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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북한의 화해와 통일을 위한 1980년대 교회의 만남과 역할 : WCC 소장 문서를 중심으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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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riss.kr/link?id=T11583087

      • 저자
      • 발행사항

        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 대학원, 2008

      • 학위논문사항

        학위논문 (석사) -- 장로회신학대학교 대학원 , 역사신학 , 2008

      • 발행연도

        2008

      • 작성언어

        한국어

      • DDC

        261.7 판사항(21)

      • 발행국(도시)

        서울

      • 형태사항

        iii, 128 p.; 30cm

      • 일반주기명

        참고문헌: p.123-128

      • 소장기관
        • 장로회신학대학교 도서관 소장기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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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본 논문에서는 객관적인 사실을 위주로 WCC,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조선기독교도연맹이 어떤 의도와 견해를 가지고 접근했으며, 그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먼저 파악했다. 그리고 다시금 그 사건의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고 각 사건을 입체적으로 맞추어 객관적이면서도 특별한 역사로서 재구성을 해보았다.
      본 논문의 Ⅰ장에서는 논문의 연구 동기와 목적, 연구 범위와 자료, 연구의 방법에 대해 밝혔고, Ⅱ장에서는 1980년대까지의 남한 정부의 통일 정책과 그에 따른 교회의 통일운동이 어떻게 변화하였는지를 살펴보았다. Ⅲ장에서는 WCC와 조선기독교도연맹의 교류에 대해서 다루었다. 이를 위해서 1980년대 WCC를 중심으로 한 세계교회의 에큐메니칼 운동의 흐름에 대해서 정리했고, 조선기독교도연맹(The Central Committee of the Korean Christians Federation)의 결성 전후 북한 사회에서 일어난 기독교 세력과 공산당의 헤게모니 다툼 그리고 신앙의 수호를 위한 박해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또한 1970년대 이후 새롭게 등장한 조선기독교도연맹의 배경을 살펴보았다. 또한 조선기독교도연맹의 국제적 연대활동 등에 대해서 밝혀보았다.
      Ⅳ장에서는 본격적으로 남북교회의 화해와 이를 돕는 세계교회의 역할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남북기독교도들의 첫 만남이자 민간 차원의 하나의 사건이었던 “조국통일을 위한 북과 해외 동포 기독자간의 대화”를 통해서 남북교회의 본격적인 만남의 씨 뿌림에 대해서 알아보았으며, 이에 반대하는 남한교회의 보수 세력의 대응 역시 흥미 있게 다루었다.
      Ⅴ장에서는 남북화해와 통일을 위한 세계교회의 호응으로 이루어진 도잔소협의회를 다루며 그 준비과정과 발표된 선언문 그리고 그에 관한 세계교회의 호응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더욱이 세계교회와 북한 교회 간의 교류를 통해서 남북교회의 만남을 어떻게 준비했는지를 연구해 보았다.
      Ⅵ장에서는 남북교회의 대표단이 WCC의 중재로 스위스 글리온에서 만난 역사적인 사건인 글리온 회의의 준비과정과 진행사항을 살펴보고,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글리온 선언이 담고 있는 의미를 살펴보았다.
      Ⅶ장에서는 1980년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활동과 정부당국과의 갈등요소를 살펴봄으로서 교회의 통일운동에 대해서 추적해 보았으며, 당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역할에 대해서 논하였다. 또한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의 선언”을 분석하여 그 역사적인 배경과 당시 남한 교회 내부의 찬반 논란을 살펴보았다. 그런 후 선언문에 의해서 남북이 함께 노력하기로 한 통일희년 운동을 연구했다.
      Ⅷ장에서는 논문 전체를 요약했고, 전망을 통하여 남한교회의 주류세력인 보수적 교회들의 남북화해에 대한 인식과 갈등의 양상을 살폈다. 그리고 끝으로 평화적 통일에 대한 교회의 역할에 대해서 연구하며 본 논문이 오늘날 한국교회에 주는 의미와 과제에 대해 제언하였다.
      본 논문의 커다란 흐름은 남북교회의 만남과 그 준비과정을 공시적 과정과 통시적 과정을 함께 엮는 방식으로 서술되어 졌으며, 각 주제에 부응하는 요인들을 소주제로 구분하여 주제에 따른 연대기적 서술을 병행하였다. 본 논문의 한계점과 아쉬움은 남북교회의 화해와 평화적 통일운동을 1980년대로 만으로 제한해 1990년대에서 현재까지의 흐름을 살피지 못하였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 대응해 보수 기독교계열에서 만든 한국기독교총연회합(한기총)에 대해서 다루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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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논문에서는 객관적인 사실을 위주로 WCC,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조선기독교도연맹이 어떤 의도와 견해를 가지고 접근했으며, 그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먼저 파악했다. 그리고 다...

