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일제가 국가주의를 강화한 1930년대를 배경으로 전개된 조선예수교장로회의 역사를 서술하였다. 필자는 1930년대 장로교회 역사에서, 장로교회가 당시 국가와 어떤 관계를 맺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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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 대학원, 2007
학위논문 (박사) -- 장로회신학대학교 대학원 , 역사신학 , 2007
2007
한국어
275.19 판사항(21)
서울
iii, 353p.; 30cm
권말부록으로 "1930년대 조선예수교장로회의 주요 통계 분석", "조선예수교장로회의 노회 변천과정",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상비부 변천 과정" 수록 영문 초록 수록
참고문헌: p.333-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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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일제가 국가주의를 강화한 1930년대를 배경으로 전개된 조선예수교장로회의 역사를 서술하였다. 필자는 1930년대 장로교회 역사에서, 장로교회가 당시 국가와 어떤 관계를 맺는가 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문제로 여겼으며, 30년대 장로교회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하였다. 다른 말로 하면 국가지상주의를 앞세운 국가와 어떤 관계를 맺느냐 하는 문제는 30년대 장로교회가 그 사명을 이룰 수 있느냐 없느냐를 좌우하는 것이었다.
필자는 먼저 30년대의 시대적 의미를 논했다. 30년대는 국가의 영향력이 극도로 강화된 시기였다. 국가가 최고의 자리를 차지한 국가지상주의 시대였다. 모든 사람들이 매 순간 국가를 위해 살아야 했고, 사생활은 용납되지 않았다. 일제는 1930년대에 침략전쟁을 계속해서 확대해 갔다. 일제는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일본뿐만 아니라 식민지 조선에서도 국가지상주의를 강화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국민의식을 주입하고, 국가를 위해서 희생할 것을 요구하였다. 당시 장로교회가 상대해야 할 국가가 바로 그 일본제국이었다. 당시 국가는 교회에게 이전 시대와 다른 관계, 즉 국가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요구하였다. 따라서 장로교회는 국가와 이전 시대와 다른 관계를 가져야 했다. 필자는 1930년대의 장로교회와 일제의 관계가 어떠하였는지를 보다 분명히 알기 위해, 1930년대 이전에는 장로교회가 국가와 어떤 관계를 가졌는지를 논했다.
1930년대 이전에 장로교회는 여러 국가, 즉 조선, 대한제국, 일본제국과 여러 종류의 관계를 맺었다. 교회 설립 초기부터 1905년까지는 국가와 친밀한 관계를 가졌고, 이후 3.1운동까지는 국가와 적대적인 관계를 가졌으며, 3.1운동 이후 만주사변 이전까지는 다소 중립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장로교회는 친국가적인 교회, 반국가적인 교회, 중립적인 교회 등 여러 가지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경험을 기초로 1930년대에 국가주의를 강화하는 일제와 보다 성숙한 관계를 가질 것으로 기대되었다.
일제는 이미 메이지유신을 전후로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확립하고 이를 통해 국가주의를 형성하고 강화하기 시작하였다. 메이지유신을 추진한 군부 세력은 후기 미토학(水戶學)의 주장을 받아들여, 일본이 ‘만세일계의 천황이 통치하는 유일한 나라’이기에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국가이고 세계를 제패할 수 있는 국가라고 주장하였다. 이것이 일본의 국체(國體)이다. 나아가 사람들에게 이러한 국체를 가진 나라의 국민으로서 국가에 충성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 국체 사상은 번(蕃)을 폐지하고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를 이루는 기초가 되었다.
메이지유신의 주역들은 또한 국가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신도(神道)를 이용하였다. 신도 국교화 정책이나 신도 비종교화 정책을 통해서 천황을 신격화하므로 국가지상주의 체제를 공고히 하였다. 천황이 곧 국가이기에 천황의 신격화는 곧 국가의 신격화이다. 신도 국교화 정책이 실패하자 그 대안으로 제시된 신도 비종교화 정책은 신도를 다른 종교보다 한 단계 높은 위치에 두는 정책이었다. 신도를 인정하지 않고는 어느 종교도 존재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메이지유신 세력은 신도를 모든 국민이 당연히 믿어야 할 종교로 만들어, 이를 국가신도(國家神道)라고 불렀다. 일제는 결국 메이지유신을 통해 ‘종교적 국가주의’ 체제를 확립하였다.
