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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병헌의 생애와 사상을 통한 교회일치운동 연구

        홍웅기 협성대학교 신학대학원 2014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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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1 장 서 론 1. 문제의 제기 한국교회는 세계적으로 급성장했다가 너무나도 쉽게 정체기로 접어들었다. 세계에서 미국 다음으로 해외선교사를 가장 많이 파송한 나라로서의 자부심도 있는 선교강국의 위치도 있지만 기독교적 문화의 영향력으로 사회를 선도하고 있지 못함도 사실이다. 21세기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지식수준은 높아졌으나 영적 기갈은 더욱 심해지고 있다. 여기에 한국개신교는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까? 선교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공동체가 당연히 짊어져야 할 사명이다. 교회일치 선교 개념은 ‘하나님의 선교’이다. ‘하나님의 선교’란? 개인 구원을 위한 전도개념이나 교세확장을 목표로 하는 것을 넘어서 삼위일체적으로 역사 안에서 인류의 구원역사를 행하시는 하나님의 활동까지를 포함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당연히 정치, 교육, 문화, 종교, 국가, 여성, 인권, 정의, 평화, 창조질서의 보존 등도 포함된다. 우리는 한국선교 초기의 선교사들이 자국의 군함과 문화를 등에 없고 들어와 문화적 제국주의와 종교적 제국주의 형태의 기독교 복음을 전파한 정황도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한국개신교 일부교단은 근본주의적인 보수주의로 남아있다. 그러나 한국 최초의 토착화 신학자요, 기독교 변증가로 불리는 탁사 최병헌의 재발견을 통해 ‘교회일치운동 선교’의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다. 대형교회들의 세습 문제와 목회자와 장로들의 싸움과 분쟁, 진보와 보수의 갈등, 교회의 분열 이단시비들은 한국교회의 고질적인 병폐로서 사회의 지탄을 받고 있다. 여기에 탁사 최병헌의 나라사랑, 민족사랑, 성경을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지성적으로 설파하여 당시의 수많은 지성들을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오게 한 업적은 오늘날 교회일치 운동의 선구자라 부르기에 적합하다. 최병헌은 자신의 유교적 학문성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빛으로 재해석하여 출판과 신문, 대학교수로서의 교육, 시민운동, 심지어는 공무원으로 참여하여 민족을 계몽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슬람권의 사람들이 대한한국으로 유입되면서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공존하고 여전히 이 땅의 유교, 불교, 도교, 샤머니즘은 교회가 부흥되었어도 존재한다. 정치상황도 서로 일치하지 못하고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경제적 성장을 이루었으나 너무 거대한 재벌들과 빈곤층의 격차는 커지고 있다. 자연환경은 계속 오염되고 있으며, 세계 경제의 변화, 강대국들의 정치적 상황에 따라 흔들리는 배처럼 흔들리고 있다. 아직도 남과 북은 핵위협과 체제의 문제로 통일조국의 앞날은 멀게만 느껴진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선교적 해결책은 무엇인가? 필자는 탁사 최병헌을 통해 그 희망을 찾고자 한다. 2. 연구목적의 범위, 방법 1) 연구의 목적 21C는 지구촌(Global age)시대이다. 역사신학을 전공하는 신학도로서 한국교회사를 공부했다. 한국 최초의 신학자로서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계몽시켜 서구 열강들과 일본의 침략을 대항하고자 자신의 유교적 학문과 문화와 종교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재해석하여 이원론적인 갈등을 극복하고 교회일치적 선교를 펼쳤던 탁사 최병헌의 상황과 생애, 사상을 통해 선교 초기의 서구선교사들이 피선교지 국민을 미개한 종족이라 여기고 야만적 문화를 가진 족속이라 무시한 배타주의적 선교 방향을 한국에서 세계로 파송되는 선교사들이 답습하지 않게 하여 선교지에서의 교회일치적 선교를 통한 하나님 나라 건설을 앞당기게 하며 국내에서도 이제는 한국적 신학의 주체성으로 세계를 구원시키려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선교로 제2의 한국교회 성장을 도모하고자 기대한다. 이 논문의 목적은 최병헌의 생애와 사상을 통한 교회일치적 선교를 연구하여 현대선교의 방향을 제시해 주는데 있다. 2) 연구범위와 방법 본 연구의 범위는 역사 신학적 입장에서 탁사 최병헌의 역사적 상황과 생애와 사상을 살펴보면서 정리해보고 교회일치 운동의 선구자로서의 그의 업적을 살펴보고자 한다. 기존의 탁사 최병헌의 연구는 많은 편이다. 유동식의 “최병헌과 종교신학”, “한국신학의 광맥”, 송길섭의 “한국 신학 형성의 선구자 탁사 최병헌과 그의 시대”, 변선환의 “탁사 최병헌과 동양사상”, 심일섭의 “한국신학 형성의 선구-최초 ‘호교론’과 ‘변증론’을 중심으로” 한숭홍의 “최병헌의 신학사상”, 신광철의 “탁사 최병헌의 비교종교론적 기독교 변증론: 「성산명경」을 중심으로”, 박명길의 “최병헌 목사의 삶” 이덕주의 “토착화신학의 선구자 최병헌”“최병헌의 신학사상”, 이창식의 “탁사 최병헌의 생애와 문학” 등등이 있고, 「아펜젤러. 최병헌 목사의 생애와 신학」이 정동삼문출판사에서 출간 된 것이 있다. 서영석 교수님의 “한국교회사에 나타난 인물과 사상” 속에서 “구한말 개신교 인식과 수용에 있어서 탁사 최병헌의 영향력”이라는 둘째 마당이 있다. 석사 논문으로는 유승한의 “탁사 최병헌이 생애와 사상연구”(감리교신학대학 신학대학원, 석사논문, 1985), 임재식의 “탁사 최병헌의 사

