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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민지조선 흥행시장의 병리학과 검열체제 = The Entertainment Market Pathology and the Censorship System in the Japanese Imperi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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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In 1926 released silent film Arirang caused quite a stir. As advanced researches has indicated, even if it was somewhat dramatic, there were much to be said for Arirang syndrome and its mythologized process. But I feel the need to move its historical phenomenon into sourceful situation, to expand its importance. It is because that the phenomenon is seemed the result from the situation the cunning Censorship System and the weak entertainment market had become closely intertwined. Directly, Arirang hadn't an issue with Censorship System, different from being remembered it as a 'anti-Japan national cinema'. Censorship System judged that Joseon theatres were maintained as a minimum safety for security reasons, the authorities adopted a stand of tolerance for a few cultural products 'made in Joseon' from this ethnic ghetto. Besides, Joseon theatres already filled with foreign films. Even though the revues and the theatrical offerings such as 'march' came into vogue for a moment, it was a design of Censorship System for blocking the disquieting ethnic products and the ethnic appropriation of exterior custom. Now as the 1930s wears on, the target of censorship seemed to move from 'public order' into 'custom'. This meant colonial authority has entered to a rearrangement phase of entertainment market at structural level. Therefore the policy of censorship authorities turned into suppressing foreign films's influence, into expanding Japan films's. That's the foreign films control from 1934. Corruption scandal of public morals of Hwangkeum-Kwangso-gok[黃金狂騷曲], as it were, was a sign of it. For this situation, although Arirang hadn't an issue with Censorship System, had become the colonial myth by disquieting surplus. And here were the backwardness of industrial foundation causing asynchronism and non-coidentity. That this symbolic struggle was able to be come into existence is because of delaying the advent of time―the legal sphere of colonial censorship dissipates, so the critical point of expression disappears. However, in comparison to―the other ghosts in the prohibited archive―'though' and 'the sexual', Arirang or the mythicization of 'Arirang' was a result from Censorship System that had a permissivism of 'the eth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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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n 1926 released silent film Arirang caused quite a stir. As advanced researches has indicated, even if it was somewhat dramatic, there were much to be said for Arirang syndrome and its mythologized process. But I feel the need to move its historical ...

    In 1926 released silent film Arirang caused quite a stir. As advanced researches has indicated, even if it was somewhat dramatic, there were much to be said for Arirang syndrome and its mythologized process. But I feel the need to move its historical phenomenon into sourceful situation, to expand its importance. It is because that the phenomenon is seemed the result from the situation the cunning Censorship System and the weak entertainment market had become closely intertwined. Directly, Arirang hadn't an issue with Censorship System, different from being remembered it as a 'anti-Japan national cinema'. Censorship System judged that Joseon theatres were maintained as a minimum safety for security reasons, the authorities adopted a stand of tolerance for a few cultural products 'made in Joseon' from this ethnic ghetto. Besides, Joseon theatres already filled with foreign films. Even though the revues and the theatrical offerings such as 'march' came into vogue for a moment, it was a design of Censorship System for blocking the disquieting ethnic products and the ethnic appropriation of exterior custom. Now as the 1930s wears on, the target of censorship seemed to move from 'public order' into 'custom'. This meant colonial authority has entered to a rearrangement phase of entertainment market at structural level. Therefore the policy of censorship authorities turned into suppressing foreign films's influence, into expanding Japan films's. That's the foreign films control from 1934. Corruption scandal of public morals of Hwangkeum-Kwangso-gok[黃金狂騷曲], as it were, was a sign of it. For this situation, although Arirang hadn't an issue with Censorship System, had become the colonial myth by disquieting surplus. And here were the backwardness of industrial foundation causing asynchronism and non-coidentity. That this symbolic struggle was able to be come into existence is because of delaying the advent of time―the legal sphere of colonial censorship dissipates, so the critical point of expression disappears. However, in comparison to―the other ghosts in the prohibited archive―'though' and 'the sexual', Arirang or the mythicization of 'Arirang' was a result from Censorship System that had a permissivism of 'the eth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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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문 초록 (Abstract) kakao i 다국어 번역

