in Uiryeong was the most often mentioned on Toegye. In Uiryeong, the scholar of where they have worked together without fighting to develop and maintain ethics went o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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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한문학(韓國漢文學)에서의 백거이문학(白居易文學)의 수용양상(受容樣相)

        허권수 ( Kweon Soo Heo ) 우리한문학회 2012 漢文學報 Vol.26 No.-

        新羅時代부터 우리 나라 선인들은 白居易의 시를 읽으며 살아 왔다. 백거이는 唐代여느 시인과는 달리 자신이 新羅를 잘 알았고, 자신의 시가新羅에서 전사되어 널리 유행한다는 사실도 알았다. 현재 남아 있는 우리나라 쪽 기록은 없지만, 그 당시 신라 文學家들과 교유했을 가능성도 없지않다. 1200년 경 高麗武臣亂직후에 그의 시문집인 『白樂天集』이 처음으로 고려에 전래되어 많은 문인들이 관심을 갖고 읽고, 그들의 문학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白居易는 儒學을 공부했으면서 佛敎에 심취하여 유불을 혼융한 문학적 경향을 가졌는데, 이런 점이 유학을 공부했으면서 불교가 국교인 高麗시대를 살아가는 文學家들의 성향에 들어맞았기 때문에 환영을 받았다. 高麗武臣亂직후에 활동한 林椿, 李奎報등이 백거이의 詩文을 가장 좋아하고많이 배우려고 했다. 고려말에 『古文眞寶』가 도입되어 조선시대 書塾의 필수교재가 되었다. 『고문진보』에는 백거이의 「長恨歌」, 「琵琶行」등 7수의 시가 수록되어 있으므로, 이후 白居易문학은 더욱더 朝鮮의 문단의 저변에까지 영향을 주게 되었다. 조선 중기의 許筠, 權필, 李安訥등이 특히 백거이를 좋아했는데, 이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許筠의 「老客婦怨」같은 작품은 백거이의 「母別子」와 내용이 흡사하고, 權필의 「忠州石」은 백거이의 「靑石」과 주제도 흡사하고, 풍자의 대상도 동일하다. 임진왜란 등을 겪고 사상적으로 혼란한시기에 사상적으로 포용적인 백거이 시가 이들의 취향에 맞지 않았나 하는생각이 든다. 高麗의 武臣亂직후와 조선조의 壬辰倭亂직후에 白居易시가 그 당대를 대표하는 문학가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는 것은, 白居易의 諷刺性보다는 그 達觀的경향이 더 큰 이유라 할 수 있다.백거이 시는 강한 諷刺性을 가진 시와 閒靜한 정취를 담은 閑適詩가 서로 대조를 이루는데, 둘 다 우리 나라에서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져 우리 나라 문학에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우리 나라에서 고려 중기 이후로 白居易의 시가, 杜甫, 李白, 蘇軾의 詩정도의 인기는 누리지 못해도 꾸준히 우리 나라 문학가들의 사랑을 받았고, 문학의 典範이 되었다. 그의 시는 평이하고 澹泊하고 솔직하다는 논평을 많이 들었는데, 평이하고 담박한 점으로 인하여 대체로 긍정적으로 白居易시를 받아들였다. Korean cultured person have well known Baijuyi, the celebrated poet of Tang dynasty from Sinla. Baijuyi also have well known Sinla dynasty and he have recognized his poetry was widely favored in Sinla. not same Cinese another