      • 로즈메리 류터의 하느님 이해

        한진경 협성대학교 신학대학원 2004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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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즈메리 류터는 독실한 카톨릭 신자임과 동시에 자유한 영혼의 소유자였던 어머니의 영향 가운데에서 자신의 무한한 가능성을 탐구하며 살도록 격려받았다. 또한 그녀는 유대인 숙부를 통하여, 고등학교 역사 선생님을 통하여, 유대인과 인종차별주의에 대한 관심의 눈을 떳다. 그후 학부시절 그녀의 비판적, 지적, 실천적 사고 속에서의 교회 역사의 연구는 그녀로 하여금 기독교의 진실성에 대하여 회의를 품으며 지적 사고의 전환 시기를 맞이했다. 민권운동, 베트남 전쟁,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페미니즘의 부활이 태동한 시기인 1960년대부터 그녀는 시민 운동가로 활약했다. 1965년부터 워싱턴의 하워드 대학교 신학교인 흑인 신학교의 경험을 통하여 그녀는 또한 신학적 사고와 사회적 실천과의 상호적인 관계를 접합시켜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한 그녀의 신학적 관심은 반유대주의, 성차별, 계급주의, 생태학 등의 다양한 분야에 걸쳐서 나타나지고 있다. 16세기 종교개혁기의 개혁은 그다지 급진적이지는 않았지만, 급진적 종교개혁의 교회들은 강압된 종교개혁의 교회들과 구별되면서 독특한 교회론과 인간론을 제시한다. 그들은 인간의 본성을 타락한 역사적 본성에서가 아니라 본래의 창조된 본성에서부터 이해되어야 한다고 본다. 또한 그들에게 있어서 교회는 세속적 사회에 대립한 새로운 몸의 모임으로서 세속적 도시를 떠나 실존의 대립된 원칙에 의해서 사는 새로운 공동체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개방되어 나타날 새 하늘과 새 땅의 메시아적 공동체를 인수할 교두보로서 현재 안에 내재해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묵시문학적 전통의 내적인 흐름은 재세례파가 재구성하였다. 그들에게 있어서의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자와의 본질적 유사성을 지니게 창조하였다. 인간이 비록 죄 가운데로 타락하였을지라도 그이 진정한 본성으로 남아있는 하느님과의 유사성은 상실치 않고 보존하고 있다. 하느님 앞에 자유한 인간의 영혼은 도래할 하느님 나라를 기대하며 이 땅에서의 순례의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유지하고 있다. 그들은 최후의 심판에 그리스도께서 하늘로부터 내려와 이 땅의 죄인들을 정결하게 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들에게 있어서 하느님 은 창조자이며 동시에 심판자로 오실 메시야였다. 르네상스에서 18세기 후기와 19세기에 있었던 자유주의 혁명에 이르는 기간 동안은 민주적, 세속적, 과학적 기반으로 그리스도교가 대체되는 기간이었다. 이 시기에 하느님의 자기계시는 자연의 법칙과 질서 속에서 보다 분명하게 보여졌다. 하느님은 더 이상 아브라함의 하느님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서의 하느님으로 이해되지 않았다. 하느님은 우주의 원형인 최고의 존재로서 질서와 합리성의 관계에서만 증명될 수 있을 뿐이었다. 합리주의 사상에 기초해 18세기에 점진적으로 출현했던 것들은 천년 왕국의 새로운 세속적 표현으로 그 천년 왕국이 역사 안에서 발생하기 시작했다. 하느님의 은총 또한 모든 인간과 모든 실체를 완성시키기 위하여 역사 안에서 일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신칸트주의 신학에서는 지상의 도덕적 왕국으로서 하느님의 나라를 해석하는 것이 새로운 자유주의적 정통주의 가운데 세워졌다. 로즈메리 류터는 19세기대륙의 자유주의 신학에서 그리스도교 사회주의의 제안자로 로베르트 라멘나를 언급하고 있다. 라멘나는 개량된 사회를 창조론과 하느님의 부성과 인간의 형제애의 기초 위에서 발견하였으며, 그러한 것은 궁극적으로 새로운 사회를 수립하는 역사를 지배하는 하느님의 능력으로 보았다. 그리스도교 사회이론은 호레이스 부쉬넬과 월터 라우센부쉬 등에 의해서 미국의 부흥주의 그리스도가 사회윤리에로 나아가게 되었다. 그것은 교회와 세상 사이의 옛 구분을 지우고, 성령이 단순히 교회 안에서만 역사하는 분이 아니라 사회 안에서 인간을 위한 투쟁 가운데서 역사하는 분으로 이해했다. 하느님은 역사 안에서 일하시는, 역사를 최종적 목적에로 인도하시는 내재적인 성령으로 이해되었다. 제 1차 세계 대전 후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은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을 가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학자로는 위기 신학, 신정통주의 신학 등으로 알려진 바르트가 꼽힌다. 바르트는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을 계시라는 근본적인 문제에 초점을 맞추었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계시는 인간이 신에게 이르는 길이 아니라, 신이 인간에게 이르는 방법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러한 신정통주의는 1920년대 후반기에 미국의 사상계에 들어가기 시작했고, 그에 있어서 대표적인 학자로는 라인홀드 니버를 들 수 있다. 그는 복음의 자율성을 옹호하면 서 또한 정치의 자율성도 생각하면서, 신정통주의가 정치적 행동주의의 근거를 제시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 주려고 하였다. 인간은 은총을 통해서 그 자신의 손으로 만든 우상들을 초월할 수 있는 새로운 삶에로 구원 받을 수 있는데, 이러한 은총의 근거는 역사를 넘어서는 절대적 초월자에게 있다. 인간이 하느님만을 믿고 신앙 안에서 살 수 있을때, 인간이 진정한 역사적 존재에로, 새로운 미래로 향한 영원한 개방성에로 구원될 수 있다고 보았다. 제 2차 세계대전의 경험이후 사람들은 폭탄과 집단살해로 전체적인 삶과 가치가 파괴되는 대파국을 초래했던 현실에 대하여 비판할 만한 어떤 가치도 전혀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여기에서 류터는 이러한 시대상황 속에서의 다양한 광기의 형태를 직접 바라보려고 하였던 알베르 까뮈를 언급한다. 까뮈는 초월적인 신과 거룩한 미래의 희망에 대한 신앙의 도약과 함께 자살 역시도 우리가 지닌 모순의 딜레마의 실체를 회피하는 것으로 본다. 그는 결합에 대한 인간의 요구와 현실이 부적당성 사이의 갈등 속에서 인간은 그 자신의 본성 안에 내재하는 가치를 확인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자기 긍정을 통한 모순에 대한 반항적 인간에 관한 연구 속에서 모든 생명의 가치를 포함하는 차원에서 개인의 삶의 가치에 관한 질문을 야기시킨다. 억압에 대항하는 개인의 반항운동에 들어있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주장은 모든 인간의 공동의 인간성을 구상한다. 이런 인간 공동체에 의해서 반항자가 자신에 대한 존경을 요구하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모든 인간이 서 있는 공동의 인간성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항은 인간 사이의 침묵을 파괴시킨다. 즉, 까뮈의 판단은 하늘에 대한 반항은 정의와 질서의 이름으로 불공정한 우주를 만들어낸 창조자를 거부하는 것이다. 형이상학적 반항자는 하느님에 대한 무신론자라기보다는 하나의 모독자이다. 형이상학적 반항자는 정의의 이름으로 불공정한 창조자를 비난하고, 악과 파국과 무분별한 학살을 행하는 우주의 창조자를 심판한다. 까뮈는 인간의 선과 아름다움이 초월에 대한 반항에서 나온다고 선언한다. 인간의 희망은 신의 부재에 대한 견고한 신앙 위에, 그리고 이 세계를 초월해 있는 신적 세계와 신성에 대한 야망에 있다. 은총은 인간의 업적을 상대화시키고 인간의 가변성을 받아들이는 능력이다. 절대자는 인간 한계의 보장자로서 작용한다. 구원받은 인간이란 자신의 존재를 어떤 절대자와도 일치시키지 않으면서 피조된 현실 안에서 살아가는 것을 말하고 있다. 역사의 흐름 속의 하느님은 종교개혁기를 거치면서 묵시사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새 하늘과 새 땅을 부여하시며 하늘로부터 내려와 이 땅의 죄인들을 정결케 하시고, 모든 악을 타파하며 심판자로 오실 하느님을 볼 수 있다. 르네상스에서 자유주의 혁명에 이르는 기간에서는 민주적, 세속적, 과학적 기반 속에서 하느님은 자연의 법칙과 질서 속에서 자기계시를 하시는 분으로 이해되어진다. 하느님은 우주의 원형인 최고의 존재인 것이다. 합리주의사상에 기초해 천년 왕국은 역사 안에서 발생하기 시작했고, 하느님의 은총 또한 역사 안에서 일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자유주의 신학에서 역시 궁극적으로 새로운 사회를 수립하는 역사를 지배하는 하느님의 능력을 본다. 그것은 하느님의 영이 단순히 교회 안에서만 역사하는 분이 아니라 사회 안에서 역시 역사하는 분이 되신다. 