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복음화는 어느 한 문화에 예속되지 않으면서, 모든 문화에 스며들 수 있습니다. 복음과 문화의 단절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우리 시대의 비극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문화, 더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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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천 : 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 2026
학위논문(석사) -- 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 , 문화영성 전공 , 2026.2
2026
한국어
282.5 판사항(21)
경기도
An Examination of the Reception and Conflicts of Christianity in East Asia : With a Focus on the Reception of Catholicism in China and Korea
ix, 171 p. ; 26 cm.
가톨릭대학교(성심) 논문은 저작권에 의해 보호받습니다.
지도교수: 조한건
참고문헌 수록
I804:41027-20000095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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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복음화는 어느 한 문화에 예속되지 않으면서, 모든 문화에 스며들 수 있습니다. 복음과 문화의 단절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우리 시대의 비극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문화, 더 정확히는 문화들을 온전히 복음화하고자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교황 바오로 6세는 『현대의 복음 선교』에서 과거 남미와 아시아에서 겪은 선교의 교훈을 현재의 선교에서 되풀이하지 않기를 권고하고 있다.
서세동점의 시기, 서양 세력과 함께 들어온 선교사들은 동아시아에 복음을 전하였다. 우수한 문화를 가진 중국과 조선은 선교사들이 전하는 복음을 직간접적으로 받아들이며, 성장과 박해의 부침(浮沈)을 겪었다. 그 과정 속에서 양국의 교회는 공통적으로 보유론적 수용이라는 특징을 지니며, 의례문제로 박해를 겪었다. 하지만 이들은 중 국에서는 예수회, 조선에서는 파리 외방전교회라는 주도적인 선교단체의 영향으로 각기 다른 성격의 교회로 성장하였다. 중국의 예수회는 적응주의 선교방식을 채택하여 황제와 조정의 관료들과 교유하면서 초기에는 박해를 거의 받지 않고 성장하였다. 반면 조선의 교회는 신앙의 수용 초기부터 정부의 박해로 좌절과 재기를 반복하며 성장하였다. 또한 파리 외방전교회의 선교사가 입국한 이후 조선교회는 보편교회와 연결되면서 성장하였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103위의 순교 성인과 124위 순교 복자를 배출 하였고, 중국교회도 120위의 순교성인을 배출하였다는 사실은 양국 교회의 성장 과정이 쉽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 그리스도교인들의 신앙에 대한 열정이 뜨거웠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신앙의 열정과 풍부한 유산이 존재함에도 현재의 모습은 어떠한가? 박해기의 고난 속에서 성장했던 교회가 현재 교세가 감소하게 된 변인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시작으로 양국의 정치적 · 사회적 상황을 고찰 하고자 하였다. 또한 그러한 상황 속에 전교의 주체는 어떤 선교방식을 채택하였으며, 그 결과는 어떠했는가? 그리고 신앙을 수용한 주체들은 어떻게 대응하였는가? 그 과정에서 발생한 갈등이 현재의 교회에 어떠한 시사점을 주는지 그 해답을 찾고자 하였다.
본 논문에서 먼저, 그리스도교를 수용한 주체들의 수용 이유를 비교해 보았다. 중국에서 처음으로 선교를 시작한 예수회는 적응주의 선교방식의 수단으로써 서양의 과학 기술과 천주교 서적을 번역하는 문서선교를 선택하였다. 이 방법으로 인해 그리스도교를 처음으로 수용한 계층은 양국의 엘리트 집단인 유학 지식인들이었다. 이 시기 중국은 명말청초의 혼란기였으며, 조선은 양란 이후 양반에 대한 권위가 떨어지고, 기득권층은 당쟁으로 민생을 돌보지 않던 시기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양국의 소장파 유학 지식인들은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학을 탐구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그리스도교를 보유론적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음으로 중국교회와 한국교회의 특징을 가르는 선교단체의 선교 방식에 상이점이 있었다. 예수회 적응주의 선교방식을 처음으로 실행한 마테오 리치와 루지에리는 중국에서 내지 선교를 시작하며, 토착화의 방법으로 다가갔다. 이들은 ‘Deus’에 대한 호칭을 중국 고전에서 사용되던 용어 ‘천’(天)과 ‘상제’(上帝), ‘천주’(天主)를 사용하였으며, 천주교 교리를 유학과 그리스도교의 유사점을 위주로 설명하고, 저술서를 저작하였다. 또한 이들은 조상의 제사나 공자의 공경 행위를 종교적 의미로 해석하지 않는 유연한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 조선에 파견된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파리 외방전교회의 훈령에서 ‘선교지의 문화와 전통에 대한 존중’을 밝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교지의 문화에 대해 엄격한 태도를 유지하였다. 이들은 현실 초월적 신앙방식과 지나친 경건주의로 인해 사회 문화 활동과 정치권과의 교유에 소극적이었지만, 조선의 신자들에게 순교를 받아들이는 굳건한 신앙을 심어주었다.
