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3년경 만들어진 운교(雲橋)는 경운궁(慶運宮)과 궐외각사(闕外各司)를 잇는 다리이며, 무지개의 형상을 하고 있어 홍교(虹橋)라고도 불렸다. 100여년이 지난 지금도 덕수궁 남측 궁장(宮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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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 京畿大學校, 2012
학위논문(석사) -- 京畿大學校 建築大學院 , 建築設計專攻 , 2012
2012
한국어
549.1 판사항(5)
690.882 판사항(21)
경기도
ix, 94 p. : 삽화 ; 26 cm
참고문헌: p. 80-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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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경 만들어진 운교(雲橋)는 경운궁(慶運宮)과 궐외각사(闕外各司)를 잇는 다리이며, 무지개의 형상을 하고 있어 홍교(虹橋)라고도 불렸다. 100여년이 지난 지금도 덕수궁 남측 궁장(宮檣)에 석축으로 구성된 교대(橋臺)가 운교의 흔적으로 남아있다.
고종이 경운궁으로 이어(移御)할 당시 경운궁에는 즉조당(卽阼堂), 석어당(昔御堂) 등 일부의 건물만이 존재했으며, 경복궁(景福宮)의 근정전(勤政殿)이나 창덕궁(昌德宮)의 인정전(仁政殿) 같은 정전(正殿)은 없었다. 따라서 필요한 여러 건물들을 지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비좁은 경운궁 부지로는 해결되지 않아서 궁역(宮域)을 확장해야했다. 하지만 궁궐 주변에는 외국공사관이 들어서 있었으며, 이미 도시가 조성된 상태였기 때문에 궁역을 넓히는 일은 그리 쉽지가 않았던 것 같다. 특히나 중화전 권역의 조성을 위해서는 남쪽으로의 확장이 불가피했다.
중화전 권역을 영건(營建)하면서 남쪽으로 궁장을 옮기고, 정문이었던 남쪽의 인화문(仁化門)은 철거하고, 동쪽에 있는 대안문(大安門)을 정문으로 삼아 ‘중화문-조원문-대안문’의 체계를 만들어낸다. 경운궁의 남측에는 정동로(貞洞路)가 경운궁과 남측 부지를 동서방향으로 가로지르고 있었는데, 이 길은 외국 공사들의 통행이 잦았던 길이어서 그들은 남측으로의 궁역확장을 반대했다. 따라서 남측부지에 들어설 궐외각사와의 연결이 어려워졌고, 대안문을 통하여 궐외각사로 통행하는 것은 동선이 길어지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운교를 설치하여, 경운궁에서 곧바로 연결할 수 있도록 하였다.
보통 궁궐에서의 다리는 궁궐 정문 안에 금천교(禁川橋)가 있으며, 연지(蓮池)에 있는 정자(亭子)를 잇는 다리를 주로 볼 수 있으나, 운교는 기존 궁궐에서는 볼 수 없는 형식의 다리이다. 금천교는 보통 석재로 된 궁륭형식의 홍예를 두 개를 연달아 놓은 형식이며, 여타의 다리들은 대체로 우물마루형식이나, 널마루형식의 석교(石橋)로 구성하거나, 단순한 목교(木橋)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하지만 운교는 형태, 구조, 재료 등 모든 면에서 특이한 형식을 갖추고 있다. 형태는 궁궐의 다리보다는 오히려 성곽의 홍예문에 가깝고, 구조적인 측면에서 교형(橋桁)부분은 근대(近代)의 중층 마루 또는 동바리 마루에 가까웠던 것으로 추정한다. 또한 벽돌을 사용하여 홍예와 난간 등을 구성하였는데, 이는 근대 조적 건물과 담장의 디테일을 많이 차용했었던 것 같다.
운교의 존재는 이미 알려져 있었으나, 형태 및 구조 등은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다만 현재 남아있는 교대를 보면서 어떤 다리였을지 궁금증이 있었고, 또 영국의 주간 삽화신문인 『The graphic』에 실린 경운궁 화재를 그린 삽화를 통해서 목교였을 것이라는 등의 막연한 추정만 했을 뿐이다. 다행히 최근에 사진 1점이 발견되어, 형태 및 규모를 추정할 수 있었다. 또한 현장에서 교대와 주변 궁장에 대한 실측조사를 하고, 중화전영건도감의궤(中和殿營建都監儀軌)의 품목(稟目)에 기록된 재료를 분석하였으며, 당시에 지어진 벽돌건물들의 유사부분과 비교를 통하여 운교의 모습을 도면으로 재현하였다.
운교는 약 7m폭의 정동로 위를 가로지르고, 벽돌을 사용하여 반지름 약 3.2m의 홍예를 틀었다. 스팬드럴(spandrel)은 네덜란드식 쌓기로, 난간은 영롱쌓기로 추정된다. 홍예의 상세한 모습은 이형벽돌의 모습이나 이맛돌의 형태로 보아 돈덕전(惇德殿)의 아치창호와 유사한 구조로 보인다. 교형은 대량을 교대와 교대를 가로지르고, 대량위에 멍에와 장선을 차례대로 설치한 후 교면(橋面)에는 청판(廳板)을 깔고, 교형 밑면에는 앙판(仰板)이라는 천장판을 붙였던 것으로 추정한다.
복원은 사라진 것을 당시 모습의 원형대로 회복하여 재현하는 일련의 과정으로, 충분한 고증 자료가 있다하더라도 정확하고 완벽하게 복원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본 연구 또한 많은 부족함을 시작으로 하였고, 연구 시작 후에도 확실한 자료 확보를 하지 못해 충분히 고증하지 못한 한계가 있다. 또한 운교 사각문(四角門) 등 운교와 관련된 시설들은 고찰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다만 본 연구를 통하여 보기 드문 형식의 다리를 추정하여 재현해 보았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 할 수 있다.
특이한 사실은 중명전(重明殿), 돈덕전, 구성헌(九成軒)같은 양식(洋式) 건물들은 영건의궤(營建儀軌)에 기록하지 않았던 반면, 운교는 영건의궤에 운교의 영건에 사용할 재료들을 기록하였는데, 이것은 운교를 완전히 양식이 아닌, 전통적 구조물로 인식했던 것이 이유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전통적 형태와 근대적 기법의 과도기적 형태로 영건하게 된 것은, 근대국가를 지향하는 고종의 의중이 담겨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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