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SS 학술연구정보서비스

검색
다국어 입력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예시)
  • 中文 을 입력하시려면 zhongwen을 입력하시고 space를누르시면됩니다.
  • 北京 을 입력하시려면 beijing을 입력하시고 space를 누르시면 됩니다.
닫기
    인기검색어 순위 펼치기

    RISS 인기검색어

      검색결과 좁혀 보기

      선택해제

      오늘 본 자료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더보기
      • 무료
      • 기관 내 무료
      • 유료
      • KCI등재

        嶺南地域 出土 土師器系土器의 재검토

        井上主稅(Inoue, Chikara) 한국상고사학회 2005 한국상고사학보 Vol.48 No.-

        본고에서는 3세기 후반에서 5세기 전엽에 걸친 영남지역의 유적에서 출토되는 師器系土器에 대해 검토하였다. 선행연구의 큰 문제는 이제까지 고분 자료를 중심으로 연구가 이루어졌고 생활유적 출토품에 대한 검토가 미흡했다는 점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사람들의 교류 형태나 移住時期 등이 언급되었다. 본고에서는 당시 사람들의 움직임을 나타내는 자료는 고분보다 생활유적에서 출토되는 토기가 적절하다고 생각하여 고분뿐만 아니라 생활유적에서 출토된 師器系土器를 종합적으로 고찰하였다. 그 결과 양자에서 출현 시기나 출토상황의 차이, 搬入品과 模倣品의 비율 차이 등이 있음을 지적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편년을 시도하여 각 단계의 토기 양상을 살펴보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당시 교류 형태나 倭人들이 건너온 배경 등을 고찰하였다. 역사 배경을 검토하는 데 주목되는 것은 師器系土器와 威勢品으로 생각되는 倭系遺物의 출현 시기가 서로 다른 점이다. 즉 師器系土器는 3세기 후반부터 보이는데 비해 巴形銅器나 鏃形石製品 등 위세품은 4세기 전엽부터 나타난다. 그러므로 이 유물들을 하나로 묶어서 단순히 교역의 결과로 들어왔다고 해석하기는 어렵다. 토기는 당시 교역에 從事한 사람들이 남긴 것이지만 威勢品으로 생각되는 倭系遺物도 이와 같이 해석할 수는 없는 것이다. 4세기 전엽부터 威勢品들이 한반도 남부에 나타나는 것은 樂浪·帶方郡이 멸망되어 동아시아의 교역체계에서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 것과 연관되며 이 시기부터 금관가야와 왜의 정치적인 관계가 실질적으로 급속히 확대되었음을 나타낸다고 해석된다. This paper has been concerned with hajiki(Japanese pottery) excavated during the late third and early fifth centuries in the Yeongnam region. The previous studies of hajiki have paid more attention to tomb material rather than ancient habitation sited. They referred piople's interaction aspect and migration period in those days. The material that shows people's movement is regarded as [ottery found in habitation sited rather than tombs. Hence, this research examined the pottery exhumed from both habitation sites and tombs. The major findings of this study are as follows: First, the difference between the a[[earance time and the excavation situation was identified. Second, many imitation goods and imports were found from tombs and habitation sites, respectively. Finally, each pottery aspect was investigated, and further the interaction form and the background that Japanese went to the south of the Korean Peninsula were explored, basing on the chronology of the pottery.

      • KCI등재

        왜계유물을 통해 본 금관가야 세력의 동향

        井上主稅 한국고고학회 2005 한국고고학보 Vol.57 No.-

        김해 및 부산지역에서 출토되는 倭系遺物은 당시 일본열도 고분시대의 정치적 동향뿐만 아니라 한반도 남부에서의 정치적 동향을 엿볼 수 있는 자료이다. 본고는 이러한 왜계 유물을 통해 금관가야 내 정치집단의 동향을 주로 대외교섭면에서 살펴보았다. 구체적으로는 금관가야 중심고분군인 福泉洞·大成洞·良洞里古墳群을 대상으로 각 고분군에서 출토된 왜계유물에 대한 검토를 통해 대왜교섭의 형태와 그 차이 등을 추적하였다. 그 결과 복천동고분군에서는 漢郡縣이나 왜와의 대외교역을 통해 유입된 유물은 거의 확인되지 않으며 대외교역에 정치적 기반을 둔 김해지역 정치집단과는 다른 성격을 가진다. 또한 다른 고분군과 달리 4세기 이후 마구나 갑주 등 북방계 문물을 위세품으로서 다량 부장하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이와 달리 김해지역의 양동리고분군에서는 2세기 후반에서 3세기에 걸쳐 한군현과의 교섭을 통해 유입된 중국 또는 북방계 유물이 많이 확인됨과 더불어 彌生時代 後期의 왜계유물도 출토되고 있어 구야국 단계에 한군현 및 왜와의 대외교역을 주도한 세력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에 대성동고분군에서는 이 시기 동안에 한군현을 통해 유입된 중국 또는 북방계 유물이 거의 보이지 않으며 4세기대의 외래계유물은 畿內地域과 관련되는 것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4세기 초에 한군현이 멸망하면서 기존의 교역체계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 대성동집단을 중심으로 하는 금관가야와 왜의 정치적인 관계가 급속히 확대되었음을 나타낸다. 또한 이러한 왜계유물은 4세기 말부터 대형분에 부장되지 않으며, 그 배경은 백제와 왜의 관계, 고구려를 포함하는 당시 국제정세의 변화와 연관될 것으로 생각된다.

      • KCI등재후보
      • 다호리유적에 보이는 왜(倭) 관련 고고자료에 대하여

        이노우에 치카라(井上主稅) 한국고고미술연구소 2009 고고학지 Vol.- No.특집호

        본 논문은 다호리유적에 보이는 왜적(倭的)요소에 대하여, 즉 왜와 관련된 고고자료에 대하여 고찰하였다. 다호리유적의 중요성은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 고고학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특히 다호리 1호묘에서는 다종다양한 부장품이 출토되었으며 그 중에서도 중세형동모의 존재에 주목하였다. 이전까지 야요이 토기만으로 이루어지던 왜계 유물이 다호리 1호묘 단계부터 차츰 청동기를 중심으로 한 유물군으로 변화하고 이러한 양상에서 중국(낙랑군)-한반도남부(한)-북부규슈(왜)의 삼자간 교섭관계가 중요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 한반도 남부의 중국(낙랑)계 유물과 왜계 청동기의 유입이 거의 동일한 시기인 것이나 왜계 청동기가 출토된 분묘 등에서 중국(낙랑)계 유물이 공반되는 것은 이 시기 한반도 남부와 북부규슈의 국제 관계가 상당히 밀접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연관 검색어 추천

      이 검색어로 많이 본 자료

      활용도 높은 자료

      해외이동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