세 번째로 양국이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기 이전 시기까지의 반그리스도교 운동에 대해 고찰해 보았을 때 개인과의 갈등, 정부와의 갈등이 드러난다. 명말청초 반그리스도교적 정서가 대표적으로 드러난 사건은 남경교안과 강희역옥이다. 남경교안의 주동자인 심각과 강희역옥을 주도한 양광선은 천주교 교리에 대한 지식과 이론적 대응은 크지 않았고, 예수회 선교사들이 천문역법을 주관하는 흠천감의 관리로 등용되는 것에 대한 개인 감정과 견제에 대한 성격이 컸다. 그러나 예수회 선교사들은 엘리트 선교를 통해 관료들과의 사이가 돈독하였고, 당시 선교사에 대한 경계심이나 의심이 크지 않았으므로, 관련자에 대한 처벌로 마무리하고, 박해로 확대되지는 않았다. 따라서 중국은 강희제의 그리스도교 금지령이 내려진 1721년까지 약 120년간 청 조정 주도의 박해를 겪지 않았다. 그리고 중국의 순교자는 대부분 강희제의 금지령 이후부터 발생하였다.
조선의 반그리스도 정서는 서학이 유입되던 시기 초반부터 남인계열 내부에서 일어났다. 성호의 소장파 제자인 신서파가 천주교 신앙에 관심을 두고, 천학을 받아들이자 공서파의 신후담과 안정복이 척사론을 주장하였다. 이들은 중국의 반그리스도교 인사들과 달리 유교와 천학의 차이점을 들어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척사론을 정립시켜나갔다. 이들은 당쟁에서 밀려난 남인들이 또다시 당쟁에 휘말리는 것을 두려워하여, 내부에서 통제하기 위한 의도에서 발생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초기 신앙공동체가 형성된 시점인 이승훈의 세례(1784년)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정부 주도의 박해가 시작되었다. 윤지충의 진산사건(1791년)으로 신해박해가 일어나고, 주문모 신부가 관아에 스스로 나타나면서 일어난 신유박해가 황사영의 백서사건(1801년)으로 인해 대대적인 박해로 확대되었다. 조선교회는 중국과 달리, 초기 공동체 설립 20년이 되기 전에 이미 2번의 박해 를 겪으며, 교회 지도층인 양반 계층이 이탈하는 변화를 맞았다. 조선은 마지막 박해인 병인박해(1866년)까지 많은 순교자가 발생하였으며, 조불수호통상조약 체결 후에도 관과 민의 충돌로 여러 교안이 일어나 교우들의 희생이 뒤따랐다.
중국과 한국교회의 그리스도교 갈등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결과를 살펴보겠다. 중국과 조선에서 그리스도교를 초기에 수용한 인물들은 주로 유학 지식인들이었다. 유학이 입신양명의 수단으로 전락하고, 민생과는 괴리되는 현실 속에 그리스도교는 사회적 문제에 대한 대안으로 여겼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앙을 신앙 자체로 받아 들여지지 않고 사회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접근했던 이들은 의례문제에 부딪혀 기득권을 내려놓아야 하는 선택의 상황에서 교회 지도층은 이탈하였다. 신앙을 자신의 심층에 받아들인 신자들은 힘없고 무지한 계층이었지만 신념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 이점은 신앙이 정치권력과 결합하거나 자신이 원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받아 들여졌을 때는 분명한 한계를 지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교황 바오로 6세의 권고처럼 복음을 비그리스도교 지역과 비신자들에게 전파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문화와 전통에 대한 이해와 존중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의례논쟁의 결과로 선교지의 문화와 단절을 선택한 교황청의 결정은 과거 중국과 조선에 수많은 희생을 낳았다. 오늘날 한국의 선교사가 파견된 지역에서 그들의 문화를 존중할 때, 그들에게 복음이 기쁜 소식이 될 수 있으며, 그들의 영혼에 그리스도가 참 기쁨이 될 것이라는 점을, 교회의 선교 역사를 통해 우리는 교훈을 얻는다.
주제어 : 예수회 적응주의, 마테오 리치, 보유론, 강의역옥, 의례논쟁, 아편전쟁, 청불수호통상조약, 척사론, 신해 진산사건, 황사영 백서사건, 파리외방전교회, 병인박해, 반그리스도교 운동, 조불수호통상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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