poet. Though there were no records proving the fact, in all likely hood he have exchange with Sinla`s poet. The collection of his works have be imported at Armed Uprising in middle period of Korea dynasty. From that time Korean cultured persons have taken the interest in his works more and read it. So Baijuyi`s works have had influence on Korean traditional literature in Chinese characters. Baijuyi studied both Confucianism and Buddhism, since his works molded the special character mingled by the thought of Confucianism and Buddhism. This character was after the fancy of Korean cultured persons who also studied both Confucianism and Buddhism. Especially Linchun[林椿] and Likuibao[李奎 報] liked his works exceedingly and modeled their works on Baijuyi`s works. Guwenzhenbao[古文眞寶], the famous enthology of Chinese poets and proses, have be imported at the close of Korea dynasty. That book became the compulsory text of every village schoolhouse. Seven poems and one proses of Baijuyi were included in Guwenzhenbao, therefore Baijuyi`s poets and proses have be imported to Korean literary world. Until the middle years of Choshen dynasty, Xuyun[許筠], Quanbi[權필], Lianne[李安訥] very liked Baijuyi`s works. After Japanese invasion in 1592, Korean cultured persons were confused mentally. Reading Baijuyi`s works gave them consolations, Because Baijuyi`s works had capacity for tolerance. Baijuyi`s works have not only satire but also quietness equality. His works were welcomed in Korea cultured persons for his far-sighted thoughts not his satire. In conclusion, from Sinla dynasty, Korean culcured person have liked Baijuyi`s works steadily and Baijuyi`s works have became model of works, but the state of love did not come up to Libai[李白], Dufu[杜甫], Sushi[蘇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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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면우(勉宇) 곽종석(郭鍾錫) 소찬(所撰) 남명묘지명(南冥墓誌銘)에 대한 소고(小考)