하느님은 역사를 최종적 목적에로 인도하시는 내재적인 성령으로 이해된다. 1차 세계 대전 후 그러한 자유주의 신학은 비판을 받고 하느님은 역사를 넘어서는 절대적 초월자로 이해되어진다. 2차 세계대전후 하느님은 절대적 초월자로 이해되어지지만 거기에서의 절대자는 인간 한계의 보장자로 작용한다. 결국 절대자는 인간의 신이 되려는 욕망을 파괴하고 인간을 그의 유한성에로 되돌려 보낸다. 서구 기독교의 문화들이 남성적이고 유일신론적인 하느님의 개념과 하느님을 우주의 창조자로 해석하는 방법이 남성의 여성에 대한 지배가 사회적 그리고 상징적 지구에 대한 지배에 중요한 연결점을 제공해 주고 있다. 또한 이런 지배는 가부장적 문화 안에서 남성을 하늘, 지성 그리고 초월적 영과 연결시키고, 여성은 지구, 물질 그리고 자연과 연결 시키는 경향을 제공하고 있다고 본다. 로즈메리 류터는 이것에 있어서 신화 속에 나타난 하느님(절대자)의 이해를 통해서 설명해 주고 있다. 우주와 신들의 근원인 최초의 어머니로 시작하는 수메르 세계의 초기 이야기들에 기초해 있는 바빌로니아 창조 이야기는 처음에 우주의 몸에서 최초의 모체인 하늘과 땅이 나타나며, 그 다음 최초의 우주적 힘인 물, 공기, 식물 그리고 도시 국가의 지배 계급을 대표하는 인격화된 신과 여신들이 나타난다. 고대의 어머니 여신 티아맷과 마르둑의 이야기에서 티아맷은 마르둑에게 폐한다. 결국 마르둑의 아버지인 에아의 발생 안에서, 종속적인 남성 배우자들을 지닌 여성 지배적인 세계는 종속적인 여성 배우자들을 거느린 남성 지배적 권력 세계로 대체되었다. 마르둑은 유한한 인간 피조물을 강제로 노예화 시키는 반면에, 신들을 자유롭게 쉬게한다. 그는 인간으로 하여금 신들에게 봉사할 책임이 있게 만들어서, 이로 인하여 편하게된 신들은 성전과 궁전에 거하는 한가한 귀족 사회의 불멸의 구성원들이 되어, 들판과 작업장에서 땀 흘리는 농노들의 노동 생산물을 몰수한다. 몰수된 노동에 기초해 있는 여가는 농노와 노예들의 하층 계급으로부터 귀족 계급을 분리시켜서 신과 동일시했다. 헤브루 창조 이야기 안에서 창조자는 우주의 최초의 물질과 공존하면서 그 과정을 조용히 관리한다. 창조자와 최초의 어머니 사이의 갈등이 제거되고, 대신에 어머니는 형상은 없지만 창조자의 명령에 즉시 반응하는 유순한 물질이 되었다. 헤브루 창조 이야기에서 창조자는 6일 동안 빛과 어둠, 하늘과 궁창, 식물, 별, 달, 물고기와 새, 동물과 인간 등 우주를 형성시킨다. 또한 하느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져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에게 고기, 새 그리고 육지 동물을 포함하는 지구에 사는 모든 동물에 대한 지배권이 주어진다. 이야기의 본문들은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남성과 여성의 평등의 여지를 열어 놓지만, 하느님과 아담을 지칭하는 대명사의 남성적 호칭은 남성이 이런 하나님을 집단적으로 적절하게 대표하며, 여성은 이런 집단적인 인간 주권의 혜택을 함께 나누지만 동시에 남성 가장(家長)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플라톤의 창조이야기인 티마이오스는 보이지 않는 영원한 사고의 영역과 보이는 유형의 영역으로 구분한다. 이 두 영역 사이에 창조자는 우주의 장인이었다. 이 이야기의 데미우르고스 역시 무엇인가를 만들어서(making) 창조한다. 그는 공간을 근원적 요소들인 불, 공기, 물 그리고 흙으로 형성하고 이것들로 우주와 더불어 세상의 영역, 세계 영혼을 만든다. 그런 후에 데미우르고스는 약간 희석된 형태의 요소들로써 인간 영혼을 만든다. 인간의 영혼들은 영원한 본질 안에서 하늘의 교육을 받게 되고, 그들이 하늘의 진리를 받으면 남성의 몸으로 구체화된다. 그러나 몸과 그 감각에 대한 통제에 실패 하면, 그 영혼은 다시 육체의 모습을 갖고 다시 태어나 여자가 된다. 여기서 플라톤은 실재를 마음과 몸으로 구분했다. 여기서 마음은 근원적이고 영원하고 선하며, 몸은 이차적이고 파생적이며 악의 근원으로 정신(마음)에 의해 지배되어진다. 정신이 몸을 지배하는 이런 계층구조(hierarchy)는 남성의 여성에 대한, 인간의 동물에 대한 그리고 지배자의 노동자에 대한 계급 계층 구조 안에서 되풀이된다. 서구 기독교는 하느님과 우주의 관계에 대한 이해를 형성시킨 창세기 1장의 설명을 받아들임에 있어서 고대근동, 헤브루, 그리스와 기독교의 개념들을 종합하였다. 기독교 신학은 하느님이 최초의 물질로 우주를 형성할 뿐만 아니라, 이 최초의 물질을 창조하는 분으로 이해했다. 또한 기독교 견해에 있어서 하느님은 완전히 별개의 스스로 있는 영원한 존재로 이해된다. 그렇지만 신과 우주의 연결 고리로서 창조를 하느님의 존재로부터 발생하여 그 존재가 실존 안에 거하는 것으로 본다. 기독교에 있어서 여성과 남성에 대한 관점은 남성을 합리적 영혼으로, 여성을 몸과 열정으로 보고 있지만 각 영혼에 있어서 신성함과 구원에 대한 동일한 능력을 가진 존재로 하느님에 의해 독특하게 창조된 것으로 본다. 신화 속에서 이해된 하느님은 모권사회에서 부권사회로의 이동, 지배와 종속 관계에 있어서의 지배자로 이해된다. 또한 그 속에서의 하느님에 대한 이해를 통하여 지배구조에 대한 정당함을 뒷받침하려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참 이스라엘의 회개와 순종은 하느님의 은총의 수혜자가 되도록 자격을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순종에 대한 요구, 그리고 이스라엘이 그에 상응하는 삶을 살지 못했을 때 백성들의 재난은 그들의 배반과 그에 대한 하느님의 진노의 표시이기도 하다. 하느님은 이 남은 자들을 근본으로 삼아 이스라엘 백성이 새롭고 정화된 모습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교회와 이스라엘 사이에 단절을 초래했던 것은 바로 파기적인 계약원칙으로서의 메시아 예수에 대한 신앙을 고양시킨 것이었다. 육적 이스라엘에 대한 기독교의 이 입장은, 유대교의 가정된 정체성이었던 하느님의 현존으로서, 예수에 대한 신앙을 마지못해 하나의 지속적인 이스라엘의 계약 안에 두려고 했던 기독교의 입장을 구체화시키는 것이었다. 베드로 교회는 첫 번째 미드라쉬가 하느님은 이방인들 속에서 한 백성을 스스로 조성해 내고 있었다는 개념을 포괄하기 위하여 부연되었다. 바울 역시 한 비밀(롬11:25)을 발견했다고 선포함으로써 유대인들의 불신앙에 대한 그러한 종교적 의미와 또한 자신의 백성을 최종적으로 구원하려는 하느님의 계속적인 관심을 시인할 수 있는 자신의 길을 발견하고 있다. 이 비밀에 의하면 유대 종교 공동체는 완악해졌고, 이방인들은 그 결과로써 구원받게 되었다. 이것은 뚜렷이 은혜로운 하느님의 행위다. 교부들은 유대인의 외면성을 완전히 자유스럽게 묘사해서, 유대인들이 기독교 금욕주의와 대조적으로 마치 실제로 육체의 악에 중독되어 있었던 것처럼 생각했다. 유대인들은 모세부터 예수 시대까지 항상 성령을 훼방했던 백성이다. 그들은 한사코 하느님을 용납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과의 계약은 실패로 끝났다. 그것은 마침내 하느님, 예언자들 그리고 메시아를 받아들였던 저 백성을 위한 것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기독교의 승리와 메시아적인 회집에 대한 좌파적 사고는 유대인은 배척당하고 추방당했으며, 반유대인 전승에서 자명한 것은 유대인이 받을 형벌은 영원하며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이다. 유대인의 율법은 그들이 배척당한 표시로 하느님에 의하여 폐기되었지만, 그들은 사악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그 법을 준수하려고 한다. 율법을 반대하는 기독교의 주장에는 모세의 율법은 폐기되었으며, 따라서 기독교인들은 더 이상 그것을 준수할 필요가 없다는 것과 그것은 또한 이미 영적으로 실현되었다는 사상이 포함되어 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자신들은 참 이스라엘로서 하느님의 계약의 백성이었다. 하느님은 그들의 순종과 회개의 요구 속에서 그들에게 시련을 허락하신다. 그렇지만 기독교적, 교부들의 관점에 있어서 유대인들과 하느님의 계약은 파기되어진 것이었다. 그러한 하느님에 의해 유기된 유대인들은 그러한 관점 하에 역사 속에서도 유기되어 질 수 밖에 없음을 로즈메리 류터는 나타내고 있다. 로즈메리 류터의 하느님 이해를 정리하면서, 류터의 폭넓은 시각과 관점을 살펴 볼 수 있었다. 단순히 개인과 관계된 나의 하느님, 우리의 하느님으로 하느님이 구속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역사와 신화, 문화와 삶 속에 존재하시며, 그 하느님이 바로 나 개인의 삶과 연계되어지는 하느님임을 본다. 그와 관련하여 류터는 하느님이 우리의 관계 속에 거하시며, 그 관계 속에서 치유를 낳는다고 한다. 그 관계는 단순히 인간들의 관계가 아닌 역사와 인류, 자연과의 전지구적인 관계라 할 수 있다. 또한 그 속에서의 하느님 이해를 통해서 우리 삶의 사회체제를 구성하고 이해할 수 있으리라 본다. 본 논문은 기존의 로즈메리 류터의 여성생태 신학을 중심으로한 관점과는 달리 하느님 이해라는 시각으로 보았다는 점에 있어서 새로운 이해를 도우리라 생각된다. 하지만 본 논문에 있어서 폭넓고 광범위한 자료 조사에의 미흡함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하느님은 역사와 사회, 문화와 온 삶 속에서 관여하고 계시며, 우리는 그 하느님을 나의 하느님의 시각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의 하느님이며 나의 하느님은 어떠한 분이신가라는 질문을 던져본다.