      본 논문에서는 객관적인 사실을 위주로 WCC,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조선기독교도연맹이 어떤 의도와 견해를 가지고 접근했으며, 그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먼저 파악했다. 그리고 다시금 그 사건의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고 각 사건을 입체적으로 맞추어 객관적이면서도 특별한 역사로서 재구성을 해보았다.
      본 논문의 Ⅰ장에서는 논문의 연구 동기와 목적, 연구 범위와 자료, 연구의 방법에 대해 밝혔고, Ⅱ장에서는 1980년대까지의 남한 정부의 통일 정책과 그에 따른 교회의 통일운동이 어떻게 변화하였는지를 살펴보았다. Ⅲ장에서는 WCC와 조선기독교도연맹의 교류에 대해서 다루었다. 이를 위해서 1980년대 WCC를 중심으로 한 세계교회의 에큐메니칼 운동의 흐름에 대해서 정리했고, 조선기독교도연맹(The Central Committee of the Korean Christians Federation)의 결성 전후 북한 사회에서 일어난 기독교 세력과 공산당의 헤게모니 다툼 그리고 신앙의 수호를 위한 박해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또한 1970년대 이후 새롭게 등장한 조선기독교도연맹의 배경을 살펴보았다. 또한 조선기독교도연맹의 국제적 연대활동 등에 대해서 밝혀보았다.
      Ⅳ장에서는 본격적으로 남북교회의 화해와 이를 돕는 세계교회의 역할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남북기독교도들의 첫 만남이자 민간 차원의 하나의 사건이었던 “조국통일을 위한 북과 해외 동포 기독자간의 대화”를 통해서 남북교회의 본격적인 만남의 씨 뿌림에 대해서 알아보았으며, 이에 반대하는 남한교회의 보수 세력의 대응 역시 흥미 있게 다루었다.
      Ⅴ장에서는 남북화해와 통일을 위한 세계교회의 호응으로 이루어진 도잔소협의회를 다루며 그 준비과정과 발표된 선언문 그리고 그에 관한 세계교회의 호응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더욱이 세계교회와 북한 교회 간의 교류를 통해서 남북교회의 만남을 어떻게 준비했는지를 연구해 보았다.
      Ⅵ장에서는 남북교회의 대표단이 WCC의 중재로 스위스 글리온에서 만난 역사적인 사건인 글리온 회의의 준비과정과 진행사항을 살펴보고,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글리온 선언이 담고 있는 의미를 살펴보았다.
      Ⅶ장에서는 1980년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활동과 정부당국과의 갈등요소를 살펴봄으로서 교회의 통일운동에 대해서 추적해 보았으며, 당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역할에 대해서 논하였다. 또한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의 선언”을 분석하여 그 역사적인 배경과 당시 남한 교회 내부의 찬반 논란을 살펴보았다. 그런 후 선언문에 의해서 남북이 함께 노력하기로 한 통일희년 운동을 연구했다.
      Ⅷ장에서는 논문 전체를 요약했고, 전망을 통하여 남한교회의 주류세력인 보수적 교회들의 남북화해에 대한 인식과 갈등의 양상을 살폈다. 그리고 끝으로 평화적 통일에 대한 교회의 역할에 대해서 연구하며 본 논문이 오늘날 한국교회에 주는 의미와 과제에 대해 제언하였다.
      본 논문의 커다란 흐름은 남북교회의 만남과 그 준비과정을 공시적 과정과 통시적 과정을 함께 엮는 방식으로 서술되어 졌으며, 각 주제에 부응하는 요인들을 소주제로 구분하여 주제에 따른 연대기적 서술을 병행하였다. 본 논문의 한계점과 아쉬움은 남북교회의 화해와 평화적 통일운동을 1980년대로 만으로 제한해 1990년대에서 현재까지의 흐름을 살피지 못하였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에 대응해 보수 기독교계열에서 만든 한국기독교총연회합(한기총)에 대해서 다루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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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1. ‘북(北)과 해외동포 기독자대화’에서 도잔소협의회 까지
      1980년대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위한 열망은 먼저 남북의 당사자들이었던 우리 민족 내부에서 부터 그 싹이 커져 나갔다. 남북의 기독교인들이 함께 만날 수 있었던 첫 기회는 1981년과 1982년에 있었던 ‘북(北)과 해외동포 기독자대화’였다. 이는 독일교회의 후원으로 제 4차 한독교회협의회 공동성명이 발표되고, 남한정부의 통제로 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해외동포 기독인들이 주도하여 북한교회의 대표들이었던 염국렬, 김득렬, 고기준, 전금철, 허영숙 등과 1차는 빈에서, 2차는 헬싱키에서 만나고 남북 화해와 통일 그리고 통일을 위한 기독자의 자세에 대해서 대화를 가졌다.
      1·2차의 공동성명과 “해·내외 동포들에게 보내는 호소문”에서 그 성향이 드러나듯이 “북(北)과 해외동포 기독자 대화”에는 남한의 민주화를 주장하는 혹은 반정부적인 성향을 가진 해외교포들(목사, 교수, 언론인, 예비역장성)과 북한의 정치인, 종교인이 주로 참석하였다.
      남한정부와 종교계 일각에서 북한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에 의해서 짜인 각본이라고 비난을 하기도 했지만, 주최자들은 “조국통일을 파괴하고 민족 간의 화해 대신 적대관계를 조성하는 우리나라의 반공적 친미적 기독교”에 통일대화를 자극시켜 준모임으로 평가하였다. 서로의 상반된 주장들과 조금은 도를 넘은 과격한 표현들이 이들의 만남 가운데서 드러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1년부터 1991년 까지 열린 6번의 만남은 “분단의 상처를 극복하려는 모험”이자 남북간 종교교류의 “원형”또는 “원동력”을 제공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북(北)과 해외동포 기독자 대화’가 개최 될 당시 한국교회는 WCC를 통하여 그 어떤 도움이나 간여를 하지 말 것을 권고한다. 이유는 그 대화의 장이 북한의 일방적인 정치선전의 장이 될 것임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회원국가 교회의 요청에 의해서 WCC 역시 비공식적인 후원에 대한 논란은 있었지 다른 관여는 하지 않았다.
      WCC의 한반도에 대한 관심은 1983년 제 6차 WCC 총회를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본 총회에서 ‘정의, 평화, 창조의 보전’(Justice, Peace, Integrity of Creation: JPIC)을 결의하였는데, 이는 과거 미·소 양 강대국에 의해서 민족이 나뉘고, 좌우이념의 포로가 되어 민족 상쟁의 전쟁을 거친 한반도에 세계교회의 관심을 갖게 했다. 무엇보다 한반도는 미·소 냉전의 제 1전선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었고, 서로에 대한 적개심과 한(恨)이 깊숙이 도사리고 있었으며, 독재정권과 군사정권의 시퍼런 칼날 가운데 민중의 숨통이 틀어 막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급속한 개발 정책으로 경제는 발전하였지만 환경의 문제가 필연적으로 제기 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한국교회와 세계교회는 ‘정의, 평화, 창조의 보전’(Justice, Peace, Integrity of Creation: JPIC)’의 상징적 지역 (Symbalic Local Area)로서 동북아시아의 한반도에 관심을 가졌다.
