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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세기 朝鮮의 對淸 外交儀禮 : 迎詔勅禮와 使臣迎接을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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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T17365407

    • 저자
    • 발행사항

      성남 : 韓國學中央硏究院 韓國學大學院, 2026

    • 학위논문사항

      學位論文(博士) -- 韓國學中央硏究院大學院 , 韓國史學專攻 , 2026. 2

    • 발행연도

      2026

    • 작성언어

      한국어

    • 주제어
    • KDC

      911.05 판사항(6)

    • 발행국(도시)

      경기도

    • 형태사항

      vi, 282 p. : 삽화, 표 ; 26 cm

    • 일반주기명

      指導敎授: 심재우
      참고문헌: p.266-280

    • UCI식별코드

      I804:41054-200000974116

    • 소장기관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도서관 소장기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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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본 논문은 1637년 병자호란 이후 조선 인조대부터 숙종대에 이르는 시기 청나라 사신 접대 사례를 분석함으로써, 17세기 조선 대청 외교의례의 실제 운영 방식과 변화 과정을 추적하고 그 본질을 규명하고자 한다. 특히 조선이 전통적 천하관(天下觀)을 재정립하는 과정에서 직면한 역사적 난제와 연계하여, 대청 외교의례 변화의 배경과 동인을 심층적으로 조명할 것이다. 나아가 조선의 대청 의례 분석을 통해 조·청 관계의 내적 구조와 그 특수성을 입체적으로 해석하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

    1637년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청나라가 주도하는 동아시아 질서에 강제 편입되었다. 17세기 대청 외교의례 변화는 크게 세 시기로 구분된다. 인조 초기에는 맹약에 따라 대명 외교의례를 그대로 적용해 청 사신을 접대하였으나, ‘입질(入質)’ 위기를 회피하기 위해 병을 이유로 장기간 대청 외교의례에 불참하였다. 이에 ‘편전영조칙례(便殿迎詔勅禮)’를 창설해 정전영조칙례(正殿迎詔勅禮)를 대체함으로써 조선 대청 외교의례에 중요한 변화가 시작되었다. 한편 청나라가 역시 황권 강화와 조선을 배려하여 조칙 선독 횟수를 늘리고 연향 횟수를 줄이는 등 의례 변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효종대에 이르러 효종은 청의 신뢰를 유지하고 국가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실용적인 외교 노선을 취하며, 대청 외교의례가 일시적으로 정상화되기도 했다. 그러나 현종대에 이르러 사대부들의 적극적 주도 아래 국왕이 다시금 대청 외교의례에 불참하게 되었고, 편전영조칙례의 절차는 한층 더 간소화되었다. 이로써 국왕의 편전영조칙례 행사는 하나의 관례로 자리 잡게 되었다.

    숙종 초기에 북벌론이 재부상하자 조정은 국왕의 의례 참석을 적극적으로 회피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나 삼번의 난(三藩之亂)이 평정된 후, 청나라는 삼도구(三道溝) 월경 사건을 계기로 조선 국왕의 장기간 외교의례 불이행을 공식적으로 질책하였다. 장기간의 청면(請免) 실패로 인한 외교적 굴욕감과 경제적 부담이 누적되면서 조선은 점차 청면 시도를 중단하게 되었다. 1690년 전후로 숙종은 다시금 의례에 친히 참석하는 방식을 택하였고, 이에 따라 대청 외교의례는 점차 정상화되었다.

    17세기 조선의 대청 외교의례를 종합적으로 관찰할 때, 그 변화의 핵심은 두 가지 측면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첫째, 국왕이 의도적으로 장기간 외교 의례에 불참했을 뿐만 아니라, 세자나 후계자의 섭행(攝行) 또한 허용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둘째, 편전영조칙례의 등장과 정착을 통해 기존 예제(禮制)의 기본 틀이 근본적으로 재편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양상은 조선 시대를 통틀어 중국 사신 접대에 관한 한 매우 이례적인 현상에 속한다. 편전영조칙례는 국왕이 조칙을 맞이하는 의례의 격식을 극도로 간소화하여, 중국이 규정한 번국의 의례에 부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조선이 자체의 예제 전통과도 배치되는 것이었다. 비록 이 의례가 인조에서 숙종에 이르는 시기 여러 차례 시행되었고, 후에 『빈례총람(儐禮總覽)』 등 공식 예전에 수록되기는 했지만, 이후 실제로는 거의 활용되지 않았다. 17세기 동안 의례 차원의 변화를 겪으면서 조선은 결국 대청 외교에 있어 안정적이면서도 시대적 특징을 갖춘 의례 체계를 확립하게 되었으며, 이는 19세기의 청 사신 접대까지 지속되었다.