1910-20년대 일본에서는 다이쇼 치하에서 정당정치와 민주주의가 잠시나마 꽃을 피웠는데, 오히려 그 시기에 경제침체와 국가위상의 하락을 경험하였다. 정당정치를 담당한 세력들의 부패와 무능 때문이었다. 1930년대에 들어 이러한 정당세력을 몰아내고 군부독재체제를 세우기 위한 쇼와유신(昭和維新) 운동이 전개되었다. 1931년의 3월 사건이 그 시작이었고, 이어서 만주사변, 10월 사건, 혈맹단 사건, 5.15 사건, 2.26 사건 등 군인들이 주도한 폭력적인 사건들이 발생하면서 정당정치는 몰락하고 군부세력이 정권을 잡았다. 특히 1935년 초부터 시작된 국체명징운동(國體明徵運動)은 미노베(美濃部達吉)의 천황기관설을 배격하고 천황을 신격화하였으며, 이를 통해 일본은 신이 다스리는 세계 유일의 국가라고 주장하였다. 이것이 곧 국체(國體)를 명징(明徵)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쇼와유신을 통해 국가지상주의가 다시 한 번 크게 강화되었으며,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국가의 힘을 강화하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시키는 체제가 수립되었다. 국가가 모든 것 위에 군림하며, 모든 사람들의 경배를 받는 위치에 오르게 되었다. 이를 기초로 일제는 침략전쟁을 계속해서 확대해 나갈 수 있었다. 일제는 마치 요한계시록 13장에 나오는 짐승과 같은 국가로써, 참람(僭濫)하게 하나님의 위치를 차지하고, 모든 것을 자기 세력 아래에 두고자 하였다.
이것이 식민지 조선 통치에도 영향을 주어 우가키와 미나미 총독 치하에서 식민지 조선은 병참기지로 변해갔고, 조선 사람들은 일제의 국민, 즉 황국신민이 될 것을 강요받았다. 두 총독은 철저하게 일제라는 국가의 이익을 위해 물자와 사람을 동원하는 정책을 조선에서 시행하였다. 우가키의 조선공업화정책과 미나미의 병참기지화 정책은 조선의 물질적인 자원들을 전쟁에 동원하기 위한 정책들이었다. 식민지 조선 사람들의 삶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으며, 오로지 국가의 이익을 위해 물자를 수탈하고 사람들을 동원하였다. 우가키의 심전개발운동과 미나미의 국민정신총동원운동은 사람들의 정신을 개조하여 일제의 국민으로 만들기 위한 도구들이었다. 특히 국가신도가 그러한 운동을 위해 활용되었다. 식민지 조선 사람들에게 일제의 국민의 의식이라는 심어주기 위해서는 일본에서 하는 것보다 더 강력한 정신적 운동을 전개해야 했다. 신사참배 강요도 이러한 맥락에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보다는 국민이라는 정체성이 우위에 있게 되고, 국민이 되지 않고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게 하였다. 모든 사람들이 국민이 되어 국가를 숭배하도록 강요하였다.
장로교회는 바로 이러한 국가를 상대하며 살아야 했다. 그 국가의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복종해야 할 대상이 아니었다. 일제는 용(사탄)으로부터 권세를 부여받은 짐승(국가)으로서, 참람하게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그 국가는 교회가 복종이 아니라, 저항해야 할 대상이었다.
1930년대 장로교회는 하나님인체 하는 국가와 싸워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그런데 장로교회는 국가를 멀리하고 국가에 대항하기보다는, 이와는 반대로 국가와 대화하고 국가를 의존하였다. 이것이 30년대 장로교회 실패의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장로교회가 엄청난 성장을 이루고, 조직을 견고하게 하였지만, 그것이 결국 국가의 목적을 위해 사용되고 말았다.