      특별히 WCC는 남한과 북한 교회의 화해와 만남을 통한 그리스도 안에서의 통일을 추구하기로 하고, 남한교회에서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를 북한교회 안에서는 조선기독교도연맹을 상대로 중재자로서 화해의 역할을 감당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1948년 세계교회협의회 제 1차 총회인 암스테르담 총회 때부터 김관석(당시 NCCK총무)를 옵저버로 참석하게 했고 또 청년대표 엄요섭을 참석하게 할 정도로 이미 서로에 대한 연합이 잘 되고 있었다. 장로교회는 세계교회협의회 제 1차 총회 때 회원교단으로 가입하였고, 그 후 장로교단은 세계교회협의회 안에서의 활동 문제를 놓고 합동과 통합으로 분열하는 가운데서도 세계교회와 국제적으로 교류를 지속적으로 하였다.
      이에 비해 북한은 1973년 유엔 산하 세계보건기구에 가입하고 제네바에 북한 대표부를 구성한 후 제네바 유엔사무국 북한 대표부를 통해 세계교회협의회에 1974년 2월 2일과 2월 3일 작성된 두 통의 편지를 보냄과 동시에 그 편지를 전해 왔던 북한 대표부의 영사 권태준과 2등 서기관 박일부를 통해서 북한의 조선기독교도연맹이 세계교회협의회의 회원으로 가입 할 수 있는지를 타진함으로 그 관계가 발전하기 시작했다.
      1983년 이전에는 세계교회협의회에서도 남한교회를 의식해서 북한교회와의 협력 관계를 공론화 시키는데 거리를 두고 있었고, 북한교회 측의 요청에는 원론적인 입장에서 정리하였다.
      조선기독교도연맹이 근 30여 년간의 침묵을 깨고 국제기구인 세계교회협의회에 접근한 것을 두고 여러 가지 의견이 분분 했으나 크게 3가지 관점에서 그 의도를 파악 할 수 있다. 그 첫째는 남한사회의 경제적 발전과 함께 국제사회에서 그 영향력이 커져 가는 남한에 대한 대응으로서 세계교회협의회를 통해서 서방 세계와의 관계를 개선하고자 하는 북한 당국의 의도가 있었으리라 유추되어 진다. 이러한 유추 가운데는 공산당 정부의 역할이 없이는 조선기독교도연맹이 단독으로 대외사업을 하기란 불가능 할 것이라는 북한사회의 특수성을 고려해서다. 두 번째는 세계교회협의회를 남한에 대한 정치적 선전의 장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라는 견해이다. 광주항쟁으로 부터 시작한 남한 사회의 민주화 운동과 반정부 투쟁 가운데 그 중심을 이루고 있던 기독교 민주화세력을 우회적으로 지원하고, 국제 사회 안에 군사정부의 비정통성과 야만성을 계속해서 폭로하겠다는 정치적 계산이 있었을 것이다. 더욱이 에큐메니칼 운동을 하는 세계교회협의회에는 북한의 후원국 역할을 하는 러시아의 정교회가 그 회원으로 가입해 있었기 때문에 협력 관계에서 우호적일 수 있었다. 세 번째는 순수하게 남북의 화해를 위한 시도로서 민간 차원의 대화와 화해를 통해서 서로를 알아가길 원했다는 것이다. 또한 북한 사회 안에서 조선기독교도연맹으로 대표되는 북한 교회의 역량이 커졌다는 것도 또 다른 이유이다. 아마도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이유가 모두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조선기독교도연맹과 세계교회협의의 교류가 시작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 남북은 서로 철저하게 반목했고, 남북대화의 모든 주도권은 양측 정부만이 가질 수 있었기 때문에 남북의 교회는 민간 차원의 교류이기도 함과 동시에 양 정부의 특사 역할도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진보진영에 속하고, 당시 반정부투쟁을 하던 민주화운동의 지도부가 함께 교류하고 있었지만 그 가운데서도 남한정부의 입장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2. 도잔소협의회로 부터 글리온 회의까지
      본격적인 WCC의 남북교회의 화해와 통일을 위한 대화의 중재는 84년 10월 29일에서 11월 2일까지 일본 도쿄 근처의 도잔소국제센터에서 열린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정의협의회’를 정점으로 세계교회의 참여와 후원을 통해서 가속도를 붙이게 되었다. 이 회의에 북한은 끝내 참여하지 않았지만 서신을 통해서 도잔소협의회에서 결의된 내용에 대해서 찬성하며, WCC와 세계교회들이 중재되어 남북교회의 만남을 가질 수 있기를 원한다는 뜻을 전달해 왔다.
      이에 도잔소협의회는 앞으로의 한반도 화해와 평화적 통일을 위한 청사진이 필요함을 느끼게 되고, “분쟁의 평화적 해결에 대한 전망”이라는 제목의 보고와 건의안을 공식적으로 채택한다. 이 보고서에는 먼저 도잔소 협의회의 준비과정과 진행과정을 소개하고, 준비에 도움을 제공한 아시아기독교협의회(CCA), 일본기독교협의회(NCCJ) 그리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세계교회협의회 회원교단들과의 면밀한 논의를 통해 진행되어야 함을 밝혔다.
      그런 다음 동북아시아의 한반도가 어떻게 긴장지대를 이루고 있으며, 그 긴장의 초점에 남북한이 있다는 사실을 역사적 기술을 통해서 기록하였다. 또한 분단의 인명피해와 군사화 된 분단에서 오는 민중의 한(恨)을 기술했고, 분단세력들이 만들어 놓은 서로에 대한 적개심으로 인하여 미움과 오해가 계속 커지고 있음을 밝혔다. 하지만 이 안에 교회의 연합운동을 통하여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음을 설득하고, 이를 위한 교회의 과제를 부각했다. 더욱이 남과 북의 신뢰확보를 위해서 정확한 정보뿐 아니라 북한과의 공식적인 접촉을 더 많이 가져 서로에 대해서 알 수 있도록 하자는데 모두가 찬성하였다. 특별히 교회가 이 일을 위해서 해야 할 일 중에는 1. 인도주의적 관심, 2 통일논의에 대한 대중적 참여유도, 3. 다른 상황이 주는 교육을 통하여 서로를 배움, 4. 서로에 대한 적대심 극복, 5. 여성·청년의 참여의 증대, 남북의 군비경쟁 저지 등의 우선 과제를 정하였다.
      도잔소협의회의 “분쟁의 평화적 해결에 대한 전망”이라는 선언은 세계교회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연합으로 인해서 도출되었고, 북한 조선기독교도연맹에 의해서 긍정적인 화답을 받아 본격적으로 추진되게 되었다.
      먼저 세계교회와 한국교회는 북한에 정말로 교회가 있으며, 기독교인이 존재하는가에 대해서 물음을 제기했다. 그래서 WCC는 직접 북한을 방문하여 그것을 확인하기로 했다. 이에 1985년 세계교회협의회 국제위원회는 나이난 코쉬(Ninan Koshy)과 바인 개르트너(Erich Weing?rtner)를 대표로 해서 북한교회를 방문하게 한다. 또한 1986년에는 미국교회협의회의 대표들이 북한교회를 방문하고 그 진정성을 살피고 앞으로의 남북교회의 화해에 함께 동참하기로 결정한다. 1987년에는 일본기독교협의회가 한 달 후에는 미국교회협의회가 2차로 북한을 방문하고 1987년에 WCC의 직원들로 구성된 대표단이 다시금 북한교회를 방문하고 서로에 대한 에큐메니칼의 방법들에 대해서 나눔을 갖는다. 이러한 북한교회의 방문 안에는 남한 사람들도 세계교회협의회 직원이나 미국교회협의회의 회원으로서 함께 북한교회를 방문하고 돌아와 그 소식을 전해주고 향후 세계교회협의회를 통해 북한교회의 대표단과 만나는 문제에 대해서 조율하게 된다.
      3. 글리온 회의에서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의 선언”까지
      도잔소협의회에서 그려진 남북교회의 화해와 평화적 통일을 위한 만남은 1996년 ‘제 1차 글리온 회의’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1986년 9월 2일에서 5일까지 남북교회의 대표단은 스위스 글리온에서 “평화에 대한 기독교적 관심의 성서적·신학적 기반”(Biblical and Theological Foundation of Christian Concern for Peace)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세미나를 갖는다.