    17세기 조선의 대청 외교의례가 집중적으로 변화를 겪게 된 근본 원인은 명·청 교체기에 조선이 ‘이적(夷狄)이 중화(中華)를 대체한다’는 현실에 직면하면서 국내 사회의 윤리 질서와 문화 사상이 심각한 혼란에 빠졌기 때문이다. 조선은 청을 사대의 대상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으나, 정치적 굴복과 문화적 저항이 병존하는 상황 속에서 외교의례는 정치 현실에 순응해야 하는 요구와 명분·예제의 정통성을 지키려는 의식 사이에서 끊임없는 긴장을 겪었다. 국왕의 장기적 외교 의식 불참과 편전영조칙례의 제정은 바로 청의 조공·책봉 체제 아래에서 조선이 외형적으로는 복종하면서도 내면적으로는 문화적 자주성을 지키려 한 절충의 산물이었다. 이러한 의례 변화의 궁극적 안정은 조선이 점차 청 중심의 동아시아 국제 질서에 문화적으로 적응하고, 종속적 관계 속에서도 자율성을 유지할 수 있는 외교 예제의 새로운 모델을 형성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조청 관계는 일방적인 권력 종속이 아니라, ‘예(禮)’를 매개로 한 권력의 상호 작용과 문화적 조정을 동시에 내포한 양방적 관계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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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논문은 1637년 병자호란 이후 조선 인조대부터 숙종대에 이르는 시기 청나라 사신 접대 사례를 분석함으로써, 17세기 조선 대청 외교의례의 실제 운영 방식과 변화 과정을 추적하고 그 본...

    본 논문은 1637년 병자호란 이후 조선 인조대부터 숙종대에 이르는 시기 청나라 사신 접대 사례를 분석함으로써, 17세기 조선 대청 외교의례의 실제 운영 방식과 변화 과정을 추적하고 그 본질을 규명하고자 한다. 특히 조선이 전통적 천하관(天下觀)을 재정립하는 과정에서 직면한 역사적 난제와 연계하여, 대청 외교의례 변화의 배경과 동인을 심층적으로 조명할 것이다. 나아가 조선의 대청 의례 분석을 통해 조·청 관계의 내적 구조와 그 특수성을 입체적으로 해석하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

    1637년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청나라가 주도하는 동아시아 질서에 강제 편입되었다. 17세기 대청 외교의례 변화는 크게 세 시기로 구분된다. 인조 초기에는 맹약에 따라 대명 외교의례를 그대로 적용해 청 사신을 접대하였으나, ‘입질(入質)’ 위기를 회피하기 위해 병을 이유로 장기간 대청 외교의례에 불참하였다. 이에 ‘편전영조칙례(便殿迎詔勅禮)’를 창설해 정전영조칙례(正殿迎詔勅禮)를 대체함으로써 조선 대청 외교의례에 중요한 변화가 시작되었다. 한편 청나라가 역시 황권 강화와 조선을 배려하여 조칙 선독 횟수를 늘리고 연향 횟수를 줄이는 등 의례 변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효종대에 이르러 효종은 청의 신뢰를 유지하고 국가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실용적인 외교 노선을 취하며, 대청 외교의례가 일시적으로 정상화되기도 했다. 그러나 현종대에 이르러 사대부들의 적극적 주도 아래 국왕이 다시금 대청 외교의례에 불참하게 되었고, 편전영조칙례의 절차는 한층 더 간소화되었다. 이로써 국왕의 편전영조칙례 행사는 하나의 관례로 자리 잡게 되었다.

    숙종 초기에 북벌론이 재부상하자 조정은 국왕의 의례 참석을 적극적으로 회피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나 삼번의 난(三藩之亂)이 평정된 후, 청나라는 삼도구(三道溝) 월경 사건을 계기로 조선 국왕의 장기간 외교의례 불이행을 공식적으로 질책하였다. 장기간의 청면(請免) 실패로 인한 외교적 굴욕감과 경제적 부담이 누적되면서 조선은 점차 청면 시도를 중단하게 되었다. 1690년 전후로 숙종은 다시금 의례에 친히 참석하는 방식을 택하였고, 이에 따라 대청 외교의례는 점차 정상화되었다.

    17세기 조선의 대청 외교의례를 종합적으로 관찰할 때, 그 변화의 핵심은 두 가지 측면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첫째, 국왕이 의도적으로 장기간 외교 의례에 불참했을 뿐만 아니라, 세자나 후계자의 섭행(攝行) 또한 허용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둘째, 편전영조칙례의 등장과 정착을 통해 기존 예제(禮制)의 기본 틀이 근본적으로 재편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양상은 조선 시대를 통틀어 중국 사신 접대에 관한 한 매우 이례적인 현상에 속한다. 편전영조칙례는 국왕이 조칙을 맞이하는 의례의 격식을 극도로 간소화하여, 중국이 규정한 번국의 의례에 부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조선이 자체의 예제 전통과도 배치되는 것이었다. 비록 이 의례가 인조에서 숙종에 이르는 시기 여러 차례 시행되었고, 후에 『빈례총람(儐禮總覽)』 등 공식 예전에 수록되기는 했지만, 이후 실제로는 거의 활용되지 않았다. 17세기 동안 의례 차원의 변화를 겪으면서 조선은 결국 대청 외교에 있어 안정적이면서도 시대적 특징을 갖춘 의례 체계를 확립하게 되었으며, 이는 19세기의 청 사신 접대까지 지속되었다.