      • 본 회퍼의 교회론 연구

        김현동 협성대학교 신학대학원 2014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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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회퍼의 교회론 연구 김 현 동 협성대학교 신학대학원 김 영 선 교수 지도 현대인들은 자연과학의 발달과 기술의 실용화로 물질적 퐁요를 향유하고 있다. 이에 따라 물질만능주의의 만연 속에서 감각적 본능과 욕구 충족만을 좇는 현대인들의 삶의 방식은 교회 공동체 구성원들의 사고에 깊숙이 스며들어 복음화보다는 대형화된 교회의 건물이나, 신자들의 숫자에 치중하는 풍조를 만들었다. 이에 따라 신자들 안에서 복음의 참뜻이 흐려지고 공동체성도 잃어가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은 한국 교회로 하여금 자신의 정체성을 바로 세우고 한국 사회의 어두움을 밝히는 빛으로서, 또한 사회의 부패를 막는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길을 찾고, 또한 그 길을 올바로 걸어갈 것을 촉구하고 있다. 이에 따라 한국의 교회는 ‘교회란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묻고, 또한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깊이 성찰해야 한다. 이러한 취지에서 본고는 교회와 세상의 문제에 자신의 삶을 투신하면서 교회의 참된 본질과 새로운 방식의 신앙을 추구하였던 본회퍼의 사상을 통해 오늘날 한국 교회가 직면한 과제와 문제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였다. 본고는 본회퍼의 신학사상을 3시기로 구분하여 고찰하였다. 첫째 교회의 본질에 대하여, 둘째 세상과 성별된 교회에 대하여, 그리고 마지막은 교회와 세상의 관계이다. 이러한 큰 흐름 속에서 다음과 같이 논의를 전개하였다. 제Ⅱ장에서는 본회퍼의 삶과 그의 신학사상의 배경에 대해서 살펴보았고, 제Ⅲ장에서는 본회퍼의 신학적 이론 확립 시대인 신학사상 1시기에 저술된 『성도의 교제』와 『행동의 존재』를 바탕으로 그의 교회 이해의 출발점이었던 그리스도교의 인격 개념과 관계유비 그리고 교회의 본질적 구조에 대해서 다루었다. 제Ⅳ장에서는 본회퍼의 교회투쟁 시대인 신학사상 2시기에 저술된 『나를 따르라』와 『공동생활』을 바탕으로 세상 안에서 세상과 구별(성별)된 교회와 예수추종(제자됨)과 영적훈련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그리고 제Ⅴ장에서는 본회퍼의 정치투쟁 시대인 신학사상 3시기에 저술된 『윤리』와 『옥중서간』을 바탕으로 교회가 어떻게 세상과 관계를 이루고 있는지 그리고 성숙한 세상에서 교회의 위치와 그리스도의 길(타인을 위한 교회)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 존 웨슬레와 존 칼빈의 구원론 비교 연구

        홍승배 협성대학교 신학대학원 2012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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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Ⅰ. 서론 1. 연구 동기와 목적 무릇 신학의 가장 중요한 목적과 역할은 성경 66권을 통하여 구원의 도리를 질서정연하게 체계화하여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믿음의 사람으로 나아가게 만드는데 그 함의가 있겠다. 단순히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말로만이 아닌, 그 믿음에 일치한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결정적인 밑받침이 되어야 한다. 사상(신앙)은 행동을 낳고, 행동은 습관을 낳고, 습관은 인격을 낳고, 인격은 영원한 결과를 거두게 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신학의 중요성을 바로 인식하게 하는 바이다. 한 사람이 신봉하는 신학이론이 그 사람의 실제 신앙생활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지극히 중요한 사실이다. 물론 신학을 배워서 얻은 지식에 따라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신학적 견해에 따라 성경을 해석하고, 가르치고, 설교하는 것이 그대로 신자들의 신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에 바른 신학이론을 적립하여 나아가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일반적으로 신학개통을 로마 카톨릭 신학과 종교개혁으로 일어난 개신교 신학으로 양분하고, 개신교신학은 루터란(Lutheran), 칼빈주의(개혁주의), 웨슬리안으로 구분하는 것이 통례이다. 특히 한국 개신교에 있어서는 칼빈주의(개혁주의)와 웨슬리안 신학이 양대 주류를 이루고 있고, 대체적으로 이 두 신학체계를 바탕으로 교파들이 형성되고 있는 상황이다. 존 웨슬리는 18세기 영국의 부흥 운동의 중심에 있는 자로써, 구원의 핵심개념으로 선행은총을 말하였다. 웨슬리는 완전히 부패한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선행은총을 허락하시고, 이 은총에 반응을 보인 사람은 구원을 얻는 것이고 반응을 보이지 않는 사람은 멸망을 당한다고 말한다. 즉, 이 설득에 반응하여 순종하며 나아가는 자는 구원을 그리고 이 설득에 불응하여 나아가는 자는 멸망에 이른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책임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인간의 반응은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설득에 의하여 반응되어 지는 것이다. 즉, 이 반응의 여부에 의하여 구원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웨슬레가 성화의 열매만을 강조하기도 하며 혹은 인간 구원에 있어서 웨슬레 인간구원이 인간의 노력으로 이룬다는 오해를 받았다. 존 칼빈은 16세기 종교개혁을 완성한 자이며, 신자들의 구원이 예정되어 있다고 주장한 자이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예정된 사람들에게는 믿음을 주셔서 영생에 이르게 하시며(선택), 구원하시기로 예정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강팍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멸망에 이르게(유기) 하신다는 것이다. 또한 한 번 택함을 받은 사람은 결코 구원에서 제외되지 않는다고 한다. 즉, 한번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끝까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이다. 칼빈의 구원론에서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노력 여부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 결정되는 것으로 이해되어진다. 이러한 칼빈의 예정론은 많은 오해와 비판을 받았다. 하나님을 폭군으로 만들고 신자들에게서는 죄책과 책임감을 제거한다는 오해를 받기도 하였으며, 신자들의 고결한 삶을 지향하는 열의를 말살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이러한 오해가 발전하여 칼빈주의자들을 향하여 ‘도덕폐기론자’ 또는 ‘율법폐기론자’라고 부르기까지 하였다. 현재 한국 교회의 가장 큰 흐름 중의 하나는 탈신학화이다. 개신교 선교 100년이 넘은 지금의 한국 교세는 엄청난 성장을 하였다. 그 와중에 한국 교회는 신학적으로 각자의 신학적 색체에 따라 수많은 교파 교회들로 분열되는 부정적인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그런데 한국 교회의 분열은 신학적 논의로 인한 것보다는 거의가 교세 확장과 정치적 이해득실을 위한 이합집산으로 인한 것이다. 그러는 동안 거대한 복음주의적 부흥이 일어났고 이로 인해 더 이상 교회 안에서 신학을 논하는 것이 무의미한 일처럼 되어버리고야 말았다. 이러한 현상이 벌어진 이유는 무엇보다도 교회가 성장을 제일 목적으로 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때에 현재 우리가 믿고 있는 바가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것은 큰 유익이 된다. 막연히 교회라는 일반적인 명칭 아래에서 거하는 것 보다는 우리가 믿고 있는 바가 무엇이며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 이를 바로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교회들이 성장 제일주의로 흐르며 그 신앙생활에 있어서 신학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낮아지면서 오히려 신자들의 삶에 있어서 신앙이 더 힘을 잃어갈 수 있다. 자신이 믿고 있는 바가 무엇이며 교회가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그저 끌려다니기만 하는 신자는 약간의 어려움과 혼란이 와도 쉽게 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민에서 이 논문은 시작한다. 즉, 저마다 교단을 말하는데 교단의 신학은 논하지 않는 한국 교회 안에서 분명한 신학적 진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특히 그 중에서 웨슬리 신학과 칼빈주의 신학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리고 신자들에게 가장 와닫고 신앙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인 구원에 대한 논의를 살펴봄으로 신학의 정