      주최자인 WCC나 당사자들인 남북의 교회 대표들도 어떤 상황이 벌어질 줄 알 수 없었고, 오직 그리스도의 화해의 사역에 의지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제 1차 글리온 회의’에서는 서로의 입장에 대한 결론을 도출하기 보다는 서로를 이해하고 만남을 통한 교류를 넓히는데 초점이 맞추어졌다. 특별히 마지막 날에 남북교회의 대표들이 성만찬으로 함께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나누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와 화해의 상징이었고, 막힌 담을 허무는 첫 울림이었다.
      1988년 11월 23일에서 25일까지 제 2차 글리온 회의가 1차 때와 같은 장소에서 열렸다. 이 회의에는 1차와는 달리 서로에 대한 친밀도가 있는 상황이었고, 그 나눔 역시 화기애애했다. ‘제 2차 글리온’회의를 통해서 남북교회가 함께 추구할 수 있는 글리온 선언이 발표되었다. 서로의 주장과 의견이 팽팽히 맞서 선언문의 도출까지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이 선언을 통하여 남북교회의 새로운 이정점을 세울 수 있었다. 특별히 1995년을 희년으로 삼고 남과 북이 통일을 향하여 실제적인 역할을 하기로 협의했다.
      제 2차 글리온 회의에 앞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동년 2월 29일에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의 선언"을 발표하는데 이 선언에는 1) 1995년을 평화통일 희년으로 선포한다. 2) 평화통일을 위한 ‘조국통일 3대 원칙’인 ‘자주. 평화. 민족 대 단결’을 확인하고 현재의 양 체제의 존속이 보장되는 평화공존의 원칙에서 통일국가를 세우는 노력을 한다. 3) 통일의 주체로 남·북 민중 당사자임을 확인하고 분단 고정 정책을 배제한다. 4) 상호신뢰 회복을 위한 우선순위를 채택한다. 5) 불가침을 선언하고 군축 및 비핵화를 이루며 모든 외세는 철수한다. 6) 이산가족 재회를 포함한 교류와 군사·정치 대결 해소를 위한 동시적 접근을 이룬다. 7) 조선기독교도연맹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만남과 교류 통로 개설 등의 합의한다. 등의 내용으로 구성되어졌다.
      도잔소 에큐메니칼 정책협의회를 통해서 기초되어져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의 선언”(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통일선언문)을 통해서 그 열매가 맺히고, 인천에서 개최된 “세계기독교한반도평화협의회”에서 국제적인 지원 승인을 받게 된다. 더 나아가 1989년 8월 모스크바에 개최된 세계교회협의회의 중앙위원회가 남북교회의 대표 입회하에 글리온 선언문의 주요골격을 내용으로 하는 세계교회협의회자체의 “한반도 평화 통일 정책 선언문”을 채택하게 된다.
      이러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조선기독교도연맹 그리고 세계교회협의회의 협력과 노력은 남북한의 반공이데올로기와 적개심을 상호 화합과 평화적 통일을 향한 열망을 품는 기회를 만들었다.
      4. 80년대 한국교회의 통일에 대한 보수적 교회 지도자들의 대응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의 선언”이 1988년 2월 29일에 발표되자, 한 달 후 한국복음주의협의회는 “NCCK의 통일론에 대한 복음주의 입장”을 발표한다. 한국복음주의협의회의 입장을 밝힌 이 성명서는 88년 당시 남한교회의 주류를 이루는 보수적 성향의 기독교인들이 바라보는 남북화해와 통일에 대한 인식을 제법 알 수 있다.
      남한교회 안에 진보세력과 보수 세력 모두 남북의 통일은 화해를 통한 평화적 통일이 되어야 한다는 데는 전혀 이견이 없으나 그 방법론에 있어서는 서로가 많은 차이가 있었다. 가장 큰 차이는 바로 북한의 공산당과 조선기독교도연맹에 대한 신뢰의 문제였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대표하는 남한 내 진보성향의 교회들은 먼저 서로를 신뢰하고 그 신뢰 위에서 남북이 서로 화해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의 공산당에 대해서도 섣부른 판단은 자제 했고, 대화의 상대인 조선기독교도연맹을 최대한 존중하며, 매 만남 가운데 그들과 그들 정부의 주장을 많은 부분 양보 가운데 수용했다. 하지만 남한 내의 보수 성향을 가진 기독교인들은 과거 자신들이 공산당에게 당했던 한(恨)과 상처로 인해서 공산당을 신뢰할 수 없었다. 오히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WCC 안에 공산주의자들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남한의 보수성향의 교회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945년 해방과 한국전쟁 전후의 교회의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 역사적인 선이해가 없이 자신이 서 있는 방향만이 옳다고 주장할 때 그 속에는 화해와 통일이 아닌 갈등과 분열이 더욱 커지게 된다.
      본 논문에서는 조선기독교도연맹의 역사를 논하면서 1945년에서 1953년까지의 한국교회와 북한 공산당의 갈등을 살펴보았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한반도에서 정치적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단체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나마 전국적 조직을 가진 기독교만이 그 역할을 감당할 수 있었으나 그마저 일제의 탄압과 박해로 인해서 조선예수교장로회의 1938년 신사참배 결의를 정점으로 친일과 어용(御用)세력들이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1945년 해방은 우리민족에게 참으로 귀하고 복된 소식이었으나 해방을 바라고 기다리기만 했지 누구도 그 해방 이후를 생각하고 준비를 하지는 못했었다. 이로 인해서 한반도는 정치적 공백 상태로 빨려 들어갔고, 미소의 군정 아래 치열한 정치적 헤게모니의 싸움이 진행되었다.
      이 싸움의 한 가운데 조선의 교회가 서 있었다. 조선교회의 태생 상 복음을 전해준 선교사들의 나라인 미국에 우호적일 수밖에 없었고, 더욱이 일제에 맞서 함께 싸웠던 시절부터 무신론과 유물론을 주장하는 공산당과는 함께 할 수 없다는 인식이 교회 안에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당시의 기독교인들은 일정 수준 이상의 교육을 받은 지식층이었기 때문에 사회적인 영향력도 아주 컸다. 이런 배경 아래서 공산당과 교회는 철저한 헤게모니의 갈등을 하게 된다. 물론, 교회가 소련군정의 후원을 받아 북한사회를 대표하는 공산당에 정치적으로 이길 방법은 없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부터 복음의 진리를 위해서 당당히 권력과 맞선 경험이 있는 북한의 교회인지라 공산당의 압력에 쉽게 굴복하지 않았다. 이에 공산당은 교회를 혁명을 방해하는 반동세력으로 규정 철저한 탄압과 박해를 시작했고, 한편으로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조선기독교도연맹을 창설해서 또 다른 회유를 진행했다. 신앙의 진리를 지키려는 북한교회의 성도들은 신앙의 순수성을 포기하거나 죽거나 남한으로 내려오는 길 밖에 없었다.