        허권수 ( Kweon Soo Heo )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2014 남명학연구 Vol.44 No.-

        勉宇 郭鍾錫이 지은 「南冥墓誌銘」은, 南冥을 두고 지은 傳記文字 가 운데서 가장 포괄적이고 종합적인 서술이라 할 수 있다. 남명 전기문자 의 최후결정판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남명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빠짐 없이 수록해 놓았다. 묘지명으로서는 매우 긴 작품으로 일반적인 묘지명의 틀과 다른 점이 많다. 면우는 이 묘지명을 지으면서 자료를 최대한 널리 수집하여 신중에 신중을 기하였고, 다 완성된 뒤에도 당시 慶尙道 지역에서 문장으로 손꼽히는 제자 深齋 曺兢燮과 晦峯 河謙鎭에게 문제점을 지적하여 같 이 수정하고 보완하여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원래의 請文者 弦齋 曺庸相을 통하여 深齋가 사소한 문제로 지나치게 장기간 문제를 지적하고 나오자, 마침내 자기가 지은 「南冥墓 誌銘」은 폐기하라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그 9년 뒤인 1926년에 간행된 「勉宇集」속에 실린 勉宇의 시문 가운 데 南冥을 낮게 평가했다는 혐의를 받을 글이 발견되어, 남명 후손들은출판하여 보내 온 ..宇集.을 거절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宇 측과 관계가 멀어져 .남명묘지명.은 실제로 남명 묘소에 묻히지 못 했다. .南冥墓誌銘.에서 .宇는, 南冥의 偉大性을 부각시키고, 敬義가 南 冥思想의 핵심임을 밝히고, 南冥의 治學方法을 체계화하고, 南冥의 憂 國憐民사상을 부각시키고, 南冥의 學德의 특징을 宋朝 諸賢에 비교하 였고, 南冥의 雅號의 의미를 밝히고, 文廟從祀 疏請 등 남명 推崇事業을 소개하는 등, 내용이 가장 다양하면서 풍부하다. 단언컨대, .南冥墓誌銘.은 남명에 관한 傳記文字 가운데서 가장 종 합적이고 체계적이고 심도 있는 자료라 할 수 있다. 남명이 직접 지은 詩文에는, 남명의 언행과 생활상을 이해할 자료가 거의 없는데, 제자나 친구 後學들이 지은 이런 다양한 종류의 傳記文字 가 존재함으로 해서 남명을 연구하는 자료로서 유용하게 활용할 수 높은 것이다. Nammyung’s Epitaph Written by Myunwoo Gwagjongsug is longest Biographical work. This work may be the most extensive and comprehensive description among the Nammyung’s biographies. This work good enough to be called definitive character set recorded almost without exception among the Nammyung’s biographical work. This work is pretty long, considering the epitaph works, escaped the normal framework a lot of yet. This work was created with reference to the a lot of data. And after Gwagjongsug completed the work , he made outstanding disciples read and submit their opinions. Gwagjongsug was modified and compensated to accept their opinions in order to make the most complete work. But Joyongsang who requested that work the first continue to raise the issue, Gwagjongsug finally asked to discard it. After 9 years, in 1926, Gwagjongsug’s anthology was published, and was sent to Nammyung’s descendants. They found several article on depreciation of their ancestors Nammyung in Gwagjongsug’s anthology. So Nammyung’s descendants asked many times to edit or delete them in it. But Editor of Gwagjongsug’santhology were emphatically rejected. They even laughed at the ignorance of Nammyung’s descendants. Since then, both of which went between more and more worse, eventually Nammyung’s Epitaph was not buried in Nammyung’s tomb. But this work was edited in his anthology and has delivered to posterity. Gwagjongsug emphasized his greatness of Nammyung, and proved pious and rightness was The core of Nammyung studies. In conclusion, Nammyung’s Epitaph is the most comprehensive and systematic work. So data values of this work are very hig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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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사(兵使) 한범석(韓範錫)의 가세(家世)와 생평(生平)

