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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宋∙明名臣言行錄의 간행과 조선의 編刊 양상

        묘개열 韓國學中央硏究院 韓國學大學院 2022 국내박사

        RANK : 1839

        이 논문은 다룬 宋·明名臣言行錄 및 조선시대의 학자들이 영향을 받아서 편찬한 여러 명신언행록을 중심으로, 名臣言行錄에 대한 서지학적 분석을 시도한 것이다. 본 연구에서는 아래와 같은 사항을 고찰했다. 『宋名臣言行錄』이 발행된 후에 계속 간행되었다. 따라서 판본의 종류가 다양하여, 매우 복잡한 양상을 보인다. 본고에서는 宋淳熙本, 元本, 明初建昌郡齋本, 明正德十三年(1518)建陽書肆刻本, 明張鰲山刻本, 明鄭汝璧校修本, 明萬曆三十五年(1607)刻本, 崇禎十一年(1638)刻本, 清順治辛丑(1661)閩縣林雲銘刻本, 清四庫全書本, 清道光元年(1821)歙績學堂洪氏刻本, 道光十年(1830)南豐劉斯嵋刻本 등을 조사하였다. 각 판본의 구성 항목과 원문 텍스트를 분석하여 그동안 간행된 『宋名臣言行錄』을 크게 宋淳熙本 계통, 宋重刊本 계통, 元本 계통, 明鄭汝璧校修本 계통 등으로 나누고, 同一한 계통에 각 판본의 간행 선후 관계를 밝혀냈다. 명대에 이르러서는 『송명신언행록』의 영향을 받아 本朝 인물이 수록되어 있는 언행록이 다수 편찬되었다. 彭韶의 『名臣錄贊』, 楊廉의 『皇明名臣言行錄』과 『皇明理學名臣言行錄』, 尹直의 『皇明名臣言行通錄』, 徐咸의 『近代名臣言行錄』, 沈應魁의 『皇朝名臣言行錄新編』, 李廷機의 『皇明名臣言行錄』, 汪國楠의 『皇朝名臣言行錄新編』,徐開任의 『明名臣言行錄』 등이 있다. 각 판본에 실려 있는 서문과 원문 텍스트를 비교·분석함으로써 명명신언해록들 간의 편찬·간행 관계를 밝혔다. 또 이런 저작들의 시간적 변화 양상도 살펴보았다. 편찬시기에 따라 수록된 인물이 많아진 것, 수록된 인물의 시기 범위가 확장된 것, 수록된 문신의 품계 범위가 확대되고 수록된 인물의 신분도 다양해진 것이다. 명신언행록이 조선에 수용된 시기는 1434년 이전이며, 주로 韓明澮, 許篈 등 문신을 통해 조선에 수용되었다. 조사를 시행한 결과 한국에 현존하는 중국본 명신언행록의 수가 적지 않고 이 가운데 귀중본도 있다. 이는 해당 중국 소장본의 逸失이나 잔결을 보완하는 데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조선시대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에 이 책은 중시되었고 여러 번 간행되었다. 현존 『송명신언행록』의 경우 크게 금속활자본, 목활자본, 목판본으로 나뉜다. 이 가운데 금속활자본은 庚子字本, 乙亥字本, 甲辰字本, 戊申字本 등이 있고, 목활자본은 12행19자본(秋香堂木活字本)과 10행20자본 등이 있으며, 목판본은 11행21자본(경자자본 번각본), 10행20자본①, 10행20자본②(10행20자 목활자본 번각본), 12행22~23자본 등이 있다. 위 판본들의 원문 텍스트와 구성 항목을 비교 분석하여 두 계통으로 나눌 수 있는데 元本 계통과 明本(崇禎十一年(1638)刻本)계통이다. 다만 조선에서 중국본을 저본으로 중간했을 때에 그대로 중간한 것은 아니며, 누락된 인물 전기를 보완하거나 체제를 바꾸거나 卷首題의 가다듬는 등의 수정을 가하여 간행한 것이 많다. 이 외에 『송명신언행록』의 抄略本도 확인되었다. 현존 抄本은 李衡이 교정하고 李幼武가 속편한 판본에 따라 필사한 것이지만, 원문을 그대로 全寫한 것은 아니고 내용적으로 변동이 있다. 이런 책은 주로 인물을 增刪하고 또는 전기 내용을 增刪하거나 각색한 것이다. 조선에서 간행한 『명명신언행록』의 경우, 목판본만 확인되었다. 내용적으로는 중국본과 일치하며 모두 楊廉本系에 속하고 있어서 큰 변화 없이 그대로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조선 문인이나 학자들은 송·명명신언행록의 영향을 받아서 명신언행록을 편찬하기도 했다. 조선에 편찬된 명신언행록 가운데 조선의 명신을 수록한 것도 있고 중국 명신을 수록한 것도 있다. 『명명신언행록』 보다는 『송명신언행록』의 영향이 더 크게 적용하였고 해당 저작은 대부분이 『송명신언행록』의 구성 체제 및 기술 방법과 더 유사함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가운데 체제와 기술 방법이 모두 유사한 것도 있고 기술 방법만 유사할 뿐 체제는 다른 것도 있는데 특히 후자가 더 많다. 