      곧이어 일어난 한국전쟁은 지난 이전의 그 어떤 갈등 양상과도 비교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전쟁을 통해서 남과 북은 서로 원수가 되었고, 점령과 학살을 통해서 남측끼리도, 북측끼리도 믿을 수 없고, 받아 들이수도 없는 한(恨)의 상처를 가슴 깊은 곳에 묻어두게 된다. 이러한 수난과 상처는 그 어떤 세력보다도 한국교회에게 가혹하고 혹독했다. 평양의 예루살렘이라는 칭송을 들었던 북한 교회는 공산군에 의해서 초토화되었고, 그를 피해서 월남한 북한 교회 사람들은 더 이상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을 수 없었다. 그들은 공산주의를 사단주의 혹은 이단주의로 규정하고, 그 어떤 관용과 자비도 베풀어서는 안 되는 존재로 규정했다. 이로서 한국교회 안에서 반공이데올로기라는 괴물이 등장하게 된다. 때때로 교회의 반공이데올로기는 정적을 죽이는 무기로도 사용되었고, 때로는 지배이데올로기를 받쳐 주는 버팀목 역할도 해주었다. 그런 관계 속에서 교회의 주류는 점점 보수화 되어져 갔다. 물론, 그 가운데 인적?물적 자원의 부흥을 덤으로 얻었지만 이것은 교회의 생명을 죽이는 독(毒)으로 빠른 시간 안에서 자라났다.
      남한교회 안에서 주류를 이루는 보수성향의 교회들의 남북통일에 대한 인식을 살펴봄에 있어서 주목할 만한 인물로 대한예수교 장로회의 73대 총회장과 한국기독교총연합회장을 지낸 고(故) 임옥목사가 있다. 임옥목사는 1921년 5월 14일 평안남도 안주에서 태어났고, 북한에서 공산당과 교회의 갈등이 정점을 이룰 무엽 평양신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는 공산당에 쫓겨서 떠돌이 신세로 남한으로 내려와 부산에서 장로회신학교를 마쳤고, 군종목사로 한국전쟁의 한 가운데 서있었던 목회자였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공산당을 경험했고, 그 공산주의 사상 가운데 있는 반기독교적인 사악함을 체험했던 사람이었다.
      임옥은 거의 해마다 6·25전쟁 기념주일과 8·15광복절 기념 주일에 ‘남북한의 분단과 통일’에 관하여 설교를 했다. 그 내용은 한국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전후세대에게 전쟁의 참상, 분단의 원인과 과정,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서 설교했다. 때로는 그의 설교 자체가 과거 정부들이 주장하던 반공이데올로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자신이 보았고, 체험했기에 그 확신은 명확했다. 그는 6·25전쟁은 북한이 도발한 것이므로, 언제든 기회만 있다면 북한은 다시금 전쟁을 일으킬 것이고, 전쟁의 참혹함을 다시 경험치 않으려면 공산당들의 술수에 말려들지 말아야 됨을 역설했다.
      임희국은 임옥목사의 생애와 목회 그리고 신학사상을 모아 집필한 『작은 돌 큰 울림』에서 전쟁에 대한 임옥의 설교는 보수적 기독교의 시국 인식을 대변하며, 반공이 국시가 되고 반공이념이 사회의 이념을 통합하여 국민의 정신적 통일을 가져오게 한 점을 대변하였다고 쓰고 있다. 또한 그의 설교 속에는 국가주의도 함께 묻어 있으며, 이에 임옥의 설교를 통하여 반공이데올로기가 한국개신교 안에서 어떻게 형성되고 굳어졌는지 살펴 볼 수 있다고 적고 있다.
      임옥목사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남한교회의 보수성향을 가진 목회자들은 군사정권과 민주화운동의 당위성보다는 한국전쟁과 같은 비극이 이 땅에 다시는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는데 더욱 집중하였다. 그래서 당시의 군사정권과 그들의 독재에는 침묵했다. 또한 80년대의 민주화운동에 대해서도 결코 곱게 보지 않았다. 그는 북한 체제의 목적은 오직 남한의 공산화이고, 남한에서 혁명세력이 구축되면 제 2의 6·25전쟁이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전쟁이 다시 발발한다면 남한과 북한이 모두 함께 깡그리 폐허가 될 것이고, 그 동안 남한이 피땀 흘려 건설한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변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이 민족은 세계에서 가장 비참하게 될 것이라고 설교했다. 그걸 막기 위해서는 북한의 조종을 받는 혁명세력이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보았다.
      바로 이 관점이 남한교회 안에서 주류 보수 세력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를 중심으로 하는 진보세력간의 인식의 갈등이었다. 임옥을 비롯한 보수성향의 기독교인들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WCC가 북한교회에 속절없이 양보하는 모습이 불안하기만 했다. 더 나아가 민주화세력으로 총칭되는 학생운동단체, 노동운동단체, 그리고 정치 단체에 이어 교회까지 반정부투쟁의 주체가 되어 북한의 혁명세력으로 전략할 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있었다.
      그들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조선기독교도연맹이 계속해서 만나는 것이 북한의 정치적 선택으로 해석했다. 그리고 북한에 대한 화해와 통일에 대한 대안은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고 북한 선교를 하는 일이다.”라고 주장했다.
      북한교회와의 만남에 대해서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보기는 했지만 임옥목사를 비롯하여 보수성향의 교회지도자들이 가지고 있던 북한에 대한 한(恨)과 불신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북한교회와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여러 노력과 활동 가운데 조금씩 변화되어져 갔다. 88년 이후 보수성향의 교회자도자들 안에서도 통일과 화해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임옥목사 역시 교단의 총회장을 맡고 있을 1989년부터는 “남북의 평화적 통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는 의심과 불신의 관점이었다면 이제는 통일의 관점으로 남과 북의 교회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는 남북평화통일을 위한 교회의 자세에 관하여 여섯 가지를 제시했다.
      1. 북한 주민들에게 ‘베푸는 자세’로 임하되 북한에 정치적 변화가 오도록 돕고 당면해 있는 어려운 경제를 풀어주도록 해야 한다.
      2. 복음의 능력 안에서 교회가 이 땅에 정의가 구현되고 평화가 정착되도록 노력해야 하는데, 그 핵심 알맹이가 죄 용서에 있다. 교회는 또한 도덕적인 힘을 쌓아야 한다.
      3. 교회는 사랑의 복음으로 경제의 성장과 분배가 균형 있게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4. 민족의 통일을 위해서도 분열된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가 이루어져야 한다.
      5. 북한의 체제가 무너질 것이 대비한 남북의 화해와 교류, 그리고 대화가 모색되어야 한다.
      6. 참된 민족통일은 오직 복음의 전파에서 오므로, 교회는 먼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1980년대를 지나오면서 한반도의 화해와 평화적 통일을 위한 교회의 접근은 진보와 보수의 경험과 이해는 달랐지만 서서히 그 간격을 좁혀가고 있음은 확실했다. 그 안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WCC의 기도와 노고도 있었을 것이며, 보수성향의 교회의 참여와 자기혁신 역시 너무나 소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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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북(北)과 해외동포 기독자대화’에서 도잔소협의회 까지 1980년대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위한 열망은 먼저 남북의 당사자들이었던 우리 민족 내부에서 부터 그 싹이 커져 나갔다. 남북의...