    17세기 조선의 대청 외교의례가 집중적으로 변화를 겪게 된 근본 원인은 명·청 교체기에 조선이 ‘이적(夷狄)이 중화(中華)를 대체한다’는 현실에 직면하면서 국내 사회의 윤리 질서와 문화 사상이 심각한 혼란에 빠졌기 때문이다. 조선은 청을 사대의 대상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으나, 정치적 굴복과 문화적 저항이 병존하는 상황 속에서 외교의례는 정치 현실에 순응해야 하는 요구와 명분·예제의 정통성을 지키려는 의식 사이에서 끊임없는 긴장을 겪었다. 국왕의 장기적 외교 의식 불참과 편전영조칙례의 제정은 바로 청의 조공·책봉 체제 아래에서 조선이 외형적으로는 복종하면서도 내면적으로는 문화적 자주성을 지키려 한 절충의 산물이었다. 이러한 의례 변화의 궁극적 안정은 조선이 점차 청 중심의 동아시아 국제 질서에 문화적으로 적응하고, 종속적 관계 속에서도 자율성을 유지할 수 있는 외교 예제의 새로운 모델을 형성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조청 관계는 일방적인 권력 종속이 아니라, ‘예(禮)’를 매개로 한 권력의 상호 작용과 문화적 조정을 동시에 내포한 양방적 관계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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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本文通過梳理1637年起朝鮮仁祖時期到肅宗時期接待清使的具體事例, 考察17世纪朝鮮對清外交禮儀的實際運作與變化, 揭示該時期朝鮮對清外交禮儀實踐的真實樣貌。同時, 結合朝鮮在修正天下觀過程中面臨的歷史挑戰, 深入探討朝鮮對清外交禮儀變化的動機及原因。從朝鮮對清外交禮儀的角度, 剖析朝清朝貢冊封關係的內在肌理。

    1637年丙子胡亂後, 朝鮮被迫納入清朝主導的東亞秩序。17時期對清外交禮儀的變化分為三個時期: 仁祖初期依照盟約沿用對明禮儀接待清使, 但為躲避“入質”危機, 以病為由長期缺席對清外交禮儀。由此創設“便殿迎詔勅禮”以代正殿迎詔勅禮, 標誌朝鮮對清外交禮儀出現重要變化。與此同時, 清廷亦積極推動禮儀的調整, 增加詔勅宣讀、減少宴饗次數, 以強化皇權並體恤朝鮮。孝宗時期, 由於孝宗採取更為務實的外交策略,以維繫清朝的信任和國家的穩定, 朝鮮對清外交禮儀一度恢復常態。然而, 在士大夫的積極推動下, 顯宗時期國王再度缺席對清外交禮儀, 進一步簡化便殿迎詔勅禮的禮儀節次。國王以便殿迎詔勅禮迎接清皇帝詔勅成為常態。肅宗初年北伐論再起, 王廷更為積極促進國王迴避出席禮儀。但隨著三藩平定, 清以“三道溝事件”為契機譴責朝鮮國王長期不履行外交禮儀的行為。基於長期請免失敗帶來的屈辱和經濟負擔, 朝鮮遂逐漸放棄請免。1690年前後, 肅宗恢復親行儀式, 對清外交禮儀重歸常軌。

    總觀17世紀, 朝鮮對清外交禮儀的最大變化在於:一方面, 國王有意識地長期缺席外交儀式, 且未由世子或繼承人攝行; 另一方面, 便殿迎詔勅禮的出現與普及, 徹底改變了原有的禮制格局。此種現象在整個朝鮮時代對中國使臣的接待中極為罕見。便殿迎詔勅禮極度簡化了國王迎詔的儀式規格, 不僅與中國冊封體系所規範的藩國禮制不符, 也背離了朝鮮自制的禮典傳統。雖然該儀式在仁祖、顯宗、肅宗時期多次施行, 後被收入《儐禮總覽》等官方禮志, 但此後鮮少運用。經歷17世紀禮儀層面的調整與演變, 朝鮮最終在對清外交中形成了穩定而具時代特色的禮儀體系, 並延續至其後期的清使接待之中。