      • 창조론 안에서의 하나님의 성(性) 이해

        서동신 협성대학교 신학대학원 2013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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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 우리는 다원화된 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고 말한다. 또한 한국사회는 현재 다문화 사회로 나아가고 있다. 이와 더불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남녀평등의 문제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남녀평등에 대한 사회운동은 오래 전부터 계속되어 왔고, 실제로 여권신장을 이루었다. 교회 내에서는 어떠한가? 교회 내에서의 여성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게 여겨진다. 하지만 여전히 여성의 활동이나 리더십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많이 있으며, 그 근거를 성서에서 찾기도 한다. - 1 - 가부장적 사회에서 남성은 여성을 지배하기 위한 근거를 종교에서 찾았다. 가부장주의적인 개념적 구성은 전통적으로 남성중심적인 신념, 가치관, 태도 등을 형성하고, 또한 남성이 우월한 존재라는 기준과 가정을 전제하고 있으며, 따라서 남성에 대한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가부장주의적인 개념적 구성에서 ‘하나님-남성-여성’이라는 상징적 위계질서(symbolic hierarchy)가 형성되는 것이다. 우리는 매주 드리는 예배시간 마다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을 외운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우리의 인식 속에 강력하게 주입되는 이미지는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하나님을 왕으로 생각하는 ‘율법주의적 신관(nomistic theism)’과, 하나님을 저 하늘 위에 계시는 분으로 생각하는 ‘초자연주의적 신관(supernatural theism)’이 형성되었다. 이처럼 하나님을 우월한 남성으로 생각하는 신관의 영향으로 여성억압과 남성의 비인간화 현상, 환경 및 생태계의 파괴, 계급주의와 인종차별 등의 부작용이 초래되었다. 그리고 전통적인 하나님 이해가 끼치는 부작용으로 인해서 사회 및 기독교 내부에서도 갱신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고정적인 이해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해에 대한 다양한 시도들을 해야 할 필요성이 요구된다. 사실 성서 안에서의 하나님의 모습은 아버지의 모습에 국한되어 있지 않다. 여성신학자 맥페이그(Sallie McFague)는 하나님을 어머니, 연인, 친구로 부를 수도 있다고 말하였다. 또한 하나님을 영(Spirit)으로 생각하는 신관을 채택해야한다는 신학자들도 등장했다. 전통적인 신학은 오늘날 많은 부작용들을 야기하였고, 이에 대한 비판과 도전들을 받아왔다. 해방신학 (Liberation theology), 여성신학(feminist theology), 흑인신학, 생태신학 (Ecology Theology), 한국의 민중신학(minjung theology)등은 전통적인 신학으로 인해 야기된 악영향에 대한 반작용으로 등장하게 된 신학이다. 그 중에서도 가부장주의적인 신관에 대해서 정면으로 도전을 주었던 신학은 여성신학이었다. 여성신학은 전통신학의 문제점들을 비판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태동하였지만, 여성신학 안에 한계점도 존재한다. 그것은 ‘여성’이라는 개념에 대한 한계점이다. 즉, 여성신학은 여성의 인간으로서의 포괄적인 모습을 제시하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또한 다양한 영향 등에 대한 고려 없이 젠더만을 내세우는 여성신학은 인류 보편의 경험과 관점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다. 예수 바로 믿기는 성경관과 함께 신관(神觀) 바로 세우기에서 출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관과 관련해서 하나님은 남자인가, 여자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 근래 여성신학이 등장하기 전에 기독교인 중 하나님을 여자라고 생각한 사람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아직도 하나님을 여성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말을 하면 그것이 곧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요, 기독교에 대한 파괴공작쯤이라 여기고 있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하나님의 모델 안에서는 남성성뿐만 아니라 여성성도 찾아 볼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여성성은 성서에서 처음으로 하나님이 등장하는 창조기사 안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구약의 창조기사는 역사, 종교, 지리, 문화적 배경 등의 영향을 받았다. 문화는 서로 충돌하게 마련이다. 그러한 충돌의 여파 속에서 다른 문화의 신화가 흡수된다. 오늘날 많은 학자들은 이스라엘의 종교가 주변국들의 종교와 밀접한 연관이 있으며, 구약성서의 창조기사도 이집트, 가나안, 바벨론과 같은 여러 고대 근동의 나라들의 창조기사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창조기사 안에서 하나님의 여성성은 창세기의 두 가지 창조이야기를 비교해봄으로써 유추해 볼 수 있다. ‘창세기 1:1-2:4a’의 창조이야기에서는 온 우주 만물을 계획적으로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남성성을 ‘창세기 2:4b-2:25’의 창조이야기에서는 인간을 창조하시고 함께 계시며 옆에서 보살펴 주시는 하나님의 여성성을 엿볼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의 이름에서도 하나님의 여성성을 찾아볼 수 있다. 성경을 전체적으로 볼 때 하나님을 남성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아무리 남성 중심의 가부장 사회에서 하나님을 남성으로 보는 것이 당연시 되었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남성으로만 볼 수 없었던 고충이 여기 저기 충분히 드러나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은 남성이면서 동시에 여성도 된다. 또 남성․여성임과 동시에 이 둘을 넘

      • 예레미야서의 성전설교에 나타난 신명기적 신학사상에 관한 연구

        안용민 협성대학교 신학대학원 2015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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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요약 성전은 하나님의 현존을 체험하는 장소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인간은 성전에 대한 거룩함과 경건함을 지녀야 한다. 그리고 이는 외적인 모습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정의를 실천하는 모습으로 드러나야 한다. 예레미야는 성전설교(렘 7:1-15)를 통해 외적인 예배 행위에만 치중해 있는 유다인들을 향해 경고의 메시지를 선포하였다. 이러한 메시지를 지니는 예레미야의 성전설교는 계속해서 전승되어 내려오다가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성경 안에 기록‧편집되어 편성되었다. 예레미야서의 산문 형식으로 된 설교들 안에는 신명기 신학을 반영하는 언어들이 많이 나타난다. 이에 따라 본고는 예레미야의 성전설교(렘 7:1-15)를 중심으로 이를 신명기 학파와의 언어‧문체적, 신학적 연관성의 관점에서 고찰하였다. 특별히 본고는 본문에 나타난 신명기 학파의 편집의 흔적을 분류하는 데에 집중하였다. 그럼으로써 예레미야가 선포한 본래의 메시지는 무엇이었는지 살펴보았고, 신명기 학파가 성전성교를 편집한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보았다. 본고는 이러한 연구 목적에 부합하고자 해당 본문에 대한 주석적 접근을 시도하였는데, 연구 내용은 크게 4부분으로 진행되었다. 먼저 제2장에서 신명기 역사서와 신학사상을 살펴봄으로써 본문을 이해하기 위한 준비 작업을 시도하였다. 제3장에서는 본문 주석을 통해 예레미야의 성전설교 본문에 나타난 신명기계 색채와 신학을 띠는 히브리어구를 분류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 결과 본문은 후대의 편집을 거친 결과물이라는 것과 신명기 신학을 반영하는 언어로 구성되었음이 밝혀졌다. 제4장에서는 성전설교 본문과 신명기 학파와의 연관성을 언어와 문체, 신학에 대한 부분으로 나누어 알아보았다. 본문을 구성하고 있는 언어와 문체는 전형적인 신명기 학파의 언어와 문체와 비슷한 양상을 띠었다. 또한 신학사상에 있어서도, 본문의 신학사상은 신명기 학파가 강조하는 신학사상과 어느 정도 일치함을 알 수 있었다. 이상과 같은 연구를 통해, 성전설교 본문은 신명기 신학자에 의하여 편집된 편집물임을 알 수 있었다.

      • 웨슬리의 사회적 성화운동으로서의 디아코니아신학

        김지선 협성대학교 신학대학원 2013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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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논문은 웨슬리의 사회적성화운동으로서의 디아코니아신학라는 제목으로 웨슬리와 감리교신학, 그리고 웨슬리의 목회활동에 자료 속에서 디아코니아적인 요소들은 찾아내고, 그것은 오늘의 감리교회의 디아코니아 목회신학을 찾아내는 것이 본 논문을 목적이다. 본 논문의 첫 부분인 웨슬리의 성화중심 구원론에서 웨슬리신학의 중심이 되는 구원론을 구원의 순서로 보고 그 구원의 순서를 두 편의 웨슬리설교 통해 해석을 하였다. 그리고 구원론의 중심이 되는 성화론을 해석하여 웨슬리가 원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찾아보았다. 논문의 둘째 부분인 웨슬리와 감리교의 사회적 성화운동에서 웨슬리의 사회적 성화운동의 신학적 근거를 제시하고, 사회적 성화운동의 다양한 사역들 정리하고, 그것을 신학적으로 사회운동적으로 평가를 하였다. 논문의 마지막 셋째 부분인 웨슬리의 사회적 성화운동으로서의 디아코니아 신학에서 웨슬리설교와 논문의 나타난 디아코니아적 근거를 찾아보고, 웨슬리의 소그룹 특별히 속회를 통한 디아코니아에서 현대교회에서 하고 있는 속회에 디아코니아의 실천에 대해서 두 가지를 제시하였다. 디아코니아 목회신학에서 디아코니아 목회의 기본이 되는 세 가지를 제시하고, 디아코니아 목회를 하고 있는 인천 하나비전감리교회의사역을 소개하면서 교회의 디아코니아 목회의 목표는 통합이라는 것은 말했고, 디아코니아 목회신학의 실천방법은 넷 가지를 찾았다. 본 논문에서 디아코니아를 교회의 의무이고, 특별히 웨슬리의 신앙의 전통과 신학의 계승하고 있는 한국감리교회는 웨슬리의 사회적 성화운동을 통해 디아코니아적 목회를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 존 웨슬리의 성령론