이를 통해 중국의 명신언행록은 조선에서 수용하고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명신언행록은 명신의 언행과 행실을 기록하여 봉건 사회에 立身·事君에 중요한 참고 가치가 있으며, 현대사회에 명신 사적을 연구할 때 필요한 자료이다. 또 朱熹가 창안한 言行錄體는 다른 문헌을 輯錄하는 방식으로 책의 객관성을 높이고, 인용문헌이 많아 현재는 佚失된 문헌을 輯佚하는 데에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뿐만 아니라 다양한 인본은 한·중 양국의 서적문화교류사, 출판·인쇄문화사에도 의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本論文以宋名臣言行錄、明名臣言行錄及受其二者影響編纂的一系列朝鮮名臣言行錄為中心, 對‘名臣言行錄’進行了書誌學分析, 本文要點如下: 『宋名臣言行錄』經發行後陸續被翻刻, 因此版本種類繁多。經筆者調查發現, 現存的『宋名臣言行錄』有宋淳熙間刻本, 元刻本, 明初建昌郡齋本, 明正德十三年(1518)建陽書肆刻本, 明張鰲山刻本, 明萬三十五年(1607)刻本, 崇禎十一年(1638)刻本, 清順治辛丑(1661)閩縣林雲銘刻本, 清四庫全書本, 清道光元年(1821)歙績學堂洪氏刻本, 道光十年(1830)南豐劉斯嵋刻本等。本文對各版本的構成項目及原文進行了比較分析, 將上所調查的版本分為了宋淳熙本系統, 宋重刊本系統, 元本系統, 正德十三年(1518)建陽書肆刻本系統, 明張鰲山刻本系統等, 並整理了所屬同一系統各版本的刊行先後關係。此外, 還有王海賓和孫赫男的論文曾提到的‘新纂本’, 為異於上述版本的另一系統, 本文對此未作贅述。 明朝受『宋名臣言行錄』的影響, 編纂了很多本朝的名臣言行錄, 相關著作有彭韶的『名臣錄贊』, 楊廉的『皇明名臣言行錄』和『皇明理學名臣言行錄』, 尹直的『皇明名臣言行通錄』, 徐咸的『近代名臣言行錄』和『皇明名臣言行錄』, 沈應魁的『皇朝名臣言行錄新編』, 李廷機的『皇明名臣言行錄』, 汪國楠的『皇朝名臣言行錄新編』, 徐開任的『明名臣言行錄』等。本文對各版本中所收錄的序文和跋文以及原文文本進行了比較分析, 闡明了各版本間的編纂刊行關係。同時發現了明朝所編纂的各版本言行錄隨著時間的推移, 收錄的人物越來越多, 收錄人物的時間跨度越來越大, 相關名臣的官品範圍變廣, 人物的身份也更加多樣。 名臣言行錄于1434年之前傳入朝鮮王朝, 主要是通過韓明澮、許篈等出使中國的使臣流入。據調查, 韓國現存不少中國本名臣言行錄, 而且其中有部分貴重本, 可用於彌補中國收藏本的佚失或殘缺。 根據朝鮮時代的記錄, 名臣言行錄在當時很受重視, 並多次被刊行流通。『宋名臣言行錄』有金屬活字本, 木活字本, 木板本。其中金屬活字本分為庚子字本, 乙亥字本, 甲辰字本, 戊申字本。木活字本分為12行19字本(秋香堂木活字本)和10行20字本。木板本分為11行21字本(庚子字本翻刻本), 10行20字本①, 10行20字本②(10行20字木活字本翻刻本), 12行22~23字本。通過對以上版本構成項目和原文文本的分析, 筆者將以上版本分為了兩個系統, 元本系統和明本(崇禎十一年(1638)刻本)系統。不過朝鮮王朝在以中國本為底本進行重刊的時候, 並不是完全依照原本, 比如, 補充了中國底本中遺落的傳記, 改變別集部分的構成, 使卷首題統一等。此外, 朝鮮王朝刊行的『明名臣言行錄』現存本皆為木板本, 內容及結構構成上與中國本基本一致, 為楊廉所編版本。 此外, 韓國還現存不少『言行錄抄』, 底本為李衡校正李幼武續編之版本。不過抄本並不是按照其原文進行抄錄。內容方面有很多變動, 主要表現為對人物的增刪, 還有對傳記內容的增、刪、改等。 與此同時, 朝鮮時期的文人受此影響也編纂了名臣言行錄。朝鮮文人編纂的名臣言行錄中, 大部分收錄的是其本國的人物, 也有的收錄了中國人物。大部分此類著作在構成結構和記述方式上與『宋名臣言行錄』更為相似。所以, 相對於『明名臣言行錄』而言, 受『宋名臣言行錄』的影響更大一些。其中, 有構成結構和記述方式都與『宋名臣言行錄』相似的, 也有只在記述方式上相似構成結構相異的。由此可知, 中國的名臣言行錄不僅被朝鮮時期的文人學者所接受, 還被充分活用到本國的人物傳記編纂中。 名臣言行錄記載著名臣的嘉言懿行, 封建社會時期, 可作為立身侍君的法典, 現代社會, 則成為理解當時人物及社會的重要參考資料。朱熹初創的言行錄體以文獻輯錄的方式保證了傳記的客觀性。由於其中直接引用了各種文獻, 在佚失文獻的輯佚上也具有重要意義。並且由於印本豐富且多樣, 在中朝兩國的書籍文化交流史、出版·印刷文化史上也留下了濃墨重彩的一筆。

