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역사를 공부함에 있어 가장 큰 목적은 과거의 경험을 통해 앞으로의 나아갈 방향을 찾고자 함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 논문은 조선후기 기독교 선교과정을 살펴봄으로써 유교사회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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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 협성신학대학교 대학원, 2015
학위논문(석사) -- 협성신학대학교 대학원 , 신학과 , 2015. 2
2015
한국어
경기도
106 p. ; 26 cm
지도교수: 서영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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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역사를 공부함에 있어 가장 큰 목적은 과거의 경험을 통해 앞으로의 나아갈 방향을 찾고자 함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 논문은 조선후기 기독교 선교과정을 살펴봄으로써 유교사회의 문화와 사상이 새로이 전래된 천주교와 개신교를 어떻게 받아들이게 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했다.
크던 작던 새로이 복음이 전해지는 지역에서 기독교는 그 지역의 문화적 상황과 충돌을 일으킨다. 이러한 문화적 충돌은 후에 전래된 개신교의 경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선교에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기도 했지만 반대로 초기의 천주교의 경우 그 충돌로 말미암아 선교가 가로막히기도 했다.
본 논문의 관심은 기독교 선교에서 피선교지의 문화적 상황에 대한 이해와 그것이 어떻게 기독교 복음을 이해하는 구실을 하는가를 살펴보는데 있다. 선교과정에서 피선교지의 문화적, 사상적, 정치적 상황과 그 영향력을 배제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피선교지의 문화적, 사상적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들의 필요를 찾기 어려울 것이고, 복음의 이해에 대한 정도를 파악하기 힘들 것이다. 또한 정치적 상황은 선교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조선의 사회·문화적 기반인 유교에 대해서 공부해 보았다. 공자 사상의 핵심인 君子란 ‘仁’과 ‘義’의 가치를 실현하고 ‘禮’과 ‘文’의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이었다.
孔子는 이러한 君子가 갖추어야 할 덕목으로 ‘仁·義·禮·知·信’ 등을 들었다. 즉 인자한 사람은 근심하지 않고, 슬기로운 사람은 당황하지 않고, 용기 있는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또한 君子는 의로움을 바탕으로 삼고 禮에 따라 행동하고, 공손하게 나아가며, 믿음을 이루게 한다고 하였다. 이런 공자의 사상을 토대로 조선조의 국가 이념으로 채택된 유교는 宋나라의 朱子가 완성시킨 性理學이었다.
조선 왕조는 초기부터 성리학을 가치체계로 받아들이면서 지배질서의 정당화를 꾀하면서 국가의 통합을 이루어 갔다. 따라서 유교는 단순히 종교적 차원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가족 정치 신분 교육 경제 등의 사회 전반의 모든 영역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었으며 그렇게 됨으로써 조선 사회의 문화와 사상의 전반을 이루는 핵심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새로운 사상체계인 개신교가 그 복음을 전함에 있어 유교를 이해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이제 조선에서의 선교의 성공 여부는 이런 유교적인 문화와 사상을 얼마나 이해하고 그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하는가의 중요한 문제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천주교는 이런 유교적인 문화를 이해하지 못한 채 사대부의 자제들인 젊은 유생들에 의해 논의되고, 유교 교의조차 부정하는 단계에 이르자 지배층은 마침내 척사를 공론화하기에 이른 것이다. 더 나아가 천주교는 국가와 종교와의 관계에서 위정자의 권위를 절대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천주교는 천주에 대한 대군(大君), 대부(大父)로서의 절대적 신앙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을 성리학적 조선사회에 적용하게 되면 효의 측면에서는 가부장권(家父長權)에 대한 도전이 되고, 충(忠)의 측면에서는 군주지상권(君主至上勸)에 대한 도전이 되었던 것은 너무 당연한 결과였다.
또한 조선의 祭禮는 단순한 우상숭배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유교적 제례의식으로 정립된 그 속에는 충, 효의식의 함양을 통하여 정치적 결속력과 사회적 연대의식을 심화시키는 기능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의 기초 구성단위인 가족은 유교의 기본 규범인 효에 의해 결속된다. 그러나 이런 정치·사회적으로 연대된 조선의 제례 문제를, 교황청은 우상 숭배라는 종교적 원리에만 입각해서 배격함으로써 조선사회와 심각한 문화적 갈등의 문제를 발생시킬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초기 천주교의 전래는 조선의 문화를 이해하지 못함으로 인해 심각한 실패를 맛보아야 했다. 뿐만 아니라 천주교는 정치적으로도 대립적인 구도를 가짐으로 선교를 더욱 어려운 지경으로 내몰았다.
그에 반해 근대화를 위해 서구 문화를 긍정적으로 수용코자 하는 개화 사상가들은 개신교에 대해서도 우호적인 태도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상당수는 이미 쇠퇴와 병폐를 나타내고 있는 성리학적 가치체계는 그 힘을 잃었다고 판단했다. 이제 조선에는 근대화를 위한 새로운 가치체계가 필요하다고 여기게 되었다. 그리고 쇄도하는 열강의 침탈을 저지하는데 힘이 되어줄 국가로는 미국을 선망했는데, 그 미국을 강대국으로 부상시킨 저력에는 개신교의 역할과 정신이 있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개화 사상가 들은 “개신교의 수용이야말로 쇠약해져 가는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최선의 방법이며 개신교의 선교단체는 개화의 힘이 될 것”이라고 공언하기도 했다.
또한 개신교는 갑신정변이나 갑오개혁, 의병운동, 동학농민운동등 국가적 비운과 직·간접으로 상관관계를 띠며 발전했다. 청일전쟁과 을미사변을 겪은 조선인들은 그 같은 국난을 극복할 대안세력으로, 조직력과 추진력을 지닌 개신교에 더욱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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