        정용복 협성대학교 신학대학원 2003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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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웨슬리는 그의 신학의 4대 원천인 성서, 전통, 이성, 체험을 중심으로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자신의 독특한 신학을 형성시켜 나아갔는데, 그의 신학 배경에는 역사신학적인 전통이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웨슬리는 동방교회 전통을 통하여 신인협조설적 구원 질서와 선행은혜의 개념을 배웠고, 어거스틴으로부터 선행은혜와 의의 양면성을, 칼빈으로부터는 율법의 중요성과 함께 규칙적이고 거룩한 신앙생활을 배웠다. 또한 뮨처의 영성과 경건주의, 특히 그의 성화론에서 인간의 자유의지의 강조는 웨슬리의 복음적 신인협조설 형성에 영향을 미쳤고, 영국 성공회 목사로서 웨슬리는 영국 성공회의 성경, 전통, 이성에다 체험을 추가함으로 그의 신학을 체계화시켜 나아갔는데, 특히 그자 영국 성공회와의 연합을 힘쓰면서 보여준 에큐메니칼 정신은 오늘날도 본받을 만하다. 영국 성공회와 로마 천주교회의 신비주의는 거부하지만 성화와 완전 이해에서는 토마스 아 켐피스, 제레미 테일러, 월리엄 로우와 같은 성공회와 천주교의 신비가들의 사상을 받아 들였다. 즉 웨슬리는 영국 성공회와 로마 천주교화로부터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배웠다. 한편 웨슬리는 알미니우스주의로부터 만인속죄론과 계속적인 구원의 필요성을 배웠고, 특히 웨슬리 신학의 기조인 성령론은 마카리우스의 성령론에 깊이 의존하고 있는데, 마카리우스의 톡특한 성령론적 신학과 영성은 웨슬리의 성령론의 핵심인 성화와 완전사상을 정립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며 그의 신학 형성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 중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노력의 협력이 구원을 이루어 나아간다는 신인협조설적 개념은 웨슬리 신학의 중추적의 밑바탕을 이룬다. 웨슬리의 성령 이해는 삼위일체론적이며, 인간의 삶 가운데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성령의 역사(役事)이다. 그는 아다나시우스 신조에 근거해서 성부, 성자, 성령의 관계 속에서의 성령의 존재를 이해한 철저한 삼위일체론자였다. 성령과 나머지 두 위격과의 관계에 관해서는, 서방교회의 전통을 따라 Filioque(아들로부터 나옴)을 받아들이고 있다. 웨슬리는 성부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속죄를 통하여 인간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지만, 인간 심령 속에서의 구원의 역사와 성결의 성취는 성령을 통하여 이루신다고 보았다. 즉, 성령의 본질을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 구원을 성취하시는 분, 성화를 이루시는 영, 믿음을 주시는 분, 전도하게 하시는 분으로 이해하고 있다. 웨슬리가 가장 강조하는 성령의 사역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업적의 성취와 완성의 사역인데, 즉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회복시켜 화해와 구원을 주시며 은혜 속에서 우리가 성숙하도록 인도하시는 사역이었다. 결국 웨슬리가 보는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된 것을 확신하게 하시며,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도록 역사하시며 온전한 구원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웨슬리 신학의 핵심은 그의 구원론에 있는데, 그 구원을 이끌어가는 바탕이 성령론임을 살펴보았다.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하시며, 우리의 모습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도록 역사하신다. 웨슬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표를 성화와 완전의 추구에 두었는데, 그 구원의 질서를 이루어가는 중심에는 항상 성령의 역사가 있었다. 그래서 웨슬리 신학은 성령의 신학이라고도 한다. 그의 성령론의 특징은 동방교회의 전통, 종교개혁자 전통, 그리고 영국 성공회와 로마 천주교회의 신비주의, 알미니우스주의 그리고 특히 동방교부인 마카리우스의 사상 등의 영향을 받았으며 이것들을 종합적이고 창의적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신학으로 만들어 갔다는 점이다. 또한 그의 성령론은 성령의 활동에 의한 구원의 순서를 밝혀주는데, 무엇보다도 선행은혜에 의하여 시작되는 인간의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에게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책임을 강조하는 복음적 신인협조설에 또 다른 특징이 있다. 그리고 그의 성화론은 성화의 과정이 점진적인 개념에 순간적인 요소가 결합되어 종말론적으로 성장하는데, 여기에 성결의 개념으로서의 개인적 성화와 사랑의 개념으로서의 사회적 성화가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통전적 성화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나게 되는데, 이 사랑이야말로 그리스도교의 핵심 교리인 것이다. 웨슬리의 성령론은 그의 목회적, 실천적 신학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데, 그는 무엇보다도 성령의 체험을 참된 종교의 본질로 이해한다. 또한 성령의 역사는 그리스도인의 인격과 삶 전체에 걸쳐 나타나며 구원의 질서를 이루어 가는 중심에 있는데, 그의 신학과 영성의 핵심인 성화와 완전의 교리는 바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성장하는 것, 즉 성령 안에서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으로 본 것이다. '성령의 증거'의 교리는 웨슬리 신학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성령의 직접적인 증거는 하나님의 영이 우리 영에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직접적으로 증거 하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 죽으사 나의 모든 죄를 도말하시고 그로 인해 내가 하나님과 화목 되었다는 사실을 나에게 증거 하는 것을 말한다. 성령의 간접적인 증거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새로운 생활을 현실적으로 나타나게 하는 성령의 역사의 결과를 의미하는데, 이것은 곧 성령의 열매들을 뜻한다고 웨슬리는 말한다. 또한 웨슬리는 성령의 증거를 인간의 환상이나 마귀의 현혹과 구별하기 위해 성령의 직접 증거와 우리 영과의 공동 증거를 중요시하는데, 즉 성령의 직접 증거는 선한 양심의 증거에 의하여 일치를 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웨슬리는 성령의 증거의 진가를 가리는 표준은 성서이며, 성령의 역사와 확증의 올바른 체험의 여부는 성서에 비추어서 재적, 외적 삶 속에서 성결의 열매를 맺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성령의 확증은 직접적인 성령의 영혼에 대한 인상으로서, 하나님의 영이 직접 나에게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 나의 모든 죄는 용서받아 말소되었으며, 이로써 나 자신이 하나님과 화해를 이루었다는 사실을 확증하고 증거 하는 것이고, 성령의 증거는 그 열매와 불가분리의 관계가 있음을 가르쳐주는데, 웨슬리에 의하면 우리가 체험하는 성령의 증거가 참으로 하나님의 음성이었다는 것은 우리의 영혼 속에서 사역하는 성령의 열매에 의하여 알게 된다고 말한다. 성령의 직무는 무엇보다도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며, 또한 우리에게 선한 생각을 갖게 하고 선을 행하게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온전한 구원에 이르게 한다. 웨슬리의 올더스게이트의 성령 체험은 그의 신앙과 신학이 새롭게 정립되는 계기가 되었는데, 웨슬리의 성령론은 이렇게 실존적이면서도 이성적이다. 그것은 인간 을 강요하지 않고 인간의 이성적 판단을 사용하여 설득하는 성령의 역사를 말한다. 따라서 웨슬리의 성령론은 구원의 주도권과 완성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있지만 하나님의 선행 은혜에 대한 믿음과 인간측의 행위(참여)을 부각한 복음적 신인협조설적 구원관으로 나타난다. 성령의 시기에 대하여 웨슬리는 오순절 이전으로 본다. 그리고 웨슬리는 모든 구원의 과정이 다 성령의 사역에 해당되기 때문에 굳이 성령 세례와 성령 충만을 구별하지 않았다. 단지 날마다 죄를 깨닫고 다시 거듭나는 생활을 통하여 완전한 성화를 이루어 가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실천으로 나타난다고 했다. 그리고 웨슬리는 교회를 영혼을 구원하고 양육하는 복음적 선교기구로 이해하며, 또한 교회가 성령과 함께 협력하띠 성령의 지배를 받는 성령 공동체라는 것을 강조한다. 일평생 '한 책의 사람'이었던 웨슬리는 성서에 최종적 권위를 두며 모든 성령 운동의 기준으로 삼았다. 웨슬리는 성서를 규칙적으로 탐독할 것과 특히 배운 것을 것은 실천하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웨슬리는 세례에 관하여 모든 신자가 필수적으로 실행해야 하는 그리스도가 제정하신 은혜의 수단이라고 말하며, 신자는 세례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받아 의인화되며 동시에 거듭남을 체혐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웨슬리는 성령으로 말미암는 내적 세례의 중요성을 더 강조한다. 그래서 세례가 거듭남의 표지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지향하는 그의 독특한 성화신학의 시작점으로 보았다. 웨슬리에게 있어서 성만찬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유지시켜주며,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게 된 영원한 구원에 대한 확증이요 인증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는 믿음과 성령의 역사가 따르지 않는 성만찬은 가치 없다고 말함으로써 은혜의 수단인 성령의 역할을 다시 강조하고 있다.