      • 조선에 전래된 武英殿聚珍版書의 서지적 분석

        苗凱悅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2018 국내박사

        RANK : 1839

        武英殿建於明朝樂年間(1403-1424),曾為政治權利的中心地。清朝康熙年間 (1662-1722)設立武英殿書局。康熙四十年(1701)以後,武英殿開始大量發行書籍。1772年將《永樂大典》的佚書,各省的採集本,武英殿刊本,匯為《四庫全書》。由於工程 量浩大久費時日,便從較為稀缺的宋元版本和《永樂大典》的佚書開始撰修。1773~1803 年共刊印了138種書籍,其中木版本4種,木活字本134種。這138種書稱為《武英殿聚珍 版書》。《武英殿聚珍版書》是清內府規模最大的一次木活字印刷活動。在中國木活字印 刷史和典籍史上具有重要意義。武英殿聚珍版書刊印完成後被發往東南五省并允許地方 翻刻,翻刻本為木版本。翻刻本與殿本在樣式上非常相似,也稱為《武英殿聚珍版書》。 由於時代的動蕩與變遷,現存的《武英殿聚珍版書》多為散本。國內足本該叢書有多少 部,並沒有具體的統計。此外,韓國,日本,美國等國家也有不同數量的相關書本。 本論文的主要研究對象為韓國現存的《武英殿聚珍版書》,研究目的在於調查韓國現 存該叢書的數量及內容,分析相關目錄,了解叢書的購買時期和東傳的過程,以及明確該叢書對韓國產生的影響和意義。 韓國該叢書的收藏機構主要集中在韓國學中央研究院藏書閣,首爾大學奎章閣韓國 學研究院,韓國國立中央圖書館,東亞大學圖書館,全南大學圖書館,高麗大學圖書 館。韓國的現存本按版本分為聚珍版和翻刻木版本,其中以木版本居多,聚珍本主要藏於首爾大學奎章閣韓國學研究院。從內容來看,集部書比經史子各部的書數量上略少,並且現存本多為頁數相對較少的著作,袖珍本也較多。這主要受印刷效率,製作成本, 便攜性等方面的影響。此外,韓國還藏有兩本相關目錄,用途分別為購書清單和點檢用。 韓國現存本的購入時間上限為1774~1781之間。18世紀的朝鮮重視文化,這無疑 是該叢書購入過程中的的催化劑。1773年朝鮮使臣嚴璹與中國文人關於《四庫全書》筆 談記錄可視為《武英殿聚珍版書》話題的開始。朝鮮對《四庫全書》一直具有濃厚的興趣, 正祖曾下令購買《四庫全書》,此後林濟遠, 李鼎運, 沈能翼等人不斷向朝鮮報告《四庫全書》的消息。此外,李德懋也向中國文人潘庭筠尋求過《武英殿聚珍版書》的目錄。 《武英殿聚珍版書》流傳到朝鮮后產生了重要影響。正祖下曾令按《武英殿聚珍版程 式》中的木活字製作方法製作生生字和整理字。此外,還有私人製作的金陵聚珍字等。與此同時韓國現存的兩本目錄也具有重要的意義,並且得益于該叢書的朝鮮東傳韓國的 藏書也更加豐富。 武英殿은 明代 永樂年間(1403-1424)에 설립되어 한 때 정치권력의 중심이 되었던 기관이다. 清代 康熙年間(1662-1722)에 武英殿書局이 설립되어 문헌 간행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康熙四十年(1701)이후, 무영전에서 대량의 도서를 간인하기 시작 하였다. 乾隆三十七年(1772)에 『永樂大典』의 佚書, 각 省의 採集本, 무영전 간본을 수집하여 『四庫全書』를 편찬했다. 『사고전서』는 양이 방대해서 모두 撰修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므로, 판본이 드문 판본과 『영락대전』의 일서부터 먼저 간인하였다. 간인 작업은 乾隆三十八年(1773)에 시작하여 嘉慶八年(1803)까지 138종의 책(목판본 4종, 목활자본 134종)을 인출하게 되었다. 이 138종 책을 『무영전취진판서』라고 한다. 『무영전취진판서』는 淸內府에서 시행한 목활자 인쇄 중 규모가 제일 큰 인쇄활동의 결과물이다. 