    1926년에 개봉된 무성영화 <아리랑>의 반향은 놀라운 것이었다. 아리랑 증후군뿐만이 아니라 그것이 신화화되는 과정에는 기왕의 논의들이 밝히고 있듯이 다소의 과잉이 있다고 해도 그럴 만한 요인들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 역사적 현상을 좀 더 본원적인 국면으로 이동시켜 그 문제성을 확장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왜냐하면 그 현상은 영리한 검열체제와 병약한 흥행시장이 근원적으로 엮여 있었던 상황에서 야기된 결과로 보이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아리랑>이 ‘항일 민족영화’로 기억되는 것과 달리 이 영화는 식민지 검열체제와 결코 불화하지 않았다. 검열체제는 조선인극장이 치안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로서 보존되고 이 인종주의적 게토에서 소통되는 극소한 ‘조선산’ 문화물에 대해 ‘관용’의 태도를 취하는 것이 식민지지배의 본원적 목적에 부합한다고 판단했다. 더욱이 조선인극장은 이미 외화로 가득 채워진 상황이었으며, <아리랑>의 효과로 1930년을 전후로 하여 레뷰와 ‘행진곡’류와 같은 공연물이 한때 유행이 되었으나, 이는 불온한 종족성의 문화물뿐만 아니라 외속의 종족적 전유를 저지하는 검열체제의 디자인이었다. 이제 1930년대 초반을 경과하면서 검열의 표적은 치안에서 풍속으로 이동한 듯이 보였다. 이는 흥행시장에 대한 국가의 직접적인 개입을 구조적인 차원에서 재조정하는 단계에 들어선 것임을 의미했다. 그리하여 검열당국은 외화의 영향력을 억제하고 일본영화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정책으로 선회했으며, 그 결과가 1934년부터 본격화한 외화통제였다. <황금광소곡>의 풍속괴란 스캔들은 말하자면 그 전조였던 셈이다. 바로 이러한 정황 하에 <아리랑>은 검열체제와 불화하지 않았으되 바로 그 때문에 생성된 불온한 잉여들로 식민지의 신화가 되어갔으며, 여기에는 비동일성에 기초한 비동시성이라는 당시 산업기반과 구조의 후진성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상징투쟁은, 근원적으로는 식민지검열의 법역이 소멸될 시간의 도래, 그리하여 표현의 임계가 사라질 시간의 도래가 계속 ‘지연’됨으로써 성립될 수 있다. 그러나 금지된 아카이브에 보관되어 있던 또 다른 유령들, 즉 ‘사상’과 ‘性的인 것’의 경우와 비교할 때, <아리랑> 혹은 ‘아리랑’의 신화화는 ‘종족적인 것’에 좀 더 관용적이거나 탄력적인 입장을 취했던 검열체제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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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6년에 개봉된 무성영화 <아리랑>의 반향은 놀라운 것이었다. 아리랑 증후군뿐만이 아니라 그것이 신화화되는 과정에는 기왕의 논의들이 밝히고 있듯이 다소의 과잉이 있다고 해도 그...