      • 하인즈 코헛의 자기 개념 연구

        조항윤 협성대학교 신학대학원 2020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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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연구는 하인즈 코헛의 자기 개념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하인즈 코헛은 그의 저서에서 단 한 번도 자기 개념을 명확하게 밝히지 않았다. 또한 그 특성들도 책 여러 곳에 산재하여있다. 그렇기에 하인즈 코헛의 자기 개념을 정확하게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필자는 하인즈 코헛의 자기 개념 연구를 위해서 하인즈 코헛의 시대적 자리를 먼저 연구할 것이다. 여기서는 당시 유럽의 상황과 그의 가정환경, 그리고 그의 생애가 포함된다. 곧, 하인즈 코헛이 유럽에서부터 경험한 반유대주의와 전쟁, 그의 부모 가정에서 경험한 홀로코스트, 그리고 그의 삶에서 경험한 세 번의 박탈 경험인 제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아버지의 부재 경험,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이민해야 했던 경험과 그가 회장을 맡았던 미국정신분석학회에서의 퇴출을 중심으로 다룰 것이다. 코헛의 삶은 마치 미성숙한 자기가 성숙한 자기를 향해 회복되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하인즈 코헛의 자기 개념은 갑작스럽게 생성된 개념이 아니다. 그렇기에 필자는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자아 개념에서 시작하여 안나 프로이트, 하인즈 하트만, 멜라니 클라인, 로널드 페어베언, 도날드 위니캇의 자아 혹은 자기 개념의 발전을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이에 따라 하인즈 코헛이 각 이론가들로부터 받은 영향도 살펴볼 것이다. 하인즈 코헛의 자기 개념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자기대상들과의 관계성 안에서 존재한다. 그렇기에 그가 주장했던 자기대상들인 이상화된 부모 원상, 과대자기, 쌍둥이 자기대상을 살펴봄으로 자기와 자기대상이 갖는 관계성과 결핍에 따른 병리적 영향 등을 살펴볼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제까지 이중 축으로 이해되어온 자기대상들에 대한 이해에서 자기대상을 삼중 축으로 이해함으로 보다 발전적인 자기대상에 대한 이해와 이에 따른 자기의 영향을 살펴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하인즈 코헛의 자기 개념이 가지는 특징과 함께 신학적, 목회상담학적 적용 가능성을 모색할 것이다. 여기서 필자는 코헛의 자기 개념이 응집된 자기와 파편화된 자기 중 부모의 공감적 반응에 따라 어느 한 곳으로 향할 때 가지는 시공간적 특징과 경험의 주체로서 가지는 의미를 서술할 것이다. 또한 신학적, 목회상담학적 적용을 위해 존 웨슬리의 신학과의 비교 및 현재까지 이루어진 하인즈 코헛의 자기심리학과 목회상담학의 간(間)학문적 연구를 살펴볼 것이다. 본 논문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하인즈 코헛의 자기 개념은 발전적 개념으로 그 중심에 자기 성숙에 대한 추구가 있다. 둘째, 하인즈 코헛의 자기 개념은 경험의 주체이자 시공간의 연속성과 응집성을 특징으로 한다. 셋째, 하인즈 코헛의 자기 개념의 신학적, 목회상담학적 적용은 인간에 대한 보다 풍성한 신학적-심리학적 이해를 가져올 수 있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clarify Heinz Kohut's concept of self. Given that Kohut’s concept of self is such a basic assumption of psychology and psychiatry, it may be surprising to learn not only that he never made it clear in his articles and books, but also that instead of offering one succinct definition, his writings about the self’s characteristics are scattered throughout his articles and books, making it difficult to articulate his self-concept easily and accurately. Kohut's life shows that the immature self is restored to the mature self. This dissertation describes Kohut’s concept of self from the context of his historical situation, including the state of Europe at the time, the environment of his family, and his life. Specifically, I focus on the antisemitism and violence of World War I, how his parents’ families experienced the Holocaust, the absence of his father during World War I, his family’s experience of immigration to the United States to flee the Nazis, and his withdrawal from the American Psychoanalytic Association, of which he had been the chairman. Kohut did not form his concept of self suddenly or out of the blue. Because he built on the ideas of other scholars, I begin by describing Sigmund Freud's concept of ego and then consider the ideas of Anna Freud, Heinz Hartmann, Melanie Klein, Ronald Fairbairn, and Donald Winnicott and how they each influenced Kohut. Kohut's concept of self exists not in isolation but in relationship to what he calls selfobjects, the idealized parent imago, the grandiose self, and the twinship self. I examine relationship between self and selfobject and identify the pathological effect of the deficiency in their relationship. In addition, I examine the understanding of the selfobjects not as a bipolar self but as more of an advanced tripolar self, suggesting that the selfobjects influence the self. Finally, I suggest the possibilities of applying Kohut’s concept of self in theological and pastoral counseling. I describe the meaning of Kohut's concept of self as the subject of experience, and its characteristics of time and space when it is directed to one place, either the cohesive self or the fragmented self, depending on the empathetic reaction of parents. In addition, for the application of theological and pastoral counseling, I compare John Wesley's theology with Heinz Kohut's theory, and examine the interdisciplinary studies of Heinz Kohut's self psychology and pastoral counseling. The conclusions of this study are as follows: First, Heinz Kohut's concept of self is a developmental concept and at the center of it is the pursuit of self-maturity. Second, Heinz Kohut's concept of self is characterized by continuity between time and space and cohesion as the subject of experience. Third, the theological and pastoral counseling application of Heinz Kohut's concept of self can foster the more abundant theological-psychological understanding of human beings.