        허권수 ( Heo Kweon Soo )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2014 남명학연구 Vol.43 No.-

        청주한씨(淸州韓氏)는 고려(高麗) 중기 이후로 명공거경(名公巨卿)과 문인학자(文人學者)들이 대를 이어 배출되는 혁혁한 가문으로 성장하였다.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 더욱 번창하였고, 成宗 때 한계희(韓繼禧)의 대에 이르러 번창함이 절정에 이르렀다. 그 손자 한승리(韓承利)가 진주(晋州)에 은거한 이후로는 중앙관계(中央官界)와 관계를 맺을 기회가 줄어 자연히 고관대작(高官大爵)으로의 진출은 어렵게 되고, 중앙의 명벌가(名閥家)와의 연혼(聯婚)이 어렵게 되자, 결국 진주를 중심으로 한 지역사족계급(地域士族階級)으로 변화하였다. 또 진주의 지역사족으로 변화한 이후로는 주로 武科를 통한 사환(仕宦)으로 가성(家聲)을 지속해 나갔다. 그런 인물 가운데 조선 숙종(肅宗) 영조(英祖) 때 활약한 병사(兵使) 한범석(韓範錫)과 그의 후손들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한범석(韓範錫) 가문(家門)의 무과 출신들은 단순히 무예(武藝)만 아는 무인이 아니고, 유학적(儒學的) 소양(素養)을 겸비한 무인으로서 문무를 겸전했고, 강우지역(江右地域)의 유소(儒所)에도 참여하는 가문이 되었다. 특히 한범석(韓範錫)의 후손 가운데는 11명의 무과출신(武科出身)과 14명의 사환자(仕宦者), 3명의 문집 저자를 배출함으로써 강우지역의 명가의 위상을 유지해 나갔다. 한범석은 무과를 통해서 사환하여 50년 동안 사적(仕籍)에 있으면서 영조(英祖)의 특별한 지우(知遇)를 입어 6도 병사, 7개 고을원을 역임하며 치적을 쌓았다. 특히 국가 민족을 위하고, 백성을 사랑하고 군사들을 어루만지는 사명감(使命感)이 투철하였다. 병사(兵使) 등 군직(軍職)을 맡아서는 성을 쌓고 무기를 정비하여 국방을 튼튼히 하였다. 고을원을 맡아서는 백성들의 고통상을 이해하고 이를 제거하고 백성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제도를 만들었고, 흉년에는 백성들을 구제하는 일에 정성을 다했다. 그는 무예에 정통한 무인이면서 아울러 모범적인 목민관(牧民官)이었다. 또 무인으로서는 드물게 중국(中國)과 일본(日本)의 사행(使行)에 참여하였고, 그 사행의 활동상과 노정을 장계(狀啓)와 일기(日記)로 남겼다는 것이 다른 무인에게서 볼 수 없는 특이한 일이다. 한 사람이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오자마자 곧바로 일본에 간 경우도 극히 드물어 그 일기를 자세히 분석해 보면, 두 나라의 문화에 대한 감각의 차이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전일에 많은 치적(治績)을 쌓은 고관(高官)이라 하여 향촌(鄕村)에서 무단(武斷)을 일삼는 일은 전혀 없었고, 향촌(鄕村)의 부로(父老)들과 동등한 친구로서 어울려 담소하는 소박한 생활을 했는데, 그 당시로서는 이런 지극히 평등한 사상을 가진 사람이 드물었다. Since middle period of Golyeo dynasty, in Chungju Han family high offices and literary scholar have come out. Come to the Joseon Dynasty Han family have been more prosperous. During reign of king Seongjong, Han family reached a climax flourish. Hangyehee had figure out the best among many Han family. Hanseunglee, the grandson of Hangyehee, transferred from Seoul and lived in Jinju. From that time, his family were difficult to get the relationship with the important person in central government. So Hanseunglee``s descendants have turned to renowned family in the Jinju area. Since then they were active in the armed officials. The most famous among them was General Hanbeomseok, he has been active at reign of king Sugjong. Many of his descendants also have become armed officials. They have been outgoing in literature also . Hanbeomseok while 50 years Has served as offices in Seoul and all over the province, and he has ware the favor of the king, he has completed a lot of work, and he has been hailed by the people. He was an exemplary public servants to understand the people and made tough work with people in his body. Although he was armed officials, he went as envoy to China and Japan, left a diary that fact. such case was very rare among armed officials. He have gained a lot of work as the senior officials before. Step away from high office, He did not show the haughtiness attitude at hometown and he did dot arbitrarily. He has spend time exchanging many stories with people and has enjoyed the simple life at home town. He already had the idea of equal. At that time, person having this thought was r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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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논문 : 호서명현(湖西名賢)의 의리정신과 문학사상; 규암(圭菴) 송인수(宋麟壽)의 선비정신과 시세계(詩世界)