1930년대 장로교회는 외형상으로는 일제에 대항할 만한 정도로 엄청난 성장을 이루었다. 교인 수가 15만 명 이상 증가하여 36만 명에 이르렀으며, 교역자 수도 2천명을 넘어서고, 교회 직원 수도 2만 명을 넘어서 무흠 입교인의 4분의 1 정도가 교회를 위해서 봉사하였다. 교회와 예배당의 수도 3천을 넘어섰다. 당시 조선에 있었던 장로교회 이외의 모든 기독교 교단의 교세를 합해도 장로교회의 교세에 미칠 수 없었다. 기독교 교단뿐만 아니라, 조선에 있었던 그 어떤 단체도 장로교회만한 세력을 이루지는 못했다. 장로교회 총회는 조선에서는 유일하게 일제에 대항할 수 있는 단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장로교회는 양적인 면뿐만 아니라 조직적으로 그리고 기구적으로도 견고한 체계를 갖추었다. 조선, 만주국, 중국 등 3국에 걸쳐 30개가 넘는 노회를 조직하여 국제적인 교회가 되었으며, 장로교회 총회는 상설사무국을 갖춘 3개 부서를 포함하여 15개의 부서를 조직하여 교회 내외에서 활발한 사업을 추진하였다. 또한 장로교회의 성격을 분명히 드러내고, 교회 조직을 공고히 할 수 있도록 헌법을 개정하였으며, 노회별로 재단법인을 설립하여 교회의 재산의 안전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장로교회가 양적성장을 이루고 조직을 강화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국가에 대항할 만한 힘을 발휘하지 못한 것은 그러한 성장과 안정을 이루는 과정에서 많은 문제점을 노출하였기 때문이다. 우선 장로교회가 첫 노회와 첫 총회를 설립하면서부터 시작한 해외선교가 크게 위축되고 개교회 중심의 전도가 강화되었다. 개교회에 속한 전도인들이 사례비를 받고 교회 주변 사람들에게 전도하는 일이 중심을 이루었고, 교회가 없는 곳에 교회를 세우거나 먼 지역에 가서 전도하는 일은 소홀히 여겨졌고, 또한 전도하는 일이 유급교역자의 일로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총회 안에 조직된 많은 노회들은 자신의 세력을 확대하고자 서로 싸우기 시작했다. 30년대 내내 총대 인원을 조정하는 문제, 대회를 설립하는 문제 등으로 서로 대립하였다. 총회가 분열될 위기도 여러 차례 있었다. 총회의 여러 부서들은 신앙적인 사업보다는 사회사업에 더욱 치중하게 되므로 멀리해야 할 국가와 관련을 맺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교회 내부의 진흥운동은 자발적이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은 운동이라기보다는, 총회가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동원하여 실시한 비자발적이고 인위적인 운동이었다. 상설사무국이 설치된 부서들은 권력기관이 되어 서북 세력의 대변자 역할을 하면서 장로교회는 내외적으로 갈등에 휩싸였다. 또한 성경의 문자적 무오를 강조하는 교리를 강조하고, 무슨 일이든 장로교회 단독으로 추진함으로써, 장로교회를 대내외적으로 분열시켰다. 이 외에도 개교회에서 교회 성장에 기여하거나 많은 헌금을 한 개인을 기념하고 높이는 일이 횡행하고, 교회 직책이 명예직으로 전락해버리는 현상도 벌어졌다.
가장 중요한 것은 30년대에 장로교회가 발전을 이루면서 국가에 의존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양로원, 고아원, 농촌사업 등 여러 가지 사업을 벌이고, 학교를 운영하면서 국가와 접촉하고 의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특히 노회별로 재산을 등록하기 위해 재단법인을 만들면서 총독부와 수십여 차례 교섭하고, 총독부에 시혜를 바라는 태도를 보였다. 장로교회는 30년대 내내 노회별로 재단법인을 세우는 일을 계속하였으며, 그것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국가에 충성하는 태도를 보여야 했다. 또한 재단법인을 설립함으로써, 국가의 간섭을 훨씬 더 많이 받게 되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장로교회가 국가지상주의를 앞세우는 국가에 대한 인식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그러한 국가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으며, 장로교회가 자신의 사명을 이루는 것은 기대할 수 없었다.
장로교회는 국가를 싸움의 대상으로 삼기보다는, 내부에서 서로 나뉘어 교회의 지체들을 싸움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래서 장로교회 내에서 세대갈등, 신학적 갈등, 지역갈등이 계속되었다. 장로교회 초창기 지도자들은 지도자 대접을 받기보다는 시대에 뒤쳐진 인물이요 물러나야 할 사람으로 인식되었다. 2, 3세대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적인 문제보다 사회문화적인 일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교권자들이 교회 조직 보호를 명분으로 내세워 신학적으로 경직되어, 기도와 전도하는 단체까지도 정죄하였다. 또한 미국의 근대주의 논쟁이 장로교회에 유입되어 선교사들과 장로교회 총회가 분열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지역갈등, 즉 서북과 비서북의 싸움은 어느 싸움보다 치열했고, 30년대 내내 계속되었다. 1935년 총회에서 서북세력은 신학적인 이유를 내세워 비서북세력을 정죄하였으며, 1936년 총회에서 비서북세력은 서북세력에 총공세를 벌였다. 그러한 가운데 일제는 중일전쟁을 준비하고 일으켰다. 1938년 신사참배 결의 이후에도, 서북과 비서북세력은 신학교 설립문제를 둘러싸고 서로 대립하고 일제에 더 잘 보이기 위한 경쟁까지 벌였다. 이 모든 경쟁의 승리자는 서북세력이었고, 그때마다 비서북세력은 총회를 탈퇴하고 새로운 총회를 구성하려고 하였다.