      • Jurgen Moltmann의 삼위일체에 관한 이해

        윤한순 협성대학교 신학대학원 2003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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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본 장을 통하여 지금까지 살펴본, 몰트만의 삼위일체에 대하여 요약하고 평가함으로써 결론을 맺고자 한다. 제 2장에서는 직접적으로 몰트만의 삼위일체에 대하여 살펴보기 전, 먼저 그의 의도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서구 신학의 답변으로부터 삼위일체 하나님을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최고 실체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삼위일체의 위격에 대한 개념을 포기하게 만들고, 절대 주체로의 개념으로부터 삼위일체를 이해하게 된다면 일신론으로 치우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삼위일체를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사랑과 사귐의 관계로 설명해야하며, 이것이야말로 가장 삼위일체적인 방법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또한 기독교의 신학에 대하여 인간의 경험과 실용주의의 중심으로만 이해하는 현 시대 속에서 삼위일체의 경험과 실용성의 가능성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즉 삼위일체 하나님은 십자가의 사건을 통하여 인간의 고난에 함께 동참함으로써 경험된다. 또한 이렇게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을 새롭게 이해함으로써 삭막한 사회로부터 사회적 삼위일체가 실천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삼위일체로서 표현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몰트만은 주장한다. 제 3장에서는 삼위일체를 구성하는 각 위격에 대하여 자세히 살펴보았다. 먼저 몰트만은 아버지 하나님에 대하여 비가부장적으로 말하는 방법에 대하여 소개하였다. 오히려 모성적 아버지의 이미지를 부각시킴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이러한 하나님은 절대적 주권의 하나님의 하나님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이다. 고난까지도 뛰어넘는 그의 사랑은 결국 자신을 제한하며 창조의 사역을 이룬다. 그의 사역은 삼위일체 안에서 아들과 성령과 함께 이루어진다. 두 번째로 예수는 아버지의 아들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단 하나의', '태어난' 영원한 아들이다. 그리고 여러 형제와 자매들 중의 '장자'로서 우리와 연대하는 형제이다. 이러한 의미로부터, 예수의 성육신이야알로 삼위일체되신 하나님의 완전한 자기 전달이라고 몰트만은 평가한다. 왜냐하면 자신을 제한함으로서 하나님은 인간 존재를 받아들이며, 인간은 성육신한 예수를 통하여 그의 거하심 가운데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이 사건을 눈여겨봐야만 했다. 왜냐하면 예수의 성육신의 절정 '십자가의 죽음'이야말로 몰트만은 삼위일체의 결정적인 장소로 여겼기 때문이다.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아들의 희생으로서 가능하지만 그 혼자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아니다. 아버지 역시 아들의 죽음을 경험함으로서 자신의 신성을 포기하는 고통을 경험한다. 또한 성령은 아들과 아버지가 분리되는 고통을 경험하고, 그러나 그를 통하여 십자가 위에서 아들과 아버지는 하나가 된다. 따라서 우리는 십자가의 사건이야말로 삼위일체적인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쯤에서 우리는 집고 넘어가야할 몇 가지의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예수가 죽어야만 하는 이유에 대하여, 또한 십자가의 사건이 예수의 수동적인 순종인지 아니면 능동적인 죽음인지에 대하여,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수의 부활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들이다. 먼저 예수의 죽음에 관한 의미에 대하여 몰트만은 두 가지로 해석한다. 하나는 하나님만이 가능한 속죄로서, 또 하나는 죽음까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연대로서 이해되고 있다. 또한 그는 로마서 8장 32절을 근거로 예수의 죽음을 수동적인 순종-그러나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을 내어주는 고통을 경험한다-으로서, 그리고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근거로 예수의 능동적인 희생으로서의 죽음이라고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예수의 부활에 대하여 몰트만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이해한다. 예수는 부활함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의 형태에로 변화되고, 동시에 이것은 우리를 위한, 많은 사람을 위한 부활이 된다. 또한 아들은 성령을 파송함으로서 그의 본격적인 활동으로서의 삼위일체적 사귐에 대하여 예고한다. 세 번째로, 성령의 활동에 대하여 고찰하기 전, 먼저 성령의 주체성을 분명히 하였다. 이유는 그동안의 기독교 신학은 성령을 단순히 능력이라든지 힘으로서만 간주하여 위격으로서의 위치가 불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런다음에 성령의 어머니 같은 성격에 대하여 살펴본 후에야 비로소 몰트만이 의도한 성령의 삼위일체적 사귐에 대하여 파악할 수 있었다. 그는 성령의 본질을 '사귐'이라고 소개한다. 따라서 성령의 사귐은 신적 위격들의 관계로서, 서로의 안에서 서로를 위하여 존재하게 만든다. 또한 이러한 삼위일체의 개방을 통하여 인류는 하나님 안으로, 하나님은 인류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삼위일체의 구성을 이해하기 위하여 각 위격의 위치를 살펴보았던 제 3장과는 반대로 제 4장에서는 내재적 삼위일체에 대한 관계와 단일성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하나님은 각 위격의 독자성과 함께 서로 구분되지만 결코 세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들의 위격으로 말미암아 서로 상대방 안에서 하나가 되는 관계가 동시에 생겨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가 몰트만에게 주목해야 할 것은, 관계를 통한 삼위일체의 사귐속에서 그들의 위격성은 더욱 분명하게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사랑을 나누며, 내주하고, 침투함으로서 삼위일체 하나님은 일치하게 된다. 신적 본질로서, 십자가의 사건을 중심으로, 그리고 연대함으로서 상호 보충되며, 이러한 단일성을 통하여 결코 흡수되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명확히 구분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제 5장은 삼위일체의 실현을 기대하며 몰트만의 실천에 대한 방향에 대하여 고찰해 보았다. 먼저 그는 정치와 교회가 공존하는 오늘날 삼위일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다. 즉, 사회에 드러난 불행이 직면하여 고통을 겪고 또 그에 대하여 투쟁하는 그리스도인을 위하여 정치신학은 삼위일체적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삼위일체를 통한 자기 개방과 사귐으로부터의 연합이 이루어 질 때 비로소 우리의 시대는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될 것이라고 그는 희망한다. 두 번째로 몰트만은 교회와 인간의 삶과 실천에 대한 삼위일체의 또 다른 방향으로서 형제/자매 공동체의 실현을 기대한다. 교회의 중심이 되었던 직무행위와 계급제도를 비판하며, 지배나 종속의 질서가 없는 동등한, 삼위일체의 영원한 사랑과 상호간의 사귐이 실천되는 형제/자매 공동체를 제안한다. 마지막으로 그는 우리의 삶과 실천에 대한 삼위일체의 방향을 '자유'에 대한 개념으로부터 이끌었다.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으로부터의 인간의 자유는 주권을 획득하는 의미가 아닌, 또한 사귐을 지향하며 사랑을 통한 인간의 연합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미래를 지향한다. 그는 장차 올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는 기독교적 미래를 희망하는 것이야말로 삼위일체를 통한 진정한 자유라고 주장한다. 즉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에 대한 참여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 되는, 예수의 형제와 자매가 되는, 그리고 성령의 친구가 되는 자유를 얻게 될 것이다. 몰트만의 삼위일체론의 특징은 혼잡했던 전통의 삼위일체론을 사랑과 사귐의 공동체적 삼위일체로 재정립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버지 하나님, 아들 예수, 성령은 주체성을 가진 신적 위격으로서 서로 구분되지만, 서로의 존재에 참여하여 한 몸을 이루고 창조와 구원, 그리고 사귐의 모든 사역들에 함께 동참하신다. 아버지 하나님은 아들 예수와 성령을 통하여 창조의 사역을 이루신다. 아들 예수는 성령 안에서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십자가의 구원의 사역을 이루신다. 성령은 자신의 존재 안에 깊이 참여되어 있는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예수와 함께 역사 속에서 사귐의 사역을 이루신다.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은 사랑 안에서 자신을 개방하며 서로의 존재에 참여하고 삶을 함께 나누는 관계가 된다. 따라서 각 위격은 자신의 고유한 개체성을 유지하는 동시에 사회성 안에 있으며, 사회성 안에 있으면서도 각자의 개체성은 뚜렷이 구분되고 유지된다. 그러나 몰트만의 삼위일체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만약 그랬더라면 그의 신학 역시 전통적 신학과 다를 게 없었을 것이다. 삼위일체의 본질은 영원한 사랑과 깊은 사귐이다. 때문에 상위일체 하나님은 인간의 삶 속에 참여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은 그의 본질을 따라 사랑과 사귐으로서 서로를 연대하고 연합한다. 이러한 경험은 곧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에 상응하다. 따라서 교회와 신학이 우리를 삼위일체 하나님에게로 이끈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곧 실현될 것이다. 딸서 그의 삼위일체론은 오늘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가까이 갈 수 있는 신학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이상에서 파악된 삼위일체로부터 몰트만을 어떻게 평가해야 될까? 아무래도 먼저 그의 공헌이라고 꼽을 수 있는 것은 가장 이론적인 삼위일체론을 실천의 문제에 대하여 조화와 연결시켰다는 것이다. 필자도 한 때는 조직신학과 실천의 괴리를 고민했었다. 그러나 몰트만은 기독교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삼위일체론을 실천과 무관했던 전통의 신학과는 다른, 실천의 기반을 마련했다는 데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는 실천과 무관하여 사변성에 빠질 수 있는 이론 신학의 약점과 현대 기능사회의 실용주의의 포로로 행동만 강조하여 허무주의에 빠질 수 있는 실천 신앙의 약점을 극복하였다. 또한 그는 삼위일체론을 전개하면서 일신론적 개념이라든지, 교회의 계급주의, 가부장적인 흔적 등 삼위일체론을 희미하게 만드는 기독교의 전통을 비판하였다. 하지만 그것을 이단처럼 매장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을 존중했기에 성서의 본문을 철저하게 살폈다. 따라서 그의 삼위일체론은 기독교를 비판적으로 되살렸고, 그렇기 때문에 가장 기독교적이라고 볼 수 있다. 몰트만은 하나의 추상적 신학 체계로서 삼위일체를 쓰지 않았다. 그가 삼위일체를 집필하는 목적은 '신학을 위한 기여'라고 말한다. 따라서 그는 어디까지나 이 시대의 문제들과 관련하여 그의 삼위일체를 발전시켜 나가려고 애썼다고 생각한다. 또한 그의 삼위일체는 단지 추상적인 이론들을 나열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약한 자들의 편에 서서 세상의 불의를 지적하고 그 속에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이 실현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이러한 그의 신학은 이미 신학의 새로운 장을 열었으며, 앞으로도 세계의 신학에 깊은 영향을 줄 것이라고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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