      1. ‘북(北)과 해외동포 기독자대화’에서 도잔소협의회 까지
      1980년대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위한 열망은 먼저 남북의 당사자들이었던 우리 민족 내부에서 부터 그 싹이 커져 나갔다. 남북의 기독교인들이 함께 만날 수 있었던 첫 기회는 1981년과 1982년에 있었던 ‘북(北)과 해외동포 기독자대화’였다. 이는 독일교회의 후원으로 제 4차 한독교회협의회 공동성명이 발표되고, 남한정부의 통제로 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해외동포 기독인들이 주도하여 북한교회의 대표들이었던 염국렬, 김득렬, 고기준, 전금철, 허영숙 등과 1차는 빈에서, 2차는 헬싱키에서 만나고 남북 화해와 통일 그리고 통일을 위한 기독자의 자세에 대해서 대화를 가졌다.
      1·2차의 공동성명과 “해·내외 동포들에게 보내는 호소문”에서 그 성향이 드러나듯이 “북(北)과 해외동포 기독자 대화”에는 남한의 민주화를 주장하는 혹은 반정부적인 성향을 가진 해외교포들(목사, 교수, 언론인, 예비역장성)과 북한의 정치인, 종교인이 주로 참석하였다.
      남한정부와 종교계 일각에서 북한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에 의해서 짜인 각본이라고 비난을 하기도 했지만, 주최자들은 “조국통일을 파괴하고 민족 간의 화해 대신 적대관계를 조성하는 우리나라의 반공적 친미적 기독교”에 통일대화를 자극시켜 준모임으로 평가하였다. 서로의 상반된 주장들과 조금은 도를 넘은 과격한 표현들이 이들의 만남 가운데서 드러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1년부터 1991년 까지 열린 6번의 만남은 “분단의 상처를 극복하려는 모험”이자 남북간 종교교류의 “원형”또는 “원동력”을 제공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북(北)과 해외동포 기독자 대화’가 개최 될 당시 한국교회는 WCC를 통하여 그 어떤 도움이나 간여를 하지 말 것을 권고한다. 이유는 그 대화의 장이 북한의 일방적인 정치선전의 장이 될 것임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회원국가 교회의 요청에 의해서 WCC 역시 비공식적인 후원에 대한 논란은 있었지 다른 관여는 하지 않았다.
      WCC의 한반도에 대한 관심은 1983년 제 6차 WCC 총회를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본 총회에서 ‘정의, 평화, 창조의 보전’(Justice, Peace, Integrity of Creation: JPIC)을 결의하였는데, 이는 과거 미·소 양 강대국에 의해서 민족이 나뉘고, 좌우이념의 포로가 되어 민족 상쟁의 전쟁을 거친 한반도에 세계교회의 관심을 갖게 했다. 무엇보다 한반도는 미·소 냉전의 제 1전선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었고, 서로에 대한 적개심과 한(恨)이 깊숙이 도사리고 있었으며, 독재정권과 군사정권의 시퍼런 칼날 가운데 민중의 숨통이 틀어 막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급속한 개발 정책으로 경제는 발전하였지만 환경의 문제가 필연적으로 제기 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한국교회와 세계교회는 ‘정의, 평화, 창조의 보전’(Justice, Peace, Integrity of Creation: JPIC)’의 상징적 지역 (Symbalic Local Area)로서 동북아시아의 한반도에 관심을 가졌다.
      특별히 WCC는 남한과 북한 교회의 화해와 만남을 통한 그리스도 안에서의 통일을 추구하기로 하고, 남한교회에서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를 북한교회 안에서는 조선기독교도연맹을 상대로 중재자로서 화해의 역할을 감당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1948년 세계교회협의회 제 1차 총회인 암스테르담 총회 때부터 김관석(당시 NCCK총무)를 옵저버로 참석하게 했고 또 청년대표 엄요섭을 참석하게 할 정도로 이미 서로에 대한 연합이 잘 되고 있었다. 장로교회는 세계교회협의회 제 1차 총회 때 회원교단으로 가입하였고, 그 후 장로교단은 세계교회협의회 안에서의 활동 문제를 놓고 합동과 통합으로 분열하는 가운데서도 세계교회와 국제적으로 교류를 지속적으로 하였다.
      이에 비해 북한은 1973년 유엔 산하 세계보건기구에 가입하고 제네바에 북한 대표부를 구성한 후 제네바 유엔사무국 북한 대표부를 통해 세계교회협의회에 1974년 2월 2일과 2월 3일 작성된 두 통의 편지를 보냄과 동시에 그 편지를 전해 왔던 북한 대표부의 영사 권태준과 2등 서기관 박일부를 통해서 북한의 조선기독교도연맹이 세계교회협의회의 회원으로 가입 할 수 있는지를 타진함으로 그 관계가 발전하기 시작했다.
      1983년 이전에는 세계교회협의회에서도 남한교회를 의식해서 북한교회와의 협력 관계를 공론화 시키는데 거리를 두고 있었고, 북한교회 측의 요청에는 원론적인 입장에서 정리하였다.
      조선기독교도연맹이 근 30여 년간의 침묵을 깨고 국제기구인 세계교회협의회에 접근한 것을 두고 여러 가지 의견이 분분 했으나 크게 3가지 관점에서 그 의도를 파악 할 수 있다. 그 첫째는 남한사회의 경제적 발전과 함께 국제사회에서 그 영향력이 커져 가는 남한에 대한 대응으로서 세계교회협의회를 통해서 서방 세계와의 관계를 개선하고자 하는 북한 당국의 의도가 있었으리라 유추되어 진다. 이러한 유추 가운데는 공산당 정부의 역할이 없이는 조선기독교도연맹이 단독으로 대외사업을 하기란 불가능 할 것이라는 북한사회의 특수성을 고려해서다. 두 번째는 세계교회협의회를 남한에 대한 정치적 선전의 장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라는 견해이다. 광주항쟁으로 부터 시작한 남한 사회의 민주화 운동과 반정부 투쟁 가운데 그 중심을 이루고 있던 기독교 민주화세력을 우회적으로 지원하고, 국제 사회 안에 군사정부의 비정통성과 야만성을 계속해서 폭로하겠다는 정치적 계산이 있었을 것이다. 더욱이 에큐메니칼 운동을 하는 세계교회협의회에는 북한의 후원국 역할을 하는 러시아의 정교회가 그 회원으로 가입해 있었기 때문에 협력 관계에서 우호적일 수 있었다. 세 번째는 순수하게 남북의 화해를 위한 시도로서 민간 차원의 대화와 화해를 통해서 서로를 알아가길 원했다는 것이다. 또한 북한 사회 안에서 조선기독교도연맹으로 대표되는 북한 교회의 역량이 커졌다는 것도 또 다른 이유이다. 아마도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이유가 모두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조선기독교도연맹과 세계교회협의의 교류가 시작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 남북은 서로 철저하게 반목했고, 남북대화의 모든 주도권은 양측 정부만이 가질 수 있었기 때문에 남북의 교회는 민간 차원의 교류이기도 함과 동시에 양 정부의 특사 역할도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진보진영에 속하고, 당시 반정부투쟁을 하던 민주화운동의 지도부가 함께 교류하고 있었지만 그 가운데서도 남한정부의 입장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2. 도잔소협의회로 부터 글리온 회의까지
      본격적인 WCC의 남북교회의 화해와 통일을 위한 대화의 중재는 84년 10월 29일에서 11월 2일까지 일본 도쿄 근처의 도잔소국제센터에서 열린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정의협의회’를 정점으로 세계교회의 참여와 후원을 통해서 가속도를 붙이게 되었다. 이 회의에 북한은 끝내 참여하지 않았지만 서신을 통해서 도잔소협의회에서 결의된 내용에 대해서 찬성하며, WCC와 세계교회들이 중재되어 남북교회의 만남을 가질 수 있기를 원한다는 뜻을 전달해 왔다.
      이에 도잔소협의회는 앞으로의 한반도 화해와 평화적 통일을 위한 청사진이 필요함을 느끼게 되고, “분쟁의 평화적 해결에 대한 전망”이라는 제목의 보고와 건의안을 공식적으로 채택한다. 이 보고서에는 먼저 도잔소 협의회의 준비과정과 진행과정을 소개하고, 준비에 도움을 제공한 아시아기독교협의회(CCA), 일본기독교협의회(NCCJ) 그리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세계교회협의회 회원교단들과의 면밀한 논의를 통해 진행되어야 함을 밝혔다.
      그런 다음 동북아시아의 한반도가 어떻게 긴장지대를 이루고 있으며, 그 긴장의 초점에 남북한이 있다는 사실을 역사적 기술을 통해서 기록하였다. 또한 분단의 인명피해와 군사화 된 분단에서 오는 민중의 한(恨)을 기술했고, 분단세력들이 만들어 놓은 서로에 대한 적개심으로 인하여 미움과 오해가 계속 커지고 있음을 밝혔다. 하지만 이 안에 교회의 연합운동을 통하여 새로운 지평을 열 수 있음을 설득하고, 이를 위한 교회의 과제를 부각했다. 더욱이 남과 북의 신뢰확보를 위해서 정확한 정보뿐 아니라 북한과의 공식적인 접촉을 더 많이 가져 서로에 대해서 알 수 있도록 하자는데 모두가 찬성하였다. 특별히 교회가 이 일을 위해서 해야 할 일 중에는 1. 인도주의적 관심, 2 통일논의에 대한 대중적 참여유도, 3. 다른 상황이 주는 교육을 통하여 서로를 배움, 4. 서로에 대한 적대심 극복, 5. 여성·청년의 참여의 증대, 남북의 군비경쟁 저지 등의 우선 과제를 정하였다.