장로교회는 내부적으로 분열되었을 뿐만 아니라 성결교회, 감리교회와도 협력하기보다는 경쟁하였으며, 심지어 싸우기도 하였다. 장로교회 총회는 성결교회로 가는 장로교인에게 이명증서를 발급하지 않기로 결의하였다. 비록 일시적인 일이었지만, 이는 성결교회를 이단 취급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또한 감리교회와 맺은 선교지 분할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하였다. 30년대는 더 이상 연합이나 협력의 시대가 아니고 경쟁의 시대였으며, 장로교회가 이러한 시대를 주도하였다. 장로교회는 1935년 총회에서 장ㆍ감 협력의 상징이던 조선기독교연합공의회를 탈퇴하기로 결의하였다. 자신의 의지가 관철되지 않자 일방적으로 결정한 것이었다. 장로교회는 단독 찬송가를 발행하므로, 장ㆍ감이 수십 년 동안 공동의 찬송가를 사용하던 전통을 깨뜨렸다. 또한 장ㆍ감 연합신문이었던 󰡔기독신보󰡕를 거부하고 장로교회 기관지를 발행하였다. 조선주일학교연합회도 연합기관의 기능을 상실하고 해체되었다. 결국 30년대의 거의 모든 연합운동이 중단되고, 연합기관이 해체되었다. 국가에 대항해야 할 교회의 지체들이 30년대 내내 사분오열되어 서로 싸움을 벌였다. 장로교회가 이러한 대내외적인 싸움을 벌이면서도 국가지상주의를 앞세운 일제에 대해서는 무관심하였다. 따라서 싸움을 중단하고 연합해야 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였다.
결국 장로교회는 국가에 대항한 싸움에서 패하고 말았다. 사실 30년대의 장로교회는 국가에 대항하여 싸우지 않았다. 국가와 싸우기보다는 자신의 조직을 유지하기에 급급했다. 30년대 장로교회는 산하의 학교를 유지하고, 총회와 노회 등 교회 조직을 지키기 위해서 일제와 타협하고 때로는 일제에 의존하였다. 이것이 결국 장로교회를 실패로 이끌어갔고, 장로교회를 국가를 보조하는 기관으로 전락시켰다.
장로교회는 교회 설립초기부터 많은 학교를 설립하여 막대한 교회의 예산을 사용하여 학교를 운영하였다. 그런데 1915년 ‘사립학교규칙’ 개정 이후로 학교의 설립목적을 제대로 이룰 수 없었다. 일제가 요구하는 교과과정만을 따라야 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장로교회는 폐교하거나 아니면 국가의 간섭을 받지 않는 비정규학교 형태로 학교를 운영하였다. 이처럼 장로교회가 공교육 체계에 들어가지 않은 것은 거기서는 학교 설립목적을 이룰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20년대에 들어서 10년의 유예기간이 끝나가고, 일제가 새로운 ‘교육령’을 시행하면서 비정규학교로 남아 있을 수 있는 것도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렀다. ‘교육령’ 개정으로 대학에 들어가거나 공무원 임용시험을 치르기 위해서는 정규 중등학교의 졸업장이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그때부터 장로교회는 학교의 설립목적을 이룰 수 없는 상황에서도 운영하던 학교를 포기하기보다는, 국가가 학력을 인정하는, 지정학교 인가를 받기 위해 노력하였다. 특히 일제가 국가지상주의를 크게 강화한 1930년대에도 장로교회는 그러한 노력을 중단하지 않았다. 지정학교가 되기 위해서는 일제가 요구하는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일제가 학교를 이용해서 국민(황국신민)을 만들어가는 상황에서도 학교 자체의 유지를 목적으로 삼고 학교 운영을 포기하지 않았다. 심지어 선교부에서 폐교하기로 결정한 학교까지 인수하여 경영하였다. 결과적으로 장로교회는 산하 학교를 일제에 충성하는 국민을 만드는 기관으로 만들었다. 장로교회는 교회의 막대한 예산을 학교에 쏟아 부어 일제의 황국신민화 교육을 도운 꼴이 되었다.
