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17세기 명청교체라는 동아시아 질서의 격변 속에서 入關前 後金‧淸의 漢人 支配政策을 살펴보았다. 본고에서 의미하는 한인은 당시 여진인이 그들의 언어로 ‘니칸[nikan]’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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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 : 강원대학교 대학원, 2026
2026
한국어
강원특별자치도
170 ; 26 cm
지도교수: 남의현
I804:42002-00000003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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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17세기 명청교체라는 동아시아 질서의 격변 속에서 入關前 後金‧淸의 漢人 支配政策을 살펴보았다. 본고에서 의미하는 한인은 당시 여진인이 그들의 언어로 ‘니칸[nikan]’이라 부르던 자들을 의미하며, ‘민족성(ethnicity)’이란 측면에서 언어와 문화 등이 여진인과 서로 구분되는 이질적인 존재였다.
기존 연구에서는 입관전 한인 정책을 중원 정복의 준비 단계로 간주하거나, 만주인의 국가 형성 과정을 ‘漢化’ 중심의 서사로 설명했다. 하지만 이런 결과론적인 해석은 당시 후금이 처했던 고립된 국제정세와 요동이라는 제한된 공간에서의 생존 조건, 전쟁과 통치가 교착된 현실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한다. 이에 본 연구에서는 만주인 군주가 처음부터 중원 정복과 한인 지배라는 ‘大業’을 전제로 한인 정책을 추진했다는 시각을 지양하고, 요동을 기반으로 운영되는 새로운 국가가 살아남기 위한 노력의 하나로서 입관전 후금‧청의 한인 지배정책을 살펴보았다.
위와 같은 연구를 수행하기 위해 누르하치의 천명 시기와 홍타이지 통치 전반기인 천총 시기의 변화상에 특히 주목해 당시 후금의 한인 민호, 한인 관원, 한인 군대를 어떻게 편성하고 활용했는지에 관한 모습을 각 사례별로 분석하였다.
누르하치 시기 후금은 요동 점령 직후 전쟁으로 파괴된 경제 기반을 확보하고 그들의 통치를 정착시키기 위해 ‘計丁授田’과 ‘武官制’를 도입했다. 또한, ‘都堂’을 통해 정복지의 온갖 실무를 총괄하고 감독하게 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시도는 후금이 한인을 강제 이주시키고 요동으로 옮겨 온 여진인의 생활까지 부양하도록 하면서 한인의 이탈과 저항이 확산되었다. 이에 누르하치는 강경책으로 선회하며 요동 한인을 대대적으로 제거하고, 살아남은 자들은 새로 설치된 톡소에 편입시켜 ‘아하(aha)’로 전락시켰다. 이는 후금의 한인 지배방식의 변화를 의미했지만 해당 조치를 내린 누르하치가 얼마 되지 않아 사망했기 때문에 그 효과를 판별하기는 어렵다.
홍타이지 시기에는 누르하치 말기의 위기를 수습하고 국가의 운영 기반을 안정화하기 위한 정책 조정이 본격화되었다. 그는 한인 민호와 관련해 과거 ‘톡소(tokso)’에 속했던 한인 일부를 민호로 전환‧편성하고, 전쟁을 통해 확보한 인원 중 일부를 민호로 충당했다. 또한, 도인의 이탈을 예방하고 타국으로 도망간 자들의 쇄환을 요구하였다. 한편 후금으로 복귀한 자들에게는 정착에 필요한 물품을 지원해주는 모습을 보였다. 이 과정에서 ‘恩養’은 군주의 보살핌과 알반 수취를 연결하는 논리로 활용되어 후금의 통치 정당화와 경제적 기반을 확충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한인 관원에 대해서는 舊漢官과 新漢官에 대한 대우를 달리하면서 충분한 시간을 두고 그들을 살펴보면서 후금의 관원으로 만들어나갔다. 이와 함께 書房의 확대‧개편, 六部의 설치 등을 통해 문관 계열의 한인 관원이 공적을 쌓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한인 관원들이 올린 ‘上言’에 대해서는 당시 후금의 상황에 적합한 내용만 선택적으로 수용했으며, 비현실적이거나 기존 질서에 도전하는 제안은 즉각 반박되었다. 한인 관원이 저지른 범죄와 관련해 그 의도와 경중을 따져 차등적인 처벌을 내리면서 그들에 대한 통제의 끈을 놓지 않았다.
漢軍의 재건과 팔기 시스템 내의 편입은 후금의 군사 역량을 강화시켰다. 홍타이지는 누르하치 말기 사실상 해체되었던 한군을 화포 전력과 결합한 부대로 재조직하고, 大凌河 전투 이후 그 효용성을 인정해 병력과 무기를 적극 충원해주었다. 이후 숭덕연간에 들어서 3차례의 ‘구사(gūsa)’ 분할 개편을 통해 한군을 팔기만주‧몽고와 대응이 가능한 조직 체계를 만들어나갔다. 당시 구사의 변화가 추진되었던 이유는 군사적 기능뿐만 아니라 인구 관리의 요구가 결합되어 전개되었음을 확인하였다.
결론적으로 입관전 후금‧청의 한인 지배정책은 초반의 위기를 극복하고 효과적으로 전개되면서 후금에서 大淸으로의 전환, 명과의 대등한 국가로의 선언 등이 가능했던 기반으로 작용했다. 특히 천총연간 홍타이지가 추진한 한인 민호, 한인 관원, 한인 군대에 관한 정책 변화는 누르하치 말기 대내외적 요인으로 발생한 후금의 위기를 종식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즉, 누르하치의 후금 건국과 요동 진출 이후 만주인이 약 30년의 기간에 걸쳐 한인과 마주한 경험은 중요한 역사적 자산이 되었다. 이는 비록 입관 전후 만주인이 통치해야 하는 지역과 정복의 대상이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달라졌지만, 본질적으로 요동이란 공간에서 겪은 한인과의 경험이 통치의 밑거름으로 작용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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