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고는 權常愼이 玄石洞 漢江 가에 경영한 玄湖別墅에 주목한 논문이다. 권상신은 19세기 京華世族의 상징적인 인물로 그간 학계의 주목을 받아왔고 현호별서에 대해서도 전체적인 규모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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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Korean
KCI등재
학술저널
115-144(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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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로드본고는 權常愼이 玄石洞 漢江 가에 경영한 玄湖別墅에 주목한 논문이다. 권상신은 19세기 京華世族의 상징적인 인물로 그간 학계의 주목을 받아왔고 현호별서에 대해서도 전체적인 규모와 ...
본고는 權常愼이 玄石洞 漢江 가에 경영한 玄湖別墅에 주목한 논문이다. 권상신은 19세기 京華世族의 상징적인 인물로 그간 학계의 주목을 받아왔고 현호별서에 대해서도 전체적인 규모와 대부분의 행적이 조명된 적이 있다. 여기에 덧붙이면 현호별서는 권상신 개인의 삶에서 가장 의미를 지닌 공간이자 19세기 한강의 문화사를 대변하는 주목할 만한 공간으로 생각된다. 이에 권상신이 이곳에서 어떠한 삶을 살았고 무엇을 하고 지냈으며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지 규명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권상신은 현석동 일대의 한강변 聾石 위에 화려한 별서를 경영했다. 淸·亭을 중심으로 此翁樓·六宜亭·苟完亭·小東樓 등의 누정을 두었고 翠竹相送樓란 누각 등을 새로 추가해 당대를 풍미하던 경화세족 문인들과 활발하게 교유했다. 이러한 권상신의 삶은 아들 權敬履의 죽음과 함께 급격한 변화를 맞는다. 1810년 아들이 세상을 떠나자 세상에 대한 희망을 잃었고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韓山의 文村으로 이주하며 현호에서의 삶을 마감했다. 개인적인 애환과 호탕한 풍류가 공존한 공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권상신이 현호에서 보낸 세월은 대략 10년에 불과했지만 당대 문화사에서 주목할 만한 자취를 구가했다. 권상신은 이후 洪翰周를 사위로 들였는데 홍한주는 현호별서에서 처가 살이하며 장인과 친밀한 관계를 이어나갔다. 훗날 홍한주는 박학의 지식을 바탕으로 _智水拈筆_을 저술하는데 이는 일부 권상신의 영향이 작용했으리라 추정된다. 권상신 사후 현호별서는 폐망의 길을 걸었지만 소동루는 살아남아 명맥을 이어나갔다. 이후 洪直弼·趙斗淳·金左根 등 최고 권세가의 차지가 되며 거듭 전해진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권상신의 호는 ‘西漁’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현호별서에서 비롯된 것이니 평생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곳이 분명하다. 그러나 한편에서 조선 후기 한강의 상징적인 문화공간으로 규정해도 큰 무리는 없을 듯하다. 권상신은 현호에 화려한 별서를 경영하고 여가를 틈타 한강의 정취를 만끽했다. 당대를 주름잡던 명사들과 풍류를 즐겼고 자신이 소장한 고동서화를 바탕으로 학문을 전파했을 가능성도 엿보인다. 특히 소동루가 권귀들이 소유하고 싶어 했던 별서로 전해진 기록이 명확하니, 현호별서는 19세기 경화세족의 풍류와 문화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공간이었다고 하겠다.
다국어 초록 (Multilingual Abstract)
I studied about Hyeonhobyeolseo(玄湖別墅) which was build by Gwon, Sang-Sin(權常愼). It was located in Hyeonseok-dong(玄石洞) that is on the Han river(漢江). Gwon, Sang-Sin has been noted for one of the representative patricians in the 19t...
I studied about Hyeonhobyeolseo(玄湖別墅) which was build by Gwon, Sang-Sin(權常愼). It was located in Hyeonseok-dong(玄石洞) that is on the Han river(漢江). Gwon, Sang-Sin has been noted for one of the representative patricians in the 19th century, so the research has been done with the Hyeonhobyeolseo's features and his life in Hyeonseok-dong. I thought that Hyeonhobyeolseo had noteworthy features. It was a meaningful space in his life and the representative place of Han river's cultural history in 19th century. So, I tried to investigate Gwon, Sang-Sin and Hyeonhobyeolseo in more detail.
Gwon, Sang-Sin built posh villa on the Nong rock(聾石) which was located in Hyeonseok-dong(玄石洞) on the Han river. There were Cheonguijeong (淸?亭), Chaonglu(此翁樓), Yukuijeong(六宜亭), Guwanjeong(苟完亭), and Sodonglu(小東樓). Later, He added Chwijuksangsonglu(翠竹相送樓) and associated with representative patricians. However, his son Gwon, Gyeong- Li(權敬履) died suddenly, so he lost his hope and moved to Munchon(文村) in Hansan(韓山) after all.
Gwon, Sang-Sin had been in Hyeonho about just 10years, but he leaved remarkable traces in cultural history. For example, Hong, Han-Ju(洪翰周) who was a famous author writing Jisuyeompil(智水拈筆) became Gwon, Sang-Sin's son-in-law. I think that he was be directly affected from Gwon, Sang-Sin in Hyeonhobyeolseo. Most pavilions of Hyeonhobyeolseo disappeared with Gwon, Sang-Sin's death, but Sodonglu remained with other patricians' possession for a long time. It seems to be special place.
Seoeo(西漁) is the most famous pen name of Gwon, Sang-Sin. Seoeo was named after Hyeonhobyeolseo, so I'm sure that there was the most important place in his life. It also became the representative cultural place on the Han river in 19th century. Gwon, Sang-Sin had posh villa in Hyeonho and enjoyed beautiful scenery. In addition, he was associated with representative patricians, and his antique books influenced on later writers. Sodonglu was the one of the popular places that patricians wanted to have. I think that Hyeonhobyeolseo was the most representative cultural place on the Han river in 19th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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