나아가 장로교회 기구 자체가 일제의 국가지상주의를 전파하는 기구로 전락하였다. 그렇게 된 것은 장로교회가 자신의 사명은 생각하지 않고, 무엇보다 자신의 조직을 유지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목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30년대는 교회가 사업을 벌이고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서 일상적으로 총독부와 교섭한 시대였다. 재단법인 설립, 지정학교 인가 등 큰 문제 이외에도 철도할인권, 금강산 수양관, 공동묘지 사업 등 여러 가지 문제로 총독부를 드나들며 대화하였다. 장로교회가 자신의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 총독부를 필요로 한 시대였다. 따라서 국가가 요구하는 것에 대해 장로교회는 거부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장로교회는 우가키가 주도하는 심전개발운동에 신자들이 개별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허용하였고 총회장도 이 일에 일조하였다. 또한 미나미가 추진한 국민정신총동원운동에 협력하였다. 일제라는 국가에 대한 가치 판단을 내리지도 않고, 신도의 여러 의식을 국가의식이라는 명목으로 받아들였다. 교회가 자신의 조직을 유지하고자 애국을 빌미로 국가의식을 받아들였지만, 그 국가가 복종의 대상인지 저항의 대상인지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은 것이다. 장로교회 총회는 국가의식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노회와 개교회를 이용하여 국가의 정책을 전파하고 각종 기념식을 행하였다. 나아가 총회는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시행하였다. 신사참배결의는 교회가 결정적으로 국가에 굴복한 사건이지만, 이 결의 이전의 장로교회의 행태를 미루어보면 이미 예정된 일이었다. 장로교회는 신사참배 결의 이후 거침없이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기관이 되었다. 급기야 1939년 총회에서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 연맹을 결성하므로 교회 조직 전체를 국가의 하부조직으로 만들었다. 국방헌금을 하고, 전쟁 물자를 동원하는 일까지 하게 되었다. 장로교회는 침략전쟁을 수행하는 국가에 대항하여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꾸짖기 보다는, 전쟁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도왔다. 그를 통해 일시적으로나마 교회 조직을 유지할 수 있었지만, 교회는 자신의 사명을 수행하는데 실패하였다. 교회가 국가와 올바른 관계를 갖지 못한 것이 결국 교회의 실패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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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s thesis describes the life of the Presbyterian Church of Chosen of the 1930s, the age of statism. The church, the Presbyterian Church of Chosen of the 1930s, had to meet the state, the Empire of Japan, that had been carrying on a protracted and ag...
This thesis describes the life of the Presbyterian Church of Chosen of the 1930s, the age of statism. The church, the Presbyterian Church of Chosen of the 1930s, had to meet the state, the Empire of Japan, that had been carrying on a protracted and aggressive war. The relationship between church and state was the critical issue on which the failure or success of the Presbyterian Church of Chosen depended.
Before the years of 1930s, the Presbyterian Church had met 3 states; Chosen(朝鮮), Empire of Daehan(大韓帝國) and Empire of Japan. The Presbyterian Church hold a pro-state position until the year of 1905. But since then till the year of 1919 it hold a anti-state position and since then till the year of 1931 maintained a neural position. In the 1930s the Presbyterian Church and Empire of Japan had to make new contacts.
The forces who accomplished the Meiji Restoration(明治維新) established the ideology of the Tenno system(天皇制) which contributed to elevating the status of the state. They asserted that Japan was the only country ruled over by emperors who had reigned in an unbroken line of descent for all ages past, and that was why the Empire of Japan was superior to any other country in the world and able to dominate the entire world. That was the Kokutai(National Polity, 國體) of Japan. People as members of the state which had such a Kokutai received the demand to be loyal to state. The forces of the Meiji Restoration also made use of Shinto(神道) to emphasize the importance of the state. The policy of making Shinto a state religion or non-religion strengthened the ideology of the Tenno system and consolidated ultra nationalism or extreme nationalism(國家至上主義).
Democracy and party politics had flowered for some time under the reign of Taisho Tenno(大正 天皇) in Japan of the 1910s and 1920s. However during that era people underwent economic woes and degradation of national status. These furthered the Showa Restoration(昭和維新) and drove all the nation into extreme nationalism. As a consequence, the system which exploits people materially and mentally for the purpose of the state became a settled reality. Based on that system, the Empire of Japan could conduct a series of war campaigns continuously with escalation.