중국 목활자 인쇄사와 典籍 보존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후 중국 일부 지방의 출판사에서도 번각하였으며, 모두 목판으로 인쇄했다. 번각본 총서와 무영전본 총서의 양식이 많이 닮아서 내부의 인쇄분이 內聚珍本, 번각인쇄본은 外聚珍本이라고 한다. 하지만 淸代의 멸망과 사회의 변동 때문에 『무영전취진판서』가 많이 흩어졌다. 지금까지 완질의 총서가 얼마나 현존하는지 파악하기 어렵다. 『무영전취진판서』는 중국 외에도 한국, 미국, 일본 등 몇 몇 나라에서 확인된다. 본 연구는 한국에 현존하는 『무영전취진판서』를 대상으로 삼았다. 現存本의 내용과 수량 및 판본을 조사하고, 『무영전취진판서』 관련 서목의 역할과 총서의 구입 시기 및 전래 경로를 규명하며, 이 총서가 한국에 끼친 영향과 의의를 밝히는 데에 목적이 있다. 한국에 『무영전취진판서』의 주요 소장처로 확인된 곳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국립중앙도서관, 동아대학교 한림도서관, 전남대학교 중앙도서관,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이다. 현존본을 판본으로 분류하면 취진본과 목판본으로 나뉜다. 또 취진본은 주로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經·史·子·集部의 책은 다 있고, 集部 책의 수량은 經·史· 子 각 部의 책보다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또 現存本은 모두 冊數가 상대적으로 적은 책이고, 奎璧本도 많이 있다. 이유는 인쇄의 효율성, 제작비용, 편의성 등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이 외에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과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에는 『무영전취진판서』 관련 서목이 두 종 있다는 것을 확인되었다. 두 서목의 역할은 각각 購書單子와 點檢用이다. 한국에 현존하고 있는 『무영전취진판서』의 구입 시기 상한은 1774~1781 사이이 다. 18세기, 문화를 중시하는 사회배경은 『무영전취진판서』 구입하는 데의 촉매 역할을 했다. 1773년, 조선 사신 嚴璹가 중국문인과 한 『사고전서』 관련 筆談 기록은 조선 『무영전취진판서』 얘기의 시작으로 이후에도 조선은 『사고전서』에 계속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또 정조는 명을 내려 『사고전서』를 사게 했고, 林濟遠, 李鼎運, 沈能翼 등이 계속 『사고전서』의 편찬 소식을 전했다. 李德懋도 중국 문인 潘庭筠에게 해당 서목을 구한 적이 있었다. 『무영전취진판서』의 조선 전래 후에 『武英殿聚珍版程式』의 활자제작방식이 生生 字와 整理字의 제작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이 외에 개인이 활자를 제작할때 취진이라는 용어가 수용되기도 하였다. 또 장서각에 소장된 서목은 구서단자로써그 당시에 수입책의 가격을 파악하는 데에 의미가 있다. 규장각 장본은 총서본의 판본, 완질인지 낙장본이지 확인하는 데에 가치가 있다. 그리고 『무영전취진판서』 의구입으로 인해 한국의 중국저술의 장서가 풍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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