        허권수 ( Kweon Soo Heo )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2006 儒學硏究 Vol.13 No.-

        규암 송인수는 성리학에만 국한되지 않고 제자백가와 역사서를 두루 섭렵하는 등 학문을 폭넓게 하였다. 일찍 문과에 올라 출사하여 홍문관 등 문한을 필요로 하는 청요직을 두루 열역하였다. 그러나 그는 문약한 선비 출신의 관료가 아니고, 강직한 정신력을 가진 관료였다. 그 당시 국왕과 혼인관계를 맺어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김안로를 탄핵하여 삭직하게 만들었고, 윤원형과 이궁 일당을 탄핵하여 축출할 정도로 흔들리지 않고 정도를 걸었다. 이로 인하여 유배를 당하고 삭탈관직을 당하다가 결국 간당에 의해서 희생되고 말았다. 규암은 난관 속에서도 선비정신을 견지하여 바른 길만을 지향하였다. 비록 앞날에 난관이 닥친다 해도 그는 회피하거나 타협하지 않았다. 그 당시로서는 고통의 길이었지만, 규암의 이런 정신과 행신은 당대는 물론 후세 선비들의 모범이 되기에 충분했다. 유교를 통해서 이상국가를 건설해 보려는 의도는 정암 조광조가 맨 먼저 실현해 보려고 노력했으나 결국 간신배들에게 희생되고 말았으니, 현실정치에서 선비정신을 구현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기묘사화 직후 사기는 땅에 떨어졌고 유교 서적을 보는 것마저도 서로 기피할 정도였는데, 이 런 분위기 속에서도, 규암은 성리학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다시 성리학을 일으켜 이를 통해서 이상정치를 실현하려고 노력하였다. 그 자신 학문도 대단했고, 문장 실력도 출중하였다. 결과적으로 실패하고 희생당하였지만, 그 정신은 후세 사람들이 알고 있다. 그의 시도, 평이한 표현 속에 선비정신이 함축적으로 스며들어 있어 읽으면 읽을수록 깊은 맛을 느낄 수 있다. 학문적인 바탕과 시문의 솜씨와 행정적 능력 등을 두루 갖추었고, 거기다 강직한 선비정신을 견지하여 바른 길을 추구하던 거의 완성된 인물에 가까운 규암 같은 인재를 얻기가 쉽지 않았으나, 그의 경륜을 펴 국가와 백성들을 위해 일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간신들에게 몰려서 희생되고 말못했으니 아쉬운 일이다. 그러나 그의 선비정신은 후세에 많은 영향을 미쳐 국가를 도덕적으로 승화시키는 데 보이지 않는 가운데 근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Songinsu has widely studied history classics and the works of various schools, not limited to Song Confucianism. He has passed the higher civil service examination at an early age and has entered the service of government office. Especially he has held dignified post like Hongmungwan which the excellent scholars take participate in. But he was not officer from classical scholar sunk in effeminacy, but officer who had rectitude spirit. Because he have trodden in the path of righteousness without unrest, he have impeached Kimanlo, almightiness power man who connected marriage with the royal family. As this, Kimanlo has been deprived his office, ultimately Songinsu have impeached Yunwonhyung and Leegi, most powerful vassal in those days, they also have been deprived his office. By the reason of his firm attitude like these, he has been deprived his office, and has been exiled, finally gone to the scaffold by traitor ministers like Yunwonhyung and Leegi etc.. He have adhered classical scholar spirit and trodden in the path of righteousness in the deadlock continuously. Although he have encountered insurmountable barrier, he have never evaded it or made compromise with the foxy group. It was ordeal road but his spirit and behaviors like those were enough to become the model in not only in those days but also later. Before Songinsu, Chogwangjo have made efforts to realize ideal nation based on Confucianism doctrines, finally he have been get sacrificed by the foxy group. this proved it is very difficult to realize classical scholar spirit in practical politics. Right after Gimyo calamity of savants, the martial spirit has disappeared, in the consequence of this, on the whole classical scholars wish to evade Confucianism classics. in this atmosphere, Songinsu had correct understanding of gravity of Neo confucianism, used his endeavor to rebuild it and to realize ideal nation by Confucianism doctrines. But his efforts result in the failure. His study was very wide, his ability of prose was very excellent. For all his efforts, he did not succeed and sacrifice himself. but his classical scholar spirit will have exist in the mind of later period. his poetry have implied classical scholar spirit in plain presentation, therefore the more we read his poetry, the deeper relish of his poetry is. As he have been fully furnished with base of study, ability of poetry and classical scholar spirit which can not crush, he have consistently pursue the correct way. we can call him an almost perfect classical scholar. It is not easy to get personage like him. What a pity! he did not obtain the opportunity to realize his administrative ability for nation and peoples, he was sacrificed himself by foxy fellows. But his classical scholar spirit have affected in later, and aided tacitly nation to be mor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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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암(眞庵) 리병헌(李炳憲)의 생애(生涯)와 학문(學問)

        허권수 ( Kweon Soo Heo )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2015 남명학연구 Vol.46 No.-