Such a situation in Japan effected the ruling policy over the colony Chosen so the position of Chosen was lowered into being a supply base under the regimes of Ugaki Kazushige(宇垣一成) and Minami Jiro(南次郞).
The People of Chosen were forced to be members of the Empire of Japan as imperial subjects. The Mentality Development Movement(心田開發運動) and National Spiritual Mobilization Movement(國民精神總動員運動) were the brainwashing instruments to make people to accept being imperial subjects. Especially state Shinto(國家神道) was used for those movements. The identity of being a member of a state was more important than any other identity. So no one could be a member of the church without being a member of the state. The state blasphemously took the position of God. The Presbyterian Church of the 1930s had a mission to protest against such a blasphemous state.
The Presbyterian Church of the 1930s had grown externally to be a match for the state. It is not too much to say that the General Assembly of The Presbyterian Church of Chosen, equipped with 350,000 members and various institutions, was the only organization which could confront the state. The Presbyterian Church, however, declined in the dimension of faith or spirituality, for all that she achieved quantitative growth and stabilization of the organization. Lots of bad side-effects happened; the weakening of foreign mission, strengthening of individualism of congregations, indulging in worldly work, artificial revival movements, abuse of doctrines and creeds, antagonism between presbyteries, and the degenerating of church office into a honorary office etc.
The most important thing was that the Presbyterian Church was subordinated to the state by the process of the development of church organization. Running schools and other institutes attached to the Presbyterian Church, the church could not but connect with the state. Especially during the establishment of foundational juridical persons which were needed to register the property of congregations, the Presbyterian Church had to get in touch with the Government-General and even expected receiving preferential treatment from the Government-General. Having such a relationship with the state, the Presbyterian Church which had a mission to protest against the state could not fulfill the mission.
The Presbyterian Church set a wrong target for its fight; the church didn't fight against the state but members of the church fought against each other instead. Conflicts between the north-western faction(西北派) and anti north-western faction(反西北派) continued all through the 1930s. Moreover the Presbyterian Church competed with the Methodist Church and the Holiness Church rather than cooperating with each other. Almost every ecumenical movement was stopped and every ecumenical institute was dissolved. Such division and strife weakened the Presbyterian Church, so the church lost all the power to fight against the state.
Eventually the Presbyterian Church was defeated by the Empire of Japan. In fact, the church was not concerned with fighting against the state but concerned with maintaining its organization.
Although the schools of the Presbyterian Church could not accomplish their purpose for which they were established, the Presbyterian Church didn't stop running the schools. Moreover the church made a great effort to receive designation of the government-general so that several secondary schools could be recognized as designated schools(指定學校). The church also took charge of schools which missionaries had closed down. Finally, schools of the Presbyterian Church became instruments to make imperial subjects who were loyal to the state. The church supplied a lot of money to run such schools. By doing so the church supported the education system of the state which nurtured imperial subjects.
In addition, the organization of the Presbyterian Church itself became an instrument to propagate the ultra nationalism. The Presbyterian Church once fought against the Japanese Empire. From the Eul-Sa(乙巳) Treaty of 1905, which was forced, to the 1919(Sam-il) Independence Movement, the church was an anti-state organization and the state was an anti-church organization. Therefore protest by the church and persecution by the state were repeated reciprocally. The Presbyterian Church of the 1930s should have had such a relationship with the state to complete its mission. But the Presbyterian Church had a more intimate relationship with the state than before.
The Presbyterian Church participated in the Mentality Development Movement(心田開發運動) of Ugaki and cooperated for National Spiritual Mobilization Movement(國民精神總動員運動) of Minami. Without judging the state, the Empire of Japan, for her evil deeds the Presbyterian Church accepted the religious ceremonies of Shinto(神道) under the name of national ceremonies or ceremonies of the state.
The General Assembly of the Presbyterian Church propagated the policies of the state and celebrated memorial days taking advantage of the network organized with presbyteries and congregations. The Presbyterian Church even collected donations for national defense and mobilized war materials. The church didn't criticize the state and didn't proclaim the Kingdom of God either against the state which carried on aggressive war. On the contrary, the church prayed and helped so that the war would go well. By doing so the Presbyterian Church could maintain the church organization temporarily, but the church could not fulfill its mission. So the Presbyterian Church of the 1930s fail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