      도잔소협의회의 “분쟁의 평화적 해결에 대한 전망”이라는 선언은 세계교회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연합으로 인해서 도출되었고, 북한 조선기독교도연맹에 의해서 긍정적인 화답을 받아 본격적으로 추진되게 되었다.
      먼저 세계교회와 한국교회는 북한에 정말로 교회가 있으며, 기독교인이 존재하는가에 대해서 물음을 제기했다. 그래서 WCC는 직접 북한을 방문하여 그것을 확인하기로 했다. 이에 1985년 세계교회협의회 국제위원회는 나이난 코쉬(Ninan Koshy)과 바인 개르트너(Erich Weing?rtner)를 대표로 해서 북한교회를 방문하게 한다. 또한 1986년에는 미국교회협의회의 대표들이 북한교회를 방문하고 그 진정성을 살피고 앞으로의 남북교회의 화해에 함께 동참하기로 결정한다. 1987년에는 일본기독교협의회가 한 달 후에는 미국교회협의회가 2차로 북한을 방문하고 1987년에 WCC의 직원들로 구성된 대표단이 다시금 북한교회를 방문하고 서로에 대한 에큐메니칼의 방법들에 대해서 나눔을 갖는다. 이러한 북한교회의 방문 안에는 남한 사람들도 세계교회협의회 직원이나 미국교회협의회의 회원으로서 함께 북한교회를 방문하고 돌아와 그 소식을 전해주고 향후 세계교회협의회를 통해 북한교회의 대표단과 만나는 문제에 대해서 조율하게 된다.
      3. 글리온 회의에서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의 선언”까지
      도잔소협의회에서 그려진 남북교회의 화해와 평화적 통일을 위한 만남은 1996년 ‘제 1차 글리온 회의’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1986년 9월 2일에서 5일까지 남북교회의 대표단은 스위스 글리온에서 “평화에 대한 기독교적 관심의 성서적·신학적 기반”(Biblical and Theological Foundation of Christian Concern for Peace)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세미나를 갖는다.
      주최자인 WCC나 당사자들인 남북의 교회 대표들도 어떤 상황이 벌어질 줄 알 수 없었고, 오직 그리스도의 화해의 사역에 의지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제 1차 글리온 회의’에서는 서로의 입장에 대한 결론을 도출하기 보다는 서로를 이해하고 만남을 통한 교류를 넓히는데 초점이 맞추어졌다. 특별히 마지막 날에 남북교회의 대표들이 성만찬으로 함께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나누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와 화해의 상징이었고, 막힌 담을 허무는 첫 울림이었다.
      1988년 11월 23일에서 25일까지 제 2차 글리온 회의가 1차 때와 같은 장소에서 열렸다. 이 회의에는 1차와는 달리 서로에 대한 친밀도가 있는 상황이었고, 그 나눔 역시 화기애애했다. ‘제 2차 글리온’회의를 통해서 남북교회가 함께 추구할 수 있는 글리온 선언이 발표되었다. 서로의 주장과 의견이 팽팽히 맞서 선언문의 도출까지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이 선언을 통하여 남북교회의 새로운 이정점을 세울 수 있었다. 특별히 1995년을 희년으로 삼고 남과 북이 통일을 향하여 실제적인 역할을 하기로 협의했다.
      제 2차 글리온 회의에 앞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동년 2월 29일에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의 선언"을 발표하는데 이 선언에는 1) 1995년을 평화통일 희년으로 선포한다. 2) 평화통일을 위한 ‘조국통일 3대 원칙’인 ‘자주. 평화. 민족 대 단결’을 확인하고 현재의 양 체제의 존속이 보장되는 평화공존의 원칙에서 통일국가를 세우는 노력을 한다. 3) 통일의 주체로 남·북 민중 당사자임을 확인하고 분단 고정 정책을 배제한다. 4) 상호신뢰 회복을 위한 우선순위를 채택한다. 5) 불가침을 선언하고 군축 및 비핵화를 이루며 모든 외세는 철수한다. 6) 이산가족 재회를 포함한 교류와 군사·정치 대결 해소를 위한 동시적 접근을 이룬다. 7) 조선기독교도연맹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만남과 교류 통로 개설 등의 합의한다. 등의 내용으로 구성되어졌다.
      도잔소 에큐메니칼 정책협의회를 통해서 기초되어져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의 선언”(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통일선언문)을 통해서 그 열매가 맺히고, 인천에서 개최된 “세계기독교한반도평화협의회”에서 국제적인 지원 승인을 받게 된다. 더 나아가 1989년 8월 모스크바에 개최된 세계교회협의회의 중앙위원회가 남북교회의 대표 입회하에 글리온 선언문의 주요골격을 내용으로 하는 세계교회협의회자체의 “한반도 평화 통일 정책 선언문”을 채택하게 된다.
      이러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조선기독교도연맹 그리고 세계교회협의회의 협력과 노력은 남북한의 반공이데올로기와 적개심을 상호 화합과 평화적 통일을 향한 열망을 품는 기회를 만들었다.
      4. 80년대 한국교회의 통일에 대한 보수적 교회 지도자들의 대응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의 선언”이 1988년 2월 29일에 발표되자, 한 달 후 한국복음주의협의회는 “NCCK의 통일론에 대한 복음주의 입장”을 발표한다. 한국복음주의협의회의 입장을 밝힌 이 성명서는 88년 당시 남한교회의 주류를 이루는 보수적 성향의 기독교인들이 바라보는 남북화해와 통일에 대한 인식을 제법 알 수 있다.
      남한교회 안에 진보세력과 보수 세력 모두 남북의 통일은 화해를 통한 평화적 통일이 되어야 한다는 데는 전혀 이견이 없으나 그 방법론에 있어서는 서로가 많은 차이가 있었다. 가장 큰 차이는 바로 북한의 공산당과 조선기독교도연맹에 대한 신뢰의 문제였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대표하는 남한 내 진보성향의 교회들은 먼저 서로를 신뢰하고 그 신뢰 위에서 남북이 서로 화해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의 공산당에 대해서도 섣부른 판단은 자제 했고, 대화의 상대인 조선기독교도연맹을 최대한 존중하며, 매 만남 가운데 그들과 그들 정부의 주장을 많은 부분 양보 가운데 수용했다. 하지만 남한 내의 보수 성향을 가진 기독교인들은 과거 자신들이 공산당에게 당했던 한(恨)과 상처로 인해서 공산당을 신뢰할 수 없었다. 오히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WCC 안에 공산주의자들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남한의 보수성향의 교회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945년 해방과 한국전쟁 전후의 교회의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 역사적인 선이해가 없이 자신이 서 있는 방향만이 옳다고 주장할 때 그 속에는 화해와 통일이 아닌 갈등과 분열이 더욱 커지게 된다.
      본 논문에서는 조선기독교도연맹의 역사를 논하면서 1945년에서 1953년까지의 한국교회와 북한 공산당의 갈등을 살펴보았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한반도에서 정치적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단체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나마 전국적 조직을 가진 기독교만이 그 역할을 감당할 수 있었으나 그마저 일제의 탄압과 박해로 인해서 조선예수교장로회의 1938년 신사참배 결의를 정점으로 친일과 어용(御用)세력들이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 1945년 해방은 우리민족에게 참으로 귀하고 복된 소식이었으나 해방을 바라고 기다리기만 했지 누구도 그 해방 이후를 생각하고 준비를 하지는 못했었다. 이로 인해서 한반도는 정치적 공백 상태로 빨려 들어갔고, 미소의 군정 아래 치열한 정치적 헤게모니의 싸움이 진행되었다.
