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미 실먼(Amy Sillman, 1955-)은 1970년대 후반 뉴욕에서 미술을 배우며 여성으로서 회화를 지속하는 것의 정치적 부담과 모순을 인식한 이래, 회화의 위기를 타개할 알리바이이자 방법론으로 ...
에이미 실먼(Amy Sillman, 1955-)은 1970년대 후반 뉴욕에서 미술을 배우며 여성으로서 회화를 지속하는 것의 정치적 부담과 모순을 인식한 이래, 회화의 위기를 타개할 알리바이이자 방법론으로 드로잉을 채택해 작업해 왔다. 실먼의 회화를 둘러싼 기존의 논의는 2000년대 중반을 지나며 내러티브와 색, 제스처 등의 회화 내적인 논리로부터 ‘회화 바깥의’ 미술계 네트워크 속 사회적이고 협업적인 요소를 중심으로 이동하는 양상을 보인다. 이러한 변화의 배경에는 60년대 중반 이래로 드로잉이 이론적으로 발전한 과정과, 21세기에 들어서 매체 특정성 담론이 소진된 회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했던 작가와 이론가들의 시도가 있었다. 본 논문에서는 1990년대 이후 변화한 ‘드로잉’의 개념과 그 비평적 의의를 경유하여, 동시대 회화가 지닌 공적이고 사회적인 성격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이를 통해 본 논문은 실먼의 드로잉에 기반한 ‘드로잉적 회화’가 어떻게 주체 개인의 자아 형성과 매체의 확장이라는 두 축 위에서 동시대 회화의 의미를 재구성하는지 고찰하며, 드로잉이 회화의 알리바이이자 회화가 사회적 네트워크와 접속하는 매개로 작동함을 주장한다.
60년대 중반 미니멀리즘과 개념주의 예술가들이 드로잉을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매체로 갱신한 이후로 드로잉은 표현과 ‘심리적 사유성’으로부터 분리된 순수한 행위와 시간의 기록이자 익명성과 중립성을 지닌 공적 매체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중립적 매체로서의 모더니즘 드로잉 담론에 가려져 낮은 비평적 지위를 유지하던 주관적인 경향의 드로잉이 점차 대안적으로 탐구되기 시작하면서, 90년대에 이르러 드로잉은 자아와 사회, 제도, 관객, 예술의 매체를 포함해 모든 타자에 대한 무한한 연결성을 특징으로 삼으며 다변화된 동시대의 특질을 구체화하기에 적합한 매체로 여겨지게 된다. 실먼이 90년대에 회화의 전략으로 채택한 비주류의 ‘그리기’는 퀴어 여성 화가로서 자신의 내면성과 정체성을 드러내는 방식이자, 물질적 매체의 경계를 넘어 타자성과 사회적 네트워크, 그리고 예술의 타 장르와 연결되기 위한 회화의 전략이었다. 실먼의 드로잉적 회화는 엄격한 미술사적 비판을 피하는 가벼운 농담처럼 우회적으로 관객에게 접근할 수 있었으며, 전통적인 회화보다 사적인 거리에서 경험됨으로써 실먼의 회화가 그의 내면성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단서가 되었다. 실먼의 드로잉적 회화는 유사한 형태들의 유희적 변형을 통해 형상과 배경, 신체의 내부와 외부를 역전시키고 내면적인 공간을 열어낸다는 점에서 캐리커처의 심리적 효과를 발생시킨다. 90년대를 거치며 변화된 드로잉의 의의를 따라 이를 바라보면, 실먼에게 ‘그리기’란 사적이고 개인적이며 비정치적인 행위가 아닌 오히려 가장 내면의 공간으로부터 시작된 회화를 캔버스 바깥의 타자와 공동체에 연결시킬 수 있는 수단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실먼은 무한한 연결성을 통해 매체 간의 위계와 구분에 대항하는 드로잉의 특성을 회화에 적용함으로써, 매체의 경계를 설명하기 어려워진 오늘날의 포스트-매체 시대에 회화를 사유하는 대안적인 관점을 제시하고자 했다. 마찬가지로 동시대의 변화된 조건 속에서 회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포착하고자 한 데이비드 조슬릿의 네트워크 회화론은, 순수하고 독립적이며 물리적 개체로 환원되는 과거의 ‘매체’ 개념을 거부하고 회화를 전시와 유통의 네트워크를 순환하는 역동적 메커니즘 속 가변적인 ‘포맷’으로 바라볼 것을 주장하였다. 21세기의 예술은 이질적인 것들과 연결되고 순환함에 따라 새로운 힘을 축적할 수 있다는 조슬릿의 이론과 발맞추어, 실먼은 이 시기 디지털 드로잉 애니메이션과 출판물, 전시 디스플레이를 포함하는 다매체적 ‘다이어그램’을 회화의 일부이자 보조 장치로서 채택한다. 실먼에게 다이어그램은 서로 다른 포맷 간의 평등한 관계를 유비하고 새로운 연결을 통해 회화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새로이 제시하는 방식이었다. 회화 내부의 캐리커처 드로잉을 통해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사이의 경계를 질문하고 관객을 심리적으로 회화에 참여시키던 실먼의 드로잉적 회화는 다이어그램을 통해 회화 외부로 뻗어나가며 물리적 공간 속에서의 참여로 확장된다. 실먼은 회화 바깥의 포맷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관객에게 회화가 경험되는 방식을 고민함으로써 이러한 질문을 회화 매체 내부와 외부의 경계에 대한 질문으로 풀어내고자 했다. 실먼은 전시 공간에 애니메이션의 컷 드로잉을 수평적으로 배치하여 전시 전체가 거대한 필름 스트립이 되게 하고, 멈춘 회화가 움직이는 애니메이션의 한 순간이 되도록 구성한 독특한 디스플레이 형식을 사용한다. 실제 공간 속에 펼쳐진 실먼의 드로잉적 회화는 독립적인 사물로서의 매체의 권위를 불안정하게 만듦과 동시에, 매체에 비선형적인 시간성과 미종결성을 부여함으로써 회화가 네트워크 속에서 고정되지 않고 순환할 가능성을 시각화하였다. 관객이 공간 속을 이동함에 따라 회화의 시간이 작동하는 전시의 구조는 타자를 회화에 동참하는 네트워크의 행위자로 변환시킨다. 이와 같은 드로잉적 회화의 상호 침투는 드로잉을 통해 회화 매체의 경계를 풀어내고 타자와 연결되는 회화의 미래를 그려내기 위해 고민한 결과였다.
회화의 미래에 대한 실먼의 믿음은 작가 주체의 개인적 정체성을 넘어서 세상을 바라보고 질문하는 퀴어한 시선으로 나타났다. 회화이면서도 회화가 아닌, 회화의 알리바이로서의 실먼의 드로잉적 회화는 오늘날 여전히 ‘그린다’는 행위가 단순히 자아의 표출이거나 주관성이 제거된 통제의 시스템이 아닌, 개인과 사회가 연결되는 공간을 드러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