    1926년에 개봉된 무성영화 <아리랑>의 반향은 놀라운 것이었다. 아리랑 증후군뿐만이 아니라 그것이 신화화되는 과정에는 기왕의 논의들이 밝히고 있듯이 다소의 과잉이 있다고 해도 그럴 만한 요인들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 역사적 현상을 좀 더 본원적인 국면으로 이동시켜 그 문제성을 확장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왜냐하면 그 현상은 영리한 검열체제와 병약한 흥행시장이 근원적으로 엮여 있었던 상황에서 야기된 결과로 보이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아리랑>이 ‘항일 민족영화’로 기억되는 것과 달리 이 영화는 식민지 검열체제와 결코 불화하지 않았다. 검열체제는 조선인극장이 치안유지를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로서 보존되고 이 인종주의적 게토에서 소통되는 극소한 ‘조선산’ 문화물에 대해 ‘관용’의 태도를 취하는 것이 식민지지배의 본원적 목적에 부합한다고 판단했다. 더욱이 조선인극장은 이미 외화로 가득 채워진 상황이었으며, <아리랑>의 효과로 1930년을 전후로 하여 레뷰와 ‘행진곡’류와 같은 공연물이 한때 유행이 되었으나, 이는 불온한 종족성의 문화물뿐만 아니라 외속의 종족적 전유를 저지하는 검열체제의 디자인이었다. 이제 1930년대 초반을 경과하면서 검열의 표적은 치안에서 풍속으로 이동한 듯이 보였다. 이는 흥행시장에 대한 국가의 직접적인 개입을 구조적인 차원에서 재조정하는 단계에 들어선 것임을 의미했다. 그리하여 검열당국은 외화의 영향력을 억제하고 일본영화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정책으로 선회했으며, 그 결과가 1934년부터 본격화한 외화통제였다. <황금광소곡>의 풍속괴란 스캔들은 말하자면 그 전조였던 셈이다. 바로 이러한 정황 하에 <아리랑>은 검열체제와 불화하지 않았으되 바로 그 때문에 생성된 불온한 잉여들로 식민지의 신화가 되어갔으며, 여기에는 비동일성에 기초한 비동시성이라는 당시 산업기반과 구조의 후진성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상징투쟁은, 근원적으로는 식민지검열의 법역이 소멸될 시간의 도래, 그리하여 표현의 임계가 사라질 시간의 도래가 계속 ‘지연’됨으로써 성립될 수 있다. 그러나 금지된 아카이브에 보관되어 있던 또 다른 유령들, 즉 ‘사상’과 ‘性的인 것’의 경우와 비교할 때, <아리랑> 혹은 ‘아리랑’의 신화화는 ‘종족적인 것’에 좀 더 관용적이거나 탄력적인 입장을 취했던 검열체제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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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Reference)

    1 유선영, "황색식민지의 서양영화 관람과 소비실천, 1934-1942:제국에 대한 '문화적 부인'의 실천성과 정상화 과정" 성곡언론문화재단 13 (13): 7-62, 2005

    2 강등학, "형성기 대중가요의 전개와 아리랑의 존재양상" 한국음악사학회 (32) : 5-36, 2004

    3 이승희, "프로-소인극, 정치적 수행성과 그 기억" 대동문화연구원 (64) : 153-184, 2008

    4 권명아, "풍속 통제와 일상에 대한 국가 관리-풍속 통제와 검열의 관계를 중심으로" 민족문학사학회 (33) : 368-408, 2007

    5 "조선일보"

    6 이승희, "조선극장의 스캔들과 극장의 정치경제학" 대동문화연구원 (72) : 115-156, 2010

    7 이순진, "조선 무성영화의 활극성과 공연성에 대한 연구"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 2009

    8 김수림, "제국과 유럽: 삶의 장소, 초극의 장소-식민지 말기 공영권·生存圈과 그 배치, 그 기율, 그리고 조선문학" 상허학회 23 : 88-114, 2008

    9 한국예술연구소, "이영일의 한국영화사를 위한 증언록-성동호/이규환/최금동" 도서출판 소도 2003

    10 김철, "우울한 형/명랑한 동생-중일 전쟁기 ‘신세대 논쟁’의 재독(再讀)" 상허학회 25 : 98-121, 2009

    1 유선영, "황색식민지의 서양영화 관람과 소비실천, 1934-1942:제국에 대한 '문화적 부인'의 실천성과 정상화 과정" 성곡언론문화재단 13 (13): 7-62, 2005

    2 강등학, "형성기 대중가요의 전개와 아리랑의 존재양상" 한국음악사학회 (32) : 5-36, 2004

    3 이승희, "프로-소인극, 정치적 수행성과 그 기억" 대동문화연구원 (64) : 153-184, 2008

    4 권명아, "풍속 통제와 일상에 대한 국가 관리-풍속 통제와 검열의 관계를 중심으로" 민족문학사학회 (33) : 368-408,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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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이승희, "조선극장의 스캔들과 극장의 정치경제학" 대동문화연구원 (72) : 115-156,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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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김수림, "제국과 유럽: 삶의 장소, 초극의 장소-식민지 말기 공영권·生存圈과 그 배치, 그 기율, 그리고 조선문학" 상허학회 23 : 88-114,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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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영화연극"