      이 싸움의 한 가운데 조선의 교회가 서 있었다. 조선교회의 태생 상 복음을 전해준 선교사들의 나라인 미국에 우호적일 수밖에 없었고, 더욱이 일제에 맞서 함께 싸웠던 시절부터 무신론과 유물론을 주장하는 공산당과는 함께 할 수 없다는 인식이 교회 안에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당시의 기독교인들은 일정 수준 이상의 교육을 받은 지식층이었기 때문에 사회적인 영향력도 아주 컸다. 이런 배경 아래서 공산당과 교회는 철저한 헤게모니의 갈등을 하게 된다. 물론, 교회가 소련군정의 후원을 받아 북한사회를 대표하는 공산당에 정치적으로 이길 방법은 없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부터 복음의 진리를 위해서 당당히 권력과 맞선 경험이 있는 북한의 교회인지라 공산당의 압력에 쉽게 굴복하지 않았다. 이에 공산당은 교회를 혁명을 방해하는 반동세력으로 규정 철저한 탄압과 박해를 시작했고, 한편으로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조선기독교도연맹을 창설해서 또 다른 회유를 진행했다. 신앙의 진리를 지키려는 북한교회의 성도들은 신앙의 순수성을 포기하거나 죽거나 남한으로 내려오는 길 밖에 없었다.
      곧이어 일어난 한국전쟁은 지난 이전의 그 어떤 갈등 양상과도 비교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전쟁을 통해서 남과 북은 서로 원수가 되었고, 점령과 학살을 통해서 남측끼리도, 북측끼리도 믿을 수 없고, 받아 들이수도 없는 한(恨)의 상처를 가슴 깊은 곳에 묻어두게 된다. 이러한 수난과 상처는 그 어떤 세력보다도 한국교회에게 가혹하고 혹독했다. 평양의 예루살렘이라는 칭송을 들었던 북한 교회는 공산군에 의해서 초토화되었고, 그를 피해서 월남한 북한 교회 사람들은 더 이상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을 수 없었다. 그들은 공산주의를 사단주의 혹은 이단주의로 규정하고, 그 어떤 관용과 자비도 베풀어서는 안 되는 존재로 규정했다. 이로서 한국교회 안에서 반공이데올로기라는 괴물이 등장하게 된다. 때때로 교회의 반공이데올로기는 정적을 죽이는 무기로도 사용되었고, 때로는 지배이데올로기를 받쳐 주는 버팀목 역할도 해주었다. 그런 관계 속에서 교회의 주류는 점점 보수화 되어져 갔다. 물론, 그 가운데 인적?물적 자원의 부흥을 덤으로 얻었지만 이것은 교회의 생명을 죽이는 독(毒)으로 빠른 시간 안에서 자라났다.
      남한교회 안에서 주류를 이루는 보수성향의 교회들의 남북통일에 대한 인식을 살펴봄에 있어서 주목할 만한 인물로 대한예수교 장로회의 73대 총회장과 한국기독교총연합회장을 지낸 고(故) 임옥목사가 있다. 임옥목사는 1921년 5월 14일 평안남도 안주에서 태어났고, 북한에서 공산당과 교회의 갈등이 정점을 이룰 무엽 평양신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는 공산당에 쫓겨서 떠돌이 신세로 남한으로 내려와 부산에서 장로회신학교를 마쳤고, 군종목사로 한국전쟁의 한 가운데 서있었던 목회자였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공산당을 경험했고, 그 공산주의 사상 가운데 있는 반기독교적인 사악함을 체험했던 사람이었다.
      임옥은 거의 해마다 6·25전쟁 기념주일과 8·15광복절 기념 주일에 ‘남북한의 분단과 통일’에 관하여 설교를 했다. 그 내용은 한국전쟁을 경험하지 않은 전후세대에게 전쟁의 참상, 분단의 원인과 과정,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서 설교했다. 때로는 그의 설교 자체가 과거 정부들이 주장하던 반공이데올로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자신이 보았고, 체험했기에 그 확신은 명확했다. 그는 6·25전쟁은 북한이 도발한 것이므로, 언제든 기회만 있다면 북한은 다시금 전쟁을 일으킬 것이고, 전쟁의 참혹함을 다시 경험치 않으려면 공산당들의 술수에 말려들지 말아야 됨을 역설했다.
      임희국은 임옥목사의 생애와 목회 그리고 신학사상을 모아 집필한 『작은 돌 큰 울림』에서 전쟁에 대한 임옥의 설교는 보수적 기독교의 시국 인식을 대변하며, 반공이 국시가 되고 반공이념이 사회의 이념을 통합하여 국민의 정신적 통일을 가져오게 한 점을 대변하였다고 쓰고 있다. 또한 그의 설교 속에는 국가주의도 함께 묻어 있으며, 이에 임옥의 설교를 통하여 반공이데올로기가 한국개신교 안에서 어떻게 형성되고 굳어졌는지 살펴 볼 수 있다고 적고 있다.
      임옥목사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남한교회의 보수성향을 가진 목회자들은 군사정권과 민주화운동의 당위성보다는 한국전쟁과 같은 비극이 이 땅에 다시는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는데 더욱 집중하였다. 그래서 당시의 군사정권과 그들의 독재에는 침묵했다. 또한 80년대의 민주화운동에 대해서도 결코 곱게 보지 않았다. 그는 북한 체제의 목적은 오직 남한의 공산화이고, 남한에서 혁명세력이 구축되면 제 2의 6·25전쟁이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전쟁이 다시 발발한다면 남한과 북한이 모두 함께 깡그리 폐허가 될 것이고, 그 동안 남한이 피땀 흘려 건설한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변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이 민족은 세계에서 가장 비참하게 될 것이라고 설교했다. 그걸 막기 위해서는 북한의 조종을 받는 혁명세력이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보았다.
      바로 이 관점이 남한교회 안에서 주류 보수 세력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를 중심으로 하는 진보세력간의 인식의 갈등이었다. 임옥을 비롯한 보수성향의 기독교인들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WCC가 북한교회에 속절없이 양보하는 모습이 불안하기만 했다. 더 나아가 민주화세력으로 총칭되는 학생운동단체, 노동운동단체, 그리고 정치 단체에 이어 교회까지 반정부투쟁의 주체가 되어 북한의 혁명세력으로 전략할 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있었다.
      그들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조선기독교도연맹이 계속해서 만나는 것이 북한의 정치적 선택으로 해석했다. 그리고 북한에 대한 화해와 통일에 대한 대안은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고 북한 선교를 하는 일이다.”라고 주장했다.
      북한교회와의 만남에 대해서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보기는 했지만 임옥목사를 비롯하여 보수성향의 교회지도자들이 가지고 있던 북한에 대한 한(恨)과 불신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북한교회와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여러 노력과 활동 가운데 조금씩 변화되어져 갔다. 88년 이후 보수성향의 교회자도자들 안에서도 통일과 화해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임옥목사 역시 교단의 총회장을 맡고 있을 1989년부터는 “남북의 평화적 통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는 의심과 불신의 관점이었다면 이제는 통일의 관점으로 남과 북의 교회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는 남북평화통일을 위한 교회의 자세에 관하여 여섯 가지를 제시했다.
      1. 북한 주민들에게 ‘베푸는 자세’로 임하되 북한에 정치적 변화가 오도록 돕고 당면해 있는 어려운 경제를 풀어주도록 해야 한다.
      2. 복음의 능력 안에서 교회가 이 땅에 정의가 구현되고 평화가 정착되도록 노력해야 하는데, 그 핵심 알맹이가 죄 용서에 있다. 교회는 또한 도덕적인 힘을 쌓아야 한다.
      3. 교회는 사랑의 복음으로 경제의 성장과 분배가 균형 있게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4. 민족의 통일을 위해서도 분열된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가 이루어져야 한다.
      5. 북한의 체제가 무너질 것이 대비한 남북의 화해와 교류, 그리고 대화가 모색되어야 한다.
      6. 참된 민족통일은 오직 복음의 전파에서 오므로, 교회는 먼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1980년대를 지나오면서 한반도의 화해와 평화적 통일을 위한 교회의 접근은 진보와 보수의 경험과 이해는 달랐지만 서서히 그 간격을 좁혀가고 있음은 확실했다. 그 안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WCC의 기도와 노고도 있었을 것이며, 보수성향의 교회의 참여와 자기혁신 역시 너무나 소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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