    17世紀朝鮮對清外交禮儀之所以出現集中變化, 根源在於丙子胡亂後朝鮮由明清交替之際, 朝鮮面對“以夷易華”而引發國內社會倫理與文化思想的失序。朝鮮被迫奉清朝為事大對象, 政治屈服與文化抗拒並存, 使朝鮮在外交禮儀上陷入兩難:既需順應政治現實, 又欲維持名分與禮制正統。國王長期不親行禮、便殿迎詔勅禮的創設與簡化, 正是朝鮮在清冊封體系下進行表面服從與文化自守的折衷產物。此種禮儀變化的最終穩定, 表明朝鮮逐漸完成對在以清為中心的東亞國際秩序的文化性調整, 形成一套在從屬關係中維持自主性的外交禮制模式。由此可見, 朝清宗藩關係並非單向的權力服膺, 而是一種以“禮”為媒介、兼具權力互動與文化調試的雙向關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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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本文通過梳理1637年起朝鮮仁祖時期到肅宗時期接待清使的具體事例, 考察17世纪朝鮮對清外交禮儀的實際運作與變化, 揭示該時期朝鮮對清外交禮儀實踐的真實樣貌。同時, 結合朝鮮在修正天...

    本文通過梳理1637年起朝鮮仁祖時期到肅宗時期接待清使的具體事例, 考察17世纪朝鮮對清外交禮儀的實際運作與變化, 揭示該時期朝鮮對清外交禮儀實踐的真實樣貌。同時, 結合朝鮮在修正天下觀過程中面臨的歷史挑戰, 深入探討朝鮮對清外交禮儀變化的動機及原因。從朝鮮對清外交禮儀的角度, 剖析朝清朝貢冊封關係的內在肌理。

    1637年丙子胡亂後, 朝鮮被迫納入清朝主導的東亞秩序。17時期對清外交禮儀的變化分為三個時期: 仁祖初期依照盟約沿用對明禮儀接待清使, 但為躲避“入質”危機, 以病為由長期缺席對清外交禮儀。由此創設“便殿迎詔勅禮”以代正殿迎詔勅禮, 標誌朝鮮對清外交禮儀出現重要變化。與此同時, 清廷亦積極推動禮儀的調整, 增加詔勅宣讀、減少宴饗次數, 以強化皇權並體恤朝鮮。孝宗時期, 由於孝宗採取更為務實的外交策略,以維繫清朝的信任和國家的穩定, 朝鮮對清外交禮儀一度恢復常態。然而, 在士大夫的積極推動下, 顯宗時期國王再度缺席對清外交禮儀, 進一步簡化便殿迎詔勅禮的禮儀節次。國王以便殿迎詔勅禮迎接清皇帝詔勅成為常態。肅宗初年北伐論再起, 王廷更為積極促進國王迴避出席禮儀。但隨著三藩平定, 清以“三道溝事件”為契機譴責朝鮮國王長期不履行外交禮儀的行為。基於長期請免失敗帶來的屈辱和經濟負擔, 朝鮮遂逐漸放棄請免。1690年前後, 肅宗恢復親行儀式, 對清外交禮儀重歸常軌。

    總觀17世紀, 朝鮮對清外交禮儀的最大變化在於:一方面, 國王有意識地長期缺席外交儀式, 且未由世子或繼承人攝行; 另一方面, 便殿迎詔勅禮的出現與普及, 徹底改變了原有的禮制格局。此種現象在整個朝鮮時代對中國使臣的接待中極為罕見。便殿迎詔勅禮極度簡化了國王迎詔的儀式規格, 不僅與中國冊封體系所規範的藩國禮制不符, 也背離了朝鮮自制的禮典傳統。雖然該儀式在仁祖、顯宗、肅宗時期多次施行, 後被收入《儐禮總覽》等官方禮志, 但此後鮮少運用。經歷17世紀禮儀層面的調整與演變, 朝鮮最終在對清外交中形成了穩定而具時代特色的禮儀體系, 並延續至其後期的清使接待之中。

    17世紀朝鮮對清外交禮儀之所以出現集中變化, 根源在於丙子胡亂後朝鮮由明清交替之際, 朝鮮面對“以夷易華”而引發國內社會倫理與文化思想的失序。朝鮮被迫奉清朝為事大對象, 政治屈服與文化抗拒並存, 使朝鮮在外交禮儀上陷入兩難:既需順應政治現實, 又欲維持名分與禮制正統。國王長期不親行禮、便殿迎詔勅禮的創設與簡化, 正是朝鮮在清冊封體系下進行表面服從與文化自守的折衷產物。此種禮儀變化的最終穩定, 表明朝鮮逐漸完成對在以清為中心的東亞國際秩序的文化性調整, 形成一套在從屬關係中維持自主性的外交禮制模式。由此可見, 朝清宗藩關係並非單向的權力服膺, 而是一種以“禮”為媒介、兼具權力互動與文化調試的雙向關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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