    12 백현미, "어트렉션의 몽타주와 모더니티" 한국극예술학회 (32) : 81-118, 2010

    13 정우택, "아리랑 노래의 정전화 과정 연구" 대동문화연구원 1 (1): 287-317, 2007

    14 "신동아"

    15 이순진, "식민지시대 영화검열의 쟁점들, In 식민지시대의 영화검열-1910~1934" 현실문화연구 2009

    16 이화진, "식민지기 영화 검열의 전개와 지향" 한국문학연구소 (35) : 417-456, 2008

    17 이호걸, "식민지 조선의 외국영화 -1920년대 경성의 조선인 영화관에서의 외화 상영" 대동문화연구원 (72) : 77-114,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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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브라이언 이시즈(Brian Yecies), "식민지 조선에서 좋은 사업이었던 영화검열: 할리우드 제1차 황금기(1926-1936)의 부당이득 취하기" 한국문학연구소 (30) : 203-237, 2006

    20 백현미, "소녀 연예인과 소녀가극 취미" 한국극예술학회 (35) : 81-124, 2012

    21 이승희, "세금으로 본 흥행시장의 동태론" 한국문학연구소 (41) : 141-185,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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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 이승희, "사실주의극의 성립 - 사회주의의 번역과 검열의 역학" 한국극예술학회 (29) : 47-84, 2009

    24 한기형, "문화정치기 검열체제와 식민지 미디어" 대동문화연구원 (51) : 69-105,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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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 이정하, "나운규의 <아리랑>(1926)의 재구성-<아리랑>의 활극적 효과 혹은 효과의 생산-" 한국영화학회 (26) : 265-290, 2005

    29 김영찬, "나운규 <아리랑>의 영화적 근대성" 한국문학이론과비평학회 10 (10): 177-199, 2006

    30 조희문, "나운규" 한길사 1997

    31 이승희, "공공 미디어로서의 극장과 조선민간자본의 문화정치" 대동문화연구원 (69) : 219-259, 2010

    32 한기형, "‘법역(法域)’과 ‘문역(文域)’-제국 내부의 표현력 차이와 출판시장" 민족문학사학회 (44) : 309-339, 2010

    33 박헌호, "‘文化政治’期 新聞의 位相과 反-檢閱의 內的論理― 1920年代 民間紙를 中心으로" 대동문화연구원 (50) : 199-259, 2005

    34 이순진, "1930년대 조선 영화문화의 변동과 조선인 영화상설관의 소멸 -단성사의 몰락 과저을 중심으로" 대동문화연구원 (72) : 157-200,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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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월일 이력구분 이력상세 등재구분
    2027 평가 계속평가 신청대상 (재인증평가)
    2021-01-01 등재 등재학술지 유지 (재인증평가) KCI등재
    2020-03-12 학회명변경 영문명 : Sanghur Hakbo-The Jounal Of Korean Modern Literature -> The Learned Society of Sanghur's Literature KCI등재
    2020-03-11 학술지명변경 외국어명 : The Leaned Society of sanghur`s Literature -> Sanghur Hakbo: The Journal of Korean Modern Literature KCI등재
    2018-01-01 등재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5-01-01 등재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11-01-01 등재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9-01-01 등재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7-01-01 등재 등재학술지 유지 (등재유지) KCI등재
    2004-01-01 등재 등재학술지 선정 (등재후보2차) KCI등재
    2003-01-01 등재 등재후보학술지 1차 PASS (등재후보1차) KCI등재후보
    2001-07-01 등재 등재후보학술지 선정 (신규평가) KCI등재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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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준연도 WOS-KCI 통합IF(2년) KCIF(2년) KCIF(3년)
    2024 0 0.92 0
    KCIF(4년) KCIF(5년) 중심성지수(3년) 즉시성지수
    0 0 1.675 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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