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는 조선시대의 심의(深衣)의 변천과정과 요인을 고찰하는데 그 목적을 두었다. 먼저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예서(禮書)에 기록된 심의제도를 정리하여 심의의 상징성을 재확인하고, 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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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 성균관대학교 일반대학원, 2019
학위논문(석사) -- 성균관대학교 일반대학원 , 의상학과 , 2019. 8
2019
한국어
서울
A study on changing trends in the types of sim-ui and its factors in Joseon period
xvi, 185 p. : 삽화 ; 30 cm
지도교수: 조우현
참고문헌: p. 160-177
I804:11040-000000155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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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조선시대의 심의(深衣)의 변천과정과 요인을 고찰하는데 그 목적을 두었다. 먼저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예서(禮書)에 기록된 심의제도를 정리하여 심의의 상징성을 재확인하고, 학파(學派)와 당(黨)에 따라 변화한 심의 형태와 유형을 고찰하였다.
심의(深衣)는 고대 중국의 의복제도 중 하나로, 백색의 가는 포(白細布)를 사용하여 상의(衣)와 하의(裳)를 따로 만들어 연결한 뒤 깃, 소맷부리와 옷의 가장자리는 검은 비단(黑繒)으로 가선을 두른다. 심의는 형태의 구성별로 철학적 의미를 담고 있으며, 고려시대 말 성리학 사상을 연구하는 유학자에게 착용되기 시작하였다.
조선시대 유학자들은 유교의례에 따른 예(禮)를 시행하기 위해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주본(注本)으로 하여 의례(儀禮)에 착용하는 심의제도를 고찰하기 시작하였다. 심의는 조선 중기에 冠禮·喪禮·祭禮의 예복(禮服)이자 유학자의 법복(法服)이라는 상징성을 갖게 되면서 유학자들을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착용되었다. 그러나 영남학파의 남인들은 『주자가례』의 심의제도에 대한 불명확한 해석과 『예기(禮記)』에 기록된 ‘평정하다.(平)’라는 철학적 의미를 심의가 형태적으로 구현하지 못하는 것을 문제 삼았다. 남인들은 심의의 형태적 오류를 해결하기 위해 『예기』와 『주자가례』를 재 고찰하였다. 이는 학파와 정파(政派)를 기준으로 조선 후기의 심의제도가 달라지는 근본적인 계기가 되었다.
기호학파의 서인들은 주자의 직령심의제도를 정설로 여겼고 그 제도가 노론의 학자들에게 계승되었다. 노론의 송시열이 초상화에서 직령심의를 착용하면서, 노론들은 직령심의를 통해 자신들의 학파를 주자의 학통을 이은 정통적인 학파이자 당(黨)임을 상징하였다. 직령심의는 노론의 상징이 되었다. 이처럼 조선 후기의 심의는 정치적 상징성을 갖기 시작하였고, 노론들의 정치활동에 활용되었다.
반면, 남인들은 주자의 심의제도가 갖고 있는 형태적 문제점을 적극적으로 해결하고자 하였다. 16-17세기에 조호익·정구·윤휴는 ‘섶이 있는 직령심의’를 제안하여 여밈의 문제를 보완하였고, 한백겸은 『예기』의 심의제도를 재해석하는 문헌 고증 방법을 통해‘대금형(對襟形) 방령심의’를 제안하였다. 그러나 한백겸의 심의는 앞자락이 벌어진다는 단점을 갖고 있었다. 일부 학자들은 그의 제도를 비판하였고, 방령심의설은 유학자들의 심의제도에 즉각적으로 반영되지 않았다.
17세기 중반 유형원은 자신의 저서에서 한백겸의 심의를 다시 거론하였고, 18세기 중반 유장원은 한백겸의 심의를 대금형에서 ‘우임형 방령심의’로 변화시켰다. 유장원의 심의는 그의 문인들에게 이어졌으나 여밈의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이들 외에 우임형 방령심의가 다른 유학자들의 예서에 기록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에 이 유형의 심의는 활용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한백겸의 방령심의 역시 일반화되지 못하였으나 18세기 중반 남인의 이익은 한백겸의 방령 깃과 윤휴의 품, 섶, 소매 등 남인들의 심의제도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섶이 있는 방령심의’를 체계화하였다. 이익의 방령심의는 이전보다 깊이 여미어지고 아랫단은 가지런해졌다.
남인들은 방령심의제도를 통해 그들의 예학(禮學)을 상징하고 시각화하여 노론의 직령심의와의 차별적인 요소를 표출하고자 하였다. 이익의 심의는 손자 이삼환과 제자 허전에게 전해졌다. 이삼환은 방령심의를 착용하고 초상화를 제작하였으며, 허전은 방령심의가 활용될 수 있도록 제작방법을 예서(禮書)에 도식화(圖式化)하였다. 허전의 도식은 박규수, 정윤용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이들의 예서에 심의의 제작방법에 대한 상세한 도식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이후 조선 후기의 방령심의는 남인들의 심의로 제도화되고 인식되었다.
이와 같이 심의의 형태 변화에는 학파간의 정치적 상황이 반영되었으며, 심의는 유학자들의 예학 연구의 결과물이자 정치적 상징성을 갖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본 연구는 이전에 고찰되지 않은 조선시대 심의제도를 함께 고찰함으로써 남인들의 심의 형태의 변화과정을 밝혀냈다는 것에 그 의의를 두며, 심의 유형을 이해하고 고증하는 작업에 기초자료로 활용되길 기대한다.
목차 (Table of Cont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