        眞庵 李炳憲은 조선말기의 개혁적 유학자다. 본래 勉宇 郭鍾錫의 문하에서 공부하다가, 유학의 개혁을 통한 구국에 뜻을 두고 중국 강유위의 제자가 되어 今文經學을 공부하고 孔子敎운동을 전개했다. 西歐文物이 밀려들어오고 日本의 침략 마수를 뻗기 시작하던 19세기 후반기에 태어나 儒敎가 급속도로 망해가고 우리 傳統이 무너지는 것을 직접 목도하며 성장하였다. 그래서 유교를 復原할 수 있는 방안으로 유교를 종교화 하여 孔敎라 이름하고, 孔子를 敎祖로 삼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공교의 사상적 기반으로 삼기 위하여 今文經學을 공부하였다. 그는 국권을 회복하고 백성들이 행복해질수 있는 유일한 길은 유교라고 확신하였는데, 그 유교는 우리 나라에 두루 퍼져있는 宋學이 아니고 孔子의 가르침을 원래 모습인 孔敎였던 것이다. 유교가 개혁을 통해서만 민족을 이끌 수 있고 전통문화를 지켜 나갈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의 孔敎運動은, 培山書堂에 文廟를 지어 孔子를 享祀하는 정도에서 그치고 말아 실제로는 크게 확산되지 못 했다. 시대변화에 무관심한 保守儒林들의 악랄한 반발로 그의 이상은 실현되지 못 했다. 그런데도 그는 눈을 감는 순간까지도 한 평생 孔敎運動에 헌신하였다. 비록 그의 孔敎運動은 성공을 거두지 못 했지만, 그는 韓國儒敎史上 가장 독특한 유학자요 사상가요 종교이론가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저서를 남겨 그의 유학사상을 수록했는데, 이는 韓國思想史에 새로운 경지를 연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康有爲의 大同思想을 바탕으로 華夷觀을 극복하고 四海同胞主義를 제창하였고, 變法自疆에 의한 국가발전을 도모하고, 민족의 自矜心을 고취하였다. 그는 孔敎運動을 통해 우리 민족을 보존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韓國學述史上 본격적인 今文經學者이다. 또 今文學에 바탕하여 儒敎經典을 재해석하여 『易經今文考』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이는 韓國經學史上 독특한 업적이다. 朱子學 일변도의 한국학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은 업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보수적 유림들의 극렬한 반발 아니라 해도, 급속하게 변하는 시대조류에 孔敎를 통한 儒敎의 復原과 民族의 自尊의 추구가 실효를 거두기는 쉽지 않았던 것이었다. 아무튼 眞庵은 많은 儒學者들 가운데서도 가장 독창적인 학자고, 금문학을 도입한 특이한 학자고, 서양의 학문도 선구적으로 상당히 이해하였으며 당시 중국 사정이나 학계의 동향을 가장 잘 아는 학자였다. 일본과도 무조건적인 투쟁이 아닌 설득을 통하여 이해시키려고 노력했다. Jinam Leebyeongheon was a reformative Confucians. He studied under great scholar Meonwoo Gwakjongseok as the original traditional Confucian scholars. But he thought that changing of the Confucian was absolutely necessary to survive After looking at the new Western products. So he went China to see a great teacher, just Kangyouwei. Kangyouwei was trying to change the Confucian as a religion, and named Confucius school. It is taken from the church organizations in the West. Leebyeongheon introduced the Confucius School in Chaoxian and established a Confucius shrine. It is completely different from the previous system of Confucianism. So Traditional Confucian scholars fiercely opposed to such actions. Leebyeongheon``s movement has returned to eventually fail. And Leebyeongheon studied the New text Confucian classics from the Kangyouwei. Kangyouwei newly interpreted Confucian classics against Zhu Xi``s annotations way. However, such the interpretation did not very reasonable. Leebyeongheon did not believe at first, and later believed it and built some books in accordance with the doctrine of the master.Although Leebyeongheon tried to rescue the country through the Confucian reform, but he failed to achieve his intentions were. Anyway he was the first one who developed the Confucius School in Chaoxian, as well as he only studied New text Confucian classics. This would also be mea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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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치원의 재당 (在唐) 생애에 대한 소고

