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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近世 · 近代移行期における日本の首都空間の変容の一斷面-旧江戶城門の再編成を中心に

        岩淵令治(IWABUCHI, Reiji)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2016 서울학연구 Vol.- No.64

        일본의 수도, 도쿄의 중심에는 1.5㎢를 차지하는 천황의 주거, ‘황거 皇居’가 존재한다. 이는 도쿄의 모체였던 도시 에도가 성을 중심으로 한 죠카마치 城下町의 형식을 취한 도시였으며, 황거는 에도성의 공간을 이용하였기 때문이다. 에도성은 국내의 정치적인 안정으로 의례를 통한 쇼군 將軍의 권위를 선양하는 장소로 기능하였다. 이중으로 해자를 두르고 중핵에는 도쿠가와 쇼군가 德川將軍家의 거처와 정무공간, 그 외 관청이 위치하였다. 해자에는 다리와 성문이 설치되었으며, 쇼군의 방문자와 외출하는 쇼군 행렬의 송영이 성문에서 행해졌다. 성문은 서열의 확인과 권위를 발현하는 장으로 기능하였다. 근대에 들어오면서 이 의례공간은 축소되어 외측 해자의 성문은 철거되었다. 그리고 내측 해자의 성문 중 9개소가 남겨졌으며, 이 공간이 오늘날의 ‘황거’와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이 공간이 무조건적으로 ‘황거’로 치환된 것은 아니었다. 첫째, 처음에는 황거와 관청가를 합쳐 ‘황성 皇城’으로 구상되었다. 그러나 결국 성의 가장 중핵에 해당되는 혼마루 本丸 부분에는 황거도 관청도 설치되지 않았다. 또 관청가의 용지로서 확보된 또 다른 공간도 관청으로 이용한 경우는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그 결과 의례공간으로서의 광장이 확대, 재생되었다. 둘째, 에도시대에는 통행이 가능했던 북측 부분(北の丸·山吹)의 도로는 일시 개방되었으나, 천황을 지키는 근위연대의 주둔지 설치에 의해 ‘황성’에 흡수되어 통행이 폐쇄되었다. 이와 같이 근대의 ‘황성’은 천황가가 거주하는 ‘황거’ 이외의 기능도 가졌기 때문에 거대한 공간을 유지할 수 있었다. 제 2차 세계대전 후 일부는 공원으로 개방되었으나 여전히 ‘황거’는 거대한 공간으로서 도시의 중심을 점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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