        허권수 ( Kweon Soo Heo ) 영남중국어문학회 1985 중국어문학 Vol.10 No.1

        長慶年間, 唐朝欲以夷制夷, 始說寶貢科, 可使邊方異民族參與於唐朝之政治. 是故, 多施惠於新羅遊學生. 新羅亦掃法六頭品勢力之不平, 廣開渡唐遊學之門戶. 因此, 新羅遊學生多受惠於新羅與唐. 崔致遠乃新羅末渡唐遊學生之一也. 十二而渡唐, 十八而登於賓貢科, 以後十七年間仕于唐. 登料而未釋褐時, 寓居洛陽, 筆作飯襄. 厥後除漂水縣尉, 職位與祿俸俱適於意. 然, 三年後 辭縣尉, 擬將赴宏詞料, 蓋爲得高位以展其蘊蓄也. 然財力不及而未果. 因託高騈爲待御使, 專擔官府文書之撰. 是時也, 弘揚其文名, 由是, 得高騈之信又俸祿頗曉, 唯文筆是可勉. 如此生活, 傍人見之, 以大榮達, 崔致遠則中心常懷鄕愁, 切慕父母 故無日不思故國. 因之, 欲將其不能施於唐之抱負, 移施於新羅, 二十八而歸于新羅. 留唐時, 想相與契交者不鮮矣, 然其遺文多代高騈而製者故, 無以追考, 可考者, 唯羅隱·顧雲等數三人而已矣. 崔致遠對于高句麗·百濟·渤海, 全無同族意識, 反以高句麗·百濟爲唐之巨壽. 於渤海則敵對感尤劇, 可知其意識之如何. 崔致遠終不覺唐之以夷制夷之譎計, 不免爲唐所使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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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성이씨(眞城李氏) 가문의 『소학(小學)』 중시 전통

        허권수 ( Heo Kwon-su ) 연민학회 2020 연민학지 Vol.33 No.-

        『소학(小學)』은 고려 말기에 우리나라에 전해졌다. 유교(儒敎)를 통치이념으로 삼은 조선시대에 와서 『소학』은 유교사상의 보급에 아주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중요한 책이기 때문에 조정에서 대단히 중시하여 널리 보급하려고 노력하였다. 그 결과 『소학』은 급속도로 보급되어 중종조(中宗朝)에 이르면 조선 지식인의필독서가 되었는데, 특히 이학자(理學者)들 사이에서 널리 읽혔고,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가문인 진성이씨(眞城李氏) 가문에서도 널리 읽히고 강조되었다. 진성이씨 가문에서 소학을 맨 먼저 접한 인물은 송재(松齋) 이우(李堣)이다. 퇴계가 『성학십도(聖學十圖)』에 소학을 제삼도(第三圖)로 넣음으로써 『소학』의 위상을 최고도로 높였고, 선조(宣祖)에게도 자주 읽을 것을 권유하였다. 퇴계가 이렇게 『소학』의 가치를 높이자, 퇴계 후손들을 포함한 진성이씨 가문의 학자들은 『소학』을 특별히 중시하면서 읽는 것이 하나의 가풍(家風)이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이르러서 율재(慄齋) 이한걸(李漢杰)은 여자 인성교육(人性敎育)을 위해서 『소학』에서 여자에 관계된 내용을 발췌하고, 그것을 완전히 번역하여 『여자소학(女子小學)』을 만들었다. 조선조 5백 년 동안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여자들의 교육에 관심을 갖고서 여자들을 위한 서적을 만든 것이다. 『동학(東學)』은 양전(陽田) 이상호(李祥鎬)에 의하여 편찬되었는데, 주로 우리 선현(先賢)들의 명언이나 훌륭한 행실 등을 모은 것으로, 젊은 선비들의 수행에 도움이 많이 될 것이다. 진성이씨 가문의 『소학』 중시 경향은 현세 학자인 연민(淵民) 이가원(李家源) 교수에까지 이어져 대학의 한문 교과서에 『소학』에서 인용한 글을 수록했다. 이런 전통은 진성이씨 가문의 하나의 우수한 학문적 전통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Sohak(小學) written by Juja and his disciple Ruchungji, was brought to Korea in the late Goryeo Dynasty. In the Joseon Dynasty, where Confucianism was the ruling ideology, it was a very useful book. Therefore, kings and servants actively have tried to spread widely at the national level. As a result, by the 15th century, Sohak became widespread throughout the country. Among the famous families of Joseon, the family of Toegye Lee Hwang, Jinsung Lee’family enjoyed reading this book with special emphasis. Such traditions have persisted since Toegye have been until recently. Not only did their descendants enjoyed reading Sohak, they also wrote similar books. This tradition greatly influenced the discipline and morality of Joseon. Among them, Lee Han-geul’s Women’s Sohak(女子小學) and Lee Sang-ho’s East Sohak(東學) are the most representative. If We find this kind of book and study it well, We will understand the atmosphere that emphasizes the study of Sohak at Jos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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